사랑이란 무엇인가 - 진정한 자유를 위한 관계맺기와 홀로서기 지혜의 연금술 시리즈 9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젠토피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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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지향하도록 가르친다. 신이라는 단어를 나는 매우 쉽게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는 결코 버릴 수 없다. 신과 사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사랑을 선택할 것이다. 신에 관한 모든 것을 나는 잊었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저절로 신을 알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을 향한 첫걸음이며, 첫경험이다. (...) 자신을 사랑하라. (...) 자신을 비난하면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 조금이라도 성숙할 수 있는가? 자신을 비난하면서 어떻게 존재를 경배할 수 있는가? 자기 내면에 있는 존재를 경배할 수 없다면, 다른 이들의 내면에 있는 존재를 경배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의 맨 첫 물결은 자신의 가슴에서부터 일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슴에서 물결이 일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로 번져갈 수 없다. (...) 자신의 몸을 사랑해야 하고, 자신의 영혼을 사랑해야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 내면에 있는 신성을 존경해야 우주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자비롭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고요하고 명상적이며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간다.”

 

“자기중심적인 자만심은 결코 자기애가 아니다. 정반대에 놓여있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 된다. 자기중심적인 자만심은 심리학자들이 자기도취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나르시시즘이다. (...) 나르시스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림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애가 아니다. 그림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다. 그는 이제 둘로 나뉜다. 나르시스는 분열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분열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두 존재로 자기 자신을 나눠버렸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주 많은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때 저지르는 일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의식을 가지고 지켜보라. 그것은 단지 나르시시즘일 수 있다. 상대방의 얼굴, 눈,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그저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어보는 거울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백에 아흔아홉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도취였다. 사람들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이 보여주는 존중, 관심, 아첨을 사랑한다.”

 

“진정한 사랑에는 구별이 없다. 연인은 서로에게 융화된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는 커다란 구별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의 구별이 있다. 진정한 사랑은 관계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냥 사랑이다. 사랑은 꽃피어나고 향기를 내뿜으며 하나로 녹아든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분리된 두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에만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하나가 된다.”

 

“진정한 사랑 안에는 따뜻한 냉정함이 있다. (...) 진정한 사랑에는 따뜻함이 있으나 열기는 없다. 확실히 따뜻하기는 하지만, 냉정하기도 하다. 매우 집중되어 있으며, 고요하고 냉정한 상태가 그 안에 있다. (...) 사랑은 관계가 아니라 나눔이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로 함께 융화되는 일이요, 열병이 아니라 차가운 열정이 되리라.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게 되리라.”

 

“자신을 사랑하라고 붓다는 말한다. 그리고 그는 주시하라고 덧붙인다. ‘주시’는 붓다의 이름으로 행하는 명상이다. 그러나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그다음 주시해야 한다. (...) 사랑은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는 있는 그대로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억압하지 말라.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반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억압한다. 억압하는데 어떻게 주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적의 눈을 바라볼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맞출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눈과 눈을 마주치며 자신의 얼굴, 자신의 실체를 대면할 수 없다.”

 

“사랑은 몰입이며 헌신이다. 사랑은 순간의 일이 아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 사랑은 평생 지속하는 몰입이다.”

 

“사랑을 존재의 진정한 실체라 생각한다면, 깊은 친근감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두 가슴이 만나 하나가 된 일체감으로 춤출 수 있다면, 그대에게 다른 영성은 필요하지 않다. 그대는 이미 영성을 되찾은 것이다. 사랑은 궁극적인 경험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그것을 신이나 절대자 혹은 진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름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궁극적인 것에는 이름이 없다. 이름 없는 곳으로 사랑은 우리를 이끌어간다.”

 

“기억하라. 사랑은 무한하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질투하지 않는다. 사랑하기에 소유하려 한다는 생각은 추하다.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소모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물건들뿐이다. 사랑은 자유를 준다. 사랑은 자유이다.”

