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계 -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 정신세계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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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했던 것에 비해 별 감흥이 없다. 몸으로 느끼질 못해서 그런가. 아마도 그게 내 한계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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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주체 -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브루스 핑크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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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이 “과학적 담화의 구조와 작용을 어떤 근본적인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는 하지만, 그 역시 과학과 마찬가지로 여러 담화들 가운데 단지 하나의 담화에 불과하며, 애당초 대문자 S를 가진 과학Sicence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브루스 핑크의 언급(267)은, 라캉이 세미나17에서 돌연 S1의 절대성을 부정해버렸던 사실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세미나11에서 S1과 S2는 원초적 억압에 대한 논의에서 도입되며, [$와 결합하는 단항적 기표] S1은 어머니의 욕망을 나타내고, [S1에 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최초의 이항적 기표] S2는 부성적 은유의 작용을 통해 원초적으로 억압되는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낸다. 세미나17에 이르러, 사실상 그 어떤 기표든, 이런저런 때에, 주인기표(S1)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단지 여하한 오래된 기표”에 불과한 S2에 대립되는 바, 여러 S1 가운데 하나로서 볼 수 있게 된다. -p.341 6장 미주 15

 

S1이 결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며 그저 여러 S1들 가운데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하나에 불과하다면, 정신분석이 탐구하는 진리로서의 무의식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라캉의 온갖 언설들과 수학소들이 무수한 이항적 기표들이라면, 그 모든 이야기들을 포괄하는 S1, 곧 라캉이 평생토록 심혈을 기울여 얘기하려 했던 무의식 역시 “단지 여하한 오래된 기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이론 역시 하나의 담론에 불과하다는 선언이 과연 자신의 이론 안에서 가능한가. 그렇다면 대체 라캉 이론과 무의식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라캉 이론이 과연 무의식을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론적 당위와 근거가 있는가. 정신분석이 정신을 분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기 붕괴적인 선언을 자기를 구축하기 위한 명제로서 정식화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기표든 주인기표(S1)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라캉의 주장 자체가 “마음속에 그려질 수는 있지만” “구성하기는 불가능한”, “위상학적 용어들로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반면, 정확하게 시각화할 수도 구성할 수도 없는” 크로스-캡(230)처럼 느껴진다. (대상a를 직면하도록 하기 위한 일환으로 분석자를 당혹과 혼란과 점증하는 의문들 속에 휩싸이게 만들면서 돌연 상담을 끝내버리곤 했다는 라캉의 임상적 방법론에 대응하는, 라캉 이론 추종자들을 정신차리게 만들기 위한 이론적 방법론인지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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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는 없다 - 성적 차이에 관한 라캉주의적 탐구 바리에테 3
브루스 핑크 외 지음, 신형철 외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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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왜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고 선언하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라캉이 거세, 남근, 그리고 남근 기능 등을 통해 결여로부터 개시되는 욕망의 순환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성 구분을 부정하면서, 존재의 결여의 기표이자 욕망의 순환의 최초의 개시자가 되는 바로 이 남근을 둘러싸고 각각의 주체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남성적인 범주(가)와 여성적인 범주(나)를 새롭게 구분한다. 상징적 질서에 안착해 있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이들 각각의 모습은 각자가 상이한 층위에서 기표와 맺는 서로 다른 관계 방식들에서 기원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타자가 빗금 쳐진 타자(A)와 대상a로 분리된다고 할 때,

 

(가) '남자'로 범주화되는 이들에게 있어서 타자(기표로서의 타자, A)는 이미 확고하게 들어앉혀져 있다. 따라서 남자의 문제는 대상(a)와의 문제이며, 남자는 대상(a)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주체화된다. 즉, 남자들의 경우 기표에는 이미 확실하게 순응되어 있으니 기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관계 맺는 것이 관건이다. 가령 아래 시에서 시적 화자의 태도를 보자. 이들은 꽃 혹은 오렌지라는 기표 자체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상을 꽃으로 혹은 오렌지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미 기표에 철저히 종속된 상태에서 물 자체로서의 대상에 육박해 들어간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 나는 한밤 내 운다. //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 탑을 흔들다가 /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전문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 마음만 낸다면 나는 /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 마땅히 그런 오렌지 / 만이 문제가 된다. // 마음만 낸다면 나도 /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 마땅히 그런 오렌지 / 만이 문제가 된다. //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 대는 순간 /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신동집, <오렌지> 부분

 

이들은 기표(형식)에는 종속되어 있으나 정작 기표의 내용(의미)으로부터는 소외되어 있다. 한마디로 영원히 껍데기밖에 모르는 상태이고, 그래서 늘 대상(a)와의 거리감 때문에 괴롭고, 얼굴을 가리운 신부의 실체를 의심하면서 한밤 내 울 수밖에 없다. 

