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반응적인 힘들은 작용을 제한하고 분열시키고 지체시키며 방해한다. 반대로 적극적인 힘들은 창조가 분출되도록 만든다. 적극적 유형은 오로지 적극적 힘들만을 포함한 어떤 유형이 아니다. 적극적 유형은 적극적으로 영향 받고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그런 반응적 힘들을 포함하는 관계임. 즉, 적극적인 유형은 힘들이 서로 경합하며 거침없이 분출하는 역동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표현한다. 원한은 이런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원한은, 작용하는 힘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영향 받길 중단함”으로써, “피함”으로써 반응적인 힘이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 방식이다. 원한은 하나의 질병이다. 이 질병은 어떻게 해서 적극적인 힘을 이기는가. 그 메커니즘은 어떻게 되는가.

 

2 프로이트의 <위상학적 가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흥분을 수용하는 체계가 있고 또 한편으로 흥분을 항구적인 흔적(=기억, 추억)으로 변화시키는 체계가 있다. 전자가 의식에, 후자가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는 이를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로 본다. 후자 즉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서,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응적 무의식은 마치 생물이 되새김질을 하듯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고착시키고 흔적에 집중한다. 전자 즉 반응적 의식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영향 받고 학습하고 습득하고 훈련 받는, 말하자면 적극적인 반작용을 수행하는 영역이다. 반응적 의식이 가진 적극적인 능력은 바로 망각 능력이다. 망각의 능력이야말로 제동력이고 완화 장치이며 재생시키고 치료하는 조형적 힘이다. 망각 능력=건강한 생체대사능력.

 

망각능력이 쇠약해지면 즉 완화장치가 손상을 입게 되면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와 비슷해진다. 이때 흔적들에 대한 대응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의식에 침투한다. 흔적들에 대한 반작용은 이제 (의식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됨과 동시에 흥분에 대한 반작용은 영향받길 중단한다. 반작용을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적극적인 힘들은 실행의 물리적 조건을 잃고, 그것들의 활동을 실행할 조건을 더 이상 갖지 못하며,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다. (아팠던 기억, 비난당했던 기억, 위험했던 기억, 맞았던 기억 등등 안 좋은 기억이 나면 순간 움츠러들면서 할 수 있는데도 더 이상 안 하게 됨. 반응하기를 단념하게 됨.) 흔적이 반응적 장치 속에서 흥분을 대신한다.

 

그런데 의식을 치고 올라오는 기억이라는 이러한 반응적 힘들은, 적극적 힘들의 그것보다 더 큰 하나의 힘을 형성하면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적극적인 힘들을 전염시키고 감염시켜서 그것들의 힘을 빼앗고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승리한다. 여기서 우리는 원한의 정의를 재발견한다. 원한은 느껴질 수 있음과 동시에 영향 받길 중단하는 반작용이다. 원한은 질병이며 사실 모든 질병이 원한의 한 형태이다. 더 이상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채 혼자 누워서 속으로 끙끙 앓으며 참고 삭이면서 이만 갈고 있는 상태.

 

3 흔적들의 기억에 의한 의식의 침투, 기억의 의식 자체로의 상승. 의식으로 침투하는 기억의 장소 이동. 반응적 힘들의 이동. 이것이 원한의 일차적 모습이자 원한의 위상학적 측면이다. 원한은 그 다음으로 유형학적 측면을 보인다. 장소를 이동한 다음 어떤 하나의 유형(원한의 인간이 보여주는 가치 전복, 힘들의 관계의 전복)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형의 주된 징후는 놀랄 만한 기억력이다. 어떤 것을 잊는 데 있어서의 그 무능력. 아무것도 잊을 수 없는 그 무능력.

 

건강한 인간에게 흥분이 될 만한 모든 자극들이 원한의 인간에게 다가오는 순간 신속하게 얼어붙는다. 의식의 경직, 경화. 반응 불가능. 오로지 흔적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 질적이고 유형적인 무능력에 대한 책임을 원한의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자극적 대상에게로 전가시킨다. 대상이 주는 흥분에서 흔적들을 제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상받기 위해서 그는 대상을 증오하고 경멸하고 비난한다. 그래서 원한의 인간이 행하는 복수는 그것이 실현될 때조차 그 원리에 있어서 정신적이고 상상적이며 상징적이다.

 

4 원한의 인간은 악의가 아니라 적의를 갖는다. 적의=경멸하는 능력. (니체는 악의를 건강한 것으로 봄. 강자적인 것으로 봄. 거침없이 무구하고 천진하고 잔혹하고 공격적인, 그래서 건강한 악의.) 그는 친구도, 적도, 불행도, 불행의 원인도, 그 어떤 것도 찬미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에 건강한 악의를 갖는 강자는 어떠한가. 그는 상대에 대하여 정면 대결에의 의지를 갖는다. 싸움의 상대로 기꺼이 대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적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원한의 인간은 존중해야 할 모든 대상을 비난하고 비하할 뿐이다.

 

원한의 인간은 정면 대결할 힘도 의지도 없다. 무반응한 채 속으로만 상대를 비난하고 비하한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평화로운 휴식의 상태에 잠긴다. 정신과 신체의 느슨한 마비상태 속에서 그는 오로지 사랑받기만을 원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제공되고 쓰다듬어지고 잠재워지기를 원한다. 그는 앓아누운 병자다. 기획할 능력, 맞서 싸우고 대결할 능력, 적극적으로 반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살핌 받기만을 원한다. 그는 누워서 그저 이득을 취하려고만 한다. 만인에게 민주적으로 골고루 이득이 분배되기를. 그런 점에서 원한의 인간들은 도덕을 가지고 있다. 실리의 도덕. 원한의 인간의 관점에서는 모두에게 고루 이득이 되는 것이 바로 도덕이 된다.

 

5 강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좋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너는 나와는 좀 다르구나) 그러므로 너는 안 좋다. 노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악하다. (난 그렇지 않은데)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 강자는 자신의 좋음을 자각하기 위해 비교의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스스로 행동하고 긍정하고 즐김에 따라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그는 사물들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자신이 가치들을 창조함을 의식한다. 그는 자기 속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의 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찬미, 충만의 감정, 넘치고자 하는 힘의 감정 속에 있다. 그는 헌신하고자 한다. 주고자 한다. 왜? 자기 스스로 힘이 넘치기 때문에. 강자가 ‘너는 안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부차적 결론일 따름이다.

 

강자와 달리 노예는 타인에 대한 부정을 필수적으로 전제해야만 겨우 자기 긍정에 이를 수 있다. 부정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구성하고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의해서만 현존한다. 노예는 외관상 긍정적인 결론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반작용과 부정의 전제들, 원한과 허무주의의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또 그 결론은 단지 긍정성의 ‘외관’만을 갖는다. 노예는 긍정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서 두 부정을 필요로 한다. 너는 나쁘다(첫 번째 부정). 나는 너처럼 나쁘지 않다(두 번째 부정). 고로 나는 착하다. 이것이 노예의 기이한 삼단논법임. 노예의 기이한 가치 창조.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악의가 있는 자는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는 자이다. 자신의 행동이 제3자들에게 초래할 파괴적 결과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자이다. 그렇다면 원한의 인간이 볼 때 선한 자는?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다. 한마디로 원한의 인간은 모든 행동을 행동하지 않는 자의 관점에, 그것의 결과들을 경험하는 관점에, 그뿐 아니라 그것들의 의도들을 탐색하는 신적인 제3자의 관점에 결부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좋음과 나쁨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판단으로 대체된다.

 

6 원한의 오류추리는 힘과 행동이 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허구에 근거한다. 가령, 번개란 곧 치는 것인데 ‘번개가 친다’고 표현한다. 번개가 안 칠 수도 있었는데 친다는 것인가? 의미의 실제 관계를 인과성의 가상의 관계로 대체하는 이러한 허구적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위해서보다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추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까지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약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주체와 분리시키고 중립화시킨 힘을 약자는 더 나아가 도덕화시킨다. 좋음과 나쁨, 우월함과 저열함이라는 힘들의 성질의 차이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대립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7 원한의 일차적 단계 즉 위상학적 단계에서 아직 원한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와 같다. 그렇다면 아직 가공되지 않은 이러한 상태를 질료로 하여 누가 원한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가? 가치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원한의 구체적 형태를 창작해내는 위대한 예술가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사제다. 유태교에 있어서의 주인인 그는 노예에게 반응적 삼단 논법에 대한 생각을 제공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새로운 사랑을 고안해낸다. 불행한 자들, 가난하고 무능한 자들, 보잘 것 없는 자들에게 선량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다.

 

사제는 반응적 힘들의 승리를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조장해나가는데, 실상 그가 지닌 권력의지는 바로 허무주의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가 반응적 힘들을 필요로 한다는 근본 명제를 발견하지만, 부정하는 힘인 허무주의는 반응적 힘들을 승리로 이끈다는 그것의 역 또한 발견한다. (15에서 이 이야기가 또 나옴)

 

8 사제가 창작해낸 허구에 의해 적극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나면 이제 적극적 힘은 반응적으로 전락한다. 출구를 갖지 못한 힘이 내재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책의 기원이다. 한때 강자였던 자들은 반응적 인간들이 퍼붓는 비난을 내재화하면서 더 이상 자신을 향유하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등 돌린 채 고통을 생산한다. 고통과 불행에 빠져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하는 이러한 상태야말로 원한의 인간이 결정적으로 승리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가책은 고통의 동력이며 기폭제다. 이제 이 새로운 노예들은 자발적으로 끔찍한 고행을 단행하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고통은 이제 구원의 수단이 되고, 이들은 고통에서 회복되기 위해(구원받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생산한다.

