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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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은 ‘애정’이 “평범한 경제학자의 계산을 모조리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힘”(61)인 동시에 인간의 경제활동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얘기한다. 또한 그는 “경제의 궤도를 혼란시키는 불온한 힘이 아니라 일관된 지배력”(41)으로서 정직에 대해 강조하기도 한다. 러스킨에게 정직이란 부의 획득을 위한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 조건이기도 했다. 애정과 정의에 대한 러스킨의 이러한 생각은 연민과 애정으로서의 ‘인’과 도덕과 정의로서의 ‘의’를 강조했던 맹자의 인의사상과도 퍽 닮아있다.

이 책 곳곳에서 러스킨은 확실히 이상주의적인 유교 사상가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군인의 직업이 국민을 수호하는 것이고 목사의 직업이 국민을 가르치는 것이며 (...) 상인의 직분이 국민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것”(77)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서 ‘인’을 강조한 공자가 떠오르며, “한 개인의 손에 있는 부가 다수의 사람에게 미치는 지배력을 줄이고, 사람들의 연쇄를 통하여 그 힘을 널리 분배”(135)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상업을 엄격히 제한하여 과도한 독점자본의 형성을 막았던 유교식 산업정책이 연상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는 상호부조와 호혜 경제에 기반을 둔, 정치적으로는 왕도정치가 행해지는 유교적 이상에 근접한 사회를 꿈꾸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러스킨은 아나키스트 계열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기며 통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점은 “정부와 협력은 모든 사물에서 생명의 법칙이고, 무정부와 경쟁은 죽음의 법칙이다”(144)라는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러스킨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사이를 단순히 그리고 일방적으로 적대관계로 환원해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노동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서 <자기 생각을 특정한 일에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불쾌한 감정>을 노동의 개념 속에 포함시킨”(130) 존 스튜어트 밀의 견해에도 확고하게 반대 입장을 취한다. 러스킨은 노동에 대한 밀의 정의에서 왜 ‘불쾌한 감정’은 포함되고 ‘유쾌한 감정’은 포함되지 않았는지 물으면서, 노동을 방해하는 감정이 노동을 촉진하는 감정보다 더 본질적으로 노동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이어서 그는 불쾌한 감정에 의한 노동의 경우 노동자는 단순히 배상을 받을 뿐이지만, 유쾌한 감정에 의한 노동의 경우에 노동자는 일의 교환가치 가운데 일부를 생산하는 동시에 가치의 실제 분량도 현저히 증가시킨다고 말한다.