 

(나) 사실은 결코 (나)라는 하나의 범주로 유형화시킬 수 없는 것이 이들 부류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은 언어를 가지고 의미를 전달 해야 하니 불가피하게 (나)라고 해보자. '여자'로 범주화되는 (나)들에게 있어서 타자(기표로서의 A)는 애당초 그 자체로 완전하게 들어앉혀져 있지도 않다. 따라서 여자에게는 타자를 주체화하고 그것을 그녀 자신 안에 구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여자는 타자(A)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주체화된다. 가령 아래 시에서의 시적 화자들의 태도를 보자. 시에서와 같이 ‘여자’로 범주화되는 이들이란, '그렇게 불리고 싶으면 불러드리지' 혹은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부르시던지'라고 말하는 유형의 인간들이다. 기표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기표를 비웃어버리는 인간들.

 

멋대로 하세요 / 나는 당신 것이예요 / 옷을 벗기시든지 / 주무르시든지 /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 그러나 사랑하진 말아요 / 밑지는 건 당신이기 때문에 / 당신을 위해 그것만은 안 되겠네요 / 심각한 척도 마세요 / 그냥 우리 편하게 지내요 / 자, 가까이 오세요 / 아니, 가까이 오시든지 마시든지 / 마음대로 하세요 / 당신의 욕망 앞에 나는 / 순진한 창녀예요 / 즐거움도 아픔도 모두 껴안는 / 그런 작은 구멍이예요 / 멋대로하세요, 당신 /나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 그의 것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홍영철, <시간의 구멍> 전문

 

이제부터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 (...) // 오빠! /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 오빠라는 말로 한 방 먹이면 /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 꽃이 되지 않으리 // 모처럼 물안개 걷혀 /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 불혹의 기념으로 / 세상의 남자들은 /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 (...) //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 그 마음을 /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 헐떡임이 사라지고 //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 비단구두 사 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 나 이제 용케도 알아 버렸다.  -문정희, <오빠> 부분

 

위의 두 시만 보면 (나)들은 일견 교활하기만 한 것 같지만 실상 이들은 기표를 비웃어버릴 수 있을 만큼 기표와 일체감을 못 느끼고 있기 때문에, 기표와의 관계가 느슨하기 때문에,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고통 받기도 한다. 아래 인용한 최정례의 시는 물질만능 사회로 대변되는 타자(A)와 나의 관계 맺기가 실패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미 물질사회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결코 물질사회를 떠나지 못할 것이면서도, 그럼에도 이렇게 자꾸만 부정의 심리를 표출한다.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 지지도 않고 /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쾅 박네 / 운전수가 튀어나와 /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 그 나물에 그 밥 / 쟁반만 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 그 노래에 그 타령 /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 훌쩍이면서 / 여기는 블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 블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블루베리 케잌을 만들자구 //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 그녀의 입술을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 그러니 제발, 날 놔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달란 말이야  -최정례, <그녀의 입술을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전문

    

