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의 총살은 어떤 식으로든 수십만 명의 소련인과 연루된 일이었다(그런 점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인 피점령 폴란드 소재죽음의 공장들에서 중요한 작업은 소련인들이 했다.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에 소련인 직원들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군이 부역자를 필요로 하고, 찾아냈음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역활동은 증오스러운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가열차게 저항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지켰노라‘는 ‘단합된 소련 국민이라는 신화에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은 잊혀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 P613
소련 유대인의 크나큰 인명 피해, 그 대부분은 소련이 침략한 땅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들 유대인은 폴란드, 루마니아, 발트 삼국의 국민이었으며, 독일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 고작 21개월(폴란드의 경우), 또는 12개월(동북부 루마니아와 발트 삼국의 경우) 소련의 치하에 있었을 뿐이다. 전쟁 중 고난을 겪은 소련 국민은 대부분 독일군의 점령이전에 소련 체제에서 고통받았다. 소련과 나치 독일의 동맹 때문이었다. 이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서 전쟁은 1941년에 시작되었으며, 고통받은 국민은 "평화롭던 소련 인민 "이어야 했다. - P617
소련 유대인은 "근본 없는 코즈모폴리턴" 이면서 "시오니스트일 수 있었다. 미국에이끌리는 유대인은 미국의 새로운 위성국가를 지지할 수도 있으리라. 이스라엘에 이끌리는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새 종주국을 지지할 수도있으리라. 어느 쪽이든, 아니 둘 모두일 수도 있을 텐데, 소련 유대인들은 더 이상 믿을 만한 소련 국민일 수 없었다. 적어도 스탈린의 눈에는 그랬다. - P624
홀로코스트는 많은 유대인을 공산주의로 이끌었으며, 소련을 해방자로 여기는 이념을 따르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는 폴란드의 통치권을 유지하고 스탈린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지도적 유대 공산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1946년 12월, 베르만은 이미 그 방향으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유대계 폴란드인의 사망자 공식 통계 발표치는 크게 늘리는 반면, 유대계는 줄여서 양쪽 다 같은 숫자(300만 명씩)가 되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이미 정치적 문제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위험하고 어려운 사안이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그것이 스탈린의 이념 노선에, 그리고 현재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 P635
서구와 미국 역사가와 기념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적 역사왜곡을 시정하려 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동쪽에서 희생된 거의 50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나치에게 죽은 거의 500만 명의 비유대인 희생자는 간단간단히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동방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어간 사실과 서방에서의 지리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없다. 유럽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아무리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자고 말한다고해도 말이다. 스탈린의 제국은 히틀러의 그것을 포괄했다. 철의 장막은 서방과동방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도 장벽을 마련했다. 이제 그 장막이 걷힌 상태에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볼 수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있었던 유럽의 참된 역사를, - P669
모든 죽음은 숫자가 되었다. 이오시프에서 유니타의 죽음 사이에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블러드랜드에 1400만 명 이상의 피를 뿌렸다. - P671
집단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유대인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들은살아남은 유대인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이 집단수용소가 유명해진또 다른 이유다. 그들은 수용소에 대해 설명했다. 오래 일하다가 끝내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 끝 무렵에 들어와 바로 해방된 사람들이. 유럽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독일의 정책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라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아우슈비츠 등지의구덩이, 가스 차량, 살인 공장 등으로 실행되었다. - P675
독일 점령 상태에서 대부분의 폴란드계, 소련계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가 주요 살인 공장이 되기 전에 이미 학살당한 상태였다.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 복합시설이 1943년 봄에 자리잡았을 때,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4분의 3 이상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다시 보자면, 소련과 나치 체제의 손으로 의도적으로 살해된 수없이 많은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은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가동하기 시작할 무렵 이미 끝장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푸가의 ‘코다 밖에 안 되었다. - P676
그로스만 소설의 등장인물 하나가 부르짖듯이,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일정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사람으로여겨질 권리를 빼앗는 그들의 능력에 있었다. 따라서 유일한 답은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일, 외치고 또 외치는 일뿐이었다. 유대인과 부농은 사람이다.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 모두가사람임을 알았다. 이것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허구적 세계‘라고 불렀던 것에 저항하는 문학이었다. - P681
스탈린은 유토피아를 재정립하는 능력이 있었다. 스탈린주의 자체가 목표 수정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추동했던 유럽 혁명에서, 그 혁명이 불발하자 소련의 방어로 후퇴한 것이었다. 1920년, 북은 군대가 공산주의를 유럽에 확산시키는 데 실패하자, 스탈린은 후퇴 계획을 마련했다. 일국사회주의,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를 하나의나라 소련에서 완성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5개년 계획이 재앙을 가져오자, 그는 수백만 명을 의도적으로 굶어 죽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정책 추진 과정의 일환이라 설명하고, 그 덕으로 무서운 국부이자 정치국의 지배자라는 위상을 굳혔다. 1937년에서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를 부농과 소수 민족 박멸에 내세운 뒤, 그는 그것이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 P684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 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는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치 학살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베네시나 예렌부르크 같은 비범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그런 유혹에 빠졌다. 그 체코 대통령과 유대계 소련 작가는 그런 식으로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했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 P703
"나는 믿고 싶었기 때문에 믿었다." 그에게는 도덕 감각이 있었다. 비록 잘못되었지만, 마르가레테 부버노이만이 카라간다의 굴라크에 있을 때, 동료 재소자가 그녀에게 "달걀을 깨지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많은 스탈린주의자와 그동조자들은 대기근과 대공포가 빚은 희생이 정의롭고 안전한 소련국가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토록 희생자의 규모가컸던 것은 그만큼 희망도 강력했다는 뜻이다. - P705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일이다. 죽은 뒤에 서로 경쟁하는 국가별 추념에 따라 명단에 실리고,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것, 그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빠지는 일이다. - P715
블러드랜드의 대량학살의 역사에서, 기억은 다음과 같은 이름을포함해야만 한다. 포위 속에서 굶어 죽은 100만 명의(100만 배의 하나의) 레닌그라드 시민들 각각,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독일군에게 살해된 310만 명의 (310만 배의 하나의) 소련 전쟁포로 각각,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소련 체제 아래 굶어 죽어야 했던 330만 명의(330만 배의 하나의) 우크라이나 농민 각각도 이들의 숫자를 완전히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들을 나타내고 있다. 무시무시한 선택을 해야 했던 농민 가족, 구덩이에서 서로의 몸을 덥혀주려 애쓰던 포로들, 레닌그라드에서 가족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 타냐 사비체바 같은 아이들, - P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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