유쾌한 감정이란 러스킨의 맥락에 따르면 사회적 애정에서 기인하는 것이겠다. 그가 유교 사상가들과 차이를 보이는 점이라면 이렇게 애정을 대단히 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하나의 동력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동력으로서의 애정이란, 뒤집어 얘기하면 애정이 곧 비-경제적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착취가 가능한 잉여 자원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노동자가 ‘유쾌한 감정’을 발휘하여 이루어낸 가치의 현저한 증가분은 어디까지나 결국 맑스가 말한 상대이윤으로 환원되어버리고 마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애정’은 확실히 경제학의 변칙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에선 러스킨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변칙적이다. 이 시대의 애정이란, 체제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거나(ex. 공동체적 애정과 유대를 기반으로 한 호혜경제가 시장경제의 모순을 완화시켜주는 버퍼로 기능하고 있는 개도국의 경제 메커니즘) 작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활용 또는 착취하는 체제 외부적 요소로서, 이미 이데올로기적으로 충분하게 강요되고 있는 정서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그 어떤 지난날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상냥하지 않은가. 고객님을 향한 사랑이 이토록 뜨거웠던 시절이 또 있었나. 애정 표현이 나날이 격렬해지는데도 왜 고객님은 성질이 점점 더 사나워지고 우리는 갈수록 피곤할까. 어쩌면 우리는 경제학에서 애정의 문제를 사고할 것이 아니라, 변칙적인 요소인 애정마저 경제학의 빈틈을 메우는데 소용되고 있는 체제 자체의 문제를 사고해야 하지 않을까. 그 편이 좀 더 '정직'하고 도의적인 고민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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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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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의 대담에서 둣치오는 맑스주의자가 푸코에게 가질 수 있을 법한 여러 가지 비판적인 의문들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그는 푸코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분석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근대세계의 모든 사회에서 유사하게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당신의 이런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전체주의나 민주주의체제 간의 차이가 무의미해져버리지 않나. 물론 당신은 이를 부인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담론이 가져올 결과와 그것의 정치적인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당신의 연구는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회의주의, 무관심주의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사유의 토대나 방식이 워낙 다르다 보니 어떤 답변은 종종 질문과 단절된 채 흘러가는 면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푸코의 답변을 읽고 나서도 뭔가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푸코와 맑스라고 하는, 여간해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만남은, 푸코가 끝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연구가 (회의주의가 아니라 무려) ‘절대적 낙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밝히는 순간 오묘한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속한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 자신에 의해 고안되고, 계획될 수 있는 수많은 할 일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모든 연구는 절대적 낙관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요. 당신이 어떻게 갇혀 있는지 보시오.’라고 말하기 위해 분석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물들이 변형될 수 있다고 믿는 한에서만 그것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165)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섣불리 말을 하지 않는 거라는 푸코의 말이 다소 수사적으로 들린다면, 이 책에서 푸코가 자신의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다음의 대목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스스로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들을 구축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주체성의 수준을 전환하고, 그 자신을 상이한 주체성들의 무한하고 다양한 계열들로서 구성하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은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우리를 ‘인간’이라고 가정되는 그 무엇과 마주치도록 만들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며, 그는 대상의 영역을 결정하는 동시에 그 자신을 바꾸고, 해체하고, 변환하고, 주체로서 탈바꿈하는 무한한 과정 속에 놓여있습니다.”(120)

푸코는 “인간이 인간을 생산한다”는 맑스의 경구를 돌아보면서, 이 경구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어떻게 될지 그리고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생산”이라는 문제가 곧 “현재의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전체적인 혁신을 창조하는 문제”(119)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곧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던 관계들과 더 이상 자기-동일성 속에 있을 수 없는, 그런 경험, 그리고 그 결과, 주체가 그 자체와 결별하고, 그 자신과의 관계를 깨뜨리며, 동일성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경험”(53)을 수반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담에서도 여전히 푸코는 ‘현재의 우리를 파괴하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생산해내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 실천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지식인의 역할은 해결책을 처방하거나 규칙을 설립하거나 도덕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163) “문제를 전체적인 복잡함 속에서 드러내어 의심과 불확실함을 유발”(154)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푸코에게는 개별적인 주체의 실천적 측면을 다루는 것이 곧 사상적 자기모순을 자초하는 일이므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그 자신이 일생에 걸쳐 지난하게 밀고 나갔던 지적 탐구의 여정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자유를 꿈꾸는 실천적 주체의 한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한편, 이 책에서는 맑스주의 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푸코의 생각도 들여다 볼 수 있다. 푸코는 근대 이성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시도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로부터 큰 매력을 느꼈다고 거듭 밝히면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해 채택된 ‘주체’에 대한 생각이 대단히 전통적인데다가 맑스주의적 형태의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사유와 분명히 선을 긋는다. “확실히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 혹은 구속되어 있는 우리의 본성이나 인간의 근본적인 진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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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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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의 원서를 직접 읽는 것은 물론 몹시 지난한 일일 것이나, 저자는 맺음말에서 이들의 사상을 각각 한 문장으로 재미나게 요약하고 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 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구어체로 쉽고 평이하게 쓰여진 입문서이지만 곱씹어볼만한 대목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저자는 니체가 '초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노예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항상 바꾸어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니체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바꿔치기'가 사고의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꼬집는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말을 바꾸게 되면, 결국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고양시킬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혐오를 불러일으켜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존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착적인 결론이 유도되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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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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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자주 자연과학으로부터 사례를 빌려왔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차용이 단순한 설명적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낮잡아 말했다지만, 이 책에서 지젝이 욕망의 작동방식을 양자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는 대목(요는 이렇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마치 물질이 원인이고 그 결과로서 물질의 주위로 공간이 휘어진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물질이라 여기는 것은 공간의 휘어진 효과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욕망의 기저에는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낯선 괴물 같은 무언가가 있는 거 같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걸 실재라고 부르지만, 사실 실재라는 건 상징계의 균열과 빈틈이 만들어낸 효과에 다름 아니다.)을 읽다보면, 자연과학의 이론이 그저 '단순한 설명적 도구'에 불과하지만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어떤 신비한 예감이 생긴다. 어쩌면 정신분석과 현대물리학 사이에는 단순한 유비 관계 이상의, 우리가 모르는 어떤 우주적 연관성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의 가장 깊고 내밀한 영역에 자리잡은 욕망의 활동과 광대무변한 우주적 현상 사이에 이런 유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지 않은가 말이다.

