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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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자신의 불행이 강자의 무절제한 행동에 있다고 여겨 원한을 품는다. 그러나 외부를 향했던 이 폭력적 감정은 “돌발적 사태” 이후 철저히 내면화 된다. 모든 죄를 제 탓으로 돌려 양심의 가책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약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라고 하는, 삶에 반대되면서 우선시되는 경건한 가치들을 고안해내고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삶 자체를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금욕주의자들은, 삶을 “저 다른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다리”로 간주한다. 그들은 삶을 “반박해야만 하는 오류처럼 취급”함으로써 비로소 삶을 영위한다. 삶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누리는 이러한 자기 모순적 삶의 유형에서 니체는 극심한 원한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가장 깊고, 강력하며, 가장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기갈 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481) 

금욕주의자들은 오로지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한다. 그들은 욕망(생명력, 힘, 에너지)의 표출을 경계하고, 미의 표현이나 기쁨에 서툴며, 반면에 발육 부전, 고통이나 사고, 추악한 것이나 자발적인 희생, 자기 상실이나 자기 질책,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환희와 희열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전제조건인 생리적 삶의 능력이 감퇴할수록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자기를 서서히 말려 죽여가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기묘한 금욕주의자들. 이들은 퇴화되어가는 자신들의 삶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상을 찬양하지만, 기실은 이상에 지배당한 채로 언제나 죽음, 권태, 피로, 종말을 향한 소망 따위와 대항하여 싸우고 있을 뿐이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고안해 내어 반응적인 무리를 장악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유형화한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를 간호하는 건강한 자가 결코 아니다. 반응적 무리와 접촉한 상태에서 이들에 감염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간호하거나 치료하는 건강한 자의 존재를 상정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태어난, 가장 강력하게 반응적인(병든)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병든 무리의 구원자이자 목자이자 변호인으로서 무리를 통솔하고 지배하고 혹은 좀 더 중독시키기 위해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외견상으로는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제안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무리의 고통스런 현실을 보존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자이다. 

원한 감정의 내면화는 공동체의 성립이라는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성직자의 기만술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어쩌면 ①공동체의 성립과 ②무리의 지도자로서 성직자의 출현, ③원한 감정의 내면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역사 이후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병든 무리가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분개하며 책임자를 색출하려 할 때,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모든 고통의 책임이 오로지 너희들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다. 그럼으로써 공동체의 일원들은 더 이상 서로 짐승처럼 싸우지 않고 내면의 깊이를 지닌 온순한 양이 되어 저마다의 마음의 골방에 처박혀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죄의식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죽어버리면 안 되므로 성직자는 간간이 “작은 즐거움”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고 상호성을 지향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도록 조언함으로써 무리로 하여금 소소한 행복감에 젖도록 하는 것. 그러나 그는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며, 차라리 구원자의 탈을 쓴 사기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병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지 않으며, 그저 각종 위로 수단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니체는 종교 뿐 아니라 철학, 과학, 역사 등 각종 근대 학문이 품고 있는 금욕주의적 성향을 철저히 해부한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세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기술하려는 그 모든 학문적 노력에서 니체는 도그마에 사로잡힌 관조적 인간, 반응적 인간, 병적인 인간을 읽어낸다. 

대체 왜 인간은 현실의 저편에 금욕주의적 이상을 세워놓고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가. 인간은 왜 고통의 축제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지 못하고, 썩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 고통의 의미나 골몰하며 생을 소진하는가. 스스로를 긍정할 줄 모르는 병든 인간은 무언가를 의욕하기 위해 먼저 제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만 했다. 그리고 금욕주의적 이상 속에서 고통이 ‘죄’라는 관점으로 해석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다고 말한다. 이때의 구출된 의지란 바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하고 반발하려는 의지, “허무를 향한 의지”이다.

