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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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나’에는 원천적인 오류, 즉 자신이 누구라는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 불과한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것이 에고이다. (...) 시간과 공간의 실체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력을 지녔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환상의 자아의식(외부세계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로서의 자기에 대한 느낌)을 ‘의식이 일으키는 시각적 환상’이라고 불렀다. 그 환상의 자아가 그 후의 모든 해석의 토대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에 대한 오해의 토대가 되고, 모든 사고 과정, 상호작용, 관계의 근본이 된다. 당신의 현실은 이 근본적인 환상의 반영이다.

 

-에고는 소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질수록 자신이 더 많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에고는 비교를 통해 살아간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가를 결정짓는다. 모두가 대저택에 살고 모두가 부자라면 대저택도 재산도 자신의 자아의식을 강화하는 데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자신의 부를 포기하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해,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영적이라고 생각하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누구인가를 비춰 주는 거울이 된다. 에고의 자아 존중감은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에 매여 있다. 당신은 자신에게 자아의식을 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 즉 소유의 개념은 에고가 자신에게 견고함과 영속성을 부여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허구이다. 그러나 소유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깊은 내면에는 또 다른 더 강한 충동이 있다. ‘더 많이’를 향한 욕구가 그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에고도 ‘더 많이’를 향한 욕망 없이는 오랜 기간 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에고를 훨씬 활력 있게 만드는 것은 소유보다도 오히려 욕망이다. 에고는 ‘갖고 싶어하기’보다 ‘더 많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따라서 소유가 주는 얕은 만족감은 언제나 ‘더 많이’ 원하는 욕망으로 대체된다. ‘더 많이’ 바라는, 다시 말해 동일화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심리적 욕구이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중독적인 욕구이다.

 

-에고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상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한다. 언제나 숨겨진 안건을 가지고 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고, 불충분함과 결핍감이 있으며, 어떻게든 그것을 채워야만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과 상황을 이용하지만, 어쩌다 성공해도 그 만족감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것’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에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고 고뇌한다. 이제는 고전이 된 유명한 팝송 <난 만족할 수 없어(I can’t get satisfaction)>(롤링스톤즈가 부른 곡)는 다름 아닌 에고의 노래이다.

 

​-그러면 자신의 소유물에 자부심을 갖거나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해 분한 감정을 갖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부심, 돋보이려는 욕구, ‘남보다 더 많이’를 통해 자아가 확실히 강화되고 ‘남보다 더 적게’에 의해 위축되는 것은 옳은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에고일 뿐이다. 에고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단지 무의식일 뿐이다. 자신 안에 있는 에고를 관찰할 때 당신은 그 너머로 가기 시작한다. 에고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 안에서 에고의 행위를 감지하게 되면 미소 지으라. 때로는 소리 내어 웃어도 좋다. 인류는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먼저,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에고는 당신이 아니다. 에고를 개인적인 문제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단지 더 에고일 뿐이다.

 

​-‘나를’, ‘나에게’, ‘나의 것’, ‘더 많이’, ‘원한다’, ‘필요하다’, ‘어떻게든 가져야 한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등의 생각 형태는 에고의 내용물이 아니라 구조에 속한 문제이다. 내용물은 상호교환이 가능하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 생각 형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그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머물러 있는 한, 당신은 그 생각 형태들이 하는 말을 믿게 된다. 그렇게 되면 숙명적으로 그 무의식적인 생각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계속해서 찾으면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운명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생각 형태가 작용하고 있는 한, 어떤 소유물, 장소, 사람, 조건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물건들 이외에 동일화의 또 다른 기본 형태는 ‘나의’ 육체와의 동일화이다. (...) 완벽에 가까운 훌륭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만 육체와 자신을 동등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문제가 있는’ 육체와도 쉽게 동일화되고 육체의 불완전함, 질병,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받는 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장애로 고통스러워하는 자, 환자라는 관념적 정체성을 늘 확인시켜 주는 의사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무의식중에 그 병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에고가 동일화되는 또 다른 생각 형태 중 하나이다. 에고는 일단 동일화될 대상을 발견하면 놓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지만 드물지 않은 경우에, 더 강한 정체성을 추구하는 에고는 병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 병을 일으킬 수도 있고, 또 실제로 일으키기도 한다.