 

9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새로운 내적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고통은 원죄의 결과인 것이다. 가책의 첫 번째 측면이 앞서 보았듯 적극적 힘의 내재화로 인한 고통의 생산이라면, 두 번째 측면은 바로 고통의 내재화, 원죄의식의 느낌으로서의 가책이다.

 

현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유사 이래 강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늘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고통은 누군가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가령 전쟁은 신들의 시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그들은 고통을 언제나 그것을 가하는 입장에서 사유했다. 고통은 삶의 흥분제이며 삶을 위한 미끼인 것이며 삶의 적극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하고 난 이후로 사람들은 이제 고통을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사유한다. 고통은 괴롭고 끔찍한 것이며, 현존은 고통으로 인해 절하된다.

 

10 사람들에게 고통이 원죄의 결과라고 적극적으로 인식시키는 자가 바로 사제다. 원죄 개념을 고안함으로써 고통의 내재화를 주재하는 사제인 것. 이상으로 우리는 가책이 원한을 계승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원한과 가책 각각 위상학적이고 유형학적인 계기들을 갖고 있으며,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로 이행할 때 사제라는 인물이 개입한다는 점, 그리고 이 사제는 항상 허구를 창작해내어 가치 전복을 이루어낸다는 점까지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가책 속에서 원한의 방향전환, 즉 고통의 내재화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현상과 얽혀있기 때문에 한결 복잡하다. 고통이 원죄의 결과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그런 생각이 단지 사제가 고안해낸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고통의 기원을 역사적 계보학적으로 추적해보면 우리는 문화라는 것과 만나게 된다. 이제 문화에 대해 살펴보자.

 

11 문화는 고문을 비롯한 잔혹한 훈련을 통해 폭력 속에서 탄생한다. 문화가 융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법에 복종한다. 복종에서 우리는 반응적인 힘을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가 반드시 반응적인 힘만을 양산하는 것은 아니다. 법이라는 것은 또한 어떤 적극적인 힘이 인간에게서 발휘될 수 있도록, 그런 쪽으로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을 처벌하고 복종시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훈육하여 주권자적 인간으로, 자율적인 개인으로 양성해내는 법의 양면성.

 

니체가 주목하는 것은 선사적 활동,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다. 문화는 인간에게 습관을 제공하고, 인간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킨다. 또한 문화는 인간에게 기억을 부여한다. 여기서의 기억이란 인간을 소화불량으로 만드는 흔적의 기억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들의 기억을 말한다. 문화는 인간에게 약속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것을 실행해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약속함으로서 미래를 이용할 수 있는 인간, 자유롭고 강력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인간만이 적극적이다. 약속하는 능력이야말로 문화의 효과다.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종적 활동으로서의 문화의 산물이다.

 

문화는 어떻게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인간으로 육성해 내는가. 인간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렇게 만들어낸다. ‘고통’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의 정확한 등가물이다. 약속을 까먹음으로써 야기된 손실=감내한 고통. 인간관계의 기원은 교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원시적인 최초의 인간관계는 바로 채권-채무의 관계였다. 니체는 교환 속에서가 아니라 신용 속에서 사회조직의 원형을 본다.

 

12 채무자는 약속을 망각해서 생겨난 부채를 체벌의 고통을 감당함으로써 벗어난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고 거기서 쾌감을 느낌으로써 피해를 보상받는다. 이걸 제대로 집행하는 것이 바로 문화가 구현하는 ‘정의’이다. 잘못했으면 맞는다, 가해자가 맞는 걸 즐겁게 지켜보면서 피해자는 보상받는다, 이로써 채무관계는 깨끗하게 해소되고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 그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해방된다. 채무관계가 해소되는 이러한 과정 어디에도 복수나 원한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정의는 결코 복수나 원한을 그 기원으로 삼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구타와 체벌이라는 문화적 훈련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 주권자인 개인, 자율적이고 초-도덕적인 개인, 더 이상 부채를 만들지 않는 인간, 책임이 없는 자, 자유로운 자, 가벼운 자, 주인이 된다.

 

13 그러나 인류 역사는 열등하고 반응적인 힘들이 승리해온 역사였고 결국 문화는 퇴행하고 말았다. 인간은 주권자 개인이 아니라 군서동물, 순종적이고 병적이며 하찮은 존재, 오늘날의 유럽인이 되었다. 문화는 반응적 삶을 보존하고 조직하고 파급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교회, 국가를 비롯한 규율권력이 인간을 반응적으로 만들었다.

 

14 반응적인 인간들은 국가, 신, 조상 등 모든 위대하고 신성한 것들에 대해 영원히 갚을 길 없는 깊은 채무감을 느낀다. 양심의 가책,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 채무자의 자기학대가 너무나 극심해져서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도달한 것. 이렇게 부채는 그것이 인간의 해방에 참여했던 적극적인 특성들을 상실하고 변형된다.

 

이를테면 기독교가 대속이라 부르는 것을 보라. 더 이상 부채에서의 해방이 문제가 아니라, 부채의 심화가 문제다. 부채를 갚느라 치르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자신을 채무자로 느끼는 고통이 문제다. 고통이 내재화되고 채무-책임성이 죄의식-책임성이 되면서 이제 고통은 부채의 이자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갚지 못한다. 적당히 고통 받고 해방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해방되지가 않음. 해방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종속으로서의 고통. 영원한 죄인이 됨.

 

내재화된 고통이 너무나 극심한 나머지 못 견디고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사제는 고통을 견디기 위한 방어수단 또한 고안해낸다. 신에 대한 봉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려함으로써 반응적 인간들로 하여금 소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15 종교는 본질적으로 원한이나 가책과는 관계가 없다. 니체는 끊임없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종교, 강자들의 종교가 있음을 말한다. 문제는 어떤 힘들이 종교를 독점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힘들이, 누가 종교를 탈취하는가. 가령 예수라는 개인적 유형을 보자면 그는 원한의 인간도 가책의 인간도 아니었다. 기독교의 진정한 고안자는 예수가 아니라 성 바울이었다.

 

성 바울 같은 사제들이 금욕적 이상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낸다. 금욕적 이상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로써 고통을 근근이 견딜 만 한 것으로 만든다. 반응적 인간은 이제 천국이라는 금욕적 이상 세계를 꿈꾸며 삶과 삶 속의 모든 적극적인 것을 비하하고 세계에 무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반응적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원한+가책+금욕적 이상이라는 삼단 복합체의 수립으로 마침내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완성되는데, 바로 이것이 사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이다. 이렇게 반응적 힘들의 승리에는 무의 의지가 하나의 동력으로서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16 이와 같이 니체는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함으로써 낡은 형이상학과 초월적 비판을 대체하는 권력의지의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순수과학을 포함하는 근대 이후 모든 인간과학에서 과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행동과 적극적인 모든 것에 대해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행동을 실리에 의해서 판단한다. 저러한 행동은 (사회 전체를 위해) 유용한가 유해한가. 행동의 동기는 무엇이고 결과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렇게 제3자적 입장에서 (마치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는 듯이) 실리를 따지는 태도 자체가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것. 그는 자신이 시도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가 시도하지 않는 행동을 주시한다. 행동하지 않는 그는 그 행동에 대한 자연권을 소유하고 있고, 그는 그것의 이득이나 이익을 이용하거나 거둬들일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힘과 힘의 의지를 파악하려면 언제나 그 힘이 발휘되고 있는 당사자, 즉 행위자, 화자, 독점한 자, 명명한 자 등등의 입장에서 살펴야지 제3자의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제3자의 관점으로 보니까 왜곡이 생기는 것임.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기존의 과학을 비판하며 니체가 주창하는 적극적인 과학(=미래의 철학)의 3과지 분과는 징후학, 유형학, 계보학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징후들을 해석하는 의사이자 새로운 유형을 창조하는 예술가이자 새로운 계보를 정립하는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2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형이상학자들은 가령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식한 질문이다. 그렇게 묻는 대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누가’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물이 고려되었을 때, ‘그것을 탈취하는 힘들이 무엇이고, 그것을 소유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 ‘누가 그 속에서 표현되고, 표명되고, 자신을 숨기기조차 하는지’를 묻는 것. 우리는 ‘누가?’라는 의문에 의해서만 비로소 본질로 인도된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가'에 초점을 맞추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물을 때,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그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지를 묻는 것이다. 무엇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들은 무엇이고, 그 힘들에 복종하는 힘들은 무엇인가. 혹은 그와 반대로 누가 그것에 저항하는가. 현상 파악에 있어서 이것은 관점주의적이고 복수주의적인 기술이다. 한 사물의 본질은 그것을 소유하고 그 속에서 표현되는 힘 속에서 발견되고, 그 힘과 유사한 힘들 속에서 발전되며, 그것에 대립하고 우월할 수 있는 힘들에 의해서 위태롭게 되거나 파괴된다.

