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국가권력을 넘어서 - 책세상총서 책세상총서 19
로버트 롤 볼프 지음, 임흥순 옮김 / 책세상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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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철학적 에세이. 이 책에서 저자가 아나키즘을 옹호하기 위해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칸트적 주체다. 칸트적 주체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자율에 대한 의무이며, 자율의 의무란 행위에 관해 자신이 스스로 최종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체계 내에서 국가의 권위가 정당하다는 것은 개인의 행위에 대한 최종적 결정을 국가가 내리도록 허락하는 것이므로 자율적인 개인의 의무는 본질상 국가의 권위와 상충된다, 는 것이 저자의 논리이다.

물론, 실제 상황에서 인간은 결코 이성의 선택과 자유의사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칸트적인 주체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욕망과 격정과 경향성에 따라 행위한다. 또, 자율적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기도 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때로는 자발적으로 자율에의 의무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런 선택이 오히려 윤리적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적 주체가 도덕적으로는 결국 아나키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논리적 귀결이 내게는 흥미롭게 읽힌다.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과 국가의 정당한 권위를 조화시킬 만한 제도로 저자가 유일하게 꼽는 정치제도는 만장일치적 직접민주주의이다. 오직 만장일치의 경우에만 사회 구성원 누구나 윤리적 주체로서 자신이 제정한 법에 스스로 따르는 상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분히 이상적인 경우다. 저자는 자율성과 권위가 참으로 양립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철학적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모든 정부를 정당하지 못한 체계로 간주함으로써 정부가 명령할 때마다 그 명령에 복종하기 전에 그것을 평가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영역에서 자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어떤 형태이든 그 시점에서 가장 정의롭고 인도적인 것처럼 보이는 정부 형태를 암묵적인 약속 하에 따르는 것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이러한 현실순응적 전략(?)을 수용하게 되면, 실제 삶의 행동양식이나 문화적인 선호에 있어서 아나키즘을 지향할지라도 정치적으로는 (예를 들어)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사민주의를 지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정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현실정치에 있어서는 큰 정부를 지지하는 상황이 결코 역설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아나키즘을 표방하면서 현실정치에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야말로 칸트적 자율성을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노예화를 자초하는, 다분히 반-아나키즘적 행동일 수 있겠다.

저자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도덕적 자율성을 포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칸트적인 기준에서는 죄(-_-)라고 말한다. “사람이 현실적 불가피성에 의해 다른 사람의 지배를 아무런 생각 없이 기꺼이 수용하고 준수한다면 그는 어린 아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다른 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 그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면, 나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가 되는 자유와 이성을 버리는 것이 된다. 이것은 바로 칸트가 말하는 자의적인 타율의 죄를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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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3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지음, 송병헌 옮김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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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가 본질적으로는 관념론적 이상주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과학적 인식론의 영역에서도 벗어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에 ‘과학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것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일까. 베른슈타인은 “학설 체계가 궁극적으로 종결되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반대로 개방적으로 새로운 사실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되고 수정”되는 과학의 본성을 언급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자칫 사회주의가 이론으로서 순수 과학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로 오도될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보다 적합한 명칭은 ‘비판적 사회주의’라고 밝히고 있다.  

교조적 사회주의를 경계했던 베른슈타인에게 '비판적 사회주의'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에게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를 공동 소유로 대체함으로써 경제생활을 전체의 계획적 규제 아래 두고자 하는 국민 경제 체제”도 아니고, “넓은 범위에서 전체의 힘에 의해 집단적 소유의 기초 위에서 영위되는 사회 상태”도 아니었다. 이 책에서 그는 “특정한 역사적 관계 아래서 스스로 성취되어가는 역사적 발전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말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는 ‘계획’이나 ‘도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물질적 기반으로 한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인 것. 수정주의자인 그는 체제의 붕괴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체제의 개선 가능성과 점진적인 변혁을 강조한다.   

사회 이론이 반드시 과학적 정합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관념이라든지 인류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이 책의 연륜(?)이 느껴진다. 특히 진보와 관련해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가 자유주의의 이념적 계승자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이런 희망적인 믿음 자체가 사회의 위험계급을 진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진통제로 유통되었으며 사실상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급진주의)의 갈등을 적절하게 조율하고 봉합함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이루어내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는 월러스틴의 분석을 떠올려보면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설령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관점이 공허한 희망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여전히 베른슈타인의 글을 읽는 것은 유의미한 일일 것 같다. 가라타니 고진이 칸트를 읽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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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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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거대서사가 붕괴했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선언에 새로운 담론을 하나 더 추가한다.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는 거대서사가 붕괴하고 작은 이야기들의 다원화가 이루어지지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다원화라는 것은 결코 방만함이나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의 범위를 설정하고 각각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작은 이야기들은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추출된 요소들이 다양한 조합을 거쳐 만들어진 일종의 유닛 같은 것이다.

작은 이야기들을 질서지우는 비-설화적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확실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의 말대로라면 포스트모던이 말하는 권위로부터 해방된 자유라는 것은 대단히 한정된 공간과 범위 속에서만 영위되는 자유이며, 그것은 결국 자유를 가장한 속박에 불과한 게 아닌가. 데이터베이스는 비-설화적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메타적 권위, 어떻게 보면 ‘한층 진화된’ 새로운 메타적 권위가 아닐까.

