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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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손에서 놓고도 한참을 생각했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겠는데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난감했다. 평소 사회 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뭐라 말해야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비난해야한다면 그 대상은 무관심으로 일관한 일인으로서 손가락질을 면하기 어려웠다. 일부러 모른 척 했다면 자괴감때문에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무거운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건 그런 비난과 자책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뿌리박힌 잘못된 인식과 선입견의 바로잡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피하지 않고 바라봐주길 바랬을 것이다.


주인공 정원은 I시의 변두리 공부방에서 만난 정아가 네팔 이주노동자 자히드의 아이를 가졌고 결혼할 거라는 말에 모진 충고를 하게 된다. 정아의 서러운 반박에 어릴 적 고향이었던 동두천을 떠올리며 20년동안 잊고 지낸 줄 알았던 그 곳을 찾아간다. 미군기지 주변에서 어려운 시절을 나고 자랐던 정원은 변해버린 동두천에서 자신의 첫사랑 재민을 만난다. 미군과의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재민은 동네에서 튀기로 놀림받고 외면당하며 모진 세월을 견뎠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재민이와의 대화속에서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의 괴로움이 그제서야 조금씩 현실감을 띄었다. 흑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은 사촌 윤희언니의 아이를 안아주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일이며, 친구들과 조금씩 어긋났던 재민이를 보듬어주지 못했던 일, 양색시들의 포주노릇을 하던 부모님밑에서 자라 늘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있던 친구 해자, 외국인에게 입양되는 걸 자랑스러워하던 경숙이까지 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으로 버거워하며 동두천에서의 시간을 견뎌낸 그들의 고통이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며 끼니를 채우고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나, 미군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나 결국 미군부대로 인해 먹고 사는 건 매한가지인데 혼혈아들과 양색시에게 가해지는 멸시적인 눈초리나 거친 입방아는 다분히 모순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그들을 자신과 별개인 이방인 취급하는 것만큼 천박한 것은 없는데도 그 당시 동두천의 주민들과 지금의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나마 성공한 혼혈아들에겐 끝없는 찬사와 부러움이 따르지만 가슴 한 켠으로는 반쪽짜리 핏줄일 뿐이라는 은근한 멸시와 반발도 따른다. 도대체 근거없는 질투심의 발로이다.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주인공 정원처럼 잊고 지낸 줄 알았던 어두운 터널을 제대로 다시 걷게 만드는 글이었다.


이 책을 덮은 후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부분에서 뿌리깊은 자각이 생겼다. 나와는 관계없는 소수의 이야기일 뿐이니 귀담아듣지 못하고 나 역시 그들을 외면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똑같이 상처주지 않았을까하는 조심스런 후회였다. 이 거대한 뿌리 밑에서 나는 일개 잔뿌리밖에 안되는 인간인데 다른 뿌리와 섞였다고 그들을 밀어내려고 안간힘썼던 건 아닌가 싶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두운 역사속에서 묻어두고 싶었던 실패작처럼 조용히 스러지고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보다 더 꿋꿋히 그 시절을 견뎠고 고단한 삶을 메마른 땅에 뿌리내렸다.


주말 TV다큐멘터리에서 쓸쓸함이 묻어난 이태원거리가 비춰진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거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5년이상 거주해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있었고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편안해져야 할 그 곳에서도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을 먼저 경계한다고 한다. 한 때 알아주는 외국인 거리 명소였지만 장사가 안 돼 하나둘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제 거리는 활기참보다는 휑한 느낌이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는 많은 외국노동자들에게 우리나라의 인심은 얼마나 각박할까. 월급을 떼먹는 사장, 열악한 근무환경, 복지혜택이라고는 받을 수 없는 그들을 사실 나조차 동정으로 바라보거나 한 때 배타적인 마음에 외면하기도 했었다. 이제와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속좁은 인간인지 되새기게 되었다. 나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방관했을 우리 모두가 지금이라도 그들을 인정하고 더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는 한 명 한명의 인식이라도 바꿔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작가가 바라던 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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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둑 1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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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고 대단한 책이라는 찬사를 등에 업은 책을 이제야 만났다. 도둑이라는 좋지 않은 명사를 붙였음에도 주인공 리젤이 흡족해할만큼 책도둑이란 말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묵직한 두께의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책도둑으로 등장하는 리젤의 이야기를 죽음의 신이 화자가 되어 풀어간다. 독특한 구성과 해석이 자꾸만 앞장을 되짚어 읽게 만드는데 사신이 모든 사물과 형상을 의인화해 묘사하면서 여러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국내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의인화 묘사때문에 중간 중간 옆 길로 새면서 이야기의 쉼표가 되어준다. 