 

3 우리가 질문의 방식을 전환하여 현상의 이면에서 현상을 만들어내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때, 여기서 의지들이 원하는 것은 특정 대상이나 목표, 목적이 아니다. 대상, 목표, 목적, 동기 이런 것들 역시 모두 징후적인 어떤 것들일 뿐. 그렇다면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거나 혹은 반대로 자신과 차이 나는 것을 부인하는, 바로 그 의지 자체의 성질이다. 의지가 원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질, 상응하는 힘들의 성질이다. 자기가 지닌 힘의 성질의 심화, 자기로부터 비롯하는 힘의 성질의 지속과 강화, 힘의 어떤 성질, 유형, 경향성의 심화. 이것이 바로 의지가 원하는 것.

 

반응성과 수동성은 인간과학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러한 성질 자체가 곧 인간이 보여주는 힘의 유형이다.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인간을 구성한다. 인간 자체가 반응적임. 계보학, 유형학, 징후학의 방법으로 우리가 힘의 성질에 주목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존의 힘의 유형 외에 또 다른 새로운 힘의 유형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힘들의 유형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며 초인간적인 것이다. 대지를 긍정할 수 있는 의지이며, 그 자체로 대지의 성질인 그것은 바로 ‘가벼움’이다.

 

4 니체 이전에 권력의지나 유사한 것에 대해서 언급한 철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니체 이전의 의지철학은 몇 가지 오해를 함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권력을 그저 하나의 표상의 대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홉스, 헤겔, 아들러의 철학에서 보여지는 권력은 항상 실질적으로 의식들의 비교를 가정하는 표상의 대상, 재인식의 대상이다. 투쟁해서 빼앗고 탈취하고 과시하고 인정받고 비교하는 대상으로서의 권력. 우월감이나 열등감, 허영심을 자아내는 권력.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을 전제해야 하는 이런 종류의 권력은 노예가 자기 자신에게 만들어주는 권력의 표상일 따름이다. 노예만이 이러한 권력 개념을 상상할 수 있다. 왜냐면 노예만이 항상 타인(주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권력을 표상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면, 권력의지라는 건 기존의 사회 내에서 현행하는 가치들, 이미 인정된 가치들(돈, 명예, 권력, 명성)에 자신을 결부시키는 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거야말로 순응주의다.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권력의지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표상의 대상으로서의 권력 개념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서로 탈취하기 위한 투쟁을 상정한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 전쟁, 경쟁 이런 것들은 니체의 의지철학에서는 낯선 개념일 뿐이다. 이런 식의 투쟁과 전쟁과 경쟁은 결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이때의 투쟁은 그저 약자들이 강자들을 이기는 수단에 불과하며, 그것이 창조하는 유일한 가치들은 승리하는 노예들의 가치들일 뿐이다. 니체는 투쟁을 배제한 권력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5 권력의지를 표상의 대상으로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필히 전쟁과 투쟁을 상정하게 되고 그 결과 권력의지를 탐구하면 할수록 비통해진다. 의지라는 것은 점점 더 참기 어렵고 견디기 힘든 무엇이 된다. 또한 권력의지 자체가 굉장히 가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허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결국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에게 의지는 부인하고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이 되고 만다. 허무주의, 염세 철학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6 권력의지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원하는 것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기원적이고 미분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허무주의적 해석술을 고안해내는 약자들의 권력의지조차도 얼마나 창조적 작업인가) 그것은 결코 표상되지 않고, 결코 해석되거나 평가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해석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이며,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위 기원적 요소에서 파생된 것을 원한다. 기원적 요소(권력)는 힘과 힘의 관계를 결정하고 관계 속에서 힘들에게 성질을 부여한다. 조형적 요소인 그것은 그가 결정함과 동시에 자신을 결정하고 그가 성질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의 성질을 부여한다.

 

권력의지가 원하는 것은 그 같은 힘의 관계이고, 그 같은 힘들의 성질이다. 그리고 또 그 같은 권력의 성질이다. 즉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매 경우에 있어 변화하는 그 복합체는 주어진 현상들이 상응하는 하나의 유형이다. 모든 현상은 힘들의 관계들, 힘들과 권력의 성질들, 그 성질들의 뉘앙스들, 요컨대 힘들과 의욕의 어떤 유형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움직이고 변화하며 조형적인) 어떤 것이며, 권력은 뭔가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주는 것,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조형적이고 그것이 자신을 결정하는 매 경우에서 분리될 수 없다. 영원회귀가 존재이지만 생성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인 것처럼, 권력의지도 하나이지만, 다수에서 긍정되는 하나이다. 그것의 통일은 다수의 통일이고, 다수에 의해서만 언급된다. 권력의지의 일원론은 복수적 유형론과 분리될 수 없다.

 

고귀하고 우아한 힘의 유형이 있고, 저속하고 비루한 힘의 유형이 있다. 사람들은 왜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로운지 물을 것이다. 긍정은 왜 부정보다 가치로운가. 해답은 영원회귀의 시련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즉 되돌아오는 것, 되돌아옴을 견디는 것, 되돌아오길 원하는 것이 보다 더 가치롭고, 절대적으로 가치롭다. 영원회귀의 시련은 부정적이고 반응적인 힘들이 살아남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2장 말미에서 했던 얘기. 영원회귀의 지속적인 운동 속에서 어떤 원심력이 작용하여 부정적인 것들은 죄다 떨어져 나가고 필연적으로 긍정적인 것만 잔존함. 이것이 긍정의 긍정, 이중의 긍정이라는 영원회귀의 원리) 

 

7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첫 번째로 원한, 두 번째로는 가책, 마지막으로 금욕적 이상을 다룬다.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모두 반응적 힘들의 승리의 모습이고, 또 허무주의적 형태들이다. 니체는 원한을 가상적 복수, 본질적으로는 정신적인 제재로서 제시한다. 또한 원한의 구성은 오류 추리를 함축한다. 즉, 못한 것을 가지고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혹은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해버린 것'이라고 여기는 것. 원한이 있기 때문에 그 짝패로서 가책이 생긴다. 그리고 이 삼단논법은 금욕적 이상으로 완결된다. 금욕적 이상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신비화를 이루는 관념이다. 영혼의 오류추리 속에서 원한이 생겨나고, 원한 속에서 세계는 전도되어 도덕과 삶이 대립을 이루게 되고, 그러한 이율배반의 사태 속에서 가책이 생겨나고, 이 모든 부정적 허구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서 금욕적 이상이 도출된다.

 

8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종래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비판을 가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공손한 비판이었다.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것들을 믿으면서 그것들을 비판한다. 인식과 도덕과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참된 인식과 참된 도덕과 참된 종교라는 성역을 남겨둔다. 칸트의 비판은 그런 가치들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반면에 니체가 덕을 고발할 때, 그가 고발하는 것은 허위의 덕도 아니고, 덕을 가면으로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바로 본래적인 덕 그 자체에 대해 고발한다. 참된 덕의 빈약함, 참된 도덕의 믿기 어려운 편협함, 참된 가치들의 저속함에 대한 비판. 우리가 상정하는 모든 참된 가치들이란 관점주의에 따른 것일 뿐이다. 사실이나 도덕적 현상은 없고, 현상들의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 인식 자체는 하나의 환상이며, 인식은 오류이고, 설상가상으로 왜곡이다. 저 진리의 참된 세계에 비할 때 이 삶은 가상과 오류투성이의 세계가 되겠지만, 사실 저 진리의 세계야말로 이 ‘가상세계’에 덧붙여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

 

9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비판이 이성 자체에 의한 이성 비판이어야만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다. 이성을 재판관이자 동시에 피고로 만드는 것이므로. 그가 말한 인간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초험철학은 우리가 인식한 것들의 내적 기원의 원리가 아니라 단순히 인식 조건의 원리일 뿐이다. 이성이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따라야 할 여러 범주들과 절차들에 불과한 것이다. 이성 자체의 기원은 따로 있다. 이성 속에 숨겨진 것, 이성 뒤에 버티고 선 것은 이성이 아니라 어떤 의지다. 권력의지라는 니체의 원리는 칸트적인 초험적 원리가 아니다. 기원적이고 계보학적인 원리, 입법적 원리로서 권력의지만이 진정한 내재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오성)의 올바른 사용법을 깨달으면 참된 가치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단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복종에 불과하다. 이성을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마음의 필요, 도덕, 의무를 끌어들이며 역시 복종을 강요한다. 그의 비판철학은 부활한 신학, 프로테스탄트적 취향을 가진 신학 이외의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칸트의 철학은 현행 가치들을 내재화하도록 만들 따름이다. 칸트에게서 능력들의 올바른 사용이란 이상하게도 그 기존의 가치들, 즉 참된 인식, 참된 도덕, 참된 종교 등에 맞물린다.

 

10 칸트와 대비되는 니체의 비판철학은 다섯 가지 점에서 근거한다. ①니체의 비판철학은 사실들을 위한 단순한 조건인 초험적 원리들이 아니라 믿음∙해석∙평가들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기원적이고 조형적인 원리들이다. ②니체의 비판철학은 이성에 복종하는 사유가 아니라 이성에 반대해서 사유하는 사유이다. ③칸트가 기존의 가치들의 재분배를 감시하는 재판정의 법관, 평화의 법관이라면, 니체는 전쟁을 예고하는 계보학자이다. ④니체의 비판철학은 정신이나 이성, 자의식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취하는 비판적 심급은 권력의지다. 니체의 비판적 관점은 권력의지의 그것이다. ⑤니체의 비판의 최종목적은 초인, 극복되고 추월된 인간에 있다. 비판에서는 (기존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것, 즉 다른 감성이 문제이다.

