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과 불교 불교입문총서 20
권오민 지음 / 민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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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사실상 이 같은 실제적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였으며, 진정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였다. 불타가 진실로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생겨남,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것이었다. -p.180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름 아닌 열반이며, 불교사상사는 바로 '열반'이라는 개념의 이해와 그것으로 나아가는 방법의 탐구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열반은 '불어서 끈다'는 의미를 지닌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괴로움의 원인인 탐욕과 증오, 그리고 무지라는 번뇌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 열반을 성취한 이는 인간을 구속하는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로서, 완전한 평화를 갖는다. 평화란 대립과 투쟁과 혼돈이 종식된 상태이기에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p.204  

 
   

삶은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고통 속에서 비로소 인간으로 깨어 있을 수 있다. 오로지 고통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삶과 오롯이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무한한 긍정은 얼마나 자주 극도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가. 사바세계의 이전투구도 멀리서 보면 우주를 수놓는 아득한 무늬가 아닐까. 나는 아직 귀의하려면 멀었나 싶다. 고통의 무늬들을 찬찬히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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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한길그레이트북스 30
M.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 / 한길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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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사회가 있다. 성스러운 사회와 세속적인 사회. 전자는 외계에 대한 경외감으로 충만한 고대 원시사회를 가리키고, 후자는 주술적 마인드 대신 과학과 합리정신이 지배적인 가치를 이루는 문명화된 근대 이후를 말한다. 엘리아데는 이 책에서 고대 여러 지역의 원시사회 문화 연구를 토대로 성스러운 사회의 원초적 세계관을 조망하고 있다.  

2. 원시사회 사람들이 미개하고 무지하다는 생각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근대적 인식이며, 그것은 사실 굉장히 폭력적이기도 한 관념이다. 영성적인 방면에 있어서 현대인은 원시사회 사람들에 비해 명백히 퇴화된 측면이 있다. 원시인들의 세계관은 현대인의 그것보다 훨씬 종교적이었으며 그만큼 신과 근접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의 현현인 자연에 유기적으로 귀속결합되어 있었으며, 자연과의 미메시스가 빈번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들은 대지와 나무와 연못과 바람과 소통할 줄 알았다. 외계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차 있는 그들에게 있어 '초자연적 영성체험' 혹은 '하이데거식 존재의 드러남'이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비현실적이거나 추상적으로 여기는 많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3. 이 책이 말하는 '성스러운 사회'는 '셈족 문화권'이 아니라 '인도 게르만 문화권' 이야기에 해당한다. 셈족 문화권이 인도게르만 문화권에 비해 보다 진보된 양태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셈족 문화권에서 잉태된 유대교의 특성을 살펴보면, 확실히 기존의 원시종교와는 차별화된 몇가지 양상들을 띠고 있긴 하다. 그러나 인류보편의 전통적 상징들이 유대교의 교리상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종교 역시 원시종교와 분리될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4. 예전에 바넷 뉴먼의 white zip이 천상계와 지상계를 연결하는 신단수로서의 상징을 갖는다는 미술평론을 읽고 이것이야말로 아전인수식 평론의 결정판이 아닌가 하여 실소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때의 비웃음이 전적으로 나의 무지의 소치였다는 게 자명해졌다. 머쓱하다. 결코 엉터리 평론이 아니었다. <성과 속>을 읽어보면 '성스러운 사회'에서 '기둥'이 갖는 상징적 의미가 상당하다. 즉, 기둥=세계수=신단수=세계 창건의 고정점(중심을 부여하여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변환시키는 결정적 존재)=초월적 세계와의 교섭을 가능하게 하는 제의적 상징물(하나의 존재양식에서 다른 존재양식으로 가는 존재론적 이행을 가능하게 함). 그 zip이 보통 zip이 아니었던 것.  