배경은 독일의 작은 마을 헴멜, 히틀러가 독일을 점령한 후 세계제2차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수용소로 보내고 있다. 그 거리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덤을 파는 사람을 위한 안내서>란 책을 훔치고 남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이별한 열살소녀 리젤 메밍거가 후버만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리젤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아코디언을 멋지게 연주하는 아빠 한스 후버만과 엄하지만 따뜻한 엄마 로자 사이에서 전쟁과 나치의 억압으로 위태롭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한스에게 아코디언을 가르쳐준 에릭 판덴부르크의 아들 막스(유대인)가 나타나면서 리젤의 집안은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된다. 가족의 비밀이 되어버린 막스는 지하실에서 2년이란 긴시간을 보내는동안 리젤과 가족에게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스가 길거리를 행진하는 유대인에게 빵을 주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막스는 리젤의 가족을 떠나게 되고, 시간이 흘러 유대인 행렬에 합류해 거리를 걷는 막스와 리젤은 다시 한 번 마주친다. 작가가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들었던 장면이 리젤의 이야기속에서 재연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로자에게 빨래를 맡기는 시장집의 부인과 몇 번의 교류끝에 친해진 리젤은 부인의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게 되고 후에는 서재의 책을 훔치게 된다. 부인의 암묵적인 동의와 배려하에 책을 훔치는 리젤을 단순히 도둑이라고 몰아버릴 수 없다. 그 책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힘멜이라는 공간에도 패전의 그늘이 짙어지며 폭격의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화자가 된 죽음의 신은 전쟁통에서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거둬들인다. 등장인물들이 죽을 것을 미리 예고하는 사신에겐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죽음은 당연다는 듯한 비난섞인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과연 이런 경우엔 어느 쪽이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똑같이 한 인간의 일그러지고 그릇된 욕망때문에 희생된 재물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그 시절에 관해 끊임없이 시험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일제치하의 시대나 전쟁의 폐해에 아직도 몸서리치고 이를 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악몽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우리의 뇌리에 각인될 것이고 힘을 잃은 영혼들에게 묵념하고 있을 것 같다.  

이들이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 사람들이?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의 눈길에 냄새에 취해 그의 문장, 문단, 책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을까? 로자 후버만이 책임을 져야 할까? 유대인을 숨겨준 사람인데? 아니면 한스가? 이들 모두가 죽어 마땅할까? 아이들도? ....(중략)
인간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책도둑의 언어로 그들의 관해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을 동정했다. 물론 그 당시 여러 수용소에서 내가 퍼나르던 사람들에게 느끼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지하실에 있던 독일인들은 물론 동정할 만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지하실은 샤워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샤워를 하라고 그곳에 보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에게 삶은 여전히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p.109