 

11 진리를 추구하는 의지의 기원을 추적해보자. 진리의 개념은 어떤 세계를 참된 것으로 규정한다. 참된 세계를 지시하는 참된 인간, 그는 속임 당하길 원치 않는다. 속임 당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곧 길을 잃게 하고 속이고 감추고 현혹시키고 눈멀게 하는 어떤 것임을 전제한다. 그렇다, 이것은 삶이 가진 고귀한 거짓의 힘이다. 그런데 진리를 원하는 자는 이 고귀한 거짓의 힘을 비하하길 원한다. 그는 삶을 하나의 오류로, 세계를 하나의 외관으로 만들어서 삶에 인식을 대립시킨다. 현 세계를 피안의 세계와 대립시킨다. 그는 이제 도덕가가 되어서 현세와 내세를 선악으로 나누고 이 세상의 삶을 비난하고 심판하며 이 세계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소위 참된 세계, 그것은 삶에 반대하는 삶이다. 그는 삶이 그 자신을 수정하고 외관을 수정하길, 고결하게 되길, 그것이 참된 세계로 이행의 구실을 하길 바란다. 삶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로부터 등 돌리길 원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을 파헤쳤을 때 드러나는 것은 이 같은 도덕적 금욕주의자의 모습이다. 금욕적 이상의 인간에게서 니체는 허무주의, 즉 무의 의지를 발견한다. 무의 의지에서 비롯한 반응적 힘들이 인식, 과학, 종교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끊임없이 금욕적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

 

12 도처에 금욕적 이상이 있지만, 그것은 시류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고 끊임없이 새롭게 출현한다. 처음엔 종교의 옷을 입었다가, 종교에서 도덕의 옷으로 갈아입고, 또 그 다음엔 도덕에서 과학으로. 끊임없이 출현하는 금욕적 이상을 발본색원하려면, 비판은 진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판결’은 금욕적 이상이 진리의지 너머에는 더 이상 은신처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를 대신해서 대답할 그 누구도 데리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때 금욕적 이상은 자기 지위를 상실하며 가면을 잃고 더 이상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인물도 이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니체는 <다르게 느끼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이상을, 다른 인식 방식을, 다른 진리 개념을, 다시 말하자면 진리의지 속에 전제되어 있지 않지만 완전히 다른 의지를 가정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추구해야만 한다.

 

13 삶을 인식에 봉사하게 할 때 삶은 반응적인 것으로 바뀐다. 사유를 삶에 봉사하게 할 때도 삶과 사유의 모형이 되는 것은 반응적인 삶이다. 니체의 새로운 사유는 “삶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갈 사유, 삶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데리고 갈 사유, 삶에 대립하는 인식 대신 삶을 긍정할 사유”이다. 여기서 삶은 사유의 적극적 힘이고, 사유는 삶을 긍정하는 능력이다. 삶을 긍정하는 사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불확실성 속으로 끊임없이 투신하도록, 낯선 체험을 하도록, 정착할 새로운 장소를 끊임없이 찾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사유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는 것,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하는 자들의 삶은 위대한 항해자들의 탐험과 같다. 험난하지만 비범한 삶들. 그런 삶 속에서만 창의력, 사색, 과감성, 절망, 이상이 존재한다.

 

14 진리를 추구하는 금욕적 이상주의자의 의지와 그 성질이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의지다. 예술은 ‘사심 없는 활동’과는 반대이다. 예술은 사심을 없애지도 않고, 욕망과 충동과 의지를 중지시키지도 않는다. 그와 반대로 예술은 권력의지의 자극제, 의욕의 흥분제이다. 예술은 오로지 적극적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적극적 삶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냄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사유를 펼치는 자들이다. 삶의 활동은 원래 속이고 현혹시키고 유혹하는 거짓의 힘으로 점철되어있다.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오류인 한에서의 세계를 확대하고, 거짓말을 신성화하고, 속이려는 의지를 우월한 이상으로 만든다. 예술은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다. 대신 예술은 거짓을 더 고귀한 긍정의 힘으로 고양시키는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은 죄다 헛된 거짓이고, 살 가치가 없고, 천국에 갈 일만이 관건이다’라는 반응적인 생각과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거짓된 세상을 더욱 아름다운 거짓으로 만들자’는 적극적인 생각의 차이. 사고관의 차이.

 

15 우리에게 익숙한 독단적인 사유의 이미지가 있다. 사유는 그 안에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본유관념) 정념에서 비롯한 오류를 피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사유하기만 하면 추상적 보편자로서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생각. 이에 반하여 니체는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사유의 요소는 진리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이다. 사유의 범주들은 참과 거짓이 아니라, 사유 자체를 독점하고 있는 힘들의 본성에 의한 우아함과 비루함, 고귀함과 저속함이다.

 

또한 니체에게 있어서 사유의 부정적 상태는 오류가 아니라, 어리석음이고 저속함이다. 반응적 힘들에 의해서 지배된 정신상태. 노예의 승리를 표현하는 어리석고 저속한 사유들. 바로 이러한 사유의 부정적 상태를 고발함으로써 사유를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임무다. 시대를 역행하는 사유, 반시대적 고찰이야말로 철학의 소명인 것.

 

그런데 모든 사유는 항상 사유를 독점하는 어떤 힘에 의존한다. 어떻게 사유하도록 훈련시키고 교육하고 강제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문화의 최종 목표는 삶을 긍정하며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안해내는 예술가와 철학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파이데이아를 세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교회와 국가가 문화의 이러한 사유 훈련을 전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반시대적 고찰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공격하고 체제비판적인 사유의 힘을 길러야 할 문화가 어용문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스적인 것에서 독일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문화. 문화의 퇴락.

 

이처럼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유는 사유를 독점하는 힘들에 의존하는 바, 사유는 언제나 그 기저에 복잡한 힘들의 관계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여러 힘들의 유형, 힘들의 다양한 위상이 실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장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세계-내-존재 일반
12절 안에-있음 그 자체에 방향을 잡아 세계-내-존재를 대강 그려봄

현존재는 선험적으로 우리가 ‘세계-내-존재’라고 이름하고 있는 존재구성틀에 근거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세계-내-존재란 무엇인가. 먼저 내-존재,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머무르다, 거주하다, 체류하다, 습관이 되었다, 친숙하다, 보호하다, 사랑하다, 돌봐주다, 몰입해 있다 등등의 의미. 즉 현존재가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친숙한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에 몰입해 있는 채로 거주한다’는 것. 세계-내-존재는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이다. 현존재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이 문제되고 있는 것. 세계는 존재자가 아니라, 오직 현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가 세계로서 개시되는 것은 현존재가 ‘세계를 개시하는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현존재의 이해 안에서만 비로소 세계로서 드러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세계라는 개념 역시 내-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는 실존주임.

 

‘<세계>-곁에 있음’은 세계-내-존재에 기초한 하나의 실존주이다. <세계>-곁에 있음이란 현존재가 세계 내의 존재자들에 몰입하면서 그것들과 관계한다는 것, 건드린다는 것, 만난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자가 세계 내부에 있는 존재자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존재자가 본성상 ‘안에-있음’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을 때뿐이다. 즉 그의 거기-있음과 더불어 이미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그에게 함께 발견되어 있고(세계-내-존재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 통일된 현상이므로), 그 세계로부터 존재자가 접촉 속에 드러날 수 있을 때에만, 그 존재자가 그것의 눈앞에 있음에서 접근 가능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세계 내부에 존재하나 무세계적인 그런 두 존재자는 결코 서로를 건드릴 수 없으며 어떤 것도 다른 것 곁에 있을 수 없다.

 

‘안에-있음’은 ‘배려함(=고려함)’의 존재양식을 가진다. 세계-내-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 배려함 또는 고려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하다, 처리하다, 공급하다, 마음 쓰다 등의 의미. 배려함이란 곧 현존재가 현존재 이외의 존재자들과 실천적으로 관계하는 방식들 일반을 가리키는 존재론적 용어 즉 이또한 실존주.

 

13절 어떤 한 기초지어진 양태에서의 안에-있음의 범례화: 세계인식
인식함 자체는 선행적으로 ‘이미-세계-곁에-있음’ 안에 근거해 있고, 현존재의 존재는 그 사실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세계-곁에-있음’으로서의 현존재가 가지는 인식이란 눈앞의 것을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런 게 아니다. 세계-내-존재는 배려함으로서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 의해서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인식작용은 선행적으로 세계와 배려하는 긴밀한 연관 속에서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존재자 자체를 이러저러한 것으로서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현존재는 그러한 인식작용에 의해서 그때마다 이미 개시되어있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존재관계를 역동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인식작용은 결코 폐쇄된 자신의 내부에서 고립적이고 정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식은 그 자체로 세계-내-존재가 취하는 하나의 실존론적 양상일 뿐이다. 인식 자체가 현존재의 한 양태인 것. 따라서 인식작용에 앞서 그러한 인식작용의 근거가 되는 세계-내-존재에 대한 선행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 대체 이 책에서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존재'라는 게 뭔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그것.
-어떤 하나의 존재자에 대해 '그것이 있다' 혹은 '그것은 ~이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나와 존재자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선(先)술어적 조건.
-존재는 존재자가 비로소 존재자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해의 기반'이다.
-존재는 선술어적 조건이자 이해의 기반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존재 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그 내용을 달리 한다.
(인식의 가능 조건?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란 푸코의 에피스테메 같은 것인가? 후설의 이념적 본질 같은 것인가?)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됨. 하나님 이런 게 아니야. 하나님 같은 것도 존재자에 불과.