기표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타자A와 관계 맺는 방식이 똑같이 느슨하다는 점에서 여우 같은 여자나 곰 같은 여자나 결국은 한통속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정희의 시 <오빠>의 화자는 오빠라는 기표를 비웃고 있지만, 실상은 바로 그 비웃는 방식으로 오빠와 계속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반체제 운동처럼. 매일 맞고 살면서도 결코 이혼하지 못하는 여자, 담배를 끊는다고 하면서도 절대 끊지 못하는 학생,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면서 여당과 놀아나는 야당 세력 등이 모두 (나)로 범주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표와 관계 맺는 방식의 특성상 (가)유형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는 주체가 된다면, (나)유형은 끊임없이 아니오를 연발하며 변덕을 부리는 히스테리 주체가 된다. (가)의 유형이 대상(a)으로부터 소외된다면, (나)의 유형들은 내용은 이미 누리고 있으면서도 정작 기표(A)와의 관계 맺기에는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에, 혹은 완곡하면서도 교묘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기표(A)로부터 소외된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기표를 자기 안에 확실히 들어앉힘으로써, "기표를 그녀 자신 안에 구성"함으로써, “기표와의 조우”가 일어남으로써, 주체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향유와 관련해서 (나)의 경우는 (가)와는 대칭적이지도 상보적이지도 않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가)유형이 전적으로 기표 세계 안에서만, 반드시 허락되는 것들 안에서만 남근적 향유($→a)를 누리는 데 반해, (나)는 전적으로 남근적 향유(La→∅)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때로 타자적 향유(La→S(A))까지도 누린다. 앞서 언급한 홍영철, 문정희, 최정례 시의 화자들은 (나)유형중에서도 주로 남근적 향유에 익숙한 이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의 화자들은 hommosexuelle로 남는다. “즉 그녀는 남자들을 사랑하고 남자처럼 사랑하며, 그녀의 욕망은 남자의 그것처럼 환상 속에서 구조화된다.” 재차 강조할 점은 hommosexuelle만이 (나)들의 전부는 아니며, 그중에는 반드시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유형들 중에서도 타자적 향유(La→S(A))를 누리는 주체를 시에서 찾아보면,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얼레지...... /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 딴딴한 흙을 둟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 얼레지는 얼레지 /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김선우, <얼레지> 전문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 채인 줄 /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 윗도리를 벗어 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 번의 생이 /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 햇살의 산통은 천 년 전처럼 /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김선우, <민둥산> 전문

 

<얼레지>보다는 <민둥산>이 좀 더 강력한 타자적 향유를 보여준다. 김선우가 누리는 이러한 향유는 종교적 열락과도 맞닿은 탈성화된 향유로서 같은 여자들한테도, 예를 들면 <오빠>의 문정희에게도 타자적으로 느껴진다. “그녀가 스스로를 한 남자의 견지에서 규정하는 한, 저 다른 국면은 불투명하고 낯설고 타자적인 것으로 머문다.” 김선우 식 여자들은 음탕하다. 같은 여자들이 보기에도. 왜냐하면 남근과의 그 어떤 관계도 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근적 향유의 보잘 것 없음마저 드러내기 때문이다. 욕망의 순환경제로부터 해탈(?)하여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김선우 식 여자는, 상징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움과 질투가 뒤범벅된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나)유형은 이렇게 부분적으로(결코 분리할 수 없는 일부로서의 부분)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면이 있기 때문에 (가)처럼 상징 질서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는 결코 할 수가 없다. 그들 가운데는 항상 김선우처럼 “전체를 의문에 빠트리는 어떤 사례”, “논리적 예외의 지위”에서 향락을 누리는 주체가 있는 것이다. 상징 질서에 의해 설정된 경계 너머로 나아가서 실재적 심급에서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탈-존'하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여자들은 결코 하나의 범주로 엮이지 못한다. 집합을 이루지 못한다. 유형화되지 못하고 늘 비-전체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여자의 기표는 빗금 쳐진 La. (나)도 정확히 말하면 (나)라고 써야 한다.

 

타자적 향유와 관련하여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정을 통해 헤라클레스를 낳은 인간 여인 알크메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 수 있겠다. 알크메네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능가하는 절대자(S1)와 동침함으로써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희열을 만끽하고,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 남자들(S2)을 일시에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남자들은 물론이고 제우스와 동침해본 적 없는 여자들 역시 그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실체와 내막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한다. 알크메네의 불러오는 배를 보며 어떠한 기미만을 어렴풋이 감지할 뿐이다. 당혹감과 허탈감 속에서 그들은 알크메네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공포와 신비를 느낄 것이다.

