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스피노자 철학 읽기
이수영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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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유의 목소리를 많이 절제한 에티카 안내서. 주석까지 꼼꼼하게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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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 : 운명을 읽다 - 기초편 명리 시리즈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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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먼저 접한 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가 사주명리의 전반적인 철학과 총론에 치중한다면 강헌의 명리는 천간합, 지지합, 충, 형, 십이운성, 신살 등등 고미숙의 책이 자세히 다루지 않고 넘어갔던 보다 구체적인 내용까지 들어간다. 같이 읽었더니 보완도 되고 복습도 된다. 두 권 읽고 나면 남의 팔자까지 진단하기는 어렵더라도 내 운명학적 꼴 정도는 조망해볼 수 있겠다. 내게 닥친 미래를 뭉툭하게나마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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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
최종현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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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신이란 무엇인가.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서 고미숙은 ‘정(精)’을 정액, 질액, 림프액, 소화액, 혈액, 골수 등등을 아우르는, “온몸을 적셔주는 물질적 신진대사를 총칭”하는 것으로,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물질적 토대”로 이해한다. 한편, ‘기(氣)’는 “주로 몸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항상성을 유지시켜주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신(神)’은 “정기의 흐름에 벡터를 부여하는 컨트롤러 역할”을 하는 “고도의 정신활동, 변화를 주관하는 무형의 작용”으로 본다.

 

기를 곧바로 에너지로 보는 고미숙과 달리 이 책의 저자는 기와 에너지를 엄격히 분리한다. 에너지는 동물이 음식을 통해 흡수한 탄소화합물의 산화 작용에 의해 생기며, 이는 기와 다르다는 것. 에너지와 기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몸 안에 기가 아무리 가득해도 에너지가 부족하면 힘을 낼 수 없고, 반대로 몸에 에너지가 충분해도 기가 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면 몸이 목석처럼 굳어져 힘을 전혀 못 쓴다는 점, 또 음식을 많이 먹어 영양이 과잉되면 에너지가 소모될 때까지 기의 운용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점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우리 몸 안에서 기와 에너지의 관계가 아주 밀접한 것은 사실이다. (...) 그렇다고 해서 기를  ‘생체 에너지’라고 하거나 ‘기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단전에 기를 축적할 때 몸속에 ‘정(精)’이 생기며, 이 정의 힘, 즉 ‘정력’을 ‘생체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다. (...) 기와 에너지는 같은 것이 아니며, 다만 둘이 얼마나 몸 안에서 긴밀하게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활력이 좌우된다. (...) 기를 잘 활용하면 에너지를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즉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생명력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몸 안의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활용하는데 기가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이다. -69쪽

 

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신(神)’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God)이나 절대자가 아니며 흔히 쓰는 ‘정신(精神)’의 ‘신(神)’이다. 우리는 정신을 마음 즉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정기신’의 ‘정신’으로서 기로 단련된 심신을 가리키는 말이지 단순히 심리 상태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정은? 정은 우리가 흔히 정력, 정기라고 할 때의 그 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양정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체조, 호흡, 명상 순이고, 양신에 있어서는 명상, 호흡, 체조 순이라고. 양생은 양정과 양신이 합쳐진 것으로, 수련을 할 때 정에 더 치중하게 되면 무술이나 차력사 방면으로 나아가고 신의 개발에 집착하면 예지력이나 독심술 등의 신통력 쪽으로 나아가는데, 저자는 사회생활을 건강하게 잘 해나가는 데 양생의 목적이 있다면 구태여 양정 혹은 양신 각 한쪽 방면으로 파고들어 오타쿠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자기는 그런 게 하나도 안 부럽다고, 그저 양정과 양신을 적절히 균형 있게 해나가는 편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니 그래도 양생법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벤져스가 될 수 있다니 이 소설 같은 소리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쨌든 흥미로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저자가 에스케이그룹 전 회장이다. 대기업 총수가 도가적 양생법에 천착한다는 거 자체가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가 주창한 심기신수련법은 ‘패기’를 강조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에스케이 직원들에게 적용하기 위한 생명관리기술인데, 이를 푸코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는 흔히 푸코 말기 사유에서 자기배려의 기술이 저항의 소극적인 방식이 아닌가 하지만 글쎄 어쩌면 양생법조차도 저항과 탈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또한 하나의 효율적인 권력장치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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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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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한순간의 우연으로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힘만이 예외이다. 우리는 바로 그 힘을 신에게 바쳐야 한다. 즉, 파괴해야 한다. ‘나’를 파괴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 행위이다. -48쪽