 

“사랑은 고통스럽다. (...) 아이들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와 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와 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 어린 새가 둥지에서 처음으로 혼자 날아오르려 애쓸 때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 (...) 사랑에 의해 겪는 고통은 절대 헛되지 않다. 사랑 속에서 겪는 고통은 창조적이다. 그것은 사람을 높은 경지의 의식으로 끌어올린다. (...) 사랑이 더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열려있어야 하며, 연약해져야 한다. 갑옷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고통스럽다. 방어하지 않으며 계산하지 않아야 한다. 모험해야 한다. 그러므로 늘 위험한 삶을 살아야 한다. (...) 사랑은 가장 위대한 화두이다. 고통스럽지만 피하려 하지 말라. 사랑을 피해버리면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 그 속으로 들어가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라. 황홀함은 아픔을 통해서 온다. 슬프겠지만, 슬픔을 통해 기쁨이 생긴다. 에고로서의 그대는 죽지만, 신으로, 붓다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신을 향한 첫걸음이며, 결코 건너뛸 수 없는 단계이다. 사랑의 단계를 건너뛰려는 사람은 결코 신에게로 도달할 수 없다. 사랑은 필수적인 단계이다. 다른 사람의 존재에 의해서만 자신의 총체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존재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가 향상되고, 자기도취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신의 에고가 아닌 다른 존재와 처음으로 조화로운 파장을 맞추어보는 경험을 하게 한다. 사랑은 에고의 일부분이 아닌 누군가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한 여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친구나 한 남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어머니나 자식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모든 인류와 조화를 이루는 게 왜 불가능하겠는가? 한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그토록 큰 기쁨이었다면, 모든 인류와 조화를 이루는 기쁨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모든 인류와 조화를 이루는 게 가능하다면 새와 나무와 동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왜 불가능하겠는가?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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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인가 - 진정한 자유를 위한 관계맺기와 홀로서기 지혜의 연금술 시리즈 9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젠토피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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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는 에고와 사랑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면서 우리가 에고로 인해서 자만심과 나르시시즘에 휩싸여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에고라는 게 버려야만 하는 종류의 것일까. 에고라는 것은 시비지심이기도 하고 탐진치로 인한 번뇌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분석과 비판 능력이고 이성적 논리적 판단이기도 할 텐데. 에고야말로 문명인으로서,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자질이며 오쇼 말대로 "사회는 바로 그런 생각[에고]에 기반을 두고 존재한다"(55).

 

산속에 들어가 머리 깎고 중이 된다면 모를까, 현대 문명의 한복판에서 벌어먹고 살아가야 할 처지라면 결벽증적으로 에고를 버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에고의 강도를 자유롭게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지 않을까. 에고를 버리고 사랑 속으로 뛰어들라는 오쇼의 말이 이성적 분석과 판단, 비판 능력보다 시적 정서적 감응력과 직관적 인식능력을 발휘하라는 뜻이라면, 단순히 이것을 취하고 저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자질을 동시에 탑재하여 능력이 신장되는 편이 낫잖아.

 