 

3장 세계의 세계성
14절 세계 일반의 세계성이라는 이념

모든 현존재는 각기 우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란 결국 주관적인 종류가 되는데, 그 안에 우리가 존재하는 하나의 공동의 세계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가? 이런 의문 속에서 이 세계도 저 세계도 아닌 세계 자체의 ‘세계성’이 문제가 된다. 세계성은 일종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세계-내-존재의 한 구성적 계기의 구조를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세계에 대해서 물을 때, 우리는 결코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적 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현존재 자체의 한 성격이다.

 

세계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다양한 의미 중에서 이 책에서는 세계를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곳’으로 이해한다. 이때의 세계는 공적인 우리-세계이기도 하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고유한 가정적 주위 세계이기도 하다. 둘의 경우 모두 세계는 실존적 의미를 가진다.

 

데카르트 이후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다르게, 세계는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서의 평균적인 일상성의 지평에서 분석론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를 뒤밟아야 하며, 그것을 현상적인 발판으로 삼아 세계와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일상적인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세계는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죽는 친숙한 생활세계이다. 이 생활세계, 주위세계의 세계성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가. 주위세계성 및 세계성 자체의 분석

15절 주위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

가장 가까이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제시는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를 실마리로 삼아 달성될 것이다.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는 ‘세계 안에서의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의 왕래(교섭)’를 부단히 수행하고 있다. 왕래(교섭)는 배려함의 방식이다. 만지고 다루고 사용하는 적극적인 실천. 이때의 존재자는 어떤 이론적인 세계-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칸트의 사물(Ding) 같은 게 아님. 사물이 아니라 도구라고 칭해야 한다. 도구의 존재양식을 살펴야 한다. 존재자들은 일차적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고려에 의해서 드러난다.

 

도구란 본질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유용성, 기여성, 사용성, 편의성 등과 같은 여러 방식들이 하나의 도구전체성을 구성한다. 가령 망치를 가지고 얘기해보자. 망치를 들고 망치질을 할 때 우리는 대개 이 망치라는 존재자를 주제적으로 눈앞에 놓여있는 사물로서 파악하지는 않는다. 존재자의 외양을 아무리 날카롭게 바라본다고 해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손안의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손안에 있음의 이해’를 결여한다. 우리가 존재자를 눈앞의 대상으로 놓고 날카롭게 관찰할수록 도구는 오히려 자신의 진정한 성격을 은폐할 뿐이다.

 

우리는 망치라는 물건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는 게 아니라, 손에 잡고 활기차게 사용한다. 그렇게 망치를 능란하게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와 망치의 관계는 보다 더 근원적이 될 것이고, 망치는 보다 더 가려지지 않은 채로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다. 망치는 망치 그 자체로서, 도구 그 자체로서 우리와 비로소 만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물들이 고유하고 자명하게 ‘그 자체로 있음’을 그 사물들을 사용하면서 ‘명확하게 주목하지 않는 배려함’ 속에서 만나게 된다. 내가 지금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능숙하게, 제 손발과 같이 능숙하게 도구를 다루면서 비로소 그 도구의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 그런데 우리가 망치를 능숙하게 사용하면 할수록 정작 우리는 망치라는 존재자에 대해서 잊는다. 오히려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은 망치로 박는 못이다. 도구가 사용되는 존재자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구들이 도구로서 제대로 기능할 경우 우리의 주목을 끌지 않고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는 도구의 존재성격을 ‘그 자체에 즉해 있음’이라고 한다.

 

하나의 도구는 그 도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내포한다(지시한다). 우리는 하나의 도구를 보면서 도구가 가지는 목적(무엇에 사용될  도구인가), 도구의 유래와 재료,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 혹은 도구를 착용하는 사람 기타 등등 여러 가지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물품과 함께 손안에 있는 존재자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도구의 착용자 또는 이용자 아울러 그들과 더불어 있는 공공의 세계, 주위세계 자연까지도 만나게 된다.

 

16절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게서 알려지는 주위세계의 세계적합성(세계연관성)
존재자를 배려하는 세계-내-존재에게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문득 스스로를 내보이는 현상, 다시 말해 현존재가 손안에 든 도구에 배려/고려/몰입되는 가운데 현존재에게 배려된 세계내부적 존재자와 함께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의 세계성이 빛나게 되는 그런 사태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령 손안의 도구가 파손되었을 경우 혹은 도구가 아예 부재한 경우 혹은 도구의 사용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를 떠올려보자. 여러 가지 이유로 도구가 사용불가능해질 때 비로소 도구는 우리 눈에 띄게 된다. 변양된 도구와의 만남. 바로 이때 앞서 말한 바의 사태가 드러난다.

 

도구가 작동불가능하게 되어 눈에 띄거나, 도구가 아예 없어져서 절실해지고, 도구가 사용이 원활하지가 않아서 억지로 버티면서 사용해야 할 때, 어떤 의미에서 도구는 손안에 있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자기 자신(‘그 자체로 있음’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결별하는 것이다. 손안에 있음이 다시 한 번 자신을 내보이기는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또한 손안의 것의 세계적합성도 드러난다.   

 

즉, 도구가 제 기능을 못할 때, 그 도구의 구성적 지시가 방해를 받는데, [여기서 도구의 구성적 지시란, 도구의 존재를 구성하는, 도구와 연관된 모든 내용들: 도구의 목적, 도구의 유래, 도구의 이용자, 도구의 이용으로 인해 수혜를 입는 자, 도구가 세상에 쓰이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도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온갖 세계 양상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도구가 지시하는 것들임] 지시의 방해 속에서 역설적으로 지시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결여와 부재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감.

 

도구에 문제가 생길 때에야 비로소 그 도구가 지시하는 것, 그 도구와 연관된 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야 비로소 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 도구를 손안에 가지고 있었던 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다시금 주위세계가 스스로를 알려온다. 세계가 열어 밝혀진다. 세계가 훤히 열어 보인다. ‘손안의 것의 탈세계화’와 동시에 ‘세계의 빛남’이 이루어진다.

 

반면, 주위 세계의 일상적 배려 속에서 손안에 있는 도구를 그것의 ‘존재 자체’로 만나려면 도구를 도구의 존재마저 잊을 정도로 능란하고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경우여야 한다. 도구의 작동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나도 그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런 때는 세계가 전혀 자신을 알려오지 않는다. 오로지 그러한 때라야만 그 도구 안에 도구의 자체 존재의 현상적 구조가 구성되어 있다.

 

눈에 안 띔, 강요하지 않음, 버티지 않음- 다시 말해 도구가 원활하게 잘 작동하는 성질, 유용성, 편리성, 편의성. 도구의 이런 성질들은 곧 ‘손안에 있는 것의 존재의 긍정적인 현상적 성격’을 의미한다. 손안의 것이 자체 안에 머물러 있는 성격. ‘그 자체로 있음’, ‘자체 존재’로서의 성격. 요약하면,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자체 존재는 오직 세계현상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론적으로 파악가능하다. [가령,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반원을 떠올려보자. 반원의 부단한 회전 속에서 비로소 홀로그램처럼 현상하는 ‘구’는, 회전하는 반원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론적으로 파악가능하다.]

 

17절 지시와 기호
앞서 살펴보았듯이 세계는 도구를 사용하는 고려에서 도구의 도구적 성격과 함께 개시된다. 다시 말해 도구의 지시연관 속에서 세계성이 구성된다. 도구의 지시연관성, 지시전체성이 세계성을 구성하는 바, 지시들이 발견될 수 있는 도구의 하나로서 기호를 분석해봄으로써 도구의 성격(지시적 성격)을 보다 명확히 규명해보자. (이후로 무슨 말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음)

 

18절 사용사태(용도)와 유의미성(유의의성), 세계의 세계성
도구는 지시적 성격을 갖는다. 즉 도구는 어떤 것으로 지시되고 있으며(가령 망치란 못 박는 것이고 옷걸이란 옷을 거는 것이다) 이것(=용도)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의 특정한 도구로서 발견된다. 그런데 어떤 도구가 사용되는 용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를 지시한다. 가령, 어떤 도구가 A를 하기 위한 도구인데, 그 A는 B를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이러한 연쇄가 계속되면 결국 필연적으로 어떤 용도도 더 이상 갖지 않는 궁극의 용도로 귀착된다. 이렇게 더 이상 다른 용도들을 위한 용도가 될 수 없는 것이 궁극목적이다. 궁극목적은 세계 내부에서 도구의 존재양식을 갖는 존재자가 아니라 그 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그 존재구조에는 세계성이 속하는 존재자인 현존재의 존재에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현존재만이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가 어떤 도구를 특정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해서 현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이미 어떤 용도를 갖는 도구로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것의 도구적 성격에서 발견하면서 그것을 이러한 도구적 성격을 갖는 존재자로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쓰일 용도에 따라서 존재하게 함’은 모든 도구를 도구로서 개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곧 현존재가 존재자들 사이의 용도 연관의 전체, 즉 용도 전체성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도전체성=지시연관의 전체성. 현존재의 궁극목적에서 시작되는 목적연관의 전체성이야말로 세계의 본질 즉 세계성이다.