 

요약하면, "성적 관계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성들은 기표와의 관계라는 제3의 관계 속에서 각기 따로따로 상이하게 정의되며, 각각의 성들이 주체화 과정에서 관계 맺는 파트너들 역시 대칭적이지도 중첩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남자의 경우 대상a, 여자의 경우 남근적 향유의 대상이 되는 S(A)와 타자적 향유의 대상이 되는 ∅)

 

홀로 '승화'됨으로써 상징 질서 내의 욕망의 총량의 보존 법칙이 성립하지 않도록 하는, 욕망을 실재적 차원으로 누출시켜 버리는, 그럼으로써 구조주의적 한계를 초월하는 주체의 존재 방식으로서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주체의 방식, 즉 ‘탈-존’이라는 개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탈-존으로서의 타자적 향유라는 개념은 (...) 리비도 경제를 열려 있는, 총체화될 수 없는 경제로 만든다. 향유의 보존은 결코 없으며, 희생된 향유와 획득된 향유 사이의 비례적 관계는 결코 없다. (...) 타자적 향유는 근원적으로 불균형적이며, 계량불가능하고, 불비례적이며, 정숙한 사회에는 음탕한 것이다. 그것은 남근적 경제나 단순한 구조주의 안으로 결코 만회될 수 없다. 탈-존으로서의 대상 (a)처럼, 타자적 향유는 구조의 매끄러운 작동에 치유될 수 없는 효과를 남긴다.”

 

라캉의 성 구분 도식은 소위 말해 사회에서 정상인 급으로 분류되는 신경증자(강박증자와 히스테리증자)들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다. 왜 라캉은 언어 질서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폐쇄적이고도 자족적인 세계를 구축한 분열증자의 도식은 안 만들었을까. 안 만든 게 아니라 못 만든 거라면(왜냐하면 분열증자는 기표와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근 기능이 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주체이기 때문에), 분열증자야말로 그 어떤 도식으로도 포착할 수 없이 완벽하게 타자적 향유를 누리고 있는 인간 유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황병승이 보여주는 분열증적이고도 나르시시즘적인 자폐성의 시 세계로부터 그 어떤 상징적 질서의 억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 홀로 오롯이 충만한 희열을 체험하는 탈-존의 비결을 배워볼 수 있겠다.

 

요요 / 엄마 잘못했어요 / 검은 마을에 폭설이 내리고 / 흰 마을의 당나귀들은 / 빨간 풍선을 열심히 불었죠 뿌뿌뿌뿌 / 삼백육십 더하기 피눈물 곱하기 달 없는 밤은? / 모르겠어요. / 배고파 배고파서 새로 산 넥타이를 삶아 먹은 뚱뚱보 원숭이? / 발길질? 따귀 백 대? / 시간을 줘요 / 저 늙은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건 12시를 지나는 다음 생 / 그렇지만 딸아 엎드려뻗쳐. / 언제나 되돌아오는 / 요요 / 신경질 // 검은 마을에 검은 눈이 멎고 / 흰 마을의 당나귀들은 답답해 아유 숨 막혀 / 뿌뿌뿌뿌 빨간 풍선이 날아오르고 / 눈물콧물 뒤범벅의 우리 엄마, / 유리창 가득 출렁이는 저 / 새파란 달들 좀 봐라 엄마는 마르고 / 엄마 아닌 것들은 전부 뚱뚱하구나 / 그러나 뒤바뀐 옷장 더하기 눈물콧물 나누기 삼백육십 개의 회초리는? / (천년만년 벌받아라 미운 오리 새끼들!) / 흑백을 사이에 두고 걸어가는 모녀와 모녀와...... / 바다 대 호수? 구두 속 구두? / 아아 모르겠구나 딸아 / 창밖의 저 늙은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건 새벽을 알리는 12시 / 그렇지만 내 속에도 죽은 벌레들은 아주 많아요 엄마, 똑바로 엎드려뻗쳐. / 언제나 되돌아오는 / 요요 / 신경질 / 세월이 가도 / 콩알만한 요요는 / 미친년 정신없이 오락가락 흑색백색 / 함께 두근거려 봐요, 엄마!  -황병승, <너무 작은 처녀들> 전문

 

사족: 이런 식으로 시를 끌어들여 인용하는 것이 무리한 시도일 수도 있고, 야생의 시에게 올가미를 덧씌우는 이론의 횡포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라캉 이론을 임상적으로(?) 이해해보는 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글 다 썼으니 방생한다. 잘 가라, 시야. 아무에게도 잡히지 말고 누군가의 귓가로 자유로이 날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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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후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철학의 정원 7
피에르 테브나즈 지음, 김동규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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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을 읽다보니 현상학이란 걸 간략하게라도 짚고 가야할 것 같아 이 책까지 흘러오게 되었지만 철학적 용어들의 섬세한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질 못해서 어설프게 읽었다. 가령 본질이라는 낱말이 철학적 텍스트 안에서 쓰일 때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른 보다 엄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 같은데 철학용어사전을 읽어본다고 해서 그 의미를 일거에 습득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 같고. 좋은 책인 줄은 알겠으나 엉터리로 읽은 것 같아 아쉽다.