 

-에고가 지배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 즉 모든 기억, 모든 해석, 의견, 관점, 반응, 감정 속에 ‘나(에고)’라는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무의식이다. 당연히 당신의 생각, 다시 말해 당신 마음속 내용물은 성장 배경, 문화, 가족 배경 등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다. 모든 마음 활동의 중심은 집요하게 반복되는 생각들, 감정들, 반응 형태 등 당신이 가장 강하게 동일화되어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독립체가 에고 그 자체이다.

 

​-에고는 동일화와 분리를 먹고 산다. 당신이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마음이 만들어 낸 자아, 즉 에고를 통해 살아간다면, 그 정체성의 기반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은 본래 변화하기 쉽고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하면서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나’라는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에고는 그 반대 생각인 ‘남’이 필요하다. 개념적 ‘나’는 개념적 ‘남’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남’은 내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할 때 가장 확실한 ‘남’이 된다. 에고가 지배하는 이 무의식적인 행동 양식의 한쪽 끝에는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불평하는 에고의 강박적인 습관이 놓여 있다. (...)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잘못’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완전한 오해이며, 적을 만들어 자신이 옳고 우월함을 느끼도록 조건 지어진 자기 마음의 투영일 수가 있다. 잘못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그것에만 집중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함으로써 그 잘못을 확대하는 경우도 흔하다. 당신이 반응하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것을 당신은 자신 안에서 강화시키는 것이다.

 

-불만은 에고가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선호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모든 불만은 마음이 만든, 당신이 완전히 믿고 있는 작은 이야기이다. 불만을 큰 소리로 말하든 단지 생각 속에서만 하든 차이가 없다. 자기와 동일시할 것을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 않으면서 불만만으로 즐겁게 생존하는 에고도 있다. 그런 에고의 포로가 되면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습관이 되고 당연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면전에 대고 하든, 혹은 흔히 하듯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든, 심지어 생각 속에서만 하든,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것은 이 패턴의 주된 부분이다. 욕하기는 이런 분류표 붙이기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이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을 이기려는 에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이 무의식 바로 아래쪽 차원에서 당신은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있으며, 또한 그보다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물리적 폭력이 있다.

 

-분함은 불만과 함께 따라오는 감정이자 사람들에게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일이며, 이것은 에고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보태 준다. 분함은 억울해하고, 분개하고, 자신이 부당하게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탐욕, 부정직, 진실성 부족, 현재 그들이 하고 있는 짓과 과거에 한 짓, 그들이 말한 것, 그들이 하지 않은 것, 했어야 하며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등에 대해 계속해서 분개한다. 에고는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눈감아 주지 않고 그것을 아예 그들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바로 당신 안의 무의식, 즉 에고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불만스러워하는 바로 그 순간 머릿속 목소리를 잡아챌 수 있는지, 즉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좋다.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그 에고의 목소리를. 그리고 그 목소리를 알아차릴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그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그 ‘알아차림’이 본래의 당신이다. 배경에는 알아차림이 있고, 전면에는 그 목소리, 즉 생각하는 자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에고로부터 해방되고, 관찰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 안의 에고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에고가 아니라, 단지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에고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에고를 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행동이 에고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집단적 기능장애의 표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만 그것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 마치 그것이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대응하려는 충동이 사라진다. (...) 대응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말이 용서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에고를 꿰뚫어 모든 인간 존재의 본질인 온전한 정신을 보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취하든 에고의 깊은 곳에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 그 환영의 자아를 강화하려는 강한 무의식적 충동이 있다. 그 자기 이미지, 환영의 자아는 생각이 지배권을 쥐고서 순수 존재, 원천, 신과 연결되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기쁨을 흐리게 만들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 생각은 커다란 축복인 동시에 큰 저주이다.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든 에고의 숨은 동기는 언제나 같다. 눈에 띄고 싶고, 특별해지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힘을 갖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더 많이’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은 남들과 별개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한다. 즉, 대립하는 상대방, 적이 필요하다.

 

-에고의 밑바탕에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기껏해야 가까운 관계, 새로운 소유물, 혹은 이런저런 성취들로 일시적으로 이 두려움을 덮어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환상은 결코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나는 누구인가’의 진리만이, 만약 당신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것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왜 두려워하는가? 왜냐하면 에고는 형상과의 동일화에 의해 일어나지만, 깊은 바닥에서는 어떤 형상도 영원하지 않고 모두 덧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자신감 있어 보여도 에고 주변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있다.