 

앞서 말했듯 현존재는 다른 용도를 위한 용도가 될 수 없고 그 자체가 궁극목적이다. 가령, 현존재가 A하기 위함이 궁극목적이라면, A를 위해 B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고, B를 만들기 위해 C가 필요하고 C를 얻기 위해 D가 요청된다고 하자. 이렇게 궁극목적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직접 다루고 있는 도구에까지 이르는 목적연관의 전체를 유의미성이라 한다. 목적연관의 전체성=세계성=유의미성. [하나의 도구를 단어라고 치면, 유의미성이란 문법이나 글 전체의 맥락을 의미하는 것인가?]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항상 친숙하게 이해하면서 살고 있는 곳인 세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유의미성이다. 유의미성을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 이러한 이해 안에서만 존재자가 용도라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현존재가 항상 이미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러한 유의미성 자체는, 현존재가 의미와 같은 것을 개시할 수 있기 위한 존재론적 조건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가 낱말과 언어를 기초 짓는다.

 

나. 데카르트의 세계해석과 대조하여 세계성을 분석함

19절 연장적 사물로서의 "세계"에 대한 규정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자아와 물체적인 사물을 구별한다. 이 구별이 나중에 정신과 자연의 구별이 되고, 자연은 공간이며 세계가 된다. 데카르트는 물체적인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의 존재론적인 근본규정을 연장에서 본다. 즉, 데카르트는 길이, 폭, 깊이와 같은 연장이 물질적 실체의 본래적 존재를 형성한다고 보면서 이것을 세계라고 부르고 있음. 분할가능성, 형태, 운동, 촉감, 색깔의 변화와 같은 물성 변화는 연장의 양상(양태)일 뿐 연장의 본질은 아니다. 연장은 어떠한 양태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견지하며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체사물에서 그러한 지속적인 머무름을 만족시키고 있는 바로 그것이 그 물체사물에서의 본래적인 존재자이며, 이것이 곧 물질적인 실체의 실체성을 형성한다.

 

20절 “세계”의 존재론적 규정의 기초들

물체적 사물(존재자)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데카르트의 두드러진 특징은 데카르트가 존재의 의미를 눈앞의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실체성을 눈앞의 자명한 존재로 보는 존재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 데카르트 뿐만 아니라 고대 존재론과 중세 존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존재를 눈앞의 자명한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는 이제껏 제대로 구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존재를 눈앞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실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회피할 뿐 아니라, 실체 자체, 즉 실체의 실체성은 그 자체로는 드러날 수 없음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실체는 그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 자체는 우리의 감각을 촉발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는 인식되지 않는다. 결국 존재를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은 단념되고 데카르는 일종의 도피로를 찾게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론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존재자를 눈앞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도구적 존재로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실체성으로서의 눈앞의 존재는 도구적인 존재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눈앞의 존재자들인 실체들이 갖는 ‘존재적 속성’을 실체의 ‘존재론적 성격’과 혼동하고 있을 뿐이다.

 

21절 데카르트의 “세계”존재론에 대한 해석학적 논의
데카르트는 세계의 존재를 연장으로 보면서, 지성을 통해서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길이, 폭, 깊이라고 하는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인식되는 항존적인 것을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생각으로는 눈앞에 존재하고 수학적으로 인식되는 항존적인 것만을 본래적 존재로 보는 것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존재자를 세계 자체와 동일시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음. 이후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 주위세계성의 주위성과 현존재의 “공간성”
현존재가 갖는 공간성은 내부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공간 안의 존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내부성이란 연장을 갖는 어떤 존재자가 보다 큰 연장을 갖는 다른 존재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현존재가 공간이라는 커다란 그릇 안에 있다는 식의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 현존재가 공간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원칙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내부성과는 구별되는 현존재의 공간성이란 무엇인가.

 

22절 세계 내부적인 도구적 존재자의 공간성
모든 도구적 존재자는 각각의 방역을 갖는다. 방역이란 우리가 어떤 도구를 어디에 놓을 것인지를 물을 때의 그 ‘어디로’에 해당. 도구가 갖는 자리. 방역=도구의 자리=도구가 놓이는 공간=어디. 도구의 방역 즉 공간은 일상적인 고려를 통해서 발견되고 둘러봄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둘러봄에 의한 해석 속에서, 공간은 유의미성에 따라 발견되고 분절된다. 공간은 발견되고 구획되고 조정되고 만들어지는 것.

 

23절 세계-내-존재의 공간성
현존재는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와 배려하며 친숙하게 왕래한다는 의미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현존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성이 귀속된다면, 그것은 오직 이러한 안에-있음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안에-있음(=세계-내-존재)의 공간성은 ‘거리 제거’와 ‘방향을 잡는다’는 두 성격을 갖는다. 먼저 현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의 거리제거는 어떤 것을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두는 것을 의미한다. 둘러보는 고려에 의해서 조달하고 마련하며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두는 것. 편리한 곳에 두는 것. 현존재는 거리를 제거하면서, 둘러봄에 의해서 발견된 방역 안에서 각각의 도구들에게 적합한 자리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일상적 주위세계를 확대해 나간다.

 

현존재는 거리를 제거하는 내-존재인 동시에 방향을 잡는다는 성격을 지닌다. 둘러보는 고려는 방향을 잡으면서 거리를 제거한다. 방향을 잡는 것은 거리 제거와 마찬가지로 세계-내-존재의 존재양상으로서 고려의 둘러봄에 의해 선행적으로 인도되고 있다. 방향의 결정은 순전히 주관적으로 현존재의 신체를 중심으로 해서만 행해지는 게 아니라, 도구들의 용도전체성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토대로 하여 성립한다. 다시 말해 방향 결정은 세계-내-존재에 근거한다는 것. 우리는 그때마다 이미 숙지되어있는 세계를 통해서 방향을 잡는다는 것. 따라서 방향을 제대로 취하려면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계를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체를 기준으로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하는 느낌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와 같이 거리 제거와 방향 잡음은 세계-내-존재의 본질적인 성격으로서, 발견된 세계 내부적 공간 안에서 둘러봄에 의해서 고려하면서 존재하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규정한다.

 

24절 현존재의 공간성과 공간

도구가 귀속되어야 할 방역은 고려의 궁극목적을 정점으로 하는 용도들의 전체를 통해서 그 윤곽이 그려진다. 즉, 현존재가 도구를 사용하기 이전에 용도전체성이 개시되어 있고, 이러한 용도전체성과 함께 공간도 개시되는 것. 용도전체성에 대한 개시는 유의미성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유의미성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용도전체성을 개시하고, 용도전체성에 입각하여 거리를 제거하고 방향을 잡으면서 어떠한 것이 어떠한 방역에서 적합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도록 존재케 한다.

 

이렇게 세계의 세계성과 함께 개시되는 공간은 수학적으로 계산되는 3차원적 공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공간이 주관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울러 세계는 공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공간이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공간이 현존재의 고려에 의해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규명을 통해서 공간을 해명해야지 데카르트처럼 공간 내지 공간적 연장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려 해서는 안 됨.

 

방역으로서의 공간은 용도전체성으로서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항상 주제적으로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구의 공간성이 둘러봄에 의해서 주제화되면 비로소 공간은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둘러봄에 의해 주제화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을 우리는 순수한 주시에 의해 계산하고 측정할 수 있다. 순수한 주시에 의해서 공간을 보게 될 경우, 주위세계적 방역들은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세계 내부적 도구들이 자리하는 공간은 용도라는 성격을 상실한다. 세계 역시 특수한 주위세계적인 성격을 상실하며 그 자체로 무세계적인 주체가 인식하는 자연세계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동질적 자연공간은 도구들의 세계연관성을 탈세계화하는 발견양식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데카르트는 이런 공간(동질적 자연공간)을 하나의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고, 칸트는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는 직관형식으로 보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런 공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생활세계적인 공간에서 추상된 것으로 봄.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동질적인 공간이라는 것은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생활세계적인 공간에서 생활세계적인 의미를 사상해버린 추상물인 것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브 온톨로지 - 사랑에 관한 차가운 탐구
조중걸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멋진 책이다. 사랑을 논하기 위한 전제를 마련하고, 사랑으로 위장되거나 오인되는 ‘사랑 아닌 것들’을 걷어내고, 또 그 외 이것저것 결벽에 가깝게 “환각을 벗겨”내느라 품을 너무 많이 들였지만(지나치게 냉소적이고 엄밀한 저자의 성격이 이 책을 장황하게 만든 데 일조한 듯), 결론부에선 ‘세계에 대한 태도’로서의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

 

“사랑은 하나의 심적 경향이다. 세계와 하나가 되는 가운데 우주 만물이 모두 인연으로 얽힌 하나가 되고자 하는 심적 경향. 사랑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구하는 나는 있다.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나만 있고 삶은 없고 살아가는 나만 있듯이. 따라서 사랑은 희구와 열망이지 손에 쥐어지는 어떤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아를 세계 속에서 소멸시키는 것을 전제한다. 무엇인가와 하나가 되려는 열망으로. 소멸은 수양이고 열망은 사랑에의 충동이다. 이 둘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이 아슬아슬하게 사랑의 희끄무레한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227)

 

“사랑은 대상을 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 자체를 향한다.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윤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는 단지 신앙을 위한 신앙, 미를 위한 미, 윤리를 위한 윤리를 추구할 뿐이다. 거기에는 이유도 목적도 없다. 단지 그것을 향한 나의 충동만 있을 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에 대한 나의 충동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대상을 향하지도 목적을 지니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할 뿐이기 때문이다.”(237)

 

“세계는 단일하다. 그리고 그 단일자는 거미줄을 가진다. 수없이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 우리는 그 거미줄 어딘가에 걸쳐 있다. 나의 연인, 나의 아내, 나의 아이 등은 이 수많은 거미줄에 같이 걸쳐졌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거나 결단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선택은 없다. 수많은 우연 가운데 그 우연이 있게 되었다.

