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살 동구가 동생 영주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닐 때 나는 잊지 못할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뛰놀았던 기억보다 더 강렬하게 머리속에 새겨진 그 모습을 작가는 마치 내 얘기하듯이 하고 있어서 놀랐다. 나와 동생도 7살 터울로 동생이 고개를 가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포대기로 조그만 동생을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동구의 이야기는 마치 나의 유년을 보고 있는 듯 해묵은 감정을 생생히 떠오르게 만들었다.  

인왕상 허리 아래 색색깔의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산동네 살고 있는 동구는 부모님과 할머니, 넷이서 살고 있다. 동생 영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아기들은 더럽고 시끄러운 존재라 여기며 싫어했는데, 7년만에 한씨 집안에 태어나 4대 독자인 자신보다 더 이쁨을 받는 동생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영주는 그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웃고 울면서 냉기 가득했던 집안에 따뜻함이 배어들게 만든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가족들의 냉대는 동생이 태어난 후 더 심해지고 관심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럴 때 동구에게 다가온 박영은 선생님은 동생에게 뭐든 양보하고 가족들에게 등한시되었던 동구의 마음을 헤아려주며 감싸안아준다. 3학년이 되도록 글을 읽지 못하는 동구에게 난독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박선생님은 방과 후 1시간씩 남아 동구에게 글씨를 가르쳐준다. 

"동구야, 잊지 마. 네가 말을 할 수 있는 한, 너는 글씨를 읽고 쓸 수 있어. 지금 네 머릿속에 무언가 훼방꾼이 들어앉아 있는 건데, 그 녀석을 쫓아내기만 하면, 너는 후련하게 책을 읽고 글씨를 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글씨가 있는 세상은, 참 놀라운 세상이란다."    -p.118

언제까지고 자신의 곁에 남아 활처럼 휜 눈웃음을 보여줄 것 같던 박선생님의 부재와 동생 영주의 사고로 동구의 유년은 깊은 상처로 얼룩진다. 속깊고 어른스러운 동구는 그 일을 계기로 더욱 성숙해진다. 난 동구와 다르게 아픈 유년의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기분이 어떤지 잘 헤아리지 못한다. 그런데 동구는 아이답지 않게 그런 경험을 한 후 더 의젓해진다. 그 곳에 있으면 늘 행복해지는 삼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을 뒤로 한 채 가족들을 위해 큰 결단을 내리는 동구의 모습은 너무나 의연하면서 어른스럽다.  

나에게도 동구처럼 박선생님같은 분이 계셨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존재감없이 교실 한 켠에 재미없게 학교생활을 하던 내게 독서의 기쁨과 칭찬의 효과를 톡톡히 보게 만들어주셨던 초등학교 은사님. 박선생님과 동구의 대화를 들으며 선생님하면 잊혀지지 않는 그 분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학을 오면서 찾아뵙지 못해 늘 가슴 한구석에 헛헛한 마음을 숨기고 살았는데 그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감정이 박선생님으로 인해 되살아났다. 
 
박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내 안에서 꿈틀꿈틀 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그리움은 순식간에 내 안을 가득 메우고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아 좁은 내 몸뚱이 안에서 사납게 뒤채며 나갈 곳을 찾더니, 마침내 나의 땀구멍 하나하나마다 황금빛 깃털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내 가슴팍에 맺힌 황금빛 깃털, 내 온몸을 휘감은 주홍빛 능소화.     -p.303


동구의 유년이 내 것인양 많이 닮아있어 나는 하염없이 보고 또 보았다. 잊히지 않길 바랬던 나의 유년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다시 채색되었다. 삼층집 정원의 느티나무를 휘감는 능소화를 바라보며 자신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뒤로 하는 동구의 모습이 슬퍼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주변 가까이에서 늘 함께할 것 같았던 사람들의 부재는 평생 잊지 못할 짐이 되겠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과거가 되고 그리움은 아름다움으로 치환된다.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기억들이 동구의 유년시절을 더욱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리움을 이렇듯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는 건 시간이라는 치유의 약을 삼킨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내가 읽은 그녀의 책을 더듬어보니 주인공이 남자였다는 사실이 참 의아했다. 그리고 내가 읽은 건 시대순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40대 이현이 주인공이었던 <이현의 연애>와 팔팔한 20대의 이야기 <달의 제단>, 9살 소년의 성장기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까지 그녀는 여자보다 더 섬세한 남자들의 성장을 이 세 책을 통해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녀의 책에서만큼은 남자가 보기보다 단순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 뒤 생각없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무모함 또한 그녀의 주인공들에게 보여지는 다른 듯 닮아있는 모습이었다. 소년에서 청년, 청년에서 장년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세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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