 

지적 엄밀성에 대한 자기검열로부터 자유로운 일반 독자의 특권을 남용하여 상상력을 좀 더 제멋대로 발휘해 보자면, 원인으로서의 대상a, 즉 결핍에 대해 민감한 사람일수록, 행성으로 치자면 질량이 무거운 행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거운 행성일수록 주위의 공간을 많이 휘어지게 하고, 왜곡된 실재를 만들어내고, 운석이라든지 먼지라든지 하는 주위의 것들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리비도가 강한 사람 역시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고(불가에서는 흔히 아상我相, 즉 '나'라고 하는 실체에 대한 고집과 집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만들어낸 왜곡된 세계의 허상 속에서 번뇌하게 된다고 얘기하지 않던가), 주위의 것들을 강하게 빨아들여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를 재편시킨다. 그는 부가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지식이 되었든 주변의 것들을 강하게 끌어당겨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집결시킨다. 이것은 그만큼 그가 '물질'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그만큼 '존재하려는 경향성, 발생하려는 경향성'이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한편, 리비도가 강한 사람의 극단은 블랙홀에 빗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는 엄청나게 허기진, 내면은 온통 허무로 가득한 괴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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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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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에 해당하는 일본역사의 반복 문제나 일본 문학 비평은 거의 못 읽었다. 역자는 이 부분 안 읽으면 반쪽만 이해하는 거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일본 역사를 잘 모르니 어렵고 재미도 없는 거 같다. 다만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앞부분인데,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근대국가체제를 표상시스템(라캉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으로 보고 각각의 영역에서 화폐와 왕을 시스템의 구멍(존재의 무無, 실재계적 순간, 의식으로부터 배제되면서도 이 의식을 지탱하고 있는 실재의 한 조각)으로 상정하는 점이나, 월러스틴의 체계 순환의 역사에서 자본과 국가의 반복강박(억압된 것의 회귀)을 읽어내는 부분은 고진의 독창적인 관점인 것 같다.

이 책에서 고진은 경제와 정치 두 방면의 역사에서 각각 결핍(구멍)을 메우기 위한 신경증적 증상으로 공황과 보나파르티슴이 반복강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미 맑스가 이를 포착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맑스의 저작 <자본론>과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을 각각 자본과 국가의 반복강박에 대한 분석으로 해석하고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계가 프로이트와 맑스를 만나면 무려 이런 얘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근대세계체계가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나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반복강박적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고진의 말은 범상치 않게 들린다. 반복강박은 죽음충동의 표현이다. 생명충동이 근본적으로 통합과 더 큰 전체를 향해 움직여가는 어떤 구성적 힘이라면, 죽음충동은 그것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해체구성적 추동력이다. 죽음충동은 심리학적으로는 긴장을 증가시키지만(반복강박), 생물학적으로는 긴장을 감소시킨다(이화작용).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근대세계체계는 구조적 갈등과 긴장이 심화됨으로써 불쾌가 고조되어가는 체계이면서 동시에 유기체적으로는 점차 해체의 과정을 밟아나가는 체계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음충동의 생물학적 최종단계는 그동안의 갈등과 긴장이 풀리고 휴식과 영면이 찾아오는 '열반' 상태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근대세계체계에 있어서는 바로 이 지점이 보드리야르가 말한 내파가 일어나는 지점이자 월러스틴이 전망하는 체계의 종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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