저자가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통해 탐색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성격은 애초에 포스트모던이 처음 철학적 담론으로 부상했을 때의 뉘앙스와는 약간 다른 것 같고 어떤 면에서는 리오타르의 주장을 전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주목한 것처럼 오타쿠를 소비사회의 새로운 포스트모던적 인간 유형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 또한 하나의 거대서사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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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백승욱 옮김 / 창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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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시대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체계에서 미지의 새로운 체계로 옮겨가는 이행기가 될 것이라는 월러스틴의 분석을 접하고 나면, 맑스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윤리적인 당위가 아니라 인식론적 당위에서 그런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세계체계가 이행기에 접어들면서 국가가 더 이상 예전만큼 세계체계의 조정기제로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고, 국가의 기능이 무력해짐에 따라 개인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안전을 스스로 구축하는 '고대적 해결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폐쇄적인 소규모 지역 공동체가 발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맑스 역시 최종적으로는 계급과 국가의 소멸, 그리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전망하지 않았나. 물론, 진보사관에 따라 선형적인 발전도식을 적용해서 생산양식이 점진적으로 다음 단계로 이행해 나갈 것이라고 본 점이나 소수 권력집단의 독재를 필연적이고 정당한 절차로 파악한 점 등 맑스의 이론에서 세부적으로 비판이 끼어들 만한 여지는 많다.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 도래할 사회에 대한 맑스의 최종적 전망은 이 책을 읽을수록 의미가 있어 보인다.

과연 인류 역사의 흐름에서 사회주의 공산국가의 성립과 몰락은 하나의 에피소드(혁명의 동력이었던 반체계적인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냉전시대 발전논리에 따라 결국 점진적 자유주의로 수렴됨으로써, 냉전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단일한 세계체계가 유지되었던 현실)였는가, 아니면 거대한 이행을 예고하는 맹아적 증후였는가. 현재의 우리로서는 가늠할 길이 없다. 그것은 사후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가의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만일에 도래할지 모르는 사건, 즉 우리가 아는 세계가 종언할 경우를 위해 우리는 후자의 경우 또한 진지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사상이 그렇겠지만, 맑스 역시 언제든 미래적인 사상으로 재조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맑스 뿐만 아니라, 맑스와 불화했던 아나키스트 푸르동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맑스와 달리 필연적인 이행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반혁명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긴 맑스주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인간과 생명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국가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혁명이 이루어지는 즉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력한 국가가 혁명의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의 목적을 배신할 것”이라던 푸르동의 날카로운 예언은 러시아의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왜 실패하고 말았을까. 월러스틴은 볼셰비키들이 '이중의 속박'이라는 딜레마를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즉, 볼셰비키들이 근대적 국가간체계를 전복하고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일단 기존 체계의 권력을 탈취해야만 한다. 정치 조직인 그들로서 이것은 곧 ‘국가조직 내에서의 권력 장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들은 기존 체계를 전복한 게 아니라, 외려 부르주아나 군주를 대신하는 국가조직의 새로운 수장으로 등극하는 격이 되어 결국 세계의 변혁은 불가능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은 실질적으로 국가자본주의로 전락함으로써 자신들이 그토록 부숴뜨리고자 했던 체계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러시아 혁명 정권은 결국 똑같은 괴물이 되어 근대적 세계체계인 국가간체계에 완벽하게 통합되었다.  

볼셰비키의 딜레마와 한계가 그런 것이었다면,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이런 난점이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뜻과 이념을 사회에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힘, 즉 실질적인 정치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에게 강제력을 발휘해서 혁명을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고 조정해 나아가려는 권력조차 거부했다. 모든 강압적 권력 행사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내세우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뜻은 있었지만 힘은 (그들이 스스로가 거부했기 때문에) 없었다. 이들의 딜레마, 즉 아나키스트들은 어떻게 정치화될 수 있는가, 어떻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나키즘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오늘날의 여러 사회운동집단에게도 여전히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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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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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필연성의 세계 속에서 좌초당한 주체는 어떻게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를 거슬러 스피노자식 결정론적 세계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되찾으려 했던 칸트를 소환해낸다. 우선, 칸트가 제3이율배반이라고 말한 두 명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명제-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것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현상이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인과성이 아니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반대명제- 무릇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자유의지에 의한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는 정명제는 스피노자식 결정론을 보여주는 반대명제와 대립한다. 그렇지만 칸트는 양쪽 모두 참 명제라고 말한다. 서로 반하는 명제들은 어떻게 각각 참으로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괄호 치기’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정명제에서 말한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괄호 쳤을 때 현상(자연필연성의 세계)를 발견하고, 반대로 반대명제에서 말한 자연필연성을 괄호 쳤을 때 자유를 발견한다. 괄호를 어디에 치느냐에 따라서 전자의 경우에는 인식적 판단, 후자의 경우에는 윤리적 판단이라는, 현상을 받아들이는 전혀 다른 태도가 동시에 가능해진다.