 

(...)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할 일만 남는다. 말한 것처럼 선택 자체가 우연이었다. 이것은 선택에 대한 책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우연에 대해 우연 자체를 살자는 얘기이다. 이것이 사랑을 위한 사랑이다. 그가 필연적으로 나의 남편일 이유도, 아이가 나의 아이일 이유도 없다. 모든 것이 우연이다. 그렇게 우연히 우리는 해체될 것이다. 따라서 이 관계는 배타적일 수가 없다. 어디에도 운명이나 필연은 없기 때문이다.

 

창밖을 보라. 수없이 많은 영혼이 질주한다. 누군가 당신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고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가 누구에게 특별한가? 모든 것이 전체를 이룬다. 이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어떤 인연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인연은 전체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다. 그 인연은 바로 나 자신의 나와의 인연이다. 거기에 타자는 없다.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의 거미줄에 걸쳐진다면 나는 그가 누구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보살필 것이다. 그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이기 때문이고,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여기에서 사랑의 배타성이 사라진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위한 사랑’이다. (...) 당신은 누구라도 사랑할 것이다.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더 특별할 이유도 없고 다른 누가 덜 특별할 이유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세계에 만연하다. 만남은 만남일 뿐이다. 사랑은 당신 마음속에 있지 상대편의 사랑받을 특질이나 성취에 있지 않다. 당신은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들이 다른 특질, 다른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사랑했을 것이고 또한 다른 사람이 그랬다 해도 그들 역시 사랑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거기에 있다. 우리는 아마도 이 사랑에 대한 추구 가운데 죽을 것이다. 무엇도 좋다. 그러나 사랑을 구하는 나, 사랑의 노력 가운데 죽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획득은 권태 이외에 무엇이겠는가?“(2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의식과 신체를 살펴보자. 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항상 노예적임. 무리 속에서 발달하는, 근본적으로 무리본성에 다름 아님. “의식은 어떤 전체가 어떤 우월한 전체에 종속되길 원할 때만 습관적으로 나타난다. (...) 의식은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어떤 존재와 관련해서 탄생한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우는 운전자의 경우라든지 직장에 막 취직한 신참의 경우. 의식보다 항상 더 놀랍고 우월하고 심오한 것이 바로 신체다. (여기서 신체란 정치적 연합체일 수도, 사회적, 생물학적, 종교적 연합체일 수 있다. 담론의 연합체일 수도 있고.) “신체의 모든 현상은 (...) 지적인 관점에서의 우리 의식보다, 우리 정신보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는 의식적인 방식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신체는 다수의 힘들이 투쟁하는 장(場)이다. 신체 속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힘들은 맞닿은 다른 힘들과 우연적인 관계를 맺으며 복종하기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신체를 정의하는 것은 지배하는 힘들과 지배받는 힘들 간의 관계이다. 모든 힘은 관계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것이다. 또한 신체는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다수적 현상이다. 하나의 신체 속에서 우월하거나 지배하는 힘들은 소위 적극적이고, 열등하거나 지배받는 힘들은 소위 반응적이다.

 

2 복종하는 열등한 힘들은 명령하는 힘들과 구분되지만, 계속해서 힘으로 존재한다. 복종하는 것은 힘 그 자체의 성질이고, 명령하는 것만큼이나 권력에 관계한다. 어떤 힘도 자신의 고유한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열등한 힘들은 주로 삶의 조건들을 보존하거나, 삶의 조건들에 적응하거나, 실리를 위해서나, 또 그 외의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 힘을 작동시킨다. 반면, 명령하는 우월한 힘, 적극적인 힘은, 사실은 이에 대한 진술 자체가 앞서 설명한 열등한 힘들의 경우보다 더 어렵다. 왜냐면 이렇게 진술하는 인간의 의식 자체가 반응적인데 적극적인 힘은 본성상 이미 의식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을 하자면, 소유하고 탈취하고 좌지우지하며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인 힘들의 특징이다. 소유하는 것은 형태를 강요하는 것, 결과들을 활용해서 형태를 창조하는 것.

 

니체는 다윈을 비판하고 라마르크를 지지한다. 다윈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을 잘 한 놈들이 생존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았단 식으로 말하는데 여기서 그려지고 있는 개체는 완전히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다. 생물체를 그저 반응적인 힘의 담지자로만 그리고 있다. 반면에 라마르크는 용불용성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이론은 다윈과 다르게 개체가 가진 조형의 힘, 변신의 힘,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니체가 보기에 생명체의 분화과정이라는 것은 환경에의 순응의 결과가 아니라 차이를 낳는 잠재성의 영역이 창조적으로 분화해간 결과이다. 유기체에게 새로운 기관이 생성되는 현상 또한 유기체 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투쟁과 특정 부분의 승리 그리고 다른 부분의 위축의 결과인 것이다.

 

3 힘들은 양적이고, 양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리학이 하듯이 그렇게 순수하게 양적인 규정은 추상적이고 불완전하고 모호하다. 양과 함께 질 또한 하나의 척도로서 고려되어야 한다. 양적인 차이는 질적 차이를 수반한다. 가령 6N과 2N은 양적으로도 다르지만, 질적으로도 다르다. 그리고 질은 양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2N을 세 배 마련한다고 해서 그 질이 6N과 똑같아지는 게 아니다. 양과 질의 환원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추상적으로 힘들을 셈할 수 없고, 어떤 현상이나 사건 또는 어떤 신체의 경우 속에서 그것들 각각의 성질과 그 성질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4 앞서 힘들이 양으로 환원 불가능하고 성질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고 했던 바, 힘에 대해서 수치화하고 추상화하고 힘을 균등화, 균일화하여 다루는 과학은 힘의 참된 이론을 결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힘의 이론을 위태롭게 한다. 비단 물리학뿐만 아니라, 니체는 인간의 의식, 정신, 철학, 심리학, 생물학을 비롯한 근대 학문, 근대문명, 민주주의, 사회주의, 실증주의, 인본주의, 변증법주의, 이 모든 것들을 모두 노예적이고 반응적인 힘들의 승리라고 싸잡아 비난한다.

 

5 니체는 태초에 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종말이 있으며 구원이 있고 천국이 있다고 얘기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리켜 삶을 부정하는 금욕적이고 허무주의적이고 노예적인 발상으로 치부한다. 그런 니체가 상정하는 세계상이 영원회귀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좋을 듯하다. 또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하는 반원의 끊임없는 회전운동, 그리고 그런 반복운동 속에서 비로소 입체적으로 현상하는 구의 이미지라든지. 그와 같이 니체는 이 세계를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목적도 없고 최종 도달점도 없는, 그저 끊임없는 변화를 낳는 영원한 생성 속에서 매순간 현상하는 어떤 것으로 본다. 영원회귀는 정태적인 게 아니다. 늘 생성 중에 있다. 지속되는 생성. 이것이 곧 존재다.

 

6 권력의지란 무엇인가. 권력의지는 힘과 분리될 수 없는, 힘에 결부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힘의 보완이며 동시에 힘에 내적인 것으로서 주어진 어떤 것이다. 힘이 생성되는 데 전제가 되는 내적 요소. 힘의 성질을 결정하는 내적 의욕. 힘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권력의지는 ‘원하는 것’이다. (크기와 방향을 동시에 갖는 물리적 단위인 벡터에서 ‘힘’이 벡터의 크기를 말한다면, ‘권력의지’는 벡터의 방향에 해당. 최초의 작용점. 마치 채찍을 휘두를 때의 그 손목스냅과도 같은.) 권력의지는 미분적인 동시에 발생적인 힘의 계보학적 요소이다. 정확히 말하면 권력의지는 힘의 계보학적 요소일 뿐만 아니라 힘‘들’의 계보학적 요소이다. 권력의지에 의해서 어떤 하나의 힘이 다른 힘들보다 우세하게 되고, 다른 힘들을 지배하거나, 다른 힘들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또 다른 어떤 힘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이 모든 힘들의 역학의 배후에 권력의지가 있는 것. 권력의지야말로 힘의 생산 요소이고 힘의 생성적 요소이다.

 

7-1 권력의지는 우연을 함축한다. 우연 없이는 힘들이 어떤 조형성도 갖지 못하며, 변화도 꾀할 수 없다. 우연은 힘을 관계 짓는다. 권력의지는 필연적으로 힘들에 부가되지만 우연에 의해서 관계 맺어지는 힘들에만 부가된다.