여기까지 쓰고나서 좀 더 읽어보니 오쇼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마음이 있다. 그리스인의 마음과 인도인의 마음이다. 그리스인의 마음에는 알고자 하는 열정이 있고, 인도인의 마음에는 존재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 그리스의 마음은 명료하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생각할 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인도의 마음은 오직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르며,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둘이 통합할 가능성은 있다. 어떤 사람이 물질에 대한 일을 할 때는 마음을 사용할 수 있다. 논리는 아주 좋은 도구이다. 같은 사람이 명상하는 방으로 들어설 때, 마음을 한구석으로 치워두고 마음이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 (...) 마음은 손이나 다리 같은 도구이다. 내가 걷고 싶을 때는 다리를 사용하지만, 걷고 싶지 않을 때는 다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주 똑같은 방법으로 물질적인 것을 알고 싶을 때만 논리적인 마음을 사용하면 된다. 그것은 적절한 사용법이며 마음은 그 일에 딱 어울린다. 내면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는 마음을 옆으로 치워두어라. 이제 다리는 필요하지 않다. 생각은 필요하지 않다. 마음이 없는 고요하고 깊은 경지로 들어가야 한다. (...) 마음을 사용할 수도 있고, 한구석에 치워놓을 수도 있다. 마음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오쇼는 자신이 그리스적 인식활동과 인도적 인식활동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다 해오며 살아왔다고 하면서 우리 역시 두 가지 일을 모두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삶은 매우 풍요로워질 거라고, 우리는 아무 것도 잃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을 흡수하여 웅장한 관현악단이 될 거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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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 개정판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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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풍-목-동쪽-신맛-간,담-푸른색 / 여름-열-화-남쪽-쓴맛-심장,소장-붉은색 / 늦여름 혹은 환절기-습-토-중앙-단맛-비,위장-노란색 / 가을-조-금-서쪽-매운맛-폐,대장-하얀색 / 겨울-한-수-북쪽-짠맛-신장,방광-검은색. 일단은 이 계열만 기억해두자.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푸코가 인용한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 속 동물 분류법처럼 위의 계열 역시 내가 처해있는 지식 담론 속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게 사실. 왜 같은 음양오행의 원리에 기반한 학문인데도 사주명리학은 별 껄끄러움 없이 받아들여지는데 반해 동양의학은 그렇지 않을까. 까닭은 동양의학이 내 몸과 정신을 통해서 그러니까 개인적인 차원에서 아직 충분히 증명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서구식 과학주의와 합리주의에 찌들어있는 나로서는 이것이 실제로 임상적으로 들어맞는지를 내 몸을 가지고 직접 실험을 해보고 나서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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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란 무엇인가 -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위한 성sex의 초월과 명상 지혜의 연금술 시리즈 10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젠토피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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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wildness으로 돌아가라. 동시에 의식의 끈을 놓지 말고 깨어있어라. 그러면 야성은 절대 위험하지 않다. 야성에 충실한 사람은 아름답다. 야성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야성이 넘칠수록 더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는 야생의 호랑이, 또는 숲속을 힘차게 뛰어다니는 사슴과 같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중요한 점은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만일 억압을 택한다면 그대는 소위 인간이라는 껍데기는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거짓되고 표피적이며 속이 텅 빈 꼭두각시 같은 인간이 될 것이다. 반면에 억압 대신 탐닉을 택한다면 그대는 동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 에너지를 변형시켜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신성한 존재가 된다. 내가 말하는 신성divine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고 있다. 그 신성의 차원에는 온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야생동물이 있다. 이 야생동물은 거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이 보태져서 더 풍요롭게 존재한다. 또한 문명세계가 그토록 이루려고 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 에너지가 변형되면 이렇듯 그대 안에 야생과 문명이 공존한다. 그대 안에서 자연과 신이 만난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과 은총으로 충만한 신이 그대 안에서 만난다. 이것이 ‘현자賢者’라는 단어의 참된 뜻이다. 현자는 자연과 신성이 하나로 만난 사람이다.”

 

“섹스는 지금까지 심각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섹스는 심각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놀이가 되어야 한다. 일종의 게임이나 유희처럼 취급되어야 한다. 섹스는 몸이 내뿜는 에너지를 갖고 두 사람이 즐기는 게임이다. (...)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해도 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즐거움을 맛본다. 그 두 에너지의 춤이 섹스이다. (...) 섹스가 중요한 이유는 단 하나 뿐이다. 즉 섹스가 우리의 에너지를 더 높은 차원으로 변형시켜준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억압보다 차라리 탐닉이 낫다. (...) 정확하게 억압과 탐닉의 중간지점에 서라. 이것이 진실로 건강한 태도이다. 억압에서 해방되면 잠시 동안 탐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곧 그는 억압과 탐닉의 중간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 자유가 부여된 다른 부분들을 살펴보자. 그대는 자유가 주어졌다고 거기에 정신없이 빠져있지 않다. 그대는 마음껏 샤워할 자유가 있다. 그렇다고 그대가 샤워에 정신이 빠져 하루 종일 샤워기 밑에 서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대가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사랑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름답다. 그 사랑이 그대에게 깊은 만족감을 안겨준다. 사랑하라. 어디에서나 어떤 것이든 사랑하라. 이렇게 넘치는 사랑은 더 깊은 삶을 깨우쳐줄 것이고, 그 삶이 그대를 신적인 차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 삶이 시작이라면 사랑은 그 절정이다. (...) 지금까지 우리는 ‘너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면 좌절한다. 하지만 (...)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사랑을 쟁취할지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다.”

 