끊임없이 의미를 탐구하는 인간의 학문적 노력이 니체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긍정할 줄 모르는 반응적 인간의 병적 징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신이나 진리라고 하는 그 모든 금욕주의적 이상, 그것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지어낸 강박적 환상일 뿐인가. 진리를 밝히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며 신은 처형되어야 마땅한가. 그러나 초월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려는 끝없는 상승의지, 자신의 의미결핍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서 온전한 실존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찬란한 본능인지 모른다. 도그마에 짓눌린 채 대지에서 벌어지는 삶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인간도 가련하지만, 마음속에 그 어떤 정신적 항성(恒星)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 역시 딱하기는 매한가지 아닐까. 

탈리히는, 금욕적인 생활 속에서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애써야 하는 피안의 타자로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얘기한다. 모든 존재의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에 대한 이름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신이란 우리 존재 전체의 궁극적인 깊이이며, 우리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이다. 신은 자연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황홀성' 속에 그 초월적인 '깊이'와 '기반'으로 존재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니체가 단칼에 베어버린 독단적 권위와 도그마의 시체 위에서 우리는 그저 '허무'만을 곱씹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자명한 것들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탈리히가 정의하는 ‘신’ 개념은 이러한 물음을 풀어가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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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04-10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발제까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진심 '부럽습니다'ㅋㅎ

수양 2010-04-1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발제도 써가야 되는 빡센 프로그램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_-
 
철학의 외부 클리나멘 총서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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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부동적인 대지에 균열과 불안정의 틈새를 회복"하려는 푸코의 전복적 사유는 후기에 이르러 자기를 배려하는 윤리적 주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책 4장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실천이라는 다소 소박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푸코 사유의 개념적 난점에 주목하고, 그러한 난점을 극복할 만한 실마리를 모색한다.

이 책에 따르면, 푸코 사유의 한계점이라고 할 만한 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권력 관계에 주목하다보니 권력을 선차적인 것으로 상정해 버린 것. 사실 권력이라는 개념이 정의되려는 순간 이미 논리적으로 필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권력에 의하여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 권력을 통해서 특정한 활동의 형식을 부과하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의 존재. 그것은 “그대로 둔다면 제멋대로 활동해서 정해진 질서를 깨뜨릴 것이 분명한 위험스럽고 불온하고 무질서한 힘”이다. 리비도나 욕망 같은 것. 푸코는 전제가 되는 이 힘에 대해 미처 간파하지 못한 것.

권력을 정의하고 권력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전제가 되는 그 힘은, 그대로 놔둔다면 어떠한 질서나 형식, 정해진 관계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탈주적인 힘"이다. 권력이란 바로 이 힘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고, 이 힘을 길들이고 포섭하는 것이며, 이 힘에 어떤 형식을 부과함으로써 그것을 생산적인 어떤 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항’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선차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힘’이다. (탈주적인 힘의 선차성!)

이 책에서 언급하는 푸코 사유의 두 번째 한계점은 그의 권력 이론에 ‘적대’의 개념이 결여되어있다는 것. 푸코에게 '적대'의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말하는 적대란 결코 집단 간의 적대가 아니라, 지배집단과 개인, 혹은 권력의 전략과 개인 간의 적대일 뿐이다. 그는 적대를 모든 ‘개별자 간의 대립’으로써 사유하고, 그러한 사유는 결국, 권력관계나 권력의 배치를 그대로 둔 채 다만, 대상을 개별화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정체성을 묶는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또 권력에 의해 이미 주어진 개인적 지위에 대해 저항하는 소극적인 수준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저자는 푸코가 말한 ‘개별자 간의 대립’으로서의 적대와는 또 다른 종류인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로서의 적대 개념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리고 전자로부터 ‘저항’이 생겨나듯이 후자의 경우에는 ‘투쟁’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즉, 권력과 탈주적 힘 사이에서 ‘저항’이 정의된다면, ‘투쟁’은 다양한 ‘집단 간 적대’에 의해, 나아가 적대하는 생체권력들 사이에서 정의되는 것. 저자는 저항이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서 생체권력을 지닌 집단들 간의 ‘투쟁’과 결부될 때, 비로소 적대적 관계를 전복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가능성이란 단순히 권력관계의 전복이나 권력의 대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투쟁과 결부된 저항의 진정한 가능성이란, 권력관계의 형태변환, 즉 ‘배치의 전복’을 내다보는 것이다. 새로운 권력기술을 창조하여 기존의 권력기술에 의한 권력배치를 재편하는 것이다.

