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총서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세속의 철학자들>에서 하일브로너는 복지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국가가 경쟁에서 도태되고 희생된 자들을 구휼함으로써 시장을 견제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국가와 시장이 결코 상호대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둘은 보완적 관계를 이루어 자본주의체제를 견고하게 만든다. 월러스틴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역할은 경쟁에서 배제된 자들이 완전히 도태되어 시장 활동 자체를 못하게 되지 않도록 그들을 적당히 구휼하고 또 이를 통해 사회적 불안을 해소해서 장기적으로는 노동공급 확보와 유효수효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면, 시장은 공동체 사회를 파탄내면서 거기서 생명과 활력을 얻고, 이렇게 시장이 파탄낸 공동체 사회를 국가가 다시 어느 정도 시장의 구미에 맞게 재정비해 놓으면 시장이 또 다시 파탄내고 하는 이러한 일련의 반복적 과정이 곧 자본주의체제인 셈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는 이렇게 국가와 시장의 쌍끌이작용(?)과 더불어 헤게모니 국가의 지속적인 교체(네덜란드-영국-미국) 속에서 돌아간다. 그런데 왜 헤게모니국가는 지속적으로 교체되어야 하는 걸까. 일단 헤게모니지위를 차지한 국가는 후발주자국가들의 성장으로 인해 점차 생산에 대한 독점력이 줄어들고 헤게모니 지위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지금의 미국의 경우와 같이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월러스틴은 이런 식으로 조만간 망하는 게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고 본다. 자본주의세계체제 그 자체도 종언을 고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적으로 생산비용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임금(노동력을 착취할 제3세계 지역이 점차 전세계적으로 줄어들어가고 있음- 더 이상 공장이전할 곳이 없음), 생산재료비(생산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환경오염처리비용이 가면 갈수록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늘어남, 자연자원은 고갈되고 폐기물 매립지는 점차 줄어듦. 이 모든 난관이 결과적으로 생산비 상승을 불러일으킴), 세금 내야 할 비용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 수지가 맞으려면 판매 가격이라도 올라야 하는데, 이마저도 더 이상 오르기 힘들다. 자본주의체제가 발달할수록 모든 나라의 생산력이 향상되어 너도나도 생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생산의 과점적 조건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는 와중에 체제에서 도태되고 약자가 된 집단들의 투쟁은 격화된다. 문명, 민족, 종교, 인종 기타 등등 사이에서 갈등과 투쟁은 첨예화되고 사회는 점점 더 카오스 상태로 되어간다.

월러스틴의 이론대로 생각해 봤을 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가 다음 주기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미국식 축적시스템(법인기업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축적시스템이 생겨나야 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국가간체계 또한 재조직되어야 한다. 과연, 인류는 현재의 자본주의체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축적시스템을 개발해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네덜란드-영국-미국의 계보를 잇는 다음 주자를 탄생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인류는 몇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를 뛰어넘어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구축해낼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세계체제 이후의 어떤 체제를 상상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치 인류 전체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에 대한 상상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인류 정신의 대격변이었듯이, 체제 자체의 전환이라는 것 역시 정신의 개벽일 것이다. 사회제도나 경제체제는 물론이고 생활양식, 풍습, 가치관, 예술사조 등 각 방면에서 근본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인식의 틀을 가진 주체가 도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과연 인류는 또 한 번 정신적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0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이 내게는 좋은 입구가 되었다. 베블런, 좀바르트 등등 차근차근 알아가 보고픈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특정한 생산양식이나 경제 제도로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물질적 발생과 그 발생을 둘러싼 총체적인 사회 관계,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운용하고 조정함으로서 사회를 특정한 모양새로 구축해 나가는 권력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 헤게모니 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 레짐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살펴보는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아니, 필요하다기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다. 

나 자신은 그저 해수의 표면을 부유하는 미립자와도 같은 존재이지만, 그리고 그러한 처지에서 오는 무력감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심층의 거대한 해류를 관찰하고 그 흐름을 조망해 보는 일은, 그 자체로 내게는, 다소 이상한 얘기 같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뭔가 상당히 유미주의적인 탐구활동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목도하는 일들에 대해 느끼게 되는 부당함과 무력감, 공포 등등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나는 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정치적인 색채를 배제하고, 마치 생물학자가 경이에 가득차서 탐미적인 시선으로 자연의 생명현상을 탐구하듯이 공부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OW TO READ 니체 How To Read 시리즈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1 모든 길들여진 영혼, 시들고 야윈 영혼에게 니체는 훌륭한 양분이다. 니체를 통해서 우리는 강해진다. 격전을 준비하는 스트리트파이터의 주인공처럼 두 손을 불끈 쥐고 바운스를 타게 된다. 니체가 위험한 것은 그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파이터-그것도 투쟁적인 세계를 헤쳐나가는 파이터가 아니라, 세계와 대결하고 세계를 전복하기 위해 투쟁적인 파이터-의 철학이기 때문이리라.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니체의 사유에서 “지적으로 성숙하고 진정으로 도전적인 부분”과 “철학적 환상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야말로 고루한 학자들이나 하는 바보 같은 짓일 것 같다. 차라리 우리는 니체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파이터의 철학’임을 감안하고, 그 사납고 오만하고 ‘근자감 쩌는’ 문체에 기꺼이 중독되는 편이 낫겠다.