 

​-만약 누군가 자신보다 더 많이 갖거나 더 많이 알거나 더 많이 할 수 있다면 에고는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자신이 ‘더 적다’는 느낌이 상대방에 비해 상상 속의 자아의식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그때 에고는 상대방의 소유물, 지식, 능력의 가치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하찮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한다.

 

​-어떤 역할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기획된 것들이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산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란 결국 일종의 심리적 에너지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것을 외부에서 찾는다. 에고가 찾는 것은 형상을 초월한 깨어 있는 의식, 즉 ‘현존’이 아니라 인정, 칭찬, 찬사 같은, 혹은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고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어떤 형상 속의 관심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접촉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따라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당신이 알아야 하고 자신 안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그것은 당신 안의 에고이다.

 

​-스스로에게 자아의식을 주기 위해 개념적으로 자신에 대해 규정짓는 일을 중단할 수 있는가? ‘생각’에서 정체성을 찾는 일을 멈출 수 있는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으면 혼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면 실제로 당신은 평화롭고 투명한 상태로 들어가, 생각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더 가까워진다. 생각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을 한계에 가두는 일이다.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을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상황은 언제나 중립적이며,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다. 반대편에는 상황이나 사실이 있고, 이쪽에는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사실과 함께 머물도록 해야 한다. (...) 대부분 당신이 생각하는 것들이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을 보아야 한다. 생각과 감정이 되는 대신,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알아차림이 되어야 한다.

 

-에고는 현실을 원망하는 것을 좋아한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타타타(여여함), ‘삶의 본래 그러함’이라고 불렀다. ‘삶의 본래 그러함’이란 이 순간의 본래 그러함일 뿐이다. 그 본래 그러함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 에고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이다. 그렇게 해서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만들어지고, 에고는 그것 때문에 번창한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불행을 에고는 사랑한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자신도 타인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자신이 지상에 지옥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모르는 채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무의식적인 삶의 본질이다. 완전히 에고의 지배 속에 살아가는 삶이다.

 

-에고가 지배하는 모든 동기는 때로는 에고가 작용하는 본인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영리하게 변장을 하고 있지만, 자기 강화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고통은 당신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원인은 형상과의 동일화이지만, 그 고통이 형상과의 동일화를 무너뜨린다. 고통의 많은 부분은 에고에 원인이 있지만, 결국에는 고통이 에고를 부순다. 단, 고통에 의식적으로 깨어 있을 때만 그 일이 가능하다. (...) 고통은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이 그것이다. 십자가 위의 사람이 그 원형적인 이미지이다. 그는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이다. 당신이 고통에 저항하는 한,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은 더디게 진행된다. 그 저항이 불태워 버려야 할 에고를 더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일 때,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그 과정이 가속화된다.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아이와 부모 등 다른 누군가의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고통을 경험할 때,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고통의 불꽃은 의식의 빛이 된다. (...) 에고는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그 생각이 당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진리의 왜곡이며,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이다. 고통을 초월하려면 고통에게 먼저 “예.”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리이다.

 

​-당신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중단하라. 그래도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생기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

 

​-에고는 왜 역할을 연기하는가? 제대로 조사해 보지도 않은 한 가지 가정, 한 가지 근본적인 오류, 한 가지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이다. 그 생각은 ‘나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이 생각으로부터 다른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뒤따른다. ‘나는 충분한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역할을 연기할 필요가 있어.’ ‘더 많이 존재하기 위해 더 많이 얻을 필요가 있어.’ 그러나 당신은 당신인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적 심리적 형상 밑바탕에서 당신은 ‘생명’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형상 속에서는 당신은 언제나 어떤 사람보다 열등하고 어떤 사람보다 우월할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질 속에서는 당신은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존과 진정한 겸손은 이 깨달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에고의 눈으로 보면 자존과 겸손은 대립적이다. 진리 속에서는 그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나는 언젠가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에고이다. 에고로부터의 자유는 사실 큰 일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깨어 있는 ‘바라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 순간 생각으로부터 알아차림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면 에고의 영리함보다 훨씬 위대한 지성이 당신 삶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 알아차림을 통해 감정과 생각마저도 개인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본래부터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그곳에는 자신도 없다. 다만 인간의 감정, 인간의 생각만 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야기, 한 묶음의 생각과 감정들에 지나지 않는 당신 개인이 살아온 이야기는 이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되고, 더 이상 의식의 전면을 차지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당신 정체성의 기초가 아니다. 당신은 ‘현존’의 빛이 되고, 생각과 감정보다 앞선 더 깊은 알아차림이 된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들은 당신을 흔들어 놓거나 마음을 방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에 흔들리고 마음이 방해받는가를 기준으로 당신이 얼마나 깊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 당신에게 무엇이 중요한가는 당신이 말하거나 믿는 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행동과 반응이 당신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것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면 좋다. ‘나를 흔들어 놓고 마음을 방해하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만약 작은 것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정확하게 이것이다. 즉, 작다. 그것이 당신의 무의식적인 믿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은 것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이 작은 것들이다. 모든 것들이 덧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내용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의 내린다. 지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내용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물이 관심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며, 그들이 동일화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인 삶’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용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는 물론 나이, 건강, 관계, 경제력, 일, 생활환경 등을. 사건들, 즉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삶의 외부 환경과 마음의 환경, 당신의 과거와 미래 모두가 이 내용물의 영역에 속한다. / 그렇다면 내용물 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 내용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바로 의식이라는 내적 공간이 있다.