 

이 책의 모든 구절들이 죄다 저런 식이다. 문장을 하나씩 톺아보자.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의 흐름은 자연스럽다. 세 번째 문장은 반전이다. 그렇다면 다음 문장은 반전에 대한 근거가 와야 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일단 넘어가자. 그 힘을 왜 신에게 바쳐야 하지? ‘즉’이라는 연결부사는 왜 뒤따라야 하는데? 나를 파괴하는 것이 왜 신을 향한 봉헌의 의미를 갖지? 오리무중. 납득불가.

 

잠언 형식의 글임을 감안하더라도 문장의 연결이 도저히 매끄럽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이런 대목을 만나면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연결이 모호해도 바로 그 모호함으로 인해서 행간에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이 생겨날 수도 있는 걸텐데 이 책에서 끝내 그런 신비로움을 발견해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독해 능력 부족인가. 읽다 던져버림. 시몬 베유는 어떤 사람일까.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스피노자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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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인가 - 진정한 자유를 위한 관계맺기와 홀로서기 지혜의 연금술 시리즈 9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젠토피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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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양육한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기껏해야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도울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을 '양육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은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매우 해로운 것이다. 아이들은 물건이나 건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나무처럼 자란다. 그러므로 자라는 것을 도울 수는 있다. 토양에 비료를 주고, 물을 주고, 햇빛이 잘 드는지를 지켜봐줄 수는 있다. 그러나 나무를 잡아늘여서 자라게 만들 수는 없다. 스스로 자라야 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도울 수는 있지만 키우거나 양육할 수는 없다."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깊은 침착함과 고요가 내면에 자리잡는다. 긴장을 풀고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 있다. 아무도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새로운 성질과 차원의 사랑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생물학적인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친밀함에 가장 근접한 사랑이다."

"사랑은 고정된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관계'가 아니라 계속해서 '관계를 맺어가는' 일이다. 관계라는 말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를 가리킨다. 관계라는 말은 명사이다. (...) 사랑은 영원히 지속하는 현상이다. 사랑은 진행형이다. 그것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우리는 왜 관계를 맺어가는 아름다운 일을 일정한 관계로 고착시켜 버릴까? (...) 나는 계속 관계를 맺어가라고 말한다. (...) 상대방을 찾고 탐색하라. 서로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라. 서로에게 새로운 존재가 되는 길을 찾아라. 각 개인은 무한하고 마르지 않으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존재이다. (...) 더 많이 알수록 상대방은 신비롭다. 사랑은 끝없는 모험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명상하는 것을 잊지 말라. (...) 사랑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혼란과 혼돈을 의식하도록 만들어준다. 이제 명상할 시간이다! 사랑과 명상이 함께할 수 있다면, 양 날개를 달고 있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게 될 것이다. (...) 사랑은 오직 명상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 사랑은 관계로 보이지만, 깊은 홀로있음 [=명상] 속에서 시작된다. (...) 사랑의 근원은 명상이다. 홀로 있으면서 절대적인 행복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전혀 필요 없으면, 그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배우는 게 아니라 성장하는 것이다. 그대는 사랑하는 방식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버려야 한다.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고,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야 한다. 바위를 치워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 질투, 소유욕, 집착, 기대, 욕망. 이런 것들이 장애이다. (...) 질투나 소유욕 따위는 그 실체를 보게 되면 너무나 추해서 한순간도 참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질투와 소유욕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다."