가령,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우리가 그의 행위에 격분하는 까닭은 그가 저지른 범죄가 사회적 구조적 모순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의 죄를 추궁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자연의 필연성이나 구조적 불가피성에 괄호를 치고 나서, 그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상정하고 그에 따른 윤리적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대전제인 자연의 필연성에 수긍하되 그것에 과감히 괄호를 침으로써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체의 자유다. 자유는 결코 자연(섭리)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칸트가 말한 ‘자유의지’에서의 ‘자유’가 오로지 ‘자유로워지라’는 의무, 당위, 정언명령에 따름으로서 존재하는 자유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정언명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기서 저자는 사르트르를 끌어온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자유란 데카르트적인 주체에게 주어진 그런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인 자유가 아니라, 실존적 긴장과 불안에서 비롯하는 자유다. 자유로워지라는 정언명령에 따름으로서 존재하는 자유란, 형벌과도 같은 실존적 고투 속에서 비롯하는 자유인 것이다.

칸트는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성을 봤다. 그에게 있어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였다. 선악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보거나 개인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견해는 둘 다 개인의 주체성과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오로지 사회적 인과성에 따라서만 판단하는 경우일 뿐이다. 이것은 윤리적 판단이 이루어져야 할 일에 대해 인식론적 판단을 해버리는 것과 같은 오류다. 칸트는 사회적 인과성에 괄호를 치고, 오로지 개인의 자유(자유로워지라는 당위에 따르는 자유)에서 그 도덕성을 찾았다.

자유로부터 도덕성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자유가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칸트의 윤리는 책임윤리다.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사회적 인과성의 법칙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간주함을 의미한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니체의 운명애로 이어진다. 니체의 운명애가 “인생을 타인이나 주어진 조건 탓으로 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면, 칸트에게 있어 운명애는 “여러 원인들에 의해 규정된 운명을 그것이 자유로운(자기원인적) 것인양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칸트와 니체의 오묘한 접점을 발견해 낸다.

칸트가 말한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는 니체적 운명애의 실천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로 재탄생한다. 그렇다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나? 저자는 책임 추궁에 응답하는 한 가지 바람직한 윤리적 실천이 원인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내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가토 노리히로였다. 전후책임 논쟁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가토 노리히로를 비판하는 쪽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이 책 <윤리21>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얘기하고 있는 윤리적 주체의 모습을 가토 노리히로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사죄와 망언 사이, 창작과 비평사, 1998)를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그가 전쟁 책임을 둘러싼 일본 내부의 자기분열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파고들므로써 굉장히 힘겨운 자기 해부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감히 굉장히 힘겨웠으리라고 짐작하는 까닭은 그의 글이 일본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논쟁의 포문을 여는 그런 글을 썼을 때 가토가 이미 어느 정도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각오하고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그것이 추궁에 응답하는 가토 나름의 한 가지 치열한 방식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렇게 믿는 한에서(이 전제가 중요하다), 나는 가토 노리히로에게서 가라타니 고진이 칸트를 경유하여 이야기한 윤리적 주체의 모습을 발견한다.   

전후책임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인들이 보여주는 자기분열적 모습은, 그들 자신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죄에 대해 후손으로서 사죄해야 한다는 묘한 상황에서 기인한다. 죽은 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후손이 느끼는 책무감은, 이 책 1장에서 가라타니가 아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부모가 책임지는 일의 부당함을 얘기한 것과 똑같은 차원에서 부당한 일일 수 있다. 한 마디로 전후책임 문제와 관련한 일본인의 자기분열적 태도는 '조상의 죄로부터 자신이 무관하다는 개인주의적 태도'와 '전쟁 책임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도덕적 규범' 사이의 간극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가토가 고안해낸 해결책이 바로 일본 전사자들을 우선적으로 애도하자는 제안이었다.  

가토에게 있어서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일은 가라타니가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죽은 자를 영구적으로 추방함으로써 불안해진 공동체를 재확립하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내부의 자기 분열적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는 가토에게 애도의 문제는 보다 복잡한 의미를 갖는 사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적 상황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과는 무관하게 가토가 제안한 자구책은 올바르지 못했다. 왜 올바르지 못한가에 대해 이 책 7장에서 가라타니는, 죽은자가 이미 타자라는 이유를 든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죽은 자는 소통이 불가능한 영원한 타자다. 때문에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일은 죽은 자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자기 위안이고 자기 만족일 뿐이며, 그것은 죽은 자를 산 자의 방편으로 활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가토에 대한 가라타니의 반박은 호소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토가 전후책임문제와 관련해서 지식인 사회에 발표한 몇 편의 글들이 윤리적 주체의 실천으로써 충분히 의미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서 가라타니가 인용한 소세끼의 소설 <모방과 독립>의 한 구절을 재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보나 그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감추지도 빼지도 않고 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쓴 공덕에 의해 바로 성불할 수가 있습니다. 법률에 걸리고 징역은 살게 됩니다만, 그 사람의 죄는 그 사람이 쓴 것으로 충분히 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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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12-16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 이책 진짜 좋아해요! 세번이나 읽었다능. 근데 놀랍게도 하나도 기억안남ㅋ-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