2 니체가 보기에 진리는 종교나 도덕과 같이 인간이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낸 개념으로 종의 보존과 생장을 위한 효용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고 편파적이며 부정확하고 오류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배움을 이어나가고 진리를 추구하길 멈추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배움을 통해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정신은 끊임없이 지식을 흡수하고 소화하고 거기서 영양을 취하고 생장한다. 이는 곧 부단한 지적 대사작용이다. 활동능력의 증강은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좋음’이고 ‘선’이다. 개체의 활발한 생명활동으로서의 진리에의 열정은, 그런 면에서 이미 충분한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11-27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7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나키즘은 하나의 이론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반-아나키즘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갈래의 아나키즘들이 보여주는 전반적인 성격과 경향을 종합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아나키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나키즘을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강권주의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에 맞서고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를 뜻한다. 내가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국가 없이 과연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아나키스트들은 상호부조와 자활자치가 이루어지는, 농업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의 소규모 공동체 사회라면 굳이 정부 조직이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협약과 협동조합, 공동체끼리의 연대와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나키스트들: 푸르동(소유란 무엇인가), 바쿠닌(국가주의와 아나키, 국가 없는 사회주의), 머레이 북친(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크로포트킨(상호부조론, 빵의 쟁취), 페레, 고드윈, 도로시 데이, 헤나시,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류스페이, 리스쩡, 콜린 워드, 신채호, 장일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에의 의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수남 옮김 / 청하 / 1988년 2월
평점 :
품절


인간이 모든 도덕적 가치에 대해 회의하고, 기독교적 세계의 허위성에 대해 구토를 일으키기 시작할 때- 니힐리즘이라는 징후가 시작된다. 인간이 절대 가치를 회의하고 구토하게 되는 사태로까지 나아가는 힘, 니체는 그것을 “성실성”이라고 말한다. 성실성은 도덕(도덕적 가치판단- 문명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해 계발된 덕목)이 양육한 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여물어서(?) 자기를 양육한 도덕에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철저한 니힐리즘이란 (...) <성실성>이 양육되어 온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덕을 믿는 일의 결과이기도 하다.”(31)

물론,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인간에게 나름의 이익이 있었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흐름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의 비소성(卑小性)이나 우연성과는 반대로, 인간에게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인간은 그리스도교적 피안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재난이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을 인간으로서 경멸하지 않도록, 사는 것을 적대시하지 않도록, 인식하는 일에 절망하지 않도록 지탱시켜 주었다.” 이는 하나의 “보존수단”이었다.(32)
 
모든 발생하는 사건의 배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에는 여하한 진리도 부재하며, 사물의 여하한 절대적 성질도, 여하한 물 자체도 없다는 것을 통찰한 인간이 돌파구로 마련하는 것은 세계를 미망(迷妄)으로 판결하는 일이다. 그리고 생존의 성격을 참이 아니라 거짓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공(空)으로 여기는 일이다. 그러나 참-거짓의 분별 또한 단순화된 세계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설정해낸 가상적 가치일 뿐이다. “무가치성에의 신앙”을 보여주는 이러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이며, 하나의 중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36)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된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생에 관해서는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무든 종류의 원망(願望)의 무엇인가를 간파했기 때문이다.”(39) 즉, 그것은 생 자체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절대적 X, 대타자, 원대하고 심오한 모든 가치들, 이상, 초인간적인 권위에 의하여 세워지는 불변하는 가치, 우리가 위안으로 삼고, 순응하고, 복종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정신적으로 매달리는 모든 가치들에 대한 환멸이다. 그것은 세계의 무도덕성, 무목적성, 무의미성을 간파한 자가, 오로지 힘의 작용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통찰한 자가 가질 수 있는 환멸이다.