"인간은 매우 성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냥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인생의 의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는 방식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라. 들어가지 않고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내 말은 그냥 방종에 빠지라는 게 아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명상적인 에너지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라는 의미이다. (...) 모든 존재는 성적이며, 우리는 모두 그것에서 왔고, 모든 존재가 그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섹스는 신이 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존재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 붓다가 되고 싶으면 섹스를 두려워 하지 말라. 그 속으로 들어가 섹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라. 그러면 점점 섹스에 대해 깨어있게 될 것이다. 조심하라. 그것은 매우 귀중한 에너지이다. 그것을 명상으로 만들고 서서히 사랑으로 변화시켜라."

"사랑이 깊다면 결혼은 아무 필요 없다. 결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뱀에게 발을 달아주거나 빨간 장미에게 빨간색을 덧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불필요한 일이다. 왜 법정에 가는가? 그 사랑이 완전하지 않다는 두려움이 있음이 틀림없다. (...) 인간은 자유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 가족이라는 낡은 제도는 자유를 파괴한다.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에 행복 역시 파괴한다. 사랑도 파괴한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집착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심리적 기제는 무엇인가? 그대가 연인에게 '나만을 사랑해주오'라고 말하는 순간 소유는 시작된다. 누군가를 소유하는 것은 그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소유하면 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물건 중 하나가 된다. 너는 나의 소유재산이므로 나는 너를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너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거래이다. 나 역시 너에게 소유되어 너의 물건이 된다. 아무도 나를 이용할 수 없다. 오직 너와 나 둘만이 서로에게 구속되어 서로에게 복종한다. 나는 너를 노예로 만들고 너는 나를 노예로 삼는다. 그 다음에는 투쟁이 시작된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지만 너를 여전히 소유하고자 한다. 너는 자유를 되찾고 싶지만, 여전히 나를 소유하길 바란다. 이것은 투쟁이다. 내가 너를 소유하려면 너는 나에게 소유 당해야 한다. 내가 너에게 소유 당하지 않으려면 나 역시 너를 소유할 수 없다. 소유에는 타협이 없다.

우리는 개인으로 남아야 한다. 우리는 독립적으로 자유로운 의식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지내고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지만, 서로를 소유할 수는 없다. 구속하지 않는다면 집착은 없다. 집착하는 것은 가장 추한 일이다. 나는 종교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의미로도 말한다. 집착은 자기 자신이 홀로 있는 아름다움을 잃게 한다. 모든 것을 잃게 한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달콤하게 느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기 자신까지도 잃는다. 하지만 마치 자신은 독립적이면서 상대방만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상대방 역시 똑같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소유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대 역시 소유하려 하지 말라."

"자유롭게 사랑하는 것, 자유롭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그대는 일단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으며, 의존하지 않는다. 그대의 사랑을 나눌 수 있고 그대의 행복을 나눌 수 있다. 그대의 지복과 침묵을 나눌 수 있다. 의존이 아니라 나눔이다. 다른 상대가 없어도 그냥 행복하고 그냥 기쁘다. 누군가 함께 있어서 나눌 수 있으면 그 또한 행복하다. 내면의 의식과 중심을 깨달으면 사랑은 집착이 될 수 없다. 자기 내면의 중심을 알지 못할 때 사랑은 집착이 되어버린다. 내면의 중심을 인식하면 사랑은 헌신이 된다."

"오직 홀로 존재할 때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 우선 존재하라. 우선 자신을 깨달아라. 홀로 있으면 존재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존재를 의식하는 것으로 사랑이 꽃핀다. 그대는 오직 홀로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깨어있고 주시하면서 그대의 주시 속에 오로지 그대만이 존재함을 기억하라. (...) 주시자가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것이 바로 불성이며 해탈이고 깨달음이다. 주시를 유일한 수행으로 삼아라. 이 수행을 통해 자신이 홀로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그대의 영혼과 자아가 투명하게 정제되었을 때 일어난다. 에고를 가지고 있으면 절대 사랑할 수 없다. 에고는 사랑받기만을 원한다. 그것이 에고를 먹여 살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랑한다. 그대는 사랑하기 때문에 아기를 낳는 게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아기를 낳는다. (...)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지 않는 한 그대는 홀로 있을 수 없다."