 

-영적인 추구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습을 바꾼 에고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기’를 제거하는 것이 미래의 목적이 되면, ‘자기’를 제거하려는 그 노력조차 ‘자기’를 더 커지게 하려는 위장된 추구일 가능성이 있다.

 

​-무저항은 우주의 가장 큰 힘을 여는 열쇠이다. 그 힘에 의해 의식, 즉 영혼이 형상에 갇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무엇이 존재하든 무엇이 일어나든, 형상에 대해 마음속에서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상의 절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항하면 당신 자신의 형상 정체성인 에고를 포함해 세상과 세상의 일들이 실제보다도 더 현실성 있어지고, 더 견고하고 더 영속적으로 보인다. 세상과 에고에게 무게와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형상들의 놀이를 생존 경쟁으로 오해하고, 그 오해가 당신의 인식일 때 그것은 당신의 현실이 된다.

 

​-강력한 영적 실천 중 하나는 에고의 작아짐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복구하려는 시도 없이 의식적으로 작아진 채 두는 것이다. 때때로 실행해 볼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비판받거나 비난받거나 험담을 들었을 때 곧바로 반박과 자기방어를 시도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작아진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에 대해 외부적으로만이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으면 실제로 어떤 것도 작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작아짐’으로써 더 커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거나 자신의 형상을 강화하려고 하지 않으면 형상과의 동일화로부터, 즉 마음속 자기 이미지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다.

 

-자신이 특별히 아무 존재도 아님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의 힘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에고에게 약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이 영적 진리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가치관, 그리고 이 시대가 사람들에게 조건 지우는 행동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산이 되기보다는 “천하의 깊은 골짜기가 되라.”고 노자의 『도덕경』은 가르친다. 그러면 당신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너에게 흘러들어 올 것”이라고.

 

-저항하지 않고(무저항), 판단하지 않고(무판단), 집착하지 않는 것(무집착)—이 세 가지는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의 세 가지 측면이다. 집착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내면의 저항을 멈춤으로써 그 차원에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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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 - 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
최진석 지음 / 소나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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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아름다운 무늬, 인문학. 코앞에 펼쳐진 생활의 과제들을 처리하느라 까마득히 잊어먹고 있었지만, 그래, 인문학이 있었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인문학적 사고가 가능하려면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독립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한 구체적인 훈련법으로 글쓰기, 운동, 낭송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셋 다 자신의 신체 감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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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에 반대한다 -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위해
아르노 그륀 지음, 김현정 옮김 / 더숲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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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위해'(부제)서는 공감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게 책의 결론이다. 예컨대 밀그램의 실험에서 실험설계자의 명령에 따라 고문을 수행하던 피험자들이 자신들의 조작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을 지켜보며 겪는 심리적 불안과 긴장, 바로 그러한 정서적 동요야말로 맹목적 피지배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체 반응이라는 것이다. 당연하고도 단순평범한 얘기지만 이 이상의 결론을 제시하기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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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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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종류의 허무주의가 있다. 먼저 ①부정적 허무주의: 초감각적 세계의 관념,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의 관념이라는 허구를 창안함으로써 삶 전부를 무가치한 것으로, 외관에 불과한 것으로 비하함. 삶보다 우월한 것으로 창안된 허구적 가치들 속에서 의지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바로 거기에 강력한 ‘무(無)의 의지’가 관철되고 있음. 권력의지를 부정하는 바로 그 의지.