5. 생명의 끝없는 출현이라는 신비는 우주의 리드미컬한 갱생과 결부되어 있다. 이 때문에 우주는 거대한 나무의 형태로 상상된다. 코스모스의 존재양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갖는 끝없는 갱생의 능력은 나무의 생명에 의하여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게르만 신화의 이그드라실과, 메소포타미아의 생명의 나무, 아시아 지역 신화에 등장하는 불멸의 나무, 구약성서에 나오는 지혜의 나무, 메소포타미아, 인도, 이란 신화에 등장하는 청춘의 나무 등등(p.133). 우주를 상징하는 거대 수목은 현대에 와서도 예술 작품의 소재로 꾸준히 차용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레인트리 연작소설을 썼고, 클림트는 생명의 나무를 그렸으며, 가깝게는 우리나라 사진작가들의 단골 메뉴야말로 가지가 만발한 고목인 것이다.  

6. 거룩함과 신성함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세기를 초월하여 유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끝내 이성과 과학의 이름으로 규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끊임없이 잃어버린 태곳적 가치에 천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원시 인류의 생물학적 후예로서 갖는 본능적 향수인가. 유사 이래 최고의 '속'을 구가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기형성을 극복하기 위한 반동적 움직임일까. 알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초-합리적, 초-이성적, 초-과학적 가치들이 현재 내게 대단히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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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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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의미 있는, 의미를 찾는 활동이며,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는 활동이다. 의미는 생명을, 의미의 경험은 의식의 주체를, 의식의 주체는 살아 있는 인간을 전제한다. 생명이 없는 상황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없는 상황에서,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경험주체로서의 인간의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 의미는 의식을, 의식은 살아있는 인간을, 살아 있는 인간은 살아 있는 '나'를, 살아 있는 '나'는 생명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생존은 우주 안의 모든 의미의 원천이며, 나의 생물학적 존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명은 의미 있는 생명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생존함으로써, 내가 의식적 주체로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생물학적 나를 비롯해서 나의 삶, 남들의 삶, 세계, 우주는 의미를 갖게 되고 더 이상 허전하지 않게 된다. 나, 나의 삶, 남들, 세계, 우주가 허전하지 않으려면 생명체, 의식있는 생명체, 즉 인간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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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솔직히
존 로빈슨 / 대한기독교서회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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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서 저자는 예배의 목적과 기능이 통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통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뚫고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중심에서 피안을 발견한다고 하는 점, 즉 세속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로 보면 교종에 가까운 입장이고 우파니샤드로 보면 라마누자에 가까운 입장인 듯하다. 

6장에서는 기존의 율법주의적 윤리관(=초자연주의적 윤리관, 예를 들면 이혼해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등, 그리스도 교리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생활규범)의 허구를 지적하고 있다. 율법주의 윤리가 ①종교적 근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②예수의 교훈을 깊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도덕계율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하나의 비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사랑’에 의거한 상황윤리를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행위의 법칙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결의론적 방법을 통해서 상대적인 사물의 세계에 사랑을 적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노력을 말한다. (...) 이것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법규화 하지 않는 철저한 ‘상황윤리’이다.”(p.151) 

7장 부분- 헉슬리를 중심으로 말하는 자연주의적 그리스도교는 ①진화론적 인본주의이며 ②계시가 없고 ③신이 곧 사랑이며(사랑이 곧 신이 아니라) ④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 등을 특질로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견해를 반박하면서(p.167 하단~p.168 상단까지가 반박 부분인데 이해가 잘 안됨)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마지막 구절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까뮈가 비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헉슬리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 즉 극도의 형이상학적인 우주 이해를 말하는 건가? 인본주의자인 헉슬리는 이런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다.)  