그리고 리젤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시절에 가장 상처받기 쉽고 예민한 유년의 시간을 견뎠다. 훔친 책과 선물받은 책을 통해 위로받고 사랑하고 행복해했다. 죽음은 늘 책도둑의 가까이 있었지만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고 갈기갈기 찢었지만 책도둑은 살려주었다. 안네의 일기가 유대인의 불안한 삶을 대변하고 어른들을 반성하게 했다면, 리젤의 이야기가 바른 생각을 가진 독일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자 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동안 리젤 또래의 경계에 있는 아이들의 삶을 많이 보아왔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렇다고 질풍노도의 청소년으로 분류하기도 모호한 나이의 아이들말이다. 그들은 대부분 인생이란 날카로운 가시에 할퀴우고, 감당하기 벅찬 현실에 맞닥드리면서도 아이같은 순수함을 마지막 보루로 간직한 채, 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시기의 자아를 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되돌아 봤을 때 야생마처럼 함부로 날뛰며 치고 박았지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리젤의 아름다운 순간을 엿볼 수 있어 나조차 순수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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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사막을 사박사박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아 옮김, 오나리 유코 그림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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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일러스트와 글, 동심과 순수함이 마음을 한없이 푸근하게 하는 책이다. 작가인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10살 사키의 일상이 소꼽장난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마음을 잡아 끄는 건 에피소드 중간 중간 삽입된 오나리 유코의 일러스트다. 이야기처럼 무심한 듯 간결하게 그린 일러스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꼬마 니콜라의 장자끄 상뻬를 떠올리게 했다. 어릴 적 읽은 후 아이였을 때보다 어른이 되어 더욱 열광하게 된 그의 일러스트는 이야기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이 책의 일러스트도 그에 못지 않게 잘 어울렸다.

기타무라 가오루. 나에겐 처음인 작가였는데도 이력 한 번 보지 않고 -처음 보는 작가라면 프로필을 먼저 확인하는 평소 습관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술렁 술렁 읽어나갔다. 책의 말미에 적힌 옮긴이의 말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 놀라지도 않았을텐데 그가 60세의 남성인데다 일본에선 미스터리 소설로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엄마와 10살 딸의 디테일한 대화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는 작가의 자전적 얘기라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섬세한 모녀의 일상을 이렇듯 아름답게 쓸 수 없다고 지레짐작해버린 나의 착각도 한 몫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순수한 시절이 있듯이, 작가가 간직해 온 추억이 모녀의 일상처럼 아름다웠을 거라는 짐작만이 뒤통수맞은 나를 위로해준다. 사키가 어른이 된 후에도 오늘 일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말에는 눈물이 났다. 엄마가 딸의 아름다운 시절을 위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해주고 생각해주는 모습은 모녀보다 같은 시절을 공유하는 친구같다고 느끼게 했다. 모녀의 일상을 살짝 엿보며 그들의 추억을 나눠가진 듯해서 구름 위에 둥실 떠있는 것처럼 으쓱해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특히 사키의 짝꿍인 무나카타와 연락장을 통해 나누는 대화내용은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했다.

책의 제목인 사박사박이라는 부사가 주는 느낌은 깃털만큼 가볍고 편하다. 엄마와 딸의 주변에 어둠이나 먹구름이라곤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몇몇 대화나 장면은 좀 낯간지럽다고 느낄 정도였지만 작위적이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60대의 할아버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순수해보였다.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감수성이나 생각을 어른이 기억하고 싶은대로 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훈훈해지는 마음은 겉잡을 수가 없다. 사키의 앞머리를 직접 잘라주고, 자전거를 처음으로 가르쳐주며, 들판의 이름모를 나무이름을 함께 기억하는 작고 사소한 일상이 잔잔한 파문으로 오래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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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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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동구가 동생 영주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닐 때 나는 잊지 못할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뛰놀았던 기억보다 더 강렬하게 머리속에 새겨진 그 모습을 작가는 마치 내 얘기하듯이 하고 있어서 놀랐다. 나와 동생도 7살 터울로 동생이 고개를 가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포대기로 조그만 동생을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동구의 이야기는 마치 나의 유년을 보고 있는 듯 해묵은 감정을 생생히 떠오르게 만들었다.  