 

일단 중요하게 생각되는 지점은 저자가 후설이 철학자이기 전에 수학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학자는 이념적 가치나 본질을 조작한다. 이념적 가치나 본질이 사실적 실재성에 상응하는가 하는 여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면서 말이다."(35) 왜 라캉이 그토록 줄기차게 각종 기호를 동원해 수학 공식과 같은 표현을 고안해 냄으로써 "수학적 절차를 확장"(세미나 21)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념적 본질'이란 무엇일까. 수학자가 창안하는 이념적 본질이란 아마도 연산 법칙이나 함수 공식 같은 것일 게다. 게임을 ‘현상’하게 하는 룰도 마찬가지로 게임의 ‘이념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섣불리 연결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와 유사한 철학적 개념들을 열거해 보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대자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 라캉 식으로 말하면 언어적인 질서로 이루어진 상징계, 이데올로기, 푸코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선험 조건 등등 이런 성질의 것들을 후설이 말하는 '이념적 본질'과 유사한 개념(혹은 후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개념)으로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상학은 실재성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념적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현상학은 잠정적으로 경험에 침묵을 고하고, 그 주의를 오로지 단순하게 의식 안에서의 현실성, 요컨대 후설이 이념적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의식을 통하여, 그리고 의식 안에서 지향되는 한에서의 대상으로 그 주의를 돌리기 위해 대상적 실재성이나 실재적 내용의 문제를 제쳐두는 것이다."(35) 이렇게 현상학은 실재성을 '제쳐두고' 의식 안에서 그 자신을 직접적으로 현시하는 현상들만을 주목한다.  

 

한데 그렇게 되면 현상학은 독아론(집단적 독아론?)으로 빠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현상학이 탐구하는 ‘이념적 본질’이 심리학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주관적 표상들도 아니고, 의식에 주어진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실체화시킨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념적] 본질은 이념적 현실성이나 심리학적 현실성이 아니라 이념적 지향, 의식의 지향적 대상, 의식에 내재하는 것이다."(36) 이 부분은 뭔가 나로서는 선명하게 이해가 되질 않지만, 아무튼 심리학으로도 형이상학으로도 전락하지 않는 방법론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 칭하고 있다.

 

현상학적으로 환원된 세계에서 실재성은 의식에 내재한다. "환원은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는 그 사실이나 현존의 실재성(이것은 괄호로 묶인다)에서가 아닌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 안에서 나타나는 사실과 관계한다." 우리는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 안에서 나타나는 사실로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파악되는 세계, 즉 환원 이후 남겨진 현상으로서의 세계란, "이러저러한 지식의 영역 속에 있는 사실이나 '실재적'인 것", "우리가 자연적 태도로 세계에 대해 나타내는 경험적 판단", "이성적이고 그 자체로 과학적인 판단의 세계" 및 그 총체로서의 세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의식과 세계의 본질적인 지향적 연결"(39)을 말한다. "사실에 대한 모든 지식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이고 일차적인 항, 그 의미의 지지대 내지는 정초로서의 주체"는 세계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를 구성하는 의미작용의 일차적 항으로서 자아가 근본적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분절이 불가능한, 라캉의 용어로 하면 상상계적 상태 같은. 따라서 후설의 사유에서의 자아는 데카르트적 자아와는 다른 위상에 놓이게 된다. 데카르트적 자아보다 좀 더 상호적이고 동태적인 자아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막연하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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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zendental 2013-03-24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이념적 본질은 '노에시스' 작용으로 구성된 '노에마'일텐데요, 현상학계 내부에서도 노에마가 대상이지, 의미인지 그 지위가 불분명하여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노에마는 칸트의 사물도 아니구요, 그렇다고 심리학적, 주관적 표상도 아닌 것인데, 사태적으로 이해하면 황금산은 사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념적 현실성은 결여하지만 이념적 본질은 가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상학이 애매한 부분이 참 많습니다. 쓰신대로 의식에 나타나는 이념적 본질에 대한 탐구라는 점도 있지만, 그 이념적 본질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사물자체에서부터 출발하기도 하거든요. 전자를 정적, 후자를 발생적 현상학이라 부르구요.
현상학은 피에르테브나즈처럼 인식론으로 이해하거나, 하이데거처럼 존재론적으로 보기보다 리쾨르처럼 하나의 철학적 기술론, 방법론으로 보는게 지금은 더 의미있는 것 것 같아요. 영미철학 전통과 대비되는 사태 자체에 대한 기술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현상학으로 말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양 2013-03-25 14:39   좋아요 0 | URL
아... 어둔 밤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ㅠ_ㅠ 후설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접근법이 있다는 것도, 철학자들이 이렇게나 깊고 촘촘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고 신기합니다. 사유의 시원으로의 후설을 좀 더 공부해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Transzendental 2013-03-25 17: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사실 저야말로 현상학이라는 미로 속에 갇혀 있는 존재랍니다. 후설 글은 또 얼마나 난삽한지요. 어떤 분에게 후설 글이 안 읽힌다고 했더니 그 분 하시는 말씀이 '자네가 후설의 언어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탓'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의 언어 세계는 도대체 입구가 어딘지, 출구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지도 교수님께서는 모든 철학자들의 고향이 후설이라 후대의 철학자들이 하는 말도 전부 후설이 한 말이라고 하시더라요. 그것이 얼마나 타당하지는 전공자인 저도 모르겠지만 후설이 어떤 수원지가 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듯 합니다.