 

②반응적 허무주의는 부정적 허무주의가 대체된 혹은 연장된 형태이다. 반응적 허무주의는 부정적 허무주의에서 창안된 허구적 가치들조차 부정한다. 현실보다 우월한 가치들 자체의 가치 박탈. 신, 선, 진리, 모든 형태의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부정. 모든 의지의 부정(부정적 허무주의가 반응적 허무주의로 나아가도록 이끈 동력이었던 무의 의지조차 부정, 무의 의지와의 동맹의 결렬). 삶의 혐오. 나약성의 비관주의. 신의 살해자.

 

2 반응적 허무주의 속에서 신은 죽었다. 어떻게? 연민으로 질식해 죽었다. 연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zero)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 다시 말해 약하고 병들고 반응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소위 반응적 삶만을 감내하는 자, 반응적 삶의 승리를 필요로 하는 자, 삶 속에서 적극적인 모든 것을 증오하는 자만이 연민을 느낀다. 허무주의의 실천으로서의 연민. 한마디로 신이 반응적 삶에 감염되어버린 것이다. 감염되어 연민하다 질식해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이 죽은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다. 반응적 인간이 바로 그 빈자리를 꿰찬다. 그리고는 진화, 진보, 만인의 행복, 공동체의 선, 개혁, 자유사상,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등 그의 고유한 가치를 파급시킨다. 신이 죽고 천국도 없어졌지만 그에 버금가는 또 다른 허구적 진리들이 양산된다. 신 대신에 도덕적 인간, 진실한 인간, 사회적 인간이 등장한다.

 

마지막 단계로서 차라리 고귀하기까지 한 일종의 불교적 상태인 ③수동적 허무주의가 있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반응적 허무주의의 극단적 완성으로, 모든 허무주의의 최종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인도되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무의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무. 신의 살해자의 자손인 수동적 허무주의의 인간은 이제는 죽기에도 너무나 지쳐버린 최후의 인간이다. 극도로 지친 삶은 수동적으로 꺼지듯 소멸을 바란다.

 

3 신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유대적인 증오의 신에서 기독교적 사랑의 신으로 거듭난다. 포악했던 구약의 신 대신 사랑을 설파하는 온화한 신의 탄생. 사랑의 신의 탄생과 더불어 반응적 삶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이때 바울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고 기독교를 구성하는 해석을 제공한다.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가 빚 많은 채무자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하여 영원한 죄의식(가책)을 가져야 한다. 영원히 죄의식과 부채의식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증오가 사랑으로 은폐되는(=무의 의지가 좀 더 유혹적이고도 세련된 형태로 나타나는), 원한에서 가책으로 방향전환이 되는 길목에 신의 죽음이 있다.

 

그러나 예수 그 자신은 사실 또 하나의 부처였다. 허무주의의의 최종형인 수동적 허무주의, 그 고귀하기까지 한 수동적 허무주의를 체현한 자였다. 그의 죽음은 반응적 삶에서 침착하게 죽는 법을, 수동적으로 스스로 소멸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에게 죽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가장 흥미롭고 가장 유순한 타락자였다. 그는 불교도였다.

 

4 니체 저작은 세 가지 방식으로 변증법을 반대한다. ①변증법은 구체적으로 현상들을 소유하는 힘들의 본성에 무지하기 때문에 현상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또 그것은 ②힘들, 그것들의 성질들, 그것들의 관계들이 파생하는 현실적 요소에 무지하기 때문에 본질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것은 ③추상적이고 비현실적 항들 사이에서의 교대, 이를테면 신학적 가치에서 휴머니즘적 가치로, 신에서 인간으로, 그렇게 신의 빈자리에 계속해서 다른 것들을 앉히는 그 끊임없는 바꿔치기를 행하는 데 만족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와 변형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불충분성은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 즉 변증법은 ‘누가?’라는 의문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 때문에 변증법은 해석에 실패하고 언제나 징후들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한다.

 

5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중세에 와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말씀으로 변형되고, 칸트에게서는 도덕적인 정언명법이나 양심의 소리로 변형된다. 헤겔에게서는 절대정신으로 변형되고, 포이어바흐에게서는 보편 인류로, 마르크스에게서는 민중 혹은 프롤레타리아로 변형된다. 기독교의 피안을 대신하여 이상적인 시민사회, 공산주의 사회가 등장한다. 예전에 신의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단죄되고 자신을 학대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듯이 근대에는 도래할 이상사회와 인류와 민중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단죄되고 억압되고 학살된다. 이 모든 변주는 바로 변증법적 운동의 양상이다. 변증법은 소외→소외의 제거→소외의 재점유로 작동한다. 격파되어야 할 가치들이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경건하게 보존된다. 가치들이 포장만 바뀐 채 끝없이 회수된다. 