저자는 집단 간 적대(=몰mole적 적대)에 주목하여 투쟁과 결부된 저항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새로운 권력기술을 창조하여 배치의 재편을 기도하는 생체정치를 제안하지만, 과연 역사상 투쟁이라는 방식에 의해 배치가 재편되었던 기존의 사례가 있는가. 푸코의 고고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배치의 변화는 어떤 집단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연대하여 투쟁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아니라, 개인들 내면의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인식의 변화, 사유의 변화, 그것의 적층에 의해 이루어져 오지 않았나. 저자는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사유의 변화’를 생체정치에서 기대할 만한 효과라고 보는 걸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푸코에 따르면 그 어떤 배치 변화도 당대의 인간의 인식 수준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 배치의 변화를 당대의 인간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기획한다는 거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어쨌든, 푸코한테서 영감을 얻은 저자는 계급투쟁을 생체정치의 차원에서 다시 사고하자고, 미시적인 수준에서 혁명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자고 말한다. 계급적 관점에서, 몰적 적대의 관점에서 생체권력의 변환을 사고해보자는 것. 대중과 결합하거나 대중을 장악하는 문제를 생체정치의 문제로서 다시 정립해보자는 것. 생체정치적 효과의 차원에서 계급투쟁을 포착해 보자는 것. 아마도 저자는 자본주의체제 내부의 무수한 맹점으로부터 발아하는 조용한 혁명, 내부 안에 숭숭 뚫린 외부로부터 서서히 번져나가는 혁명, 초유의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확실히 이 챕터에서는 맑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맑스와 푸코를 혼합하기에는 서로 간에 층위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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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주체, 욕망 - 정신분석학과 텍스트의 문제
박찬부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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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네 가지 담론 구조를 저자의 설명에 기대어 정리해본다. 먼저 기본 골격이 되는 도식을 살펴보면,

 
  • "담론의 주체" 자리는 의미활동의 시작점이자 개시자가 되는 자리이다. 이 자리에 오는 기표는 담론의 성격을 결정짓는 행위의 지배자가 된다. "담론의 주체"는 "타자"를 호명하고, 그럼으로써 강력한 하나의 질서, 의미, 명제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이 자리는 위력을 지닌 지배자의 자리다. 발동자, 행위자, 행동자, 작인, 동인의 자리.
  • 화살표는 담론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전달 체계. 의미작용.
  • "타자"가 있는 자리는 담론의 수용자, 접수자, 담론의 주체에 의해 호명되는 자.
  • "진리"가 있는 자리는 담론의 개시자인 주체의 전제가 되는 자리이다. 그것은 담론의 이면에 숨은 진실이며, 주체를 존재하게 하고 추동하는 원인이 되는 자리이다. 그러나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직 상징계의 질서에 포섭되지 않은(그래서 상징계의 우리가 영원히 불완전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신화적 주체'이며, '전-상징적 의도'라고 일컬어지는 언어 이전의 자리.
  • "생산"의 자리는 주체가 타자로 호명됨으로써 손실되고 배제되는 것, 손실되고 배제됨으로써 생겨나는 것. 부재의 기표. 행위주체의 메시지가 전달된 결과로 드러난 생산물.
  • 이 패러다임의 상부구조는 담론의 명시적인 차원과 관련된다. 의식적인 차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차원. 표면적으로 이루어지는 의미작용. 의식의 심급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활동들.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 기호적 요소.
  • 패러다임의 하부구조는 심리적이고 욕동적인 것들. 언어화되지 못한 요소들. 이야기 되지 못하고 은폐된 것들. 감춰진 것들.

S1, S2, a, $ 가운데 무엇이 주체의 자리에 위치하여 의미작용의 개시자가 되느냐에 따라 각각 아래의 담론들이 나올 수 있다.