수양 2013-03-26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인 제가 까막눈으로 피상적으로나마 가늠해 보기에도 뭔가 격이 다르신 분 같아요^^; 데카르트 급 아우라가 느껴져요...-ㅇ-;;; 그래서 평생 미로 속에서 헤매이시더라도 아름다운 구속일 거 같은데요 하하
 
라캉의 주체 -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브루스 핑크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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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은유와 주체성의 재촉: 소외, 분리, 환상의 횡단이라는 세 가지 은유화의 계기에 의해 구성되는 정신분석적 주체는 '응결물로서의 주체'와 '틈으로서의 주체'라고 하는 두 얼굴을 갖는다.

 

(1)응결물로서의 주체

한 기표를 다른 기표로 대체하는 것에 의해 혹은 한 기표가 다른 기표에 미치는 사후적 효과에 의해 결정되는 의미들의 침전물. S→S2의 의미작용이 일어날 때 소외되는 주체. 즉, S→S2→S3→S4 등으로 의미화되는 $.

 

응결물로서의 주체인 $는 실재 속의 주체, 기의로서의 주체이다. 그것은 거세된 주체이기도 하다. 만약 $가 환상의 횡단으로 알려진 추가적 분리를 아직 겪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충분하게 거세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불충분하게 거세된 주체=대상a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혹은 점령된 상태(대상a/$)의 주체=아직 타자의 욕망(대상 a)을 주체화하지 않은, 그리고 타자에 대한 자신의 증상적 복종에 전염되어 있지만 그로부터 부차적 이득을 얻는 주체.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자신에 대한 원인으로 취하기 위해서는(환상의 횡단이 이루어져 '$/대상a'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에 종속된 바로서의 자신의 다소간 안락한, 만족스럽게 초라한 지위(불충분하게 거세된 주체의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

 

사후적으로 의미화되어야 할 어머니의 욕망(S1)을 단항적 기표라고 한다면, 타자의 욕망의 기표(=아버지의 이름)는 원초적으로 억압되는 이항적 기표(S2)이다. 이 기표는 아주 유일무이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 간의 이자 관계를 부수는, 그럼으로써 굴림대 역할을 하는 최초의 기표 S2. 분할선 위에 놓이는 최초의 기표 S1을, 최초의 기표로서 사후적으로 의미화시켜주는 S2. S2는 원초적 기표이며 의미없는 주인기표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기표들이 그것에게 주체를 대표하는 기표다. 예를 들면 <그것은 오렌지다. 오렌지는 감귤류에 속하는 열매의 하나다. 오렌지는 모양이 둥글고 주황빛이며 껍질이 두껍고 즙이 많다.>라는 언술에서의 오렌지가 최초의 아버지의 이름인 S2. 이 기표가 빠진다면 다른 기표들은 아무 것도 대표할 수 없다. 원초적 기표는 주체성의 필수 조건이다.