“성은 근원적인 것이다. 성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인생은 성으로 인해 존재하고 성과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붓다와 마하비라는 성을 초월하지 못하면 되풀이해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성적 욕망이 있는 한 그대는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은 다른 누군가를 낳는 원천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대를 또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다. (...)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에너지가 있을 뿐이다. 그 단 하나의 에너지가 성 에너지이다. 신조차도 어떤 것을 창조할 때에는 섹스를 통해 그 일을 해야 한다. 섹스를 통해 아이가 태어나고 생명이 탄생한다. 꽃이 피어나는 것도 성 에너지의 작용이다. 뻐꾸기가 요란하게 울어대는 것도 성 에너지의 작용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온 세상이 성 에너지로 고동치고 있다. 성이 유일한 에너지인 것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질료 자체가 성이다. 그러니 섹스를 비난하지 말라. 힘차게 출렁이는 성의 파도 위에 몸을 실어라.”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절대 섹스하지 말라. (...) 그대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라. 그런 사람이 없다면 기다려라.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면 그 사랑이 에너지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 사랑하는 연인과 그대 사이에 기도가 일어나게 하라. 연인과 사랑을 나누기 전, 혹은 사랑을 나눈 후에 기도로 충만한 분위기를 만들어라.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사랑을 나누는 중에 그런 기도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명상과 결합된 사랑은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다. 명상이 사랑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사랑은 성 에너지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그 다음에는 명상이 사랑의 에너지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최고 정점에 이르면 사하르라르 차크라가 열린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머릿속에 있는 천 개의 연꽃잎’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육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꽃도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우리의 몸은 자연이 빚어낸 가장 오묘한 작품이다. 그러니 그대의 몸을 사랑하고 즐겨라. 그대의 몸에 닿는 감촉을 즐겨라. 이 몸을 행복하게 받아들여라. (...) 그가 그대의 몸을 사랑할 때 그 느낌을 즐겨라. 섹스는 두 사람이 서로 에너지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더 높은 차원의 만남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섹스는 저절로 사라진다. 섹스보다 더 높은 단계들이 있다. 하지만 그 단계들은 몸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을 분명하게 기억해두어야 한다. 두 사람의 에너지가 융합되는 더 높은 단계들은 몸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 단계들은 몸을 초월한다. 몸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몸보다 더 높은 차원이다. 그러니 사랑하라. 육체적인 사랑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말라. 더 깊고 높은 단계의 교감을 이루도록 노력하라.”

 

“섹스를 즐기지 못한다면 기도 또한 불가능하다. 기도는 우주와의 섹스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인을 대하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져라. 그가 그대의 몸을 애무하도록 허락하라. 그 또한 경건한 마음으로 그대의 몸을 만질 수 있게 하라. 그 순간을 즐겨라. 그것은 신의 선물이다.”

 

“내가 말하는 ‘처녀’란 순진무구하게 섹스에 임하는 사람을 뜻한다. 생물학적인 처녀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이다. 내가 말하는 ‘처녀성’은 심리적인 것과 관련이 깊다. 거의 영적인 의미에 가깝다. 처녀란 타인에 의해 주입된 어떠한 관념도 없이 섹스에 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명상적으로 섹스에 임하라. 그것이 기도이다. 섹스는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것 중의 하나이다. 신성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것이다. 섹스를 통해 생명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섹스를 통해 삶의 핵심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섹스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신을 발견할 것이다. (...) 섹스는 명상이 되어야 한다. 섹스의 예술을 배워야 한다. 노래하고 춤추고 축하하라. 성급하게 섹스를 행해서는 안 된다. 섹스는 치고 달리는 운동 경기가 아니다. 천천히 음미하라. 섹스는 훌륭한 의식이 되어야 한다. (...) 준비를 갖추어라. 더 민감하게 깨어있으라. 가슴의 문을 열어라. 섹스에 임할 때 그대는 신의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타인을 착취하기 위해 들어가지 말라. 상대방과 나누어 갖기 위해 들어가라. 배설하듯이 섹스에 임하지 말라. 그것은 섹스의 가장 낮은 차원이다. 섹스의 가장 높은 차원은 배설이 아니라 엑스터시이다. (...) 가장 높은 차원의 섹스는 창조적이다. 에너지가 배설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다. 에너지가 날개를 달고 비상한다.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여 솟구치기 시작한다. 에너지가 더 높은 차크라로 뚫고 들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배설이 아니라 환희에 가득 찬 비행이다. 이때 그대는 오르가즘의 가장 깊은 순간, 에고의 시간이 사라지는 순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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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란 무엇인가 -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위한 성sex의 초월과 명상 지혜의 연금술 시리즈 10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젠토피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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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성을 억압하지 않아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자기완성을 위해서 성을 승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오쇼가 꼽고 있는 것은 명상과 사랑이다. 여기서 사랑은 “내적 본성의 문제이지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 어떤 특정 대상이 우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것. 대상은 하나의 계기일 뿐이며, 우리는 그러한 계기를 통해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 오쇼가 말하는 사랑은 만물을 아우르는 무차별적인 사랑이고,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자비심’에 가까워보인다.