 

6 니체는 끊임없이 독일 철학의 신학적이고 기독교적인 특징, 신을 죽인 뒤에도 여전히 자아와 인간과 거대 관념들 이외에 그 어떤 것에도 도달할 수 없는 철학의 무능함, 변증법적 변형들의 기만적 특징에 대해 비난한다. 헤겔, 포이어바흐, 슈티르너에 이르기까지 독일 변증법 철학자들을 열렬히 비난한 끝에 니체가 들고 나온 것은 초인과 가치전환이다. 초인의 관심은 무엇이 신의 자리를 대체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러한 연쇄적 자리바꿈의 패턴을 극복할 것인지, 반응적 힘들이 가면을 바꿔써가며 끝없이 보존되고 전승되는 이 고질적인 시스템 자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이다.

 

그러나 니체의 초인이 변증법적 인간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그는 본성상 인간과 다르고, 자아와도 다르다. 초인은 새로운 감각 방식에 의해서 정의된다. 인간과는 다른 주체이고 인간적 유형과는 다른 유형이다. 그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보여주는 자이다. 초인의 새로운 사유방식, 새로운 평가 방식은 바로 가치전환이다. 가치전환이란 가치들의 변화도, 추상적 교대나 변증법적 전복도 아니라, 가치들의 가치가 파생하는 요소 속에서의 변화와 전복을 말한다. 힘에의 의지의 성질 그 자체의 전복. 노예적인 권력의지에서 강자적인 권력의지로의 전복. 심층 해류 자체의 변화.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해서는 안경의 색깔을 바꿀 것이 아니라, 관점 자체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처럼.

 

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4부에서 우월한 인간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우월한 인간이란 반응적 인간이며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다. 니체가 묘사한 갖가지 인간 군상들은 공통적으로 두 측면을 갖는다. 즉 인간은 ①반응적 힘과 그것들의 승리의 대표자인 동시에 ②종적(種的) 활동(문화적 활동)과 그것의 산물의 대표자다. 차라투스트라의 적이면서 또한 동료이기도 한, 우월한 인간의 이중적 측면. 니체는 이렇게 갖가지 반응적 인간 군상들을 묘사하면서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를 인간과 역사 속에서 필연적이고도 본질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 원한과 가책은 심리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허무주의는 역사의 한 국면이 아니라, 보편사의 선험적 개념이다. 반응적 힘들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원한, 가책, 허무주의 이 모든 요소 자체가 바로 인간이기 위한 조건, 인간으로서의 조건인 것.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 자체가 질병이다. 따라서 허무주의를 정복하는 것, 즉 사유를 가책과 원한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인간을 극복하고 인간을 파괴하며 가장 선한 인간조차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비판은 인간의 본질 자체에 도전한다.

 

8 그런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인가?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더 심오하다. 힘들이나 그 힘들의 성질보다 더 심오하게 힘들의 생성이나 권력의지의 성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힘들의 유형만이 아니라 ‘힘들의 생성’이기도 하다. 강자는 약자들에는 대립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 안에서 나오는 약한 생성 혹은 반응적 생성에는 대립할 수 없다. (왜? 자기 자신의 것이니까) 

 

이론적 인간에 의해 전복된 그리스 세계, 유대에 의해 전복된 로마, 종교개혁에 의해 전복된 르네상스처럼 적극적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반응적 생성이 운명처럼 약속되어 있다. 종적 활동이 있지만 그것은 반응적 힘들에 의해 금방 반응적 생성으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그저 가치들을 전복시키는 대신에 가치들을 바꾸고, 그것들을 교대시킬 뿐이다. 그것들이 파생되는 허무주의적 관점을 지키면서 말이다. 물론, 인간의 적극적 힘들은 분명 존재한다. "인간사조차 적극적인 시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모든 힘들의 반응적 생성의 자양분이 되고 만다. 우월한 인간이 두 측면을 갖는 건 이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왜 종적 활동은 대부분 반응적 힘들에 의해서 반응적 생성으로 전환되어버리는가. 종적활동은 왜 결국 실패하고 마는가. 적극적 힘이 부정의 의지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적극적 힘이 반응적으로 오염, 변질, 전락하지 않으려면, 적극적 힘의 우월성을 담지해낼 수 있는 성질, 바로 ‘긍정하는 의지’가 요구된다. 무의 의지에 의해서만 반응적 생성이 존재하듯이, 긍정하는 의지에 의해서만 적극적 생성이 존재한다. 긍정하는 힘에까지 고양되지 않는 활동, 부정의 노동에만 기대는 활동은 실패가 약속되어 있을 뿐이다. 긍정하는 의지라고 하는 바로 이 긍정의 요소야말로 인간에게 결여된 것이고, 초인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인간에 결여된 그 긍정을 표현하는 네 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웃음과 놀이와 춤. 웃음은 삶을 그 고통 속에서조차 긍정하는 것이다. 놀이는 우연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춤은 생성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