한편, 초자연주의적 그리스도교 이해와 관해서 저자는, 영상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역할이나 힘이라는 것이 대단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이 영상들 자체가 아니면 실재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때 이것들은 우상이 된다고 경계한다. 상징이나 이미지, 영상들이 실재를 중개하는 대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게 될 때 위험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제 3의 길(내재신성론이라고 내 맘대로 이름 붙인 그 길)이 자칫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신화화’라는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그것이 결코 신화와 상징을 모조리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신화나 초세계를 신앙에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불신앙의 근거가 될 위험성을 가진 그러한 신화에 우리가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p.172) 

저자는 우상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와 사색의 훈련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이미 죽어버린 신화는 숙청해 버리고, 신 앞에서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색의 끊임없는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쉽게 모호론자로 타락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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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솔직히
존 로빈슨 / 대한기독교서회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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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숭고하게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신 개념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인격신 개념은 전통적인 대중의 신학이 말하는 신이며, 유아적인 사고수준이 만들어낸 추상 개념일 뿐이다. 마치 아이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듯, 정신이 성숙한 인류도 이제는 빅브라더로서의 신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독립을 위해서 저자는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기법이 ‘높이의 표현’에서 ‘깊이의 표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파울 탈리히의 말을 인용하여 ‘신이 그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우리가 애써야 하는, 저 밖에 있는 어떤 투영이나 하늘 저쪽에 있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이라고 하면서, '우리 삶의 깊이와 존재의 기반'이 곧 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유신론- 각종 존재들을 주재하고 만물의 운행에 개입하는 피안의 절대자로서의 신, 과학시대 이전의 신화적 개념, 이해 안 되는 자연 현상들을 얼렁뚱땅 이해하기 위해서 도입한 임기응변의 신, '이원론적 초자연주의' 
  • 반신론- 일부 실존주의자들의 견해, 포이에르바흐와 프로이트(신을 인간의 가장 심오하고 심층적이고 원숙한 정신영역의 '투사물' 내지는 '반영물'로 봄), 헉슬리("신이 저 밖에 참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하며, 신이라는 것은 진화의 과정 변두리에 생겨난 현상에 불과하다. 참된 종교는 자기 의식이라고 하는 더 높은 형태로 발전하는 진화의 과정과 자기 자신을 조화시키는 데 있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반신론이 동양사상의 범신론과는 함께 엮이기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이 책에서는 반신론과 범신론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일원론적 자연주의'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다(두 이론 모두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서의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도 세계를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저자는 하나의 우상을 헐어버렸다는 점에서 초자연주의에 대한 자연주의의 비판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종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깊이 있는 것들,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비감, 실존의 근원적 의미 파악 같은 것들'까지도 말살해버렸기 때문에 역시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계시의 깊이, 영원의 번쩍임,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의 심판, 무조건적인 것과 신비스런 것과 황홀한 것에 대한 의식, 이러한 것들은 순수한 자연주의적 범주만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p.70)" 따라서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모두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신학자의 입장에서- 초월적 신 존재를 부정하는 반신론자들의 도전에 맞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존속해야 할 어떤 이유와 가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나온 이론이 '신성내재론'(딱히 무슨 이론이라고 나오지 않아 자의로 명명함)이다. 저자가 말하는 신은, 우리의 삶의 중심 안에 있으며 삶의 한계가 아니라 중심에서 만날 수 있는 실재의 깊이다. 존재 전체의 궁극적 깊이,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이다. 이때의 신은, 실체로서의 존재 여부를 관건으로 하지 않는다. 이 때의 신은 그저 어떠한 '속성'이고 '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해맑밥님이 말씀한 '종교성'이라는 것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아닐까 한다. 물론 더 자세한 것은 오쇼를 읽어봐야 알겠지만) 

신성내재론(?)의 신 개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요약 정리하면 되려 왜곡만 시킬 것 같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신의 문제라는 것은 이러한 존재의 깊이가 실재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환상이냐 하는 문제이지, 저 푸른 하늘 저쪽 아니면 다른 어디에 어떤 '존재'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중대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문제, 즉 우리에게서 궁극적 실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이 초월해 있다는 것은 신적인 대상들이 있는 어떤 '초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유한의 세계가 그 자체 안에서 그것을 넘어선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스스로 초월해 있는 것이다. (...) 신은 자연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황홀성' 속에 그 초월적인 '깊이'와 '기반'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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