 

(1)지배자 담론


네 가지 담론 가운데 가장 원형적인 담론이다. 주체화 과정과 그로 인한 주체의 소외화 과정을 보여주는 담론이기도 하다. 지배자 담론에서 화살표는 '호명, 지정, 명령, 정의내리기' 등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그것은 살구색과 배홍색 사이의 색이다.>라고 정의, 호명, 지정, 명령함으로써 '그것'의 주체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살구색과 배홍색 사이의 색'이라는 기표로서 상징계에 편입되어 비로소 이야기되어질 수 있지만, 이러한 상황은 분열된 주체 $를 야기한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살구색'과 '배홍색'이라는 기표가 동원되고 있음에도 '그것'을 단순히 그 두 가지 색만 가지고 말해버리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배홍색과 살구색 이상의 어떤 색채가 분명히 녹아 있지만 살구색과 배홍색을 끌어들이므로써 놓쳐버린, 배제되어버린 그 오묘한 색깔이 대상 a가 된다.

 

'그것'은 '살구색과 배홍색 사이의 색'으로서 언어 질서 안에 안착하기는 했으나 끝내 해소되지 않는 내면의 불만족 때문에 자신이 잃어버린 그 오묘한 색깔이 도드라지게 나타난 이를테면 주홍 빛깔을 띤 사물에 집착함으로서 $<>a라는 판타지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때 S1에서 S2로의 의미작용이 강력하게 이루어질수록 $<>a로 표기되는 판타지 구조는 억압되고, 그래서 더없이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대외적 의미작용이 강렬하게 일어날수록 이 구조 또한 똑같이 강렬해지는 것.

 

 

(2)대학 담론


이것은 교육, 교리의 담론이다. 지식의 기표 S2는 여기서 지배적이고 명령적인 위치에 오며, 야생으로서의 미개한 어린아이와도 같은 a, 즉 아직 상징계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a를 가르친다. 즉 이 구조는 탄탄한 지식체계로 무장한 교수들의 지적 담론을 순진한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전수받는 구조. 그럼으로써 생겨나는 생산물인 분열된 주체$. 교육의 결과가 상징질서의 강조로 나타나고, 그것은 또한 의식과 무의식의 분할구도의 심화, 자기모순적 욕망의 발현, 몸통에 빗금이 쳐진 분열되고 소외된 주체성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

주목할 것은 S2의 이면에서 S2의 전제이자 토대이자 동인이 되는 은폐된 진리가 지배자의 기표 S1이라는 사실이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지식 체계로 표상되는 S2가 전면에 부각되는 대학 담론은 그 이면에서 지배자의 의지와 구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 "대학 담론은 지배자 담론의 점증적 폭로행위를 통해서 그 자신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힘과 권위의 상징인 지배자 담론이 억압되면, 체계적 지식으로 무장한 대학 담론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서 지식 체계 밑에 숨겨둔 지배자 기표를 가동시킨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히스테리 담론


히스테리 담론에서는 지배자 담론과 대학 담론에서 억압되었던 분열과 소외의 주체$가 전면에 부각되어 지배자의 자리에 온다. 분열된 주체 $는 상징질서 안에서 명명된 주체S1을 심문하면서 S1이 S2(S1을 설명하는 각종 지식들)를 생산해내도록 만든다.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여 이를 이론으로 정립하고 그 후 다시 그것을 반박하고 또 다른 가설을 세우는 과학의 성격은, 끊임없이 S1을 심문하여 S2를 생산해내는 히스테리 담론과도 맞닿아 있다.

결핍과 분열, 소외의 주체 $는 힘과 권력의 상징인 S1에게서 불안을 막아줄 안정적 보호막을, 그리고 삶의 무의미성을 덮어줄 의미와 아이덴티티를 끊임없이 구한다. 그럼으로써 분열된 주체는 생산된 지식 S2로부터 잠깐의 쾌락을 얻는다. 이때 대상 a(근본적인 결핍의 요소)는 새로운 지식 S2와 환상구조를 형성함. 히스테리 담론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상 a가 진리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 이것은 이 담론의 숨겨진 진실과 동력이 대상 a라고 하는 근본적 결핍임을 보여준다.