 

9 허무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가치들의 가치가 파생되는 요소들을, 가치들의 가치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무의 의지의 개종이 바로 변화의 개시점이다. 균형이나 화해가 아니라 개종, 전환, 회심. 임계점에 도달한 후 일거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럽고 극적인, 혁명에 가까운 어떤 형질 변환.

 

수동적 허무주의의 인간, 최후의 인간이 허무주의의 극단에 도달하면 이제 그는 멸망하길 원하는 인간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파괴하고자 한다. 이 적극적 파괴는 무의 의지의 변환의 지점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완성된 허무주의=전환의 지점. 허무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곧 허무주의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파괴는 ‘반응적 힘들’과 ‘무의 의지’ 사이의 동맹이 결렬될 때 후자가 개종하고, 긍정의 편으로 가면서 반응적 힘들 자체를 파괴하는 ‘긍정하는 힘’과 관계 맺는 순간에 적극적이 된다. 파괴는 부정이 긍정적인 힘으로 전환되고, 개종됨에 따라 적극적이 된다. 어떤 순간에 나타나는 ‘생성의 영원한 기쁨’, ‘무화의 기쁨’, ‘무화와 파괴의 긍정’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철학의 결정적 지점이다.

 

10 가치전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권력의지 속의 성질의 변화. 가치들의 가치는 더 이상 부정이 아니라 긍정에서 파생된다. ②권력의지 속에서 ‘인식 이유’의 ‘존재 이유’로의 이행. ③권력의지 속에서의 요소의 개종. ④권력의지 속에서의 긍정의 군림. 긍정만이 독립적인 힘으로 존속한다. ⑤알려진 가치들에 대한 비판.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가치들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

 

11 긍정과 부정의 관계: 긍정과 부정은 권력의지의 두 성질, 권력의지 속의 두 이유로서 서로 대립한다. 한편 부정과 긍정은 원인과 결과로서 이어져 있기도 하다. “자기 자신만큼 어마어마하고 무제한적인 부정이 직접적으로 뒤따르지 않는 긍정은 없다.” 마찬가지로 긍정이 뒤따르지 않는 부정도 없다. 부정은 긍정과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서로가 서로의 직접적인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반례로 나귀의 경우를 보자. 나귀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긍정할 수도 없다. 나귀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의욕이 없다. 나귀의 긍정은 거짓된 긍정일 뿐이다. 긍정이 아니라, ‘무거움을 견디고 감당하는 것’일 뿐이다. 짊어지기에 무거운 것이 원래 삶이기라도 한 듯이 나귀는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현실을 예찬한다. 인간 역시 신을 대신하면서 모든 가치들을 스스로 짊어진다. 국가든 교회든 모든 것들을 자신의 등 위에 올려둔다. 모든 도덕에 대한 수락. 무게가 나가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긍정이고, 모든 것이 현실적이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동의, 복종, 수락, 자족, 인내로서의 긍정. 나귀의 긍정은 삶을 부정의 노동에 종속시키고, 삶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삶을 반응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러한 나귀의 거짓된 긍정은 곧 인간을 보존하는 방식에 속한다.