 

성의 승화 곧 성초월에 이르는 여정이 한결 쉬워질 수 있는, 성행위 시 견지할 만한 태도와 관련해서 오쇼는 우선 완전히 이완되고 차분한 호흡으로 섹스 시간을 늘리라고 말한다. 섹스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의식에 대한 경험을 더 많이 얻게 된다고. 아울러 섹스할 때 두 눈 사이의 지점에 의식을 집중하면 좋다. '주시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섹스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가되 항상 '주시자'가 되어라. (...) 중요한 점은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면 그대는 무의식의 힘에 사로잡히고, 소위 카르마, 업의 포로가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오쇼가 강조하는 것은 경건하고 신실한 태도이다. 사원에 들어가는 자세로, 성소에 들어서는 마음으로 섹스하라고.  

 

요가할 때처럼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며 섹스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듯하다. 한편으로 드는 한 가지 의문은, 자신의 행위를 주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미 강력한 에고의 활동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주시하면서, 그러니까 데카르트처럼 행위와 행위하는 나를 분리하여 사고하면서 어떻게 에고의 소멸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무지의 소치이겠으나 나로서는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다. 

 

이 책 읽고 나서 더욱 확신하게 되는 바는 역시 섹스와 탱고가 동일한 의미를 같는, 동일한 차원의 행위라는 것이다. 섹스와 탱고가 다를 것이 뭔가. 다만 탱고의 한계는 그것이 전적으로 불임의 운동이라는 것이겠지.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탱고는 불임의 운동이다. 탱고는 그 행위 자체로는 꼬라손 즉 오르가즘을 느끼고 상대와의 완벽한 합일을 통한 지복을 체험할 수 있을 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산출해내지 못한다.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못한다. 아무 것도 생성해내지 못하는 유희. 탱고가 주는 허무감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

 

“삶을 제외한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 자체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은 곧 종교성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과 같다. 이 삶의 진실을 체득하는 것이 궁극적 진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이 삶에서 그것을 놓친 사람은 어디를 가도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 나는 종교를 ‘삶의 기술’이라고 부른다. 진정한 종교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사다리와 같다. 세상을 등지는 게 아니라 두 눈을 크게 뜨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도피가 아니라 가슴을 활짝 열고 세상을 껴안는 것이다. 삶과의 전면적인 만남, 이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섹스에 대한 이끌림은 실제로는 섹스에 대한 것이 아니다. (...) 이런 이끌림은 섹스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한 것이다. 여기엔 종교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일상적인 삶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직 섹스를 통해서만 그런 체험을 맛본다. 쇼핑을 즐기고, 사업을 하고, 돈과 명예를 얻고,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모든 게 표피적이다. 오직 섹스만이 우리를 존재 깊은 곳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성행위 중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로, 오르가즘을 느끼는 순간에 에고가 사라지고 무아의 차원이 열린다. 잠시동안 ‘나’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에고가 사라지고, 그대는 자신이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 잊어버린다. 잠깐 동안 존재감이 사라진다. 두 번째로, 잠시 동안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 열린다.

 

무아와 무시간성, 종교적 체험의 영역에서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섹스에 열광하는 것 또한 이 두 가지 요소 때문이다. 성적인 갈망은 이성의 육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뭔가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이 숨어있다. 즉 에고와 시간이 사라진 상태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에고와 시간이 사라진 상태를 갈망하는 것일까. 에고가 사라지는 즉시 영혼을 일별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시간이 사라지는 즉시 신적인 차원이 열린다. 이것이 종교적인 체험이다. 섹스를 향한 갈망 뒤에는 이렇게 영적 체험에 대한 염원이 숨어있다.”

 

“인류는 성행위를 통해 최초로 삼매와 무심의 상태, 초의식의 경지를 맛보았다. (...) 인간이 깨어있는 의식에 도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섹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섹스는 자연이 준 방법이다. 섹스는 자연적 방법이다. 동물도, 새들도, 식물도 섹스를 한다. 그리고 인간도 섹스를 한다. 우리는 장구한 세월 동안 자연적 방법만을 써왔고 동물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인간의 영역은 섹스보다 높은 차원의 새로운 문이 열릴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섹스가 석탄이라면 브라흐마차리야, 즉 성초월은 다이아몬드다. 다이아몬드와 석탄은 적대관계가 아니다. 다이아몬드는 석탄이 새로운 차원으로 변형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브라흐마차리야는 섹스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브라흐마차리야는 섹스가 변형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 브라흐마차리야는 그대의 모든 행위가 신적인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삶이 신성한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 브라흐마차리야이다. 브라흐마차리야는 곧 신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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