이렇게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의 해석(모든 도덕적 가치판단,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철저하게 몰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 그 자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까닭에, 마치 생존 가운데에서는 여하한 의미도 전혀 없기라도 한 양, 마치 모든 것이 헛수고이기라도 한 듯이 여겨지는 것이다.”(59)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절망적인 ‘헛수고’는 아니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기는 있는가? 니체는 이에 대해 “이 사상(니힐리즘)을 그 가장 두려워해야 할 형식으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말하자면 의미나 목표는 없으나, 그러나 무(無) 가운데로의 하나의 종국을 갖는 일도 없이 불가피적으로 회귀를 계속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존, 즉 <영원회귀>. 이것이 니힐리즘의 극한적 형식이다. 즉, 무(無, 무의미한 것)가 영원히!” 

니체가 무(無, 무의미)의 영원성을 말했을 때, 그것은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적 영원성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어떤 궁극의 지향점도 파기해버렸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성이란, 주름과 표피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면적 현상의 영원성이다. 거기에는 삶을 초월하는 그 어떤 절대 가치나 목표도 없이, 그저 끊임없는 현상으로서의 연기(緣起)와 유전(流轉)만이 있을 뿐이다. 끝없는 우연과 변화, 생멸이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그것은 유희다. 호쾌하게 웃으며 언제든 뛰어들 만한, 대단한 유희다. 유희에는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 과정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얻을 뿐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과정으로부터 목적 표상을 제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긍정할 것인가?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 과정 내에서 어떤 것이 이 과정의 순간마다 매번 달성되고 게다가 항상 대등한 것인 경우이리라.” 

니힐리즘은 기본적으로 데카당스의 징후이다. 그러나 “퇴폐, 퇴락, 폐물이, 그 자체로 단죄 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증대의 한 가지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데카당스 현상은, 삶의 무언가의 상승이나 전진과 동일하게 필연적이다. (...) 사회가 정력적으로 대담하게 전진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더욱 실패나 기형아로 가득차고, 더욱더 쇠퇴에 가까워진다. (...) 데카당스 자체는 배격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니힐리즘은 이의적이게도 퇴락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하다. 초월적 가치나 신앙을 파기해버리고도 생존한다는 것, 즉 일체의 무게중심 없이도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강함인 것이다. (그런 가치들- 철학이니 도덕이니 종교니 하는 모든 지고의 가치에 의존하여 정신의 안정을 구하는 인간이야말로 "정신의 허약자, 정신병자, 신경쇠약자"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약함’을 인간의 전반적인 성질로 본다; “사람은 약함을 욕구한다. 왜? 대체로, 사람은 필연적으로 약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을 약함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사람은 약함을 극복함에 있어서, 강장한 방식에 의하여 하려고는 않고, 일종의 시인이나 도덕화에 의하여, 바꾸어 말하면, 해석에 의하여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강장한 방식이란? 그것은 억제나 극기, 금욕이 아니다. 무반응과 무관심과 무시다! “우행(愚行)을 예방하기 위한 처방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데카당스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에서 더욱더 더 나아가, 즉 더욱더 철저히 몰락하여, 궁극적으로는 몰락의 극단으로 치달아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 “철저한 몰락은, 파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의 철저한 자기 몰락으로서, 본능적 도태로서 나타난다. (...) 훨씬 깊숙한 본능의, 자기 파괴나 무(無)에의 의지의 본능의 의지로서의 파괴에의 의지.”(61) “우리가 극단적 몰락으로 치달을수록 곤궁이 커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62) 몰락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화”다. 철저한 몰락 속에서 맞이하는 철저한 부정. 그리고 오는 광명. 능동적 니힐리즘. 최후의 니힐리즘은 능동적 니힐리즘이다. 그것은 “절반은 파괴적, 절반은 반어적인, 정신의 가장 강력한,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한 삶의 이상으로서의 니힐리즘”이다.

최후의 능동적 니힐리스트, 그는 의도도 의미도 목표도 없이 그저 우연과 변화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영원한 생존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줄 아는 자”다. “여하한 신앙개조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우연이나 무의미의 대부분을 그저 용서하기만 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 인간에 관해서는 그 가치를 상당히 할인하여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일에 의해 비소해지고 약화되는 일이 없는 자이다. 즉, 대개의 불운에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성장에 도달하고, 이 때문에 불운을 그다지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건강에 가장 부한 자- 스스로의 권력에 확신을 가지고, 인간의 달성된 힘을 의식적으로 과시하면서 대표하는 인간.”(63) 

니체는 생에 대해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절망했던 자였으면서 또한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무한한 생의 환희를 느끼고 박장대소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과 도덕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이 극단의 페시미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나의 <비극의 탄생>의 여기저기에서 번져 나오고 있듯이), 나는 정반대의 것을 스스로를 위하여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인간만이 웃는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고뇌하는 것이다. 가장 불행한 가장 우울한 동물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장 쾌활한 동물이다.”(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