 

7-2 계보학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로부터 관계 속에 있는 힘들의 양적 차이와 동시에 그 힘들 각각의 성질이 파생한다. 그것들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힘들은 소위 지배적이고 지배받는다. 그것들의 성질에 의해서 힘들은 소위 적극적이고 반응적이다. 적극적이거나 지배하는 힘들 속에서처럼, 반응적이거나 지배받는 힘들 속에도 권력의지가 있다. 그러니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러한 가시적인 총체를 만들어내는 힘들의 성질을 평가하고 힘들의 관계를 측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극도로 예민한 지각이 요구된다.

 

7-3 긍정적임과 부정적임은 권력의지의 원초적 성질을 가리킨다. 행동하기, 반응하기가 힘을 표현하듯이, 긍정하기, 부인하기, 극찬하기, 비하하기는 권력의지를 표현한다.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쁘고, 어떤 것은 칭찬하고, 어떤 것은 비난하는 등 권력의지 자체가 하나의 가치평가를 수행하고 있는 것. 현상을 해석하는 것 또한 권력의지의 발현이다. 그러니 어떤 해석도 객관적일 수 없다. 해석 자체가 좋고 나쁨을 정하는 권력의지의 관철이기 때문에.

 

7-4 이 모든 이유 때문에 권력의지는 해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보학적 요소로서의 권력의지는 의미의 의미화와 가치들의 가치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착하게 여기는 행동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왜 이 행동을 착하다고 가치 매기고 있는가. 착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어떤 행동을 착하다고 가치 매기는, 의미부여하는,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어떤 힘들에 의해서 산출되었는지를 해부해 보면, 즉 가치들의 가치를 해부하면, 그 행위를 착하도록 여기게 만드는 하나의 권력의지가 있다.)

 

8 “기원의 전복된 이미지가 기원에 동반된다.” 즉 현상의 기원을 추적할 때는 항상 이미지의 전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적극적인 힘들의 관점에서 긍정인 것이 반응적 힘의 관점에서는 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힘들은 본디 귀족적이지만 반응적 힘들에 의해 반영된 그들의 모습은 평민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원래 차이를 기원에서부터 부인하고 일그러진 이미지를 제공하면서 전복된 사상으로 전염을 시켜서 기력을 소진시키는 것이야말로 반응적 힘들의 속성이자 전략이기 때문에, 어떤 사태, 신체, 사건, 현상이 반응적인 힘에 전적으로 점령당했을 경우 우리는 더더욱 이러한 이미지의 전복, 가치전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화’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는 ‘퇴락’일 수 있는 것이다.

 

반응적인 힘들은 적극적인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고 분해한다. 그것들은 적극적 힘으로부터 그것의 능력의 일부 혹은 거의 전부를 박탈해버린다. 쇠잔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하자면 에너지 흡혈귀다. 따라서 반응적인 힘들 자체가 적극적으로 되지는 않지만, 적극적인 힘이 반응적인 힘을 만나면 적극적인 힘 자체가 새로운 의미에서 반응적으로 되는 일이 생겨난다. 새로운 반응적 생성이 일어남. 이렇게 반응적인 힘들은 우월한 힘을 구성하면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힘을 ‘분리시키면서’ 승리한다.

 

매 경우에 있어 그 ‘분리’는 어떤 허구, 신비화, 혹은 왜곡에 근거한다. (천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든지 현세를 지옥으로 왜곡한다든지) 그리고 여기서 허무주의, 즉 ‘무의 의지’가 그러한 부정적이고 전복된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적극적인 힘을 함정 속으로 유인하는 무의 의지. 결국 적극적인 힘은 허구에 의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되고, 실제로 반응적으로 된다.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된 힘의 상태도 반응적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상태야말로 반응적이다. 반면 자신의 능력 끝까지 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적극적이다.)

 

9 열등한 힘들은 여전히 열등한 채로, 반응적인 채로, 노예이길 그만두지 않은 채로, 승리할 수가 있다. 열등한 힘들이 승리하고 장악하고 지배적이게 되고 그럴 수가 있다. 그럴 수가 있는 게 아니라, 대체로 그런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 이래로 인간 정신의 역사, 문명의 역사, 사회 체제의 역사 모두 열등한 것들의 승리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는 힘이 열등한지, 우월한지, 반응적인지, 적극적인지, 그것들이 지배받는 것인 한에서 승리하는지, 지배하는 것인 한에서 승리하는지를 판단해야만 한다. 그 영역 속에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해석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해석은, 현존하는 사회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사회질서를 초월한 관점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가령 자신의 능력 끝까지 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적극적인데, 힘이 끝까지 가는 것은 법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반대이기조차 한 것이다.

 

10 자유로운 사유자들(실증주의자들)은 정작 실증적인 내용의 본성에 관해서, 상응하는 인간적 힘들의 기원이나 성질에 관해서는 전혀 탐구하지 않는다. 힘들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대세를 장악한 반응적인 힘들에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고 그것들의 승리를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애당초 사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해석에는 우월한 것과 저열한 것, 즉 서열만이 존재할 뿐이다.

 

11 앞서 권력의지가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쁘고, 어떤 것은 칭찬하고, 어떤 것은 비난하는 등 하나의 가치평가를 수행하고 있다고 했는데, 좋고 나쁨의 판별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권력의지가 감수성, 감성, 기분, 감각의 문제라는 것도 뜻한다.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원시적 정서 상태’, 모든 다른 감정들을 파생하는 원시적 정서상태, 이것이 곧 권력의지인 것. 힘의 감성, 힘의 미분적 감성으로서의 권력의지.

 

12 원한, 가책, 허무주의는 심리적 특징들이 아니라, 인간 속의 인간성의 토대와 같다. 그것들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원리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노예적 속성을 띠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회귀조차도 특유의 반응적 힘의 관점에서 허무주의적인 사유로 만들어버린다. 반응적인 인간의 관점을 통해 인식되는 영원회귀는 역겹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영원회귀의 사유 역시 인간의 눈에는 전복된 이미지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13 의미와 가치들은 양면성을 갖는다. 가령 질병은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내게 새로운 능력을 부여한다. 팔을 다쳐서 팔을 쓸 수 없게 되면, 팔 대신 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새로운 능력을 계발하게 된다. 즉 반응적인 힘은 우리를 우리의 권력에서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또 다른 권력을 준다. 새로운 감정들을 가져다주고, 영향 받는 새로운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니체가 소크라테스, 예수, 유태교와 기독교, 퇴락 혹은 퇴행의 형태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서 그와 같은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와 가치들의 양면성이 어떠하건 우리는 반응적인 힘이 그것이 할 수 있는 바의 끝까지 가면서 적극적으로 된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반응적 힘은 어디까지나 무의 의지와의 관계 속에서만 전개된다.

 

14 반응적 인간의 가치평가에 감염된 차라투스트라는 처음에 영원회귀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내 ‘회복기 환자’, ‘위안받은 자’로 변신해 혐오를 극복하고 영원회귀를 긍정하게 된다. 그러한 드라마틱한 인식의 전환은 ‘선택적인 원리’로서 영원회귀를 사유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영원회귀가 선택적이라는 것인가? 먼저 영원회귀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에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윤리강령 만큼이나 엄격한 규칙을 제공한다. 바로 “네가 의욕하는 것, 그것을 네가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원하라!” 딱 한 번만 하고 싶은 것이어도 안 된다. 약간만 하고 싶은 것이어도 안 된다. 영원히 또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을, 또 하고 또 해도 다시 또 원하게 되는 바로 그런 것을 원하라. 전적으로 원하라. 이것이 영원회귀의 사유가 부가하는 윤리 준칙이다.

 

영원회귀가 선택적인 원리라고 하는 데에는 또 하나의 다른 의미가 있다. 처음에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역겹게 느꼈던 이유는 그것을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태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무주의가 정말로 극단으로 치달으면 그것의 최종점은 자기소멸이다. 허무주의의 진정한 극단적 형태는 영원회귀가 아니라 자멸이다. 자멸이야말로 반응적 힘들이 적극적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의 의지의 최종형태는 자멸인 바, 영원회귀의 운동 속에서 결국 반응적인 힘은 지속되지 못한다. 영원회귀의 원리 속에서는 긍정만이 살아남는다. 반응적인 힘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원심분리기가 그렇게 하듯이 영원회귀의 운동 원리 자체가 반응적인 힘들을 끊임없이 원 밖으로 날려버린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영원회귀라는 운동 자체가 존립할 수 있기 때문에. 영원회귀는 타오르는 불과 같은 끝없는 생성인데, 무의 의지가 장악한 영원회귀라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인 것. 운동 원리상으로 모순인 것.

 

15 영원회귀의 원리 속에서 반응적인 힘들은 지속되지 못한다. 결국 영원회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영원회귀는 생성의 보편적 존재이지만, 생성의 보편적 존재는 단 하나의 생성만을 뜻한다고. 바로 '적극적 생성'만이 전생성의 존재인 하나의 존재를 갖는다고. 사람들이 생성의 보편적 존재로서 영원회귀를 긍정하고, 거기에 더해서 '보편적 영원회귀의 산물'로서 '적극적 생성'을 긍정하는 한, 긍정은 점점 더 심오해진다. 선택적 존재론으로서의 영원회귀는 그 생성의 존재를 적극적 생성에 의해서 <자신을 긍정함>으로서 긍정한다. 이것이야말로 긍정의 긍정, 이중의 긍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