(4)분석가 담론



새로운 이론 또는 새로운 사상에 대한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지배자 담론이 상하좌우 모두 바뀐 구조. 구조의 의미 역시 지배자 담론과 대극적이다. 즉 지배자 담론이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 주체가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이라면, 분석가 담론은 세계가 균열하는 과정이고, 주체가 외부와 대면하는 과정이며, 그럼으로써 분열과 괴리가 생겨나고 새로운 주체가 생겨나는 과정이다.

분석가 담론에서는 대상 a가 개시자, 작동자, 의미작용의 시작점이다. 지배자 기표들이 포착하지 못한 실재계의 '무엇'을 전면에 부각시켜 의미작용의 개시자가 되는 것. 은폐되었던 것들,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의미화되기 시작하는 상황. "분석가 담론은 기표들, 특히 지배자 기표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실재계를 (전면에)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소외의 주체들이 자신의 소외적 상황과 지배자 기표들과의 비일치성을 자각하도록 할 수 있고, 새로운 지배자 기표의 생산(S1)에 추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대상 a의 토대이자 동인이 되는 이면의 요소가 S2, 즉 기존의 지식이라는 것, 진리의 위치를 꿰차고 있던 기존의 불충분한 지식이라는 것. 일단, 전면에 등장한 대상 a가 분열된 주체 $를 불러낸다. 그럼으로써 생산되는 지배자 기표S1. 그러나 이때 생산된 S1은 이전의 S1이 아니다. 새로운 담론, 즉 대상 a가 분열된 주체를 불러내고 그것을 즉물적으로 눈앞에 나타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 정반합적인 과정을 통해 재편 작업을 거친 새로운 S1을 만들어 내는 것. 새롭게 재편된 S1은 진리로 추앙받던 기존의 지식 S2와 행복하게 변증법적으로 결합한다.

*

도식에 등장하는 기호들이 무의식의 언어를 구성하는 기표들이라는 점에서 라캉의 담론 도식은 무의식적 욕망의 작동 메커니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식의 원리를 응용하여 언어(기호, 의식, 표층)적 요소와 심리(육체, 무의식, 심층)적 요소가 상호적으로 긴밀하게 맞물려 일어나는 각종 사회적 현상들을 분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거대하게 움직이는 사회적 무의식의 작동 양상을 분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라캉이 제시한 도식이 그저 설명의 필요를 위해 도입된 하나의 허구적 가능성일 뿐 그 자체로 절대적 이론은 아니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이 도식을 가지고 '도식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넌센스이고, 또 그럴 수도 없다고. 사실 위의 다이어그램에서 $, S1, S2, a 네 가지 기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담론 모형은 총 24가지다. 저자는 라캉이 아마도 네 가지 요소들의 순서(지배자 위치에 어떤 기호가 오느냐 하는 순서)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그 순서에 따라 네 개의 담론만 설명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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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03-1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이 대학원에서 보드리야르니 푸코니 데리다니 떠드는게 이해가 하나도 안간다고 그래서 대략 저도 아는대로 구조주의니 후기 구조주의니 차연이니 에피스테메니 하는 개념을 제 아는만큼만 짤막하게 설명해주고는 입문서 몇개를 찝어줬는데 얘가 글쎄 '오빠 근데 라캉은?'이러는거에요. 그래서 주저하다가 걍 어차피 그거 제대로 아는사람 없으니깐 그냥 너도 아는척하고 아무말이나 해버리라고 그랬죠-_-;;;;; 아니 라캉은 매번 다시 읽고했는데 어째 남은건 하나도 없는게 완죤 법학(?!)같아요ㅠㅠ

수양 2010-03-12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뭐 읽어도 도무지 오리무중이라 이렇게라도 적어놓는 거예요 긁적;;;

도다리맨 2011-01-0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너무 알기 쉽게 잘 설명해주셨네요 맨날 네 가지 담론 이곳 저곳에서 봐도 완전히 이해가 안되서 너무 답답했는데 님의 글 덕분에 앞으로 좀 더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수양 2013-03-28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답답해서 정리 해본 건데 도움이 되셨다니 쓴 보람이 생겨서 기쁩니다. 그런데 제대로 정리한 것인지는 저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_< ;;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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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에는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챕터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추가되었고, 삽화가 도판과 도판해설로 대체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근대적 지식의 배치와 노마디즘>이라는 제목의 보론도 하나 실려있다. 새롭게 들어간 ‘들뢰즈와 가타리’ 챕터는 단순히 부연된 부분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철학사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겨도 될 만 하다. 이 부분이 추가됨으로써 이전까지의 이야기는 마치 ‘들뢰즈와 가타리’를 설명하기 위한 포석처럼 느껴진다.