"홀로 있도록 선택된 자, 홀로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버린 사람이다. 자기 자신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당신은 중요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의미는 자기 내면에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의미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않는다. 그는 의미를 구걸하지 않고, 의미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의 의미는 자기 존재에서 나온다. 그 사람은 이제 걸인이 아니므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을 깨달으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우리는 아주 광대한 대륙이며 경계가 없는 무한한 존재이다. 하나의 생명이 모두를 통해 흐르고, 하나의 사랑이 모두의 가슴을 채우고, 하나의 기쁨이 모든 존재 안에서 춤춘다.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분리된 개체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궁극적 진리를 경험하면 우리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 (...) 인간은 수천 개의 형태로 구현되는 장엄한 신성의 일부분이다. 동물, 인간, 나무, 새 같은 형태는 진화해 가는 여정에서 같은 의식이 서로 다른 단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디에 속할 필요도, 내부인이 될 필요도 없다. 이 세상 내부의 사람이 되면 길을 잃어버린다. 세속적인 인간이 바로 내부인이다. 붓다는 늘 이방인으로 남았다. 모든 붓다는 이방인이다. 군중 속에 있어도 그들은 늘 홀로 있다. 시장 한복판에 서 있을 때도 그들은 사실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갈 때도 그들은 늘 홀로 있다. 아주 미묘한 거리를 늘 유지한다. 그 거리는 바로 자유이다. 그 거리는 커다란 기쁨이며 자기만의 공간이다."

"홀로있음을 즐기고 그대만의 순수한 공간을 향유하라. 그러면 아름다운 노래가 그대 가슴에서 우러나올 것이다. 그것은 각성과 명상의 노래이다. (...)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외로운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다. 그들은 오로지 착취하려고 할 뿐이다. 외로운 사람들은 사랑하는 척 할 뿐이다. 그들은 타인에게 줄 것이 없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사랑을 얻기 바란다. 홀로있음을 즐기는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슬픔은 그대 자신만의 신성한 순간이다. 슬픔과 친해져라. 그리고 그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도록 하라. 가만히 앉아 슬퍼하라. 그러면 그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슬픔은 고요한 것이며 자기만의 것이다. 홀로 있을 때 슬픔은 찾아온다. 슬픔은 더 깊이 홀로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얄팍한 행복을 쫓아다니며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슬픔을 명상의 수단으로 이용하라. 슬픔을 주시하라. 슬픔은 친구이다! 슬픔은 영원히 홀로 있을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진실한 인간이 되길 원한다면 슬픔을 이용하라. 슬픔으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슬픔은 소중한 축복이다. 슬픔과 함께 그것을 즐기며 고요히 앉아 있어라. 슬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슬픔과 더 친해지고 그 미묘함에 더 익숙해질수록 그대는 더 쉴 수 있고 이완하게 된다. 슬픔은 그대를 더 젊고 신선하고 활기차게 만들어준다. 한 번의 슬픔의 맛을 보면 그 아름다운 순간을 자꾸만 찾게 된다. 그대는 슬픔을 기다리고 환영하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홀로 있을 수 있게 된다."

"명상은 무엇일까? 명상은 그대 존재와 더불어 즐기는 것이다. 명상은 존재의 즐거움이다. 명상은 아주 단순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 명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행위도 없고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다. 그저 존재하며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 그저 존재하며 자신을 즐기면 된다. 자기 모습 그대로 행복을 누리면 된다. 숨을 쉬고, 새의 노래를 들으며 행복을 느끼면 된다.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이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을 통제하려는 사람은 매우 어리석다.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차가워질 뿐이다. 그것이 자신을 통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굳어버려서 에너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 차가움은 억압의 표시이다. 억압이 깊게 이루어졌다는 표시이다."

"나의 가르침은 오직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다. '명상'과 '사랑'이다. 명상을 통해 거대한 침묵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삶을 노래와 춤,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그 둘 사이를 움직여야 한다. 어떤 노력도 없이 쉽게 움직일 수 있다면 삶에서 가장 위대한 것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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