인왕상 허리 아래 색색깔의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산동네 살고 있는 동구는 부모님과 할머니, 넷이서 살고 있다. 동생 영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아기들은 더럽고 시끄러운 존재라 여기며 싫어했는데, 7년만에 한씨 집안에 태어나 4대 독자인 자신보다 더 이쁨을 받는 동생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영주는 그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웃고 울면서 냉기 가득했던 집안에 따뜻함이 배어들게 만든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가족들의 냉대는 동생이 태어난 후 더 심해지고 관심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럴 때 동구에게 다가온 박영은 선생님은 동생에게 뭐든 양보하고 가족들에게 등한시되었던 동구의 마음을 헤아려주며 감싸안아준다. 3학년이 되도록 글을 읽지 못하는 동구에게 난독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박선생님은 방과 후 1시간씩 남아 동구에게 글씨를 가르쳐준다. 

"동구야, 잊지 마. 네가 말을 할 수 있는 한, 너는 글씨를 읽고 쓸 수 있어. 지금 네 머릿속에 무언가 훼방꾼이 들어앉아 있는 건데, 그 녀석을 쫓아내기만 하면, 너는 후련하게 책을 읽고 글씨를 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글씨가 있는 세상은, 참 놀라운 세상이란다."    -p.118

언제까지고 자신의 곁에 남아 활처럼 휜 눈웃음을 보여줄 것 같던 박선생님의 부재와 동생 영주의 사고로 동구의 유년은 깊은 상처로 얼룩진다. 속깊고 어른스러운 동구는 그 일을 계기로 더욱 성숙해진다. 난 동구와 다르게 아픈 유년의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기분이 어떤지 잘 헤아리지 못한다. 그런데 동구는 아이답지 않게 그런 경험을 한 후 더 의젓해진다. 그 곳에 있으면 늘 행복해지는 삼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을 뒤로 한 채 가족들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리는 동구의 모습은 너무나 의연하면서 어른스럽다.  

나에게도 동구처럼 박선생님같은 분이 계셨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존재감없이 교실 한 켠에 재미없게 학교생활을 하던 내게 독서의 기쁨과 칭찬의 효과를 톡톡히 보게 만들어주셨던 초등학교 은사님. 박선생님과 동구의 대화를 들으며 선생님하면 잊혀지지 않는 그 분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학을 오면서 찾아뵙지 못해 늘 가슴 한구석에 헛헛한 마음을 숨기고 살았는데 그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감정이 박선생님으로 인해 되살아났다. 
 
박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내 안에서 꿈틀꿈틀 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그리움은 순식간에 내 안을 가득 메우고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아 좁은 내 몸뚱이 안에서 사납게 뒤채며 나갈 곳을 찾더니, 마침내 나의 땀구멍 하나하나마다 황금빛 깃털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내 가슴팍에 맺힌 황금빛 깃털, 내 온몸을 휘감은 주홍빛 능소화.     -p.303


동구의 유년이 내 것인양 많이 닮아있어 나는 하염없이 보고 또 보았다. 잊히지 않길 바랬던 나의 유년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다시 채색되었다. 삼층집 정원의 느티나무를 휘감는 능소화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뒤로 하는 동구의 모습이 슬퍼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주변 가까이에서 늘 함께할 것 같았던 사람들의 부재는 평생 잊지 못할 짐이 되겠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과거가 되고 그리움은 아름다움으로 치환된다.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기억들이 동구의 유년시절을 더욱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리움을 이렇듯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는 건 시간이라는 치유의 약을 삼킨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내가 읽은 그녀의 책을 더듬어보니 주인공이 남자였다는 사실이 참 의아했다. 그리고 내가 읽은 건 시대순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40대 이현이 주인공이었던 <이현의 연애>와 팔팔한 20대의 이야기 <달의 제단>, 9살 소년의 성장기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까지 그녀는 여자보다 더 섬세한 남자들의 성장을 이 세 책을 통해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녀의 책에서만큼은 남자가 보기보다 단순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 뒤 생각없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무모함 또한 그녀의 주인공들에게 보여지는 다른 듯 닮아있는 모습이었다. 소년에서 청년, 청년에서 장년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세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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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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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심윤경의 책을 찾는데 이 책이 '독서치료'코너에 있었다. 어떤 내용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그런데 읽고 난 후 '독서치료'란 개념자체가 좀 모호해졌다. 과연 이 글로 어떤 이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는 내용이 과격하고 난폭했으며 뜨거웠다. 추한 비극을 향해 치닫는 주인공의 심리가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같았다. 이런 그녀의 책은 처음인데 특이한 이력이 있었다.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했다. 보통 그런 자연계를 배운 사람 중에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를 쓰는 작가를 많이 보았는데 그녀의 선택은 문학이다. 격정적이지만 꼼꼼하고 섬세한 글에 금방 매료되고 말았다.