 

세계는 참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지만, 살아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계는 권력의지이며, 다양한 힘들 아래서 실현되는 거짓의 의지이다. 어떤 힘 아래서든지 거짓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은 항상 평가하는 것이다. 사는 것은 평가하는 것이다. 사유 세계의 진리도, 감각 세계의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진리, 현실 자체는 평가로서만, 말하자면 거짓말로서만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해왔던 우리의 모든 평가들, 그 평가하는 힘에 깃들어있던 의지는 삶을 삶에 대립시키고 삶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게 만든 “권력의지의 성질로서의 부정”의 의지였다. 평가하는 힘들이 이제까지는 부정의 의지에 봉사해왔던 것. 그러나 삶이 긍정되고 적극적인 것으로 변하는 것은 거짓의 고귀한 힘, 바로 긍정으로서의 권력의지이다. 긍정도 물론 평가다. 그러나 이 평가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차이를 향유하는 의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긍정은 존재의 짐을 떠맡거나 현실에 책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해방시키고 짐을 더는 것이다. 삶의 가치들인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긍정은 삶을 가볍고 경쾌하고 적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부재하다. 인간은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지점에서 부정을 긍정의 힘으로 고양시킨다. 한마디로 인간은 극적인 전환까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긍정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중의 긍정=디오니소스의 긍정)은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니체의 긍정은 ①진리나 현실이 아니고 평가(관점주의적 해석)이며, ②수락으로서의 긍정이 아니라 창조로서의 긍정이며, ③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형태로서의 초인이다. 

 

12 긍정의 본질은 차이이다. 부정이 대립의 고통이자 노동이라면, 긍정은 차이와 향유의 놀이이다. 긍정은 처음에 다수, 생성, 우연으로 상정된다. 다수는 어떤 것과 다른 것의 차이이고, 생성은 자신과의 차이이며, 우연은 모두의 사이에서의 차이 혹은 분배적 차이이다.

 

13 영원회귀는 부정의 회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원회귀는 존재가 ‘선별’임을 의미한다. 긍정하거나 긍정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재생산’이면서 ‘적극적 생성의 생산’이다. 어떤 것도 부정을 포함하지 않는 생성. 차이야말로 순수긍정이다. 니체는 차이를 부정하고 차이를 의식의 불행으로 만들며 우연을 제거하려는 모든 철학적 신비화를 비판한다. 차이는 행복이며, 우연은 기쁨의 대상이고, 그 기쁨은 ‘되돌아온다는 것’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에 통용되던 모든 가치들의 파괴자라는 점에서 반응적 인간을 넘어선다. 그는 최후의 인간(=반응적 생성의 최후의 산물, 반응적 인간이 의욕하기에 지쳐서 자신을 보존하는 최후의 방식) 또한 넘어선다. 그는 멸망하길 원하는 인간이며 몰락하길 원하는 인간이며 극복되길 원하는 인간이다. 그는 긍정이며, 인간을 멸망하고 몰락하기를 원하는 적극적 존재로 만드는 힘으로서 긍정의 정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영원회귀와 초인과 관련해서는 아직 열등한 위치를 갖는다. 영원회귀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 소식을 전달하길 주저하는 선지자다. 초인의 아버지이며, 최후의 변신이 부족한 사자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긍정은 아직 가장 심오한 긍정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결심’하는 반면에 디오니소스의 결심은 다른 본성에 속한다. 차라투스트라와 디오니소스의 계보는 일치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의 춤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웃음은 고통을 기쁨으로, 주사위놀이는 저속함을 고귀함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춤은 생성과 존재의 생성을 긍정하고, 웃음과 폭소는 다수와 다수의 하나를 긍정하며, 놀이는 우연과 우연의 필연을 긍정한다. 존재론으로서의 디오니소스와 윤리론으로서의 차라투스트라. 전환의 지점에 있는 차라투스트라와 긍정을 긍정하는 이중의 긍정 속에 있는 디오니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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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하이데거 How To Read 시리즈
마크 A. 래톨 지음, 권순홍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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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이데거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치 정권에 부역했을까. 이 책은 하이데거 철학 전반을 쉽고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치 정권에 협력하게 된 사정에 대해 잠깐 나오기는 한다.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해서 활동할 당시 하이데거는 기독교 세계가 출현하기 위해 예수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듯이 "새로운 세계를 개현하기 위해 본질적인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또한 "나치즘이 독일을 현대주의에서 구출하고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들을 활짝 열어주는 등 기존하는 세계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리라고 보았다"고. 그러니까 왜?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석연치 않은 설명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강력한 신념 속에서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독일 지식인들의 그 정교했을(?) 내적 논리에 대해 분석해놓은 책을 한 번 찾아 읽어보고 싶다. 인간이, 특히나 명철한 사고력을 자랑하는 인간이 대체 어떻게 그토록 정교한 오류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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