보론에서 저자는 ‘인문학의 위기’가 이 시대의 새로운 사태들에 대처할 만한 담론의 생산 능력 부재 탓이라고 지적하면서, 기존의 근대적 담론의 인식론적 배치 모형을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책에 언급된 내용만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은 아예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푸코의 개념들까지는 어느 정도 모형 안에 끼워 맞춰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것들'의 항에 놓일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이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배열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일그러진(그래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양새가 될 테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러한 배치 모형 자체가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규정하는 모형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만약 이 배치 모형 안에서의 '변주'가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갖기 어렵다면, 생물학이나 화학을 가리켜 흔히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 역시 수명이 다 한 학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겉핥기를 겨우 마친 자의 성급한 결론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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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양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차 세계대전 무렵 분석철학을 정초했던 사람이 쓴 책이니 정말 오래된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한철하 번역으로 95년도에 대한교과서에서 나온 것인데, 알라딘 도서목록에 없어서 최근에 나온 근사한 책으로 아무 거나 올린다.) 실제로 오늘날 탈근대 철학의 아버지 뻘 되는 철학가들이 이 책에서는 당당히 현대철학자로 분류되어 있고, 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선구자로 부각된 니체 역시 아직 비합리주의적 파시즘의 원류로 등장한다. 저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개정되지 못한 이런 부분들이 물론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대전 시기 자유진영 철학자가 당대를 바라보던 관점을 가늠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다.  

러셀은 현대에 와서 방만해진 무정부주의적인 경향들이 급기야 고삐 풀린 낭만주의로 치달아서 그에 반하는 여러 가지 반동사상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근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대타자의 통제 기능이 더욱 더 세련되고 은밀하고 정교하게 진화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가 극에 달했다고 하는 이런 대목은 어쩔 수 없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 중간적 타협 철학으로 나온 게 정부와 개인에게 각각 그 한계를 부여하려고 하는 ‘자유주의 사상’이고, 이보다 더 철저한 반동은 신에게 부여했던 지위를 국가에 대해 부여하는 ‘국가 숭배 사상’(파시즘)이라고. ‘공산주의’는 이와는 상관없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국가 숭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와 대단히 유사한 사회가 된다.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은 냉전 시대에 숨을 거둔 20세기 철학자 러셀이 서양철학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강력한 도식이 된다. 즉, 러셀은 기원 전 600년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긴 발전을 통해 철학자들이 두 부류로 분류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사회적 결합을 강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합을 완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전자는 인간성에서 비합리적인 부분을 더 중요시하며, 과학을 적대시하고, 교의체계를 제창하고, 영웅적 행위를 중시하는 규율주의자들이다. 후자, 즉 자유론자들은 극단의 무정부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과학적이며, 공리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격정을 반대하고, 심오한 종교들과 적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이진경이 주체의 구축과 해체를 키워드로 하여 서양철학사를 맥락화했던 데 비해 러셀의 이런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구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신식이고 무엇이 구식인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철학사가 전혀 다른 키워드와 잣대로 새롭게 맥락화 될 수 있다는 점이리라. '맥락화'란 어디까지나 의미 부여의 문제이고 해석하기 나름의 문제이므로, 고정불변의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에 별처럼 빛나고 있는 위대한 철학가와 철학가를 연결하여 거대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란, 모든 창조적인 작업이 그러하듯 언제나 설레고 떨리는 일이겠다. 그리고 이렇게 별자리를 연결해나가는 일은 최신의 담론으로 논의되는 당대의 작업일 수도 있겠지만, 철학사를 공부하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을 정립하기 위한 평생의 작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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