조씨 집안의 17대 종손인 주인공 상룡은 막 군에서 제대했다. 굳은 결계와 꼿꼿한 성품의 할아버지가 버티고 있는 종가집의 위세에 눌린 상룡은 반서자라는 출생때문에 천착하지 못하고 있다. 종손으로서의 자부심이나 긍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약한 그에게 할아버지는 조씨 집안의 근간을 알 수 있는 언간을 건네며 해석해오라 이른다. 그러나 언간을 해석할수록 집안의 흉허물만 밝혀지고 이에 할아버지는 격분한다. 한편 상룡은 종가집 살림을 도맡아하는 달시룻댁의 딸 정실(오랫동안 혐오스럽게 여기며 함께 자라온)과 깊은 관계가 된다. 80킬로의 거구에 겹겹이 늘어진 살덩어리, 그리고 못생긴 낯짝을 징그러워하던 그였지만 정실과의 정사를 통해 늘 억압되어 왔던 감정의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간다.

 
상룡의 이야기 속에 해석된 언간의 내용이 액자구도로 배치돼있다. 언간의 한문이 어려웠지만 일일이 사전을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문맥의 흐름과 주석으로만 내용을 파악했는데 뒤로 갈수록 비극적인 상룡의 개인사나 집안과 얽혀 자못 흥미진진해졌다.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버려 재조차 남지 않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던 작가의 바램대로 끝이 뻔히 보이는 비극의 씨앗에 얼음같은 물을 주고 썩어 문드러진 거름을 주어 한 가문을 샅샅이 파멸로 이르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치료되기는 커녕 상룡이 정실의 몸에 올라타며 가학적인 쾌락을 느낄 때는 분노로 치가 떨렸다. 상룡에 대한 정실의 마음이 목이 꺽일 정도의 해바라기식 순정, 내지는 언감생심 황송해하는 궁녀같은 모습을 볼 때도 불편한 심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상룡이 대쪽같은 할아버지의 반응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사실을 고했을 때 상룡의 마음도 거짓은 아니었구나 싶어 조금 안도했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하는 심리가 그 때부터 발동했을 것이다. 언간의 내용이 극적인 비극으로 치닫자 상룡은 할아버지 앞에 부실하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종가의 실체를 직시할 것을 충고한다. 자신이 쌓아올린 가문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한낱 사상누각이었다는 사실 앞에 할아버지는 초연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상룡은 그로 인해 늘 부정했던 자신의 굴욕적 과거와 비극을 감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 심윤경의 '이현의 연애'를 먼저 읽게 되었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와 함께 살던 이현처럼 여주인공들의 비현실적이고 비안간적인 구석때문에 주인공들 또한 뒤틀려보인다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의 비극을 더욱 비참하게 일그러뜨리고 시뻘건 화염의 불구덩이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게 만든 존재들이었다. 여자가 여자를 그렇게 묘사한다는 게 파괴적이고 엽기적이기까지 하지만 다분히 유혹적이다. 그 유혹앞에 무릎꿇을 수 있는 자만이 활활 타오르는 이야기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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