 

분할선 위에 놓이는 최초의 이항적 기표 S2는 의미를 결여하는 무의미적 기표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S2 자체의 의미는 없지만, 이 의미 없는 S2를 설명하기 위해서 S2를 중심으로 무수한 S들이 결집하고, S들은 자기들 사이에서 관계를 갖는다. 예를 들면, 오렌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감귤류, 열매, 둥근 모양, 주황빛, 두꺼운 껍질 등등이 하나의 계열로 묶이게 된다. 오렌지를 설명하려는 목적이 없었던 상황에서는 서로 간에 전혀 무관하고 무심했던 기표들이 별안간 오렌지를 중심으로 갑자기 하나의 계열로 엮이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최초의 이항적 기표 S2는 다양한 S들의 작용을 통해 언어의 운동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와 같이 "주체는 의미들의 성좌나 덩어리에 불과하다. 주체가 모든 S2들과 S1의 관계에 의해 생성된 의미들의 전체 집합에 있는 것이라면, 주체는 타자에 의해 제공된 의미들의 침전물처럼 보인다. (이때 주체의 진술들은 타자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거나 타자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을 뿐이다)." 타자의 장에 있는 주체. 타자에 의해 코드화된 언표로서의 주체. 타자 안의 의미로서의 주체.

 

(2)틈으로서의 주체

주체는 단순히 의미들의 침전(위에서 말한 응결물로서의 주체. 상대적으로 수동적이고 정적이고 화석화된 측면의 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주체는 기표들 사이의 연결고리의 형성이기도 하다(동적이고 생성적인 측면의 주체). 이것이 곧 틈으로서의 주체다. 틈으로서의 주체는 기표들 사이에 형성된 통로이다. ‘길트기’로서의 주체. S1과 S2를 서로 연결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주체. 두 기표들 사이의 연계를 확립하면서 실재 안에 틈을 낳는 어떤 것. “황급한 운동”으로서의 주체. 재촉으로서의 주체. S에서 S2로 날아가는 “불꽃”으로서의 주체(S가 S2와 만날 때 파생하는 순간적인 섬광). S와 S2 사이에 “연계를 창조하는” 주체.

 

S1/$이라는 도식을 신경증자의 경우에 적용해볼 때, S1이 담화로부터 고립된 어떤 기표를 지칭한다면, (S1=신경증자가 현재 고착되어있고 예속되어 있는 어떤 것. 신경증자가 지금 멈추어 서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막다른 골목, 일종의 정지점, 궁지) 분석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주체를 동결시키는(=주체와 고착을 이루고 있는) S1을 변증화하는 것이다. (S1을 다른 기표사슬과 연결시켜주기, 즉 S1을 S2, S3, S4...로 은유하기) S1의 외부를 도입하는 것. S1과 또 다른 기표 S2 사이에 대립을 확립함으로써 S1이 S2, S3... 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도록 유도하는 것.

 

그렇게 새로운 통로와 연결시켜서 분석자의 막다른 골목을 뚫어주는 분석가의 정신분석작업이 성공하면, 다시 말해 의미화 되지 않고 있었던 분석자의 S1을 의미화 시켜주고 나면, 주체를 예속하는 주인기표로서의 S1의 지위는 변한다. 또한 S1과 또 다른 언어적 요소 사이에 다리가 세워지면서 어떤 상실(a)이 발생한다. 틈으로서의 주체는 S1과 S2 사이에 은유의 창조적 불꽃이 튀기면서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가 다시금 의미와 존재 사이에서 분열된다. 4장에서 말한 맥동으로서의 주체가 바로 이 순간인 듯. 

 

S1가 S2로 대체되는(=은유되는) 사이에서 섬광처럼 생겨난 주체와, 그 와중에 발생한 상실(a)과, 좌천되는 주체 $. 주인기표가 변증화될 때, 은유화가 발생하고, 주체가 재촉되며, 주체는 원인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위치를 떠맡는 이 모든 동시적 과정들이 분리 및 추가적 분리(환상의 횡단)의 과정에 속한다. $<>a 상태에 머물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타자의 욕망을 주체화할 때(a를 변증화할 때, 환상을 횡단할 때), 그럼으로써 주체의 위치를 변경하고 증상을 재배치할 때, 소외는 극복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라캉에게 있어서 정신분석의 종료 시점은 증상이 해소될 때가 아니라 증상의 재배치가 완성될 때라는 것. 라캉 이론에서 증상의 해소 같은 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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