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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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은 상쾌하다. 읽고 있으면 가려운 곳을 골라서 살살 긁어주는 듯한 쾌감이 인다. 신문기자로서의 오랜 동안의 삶이 그의 글을 깔끔하고 단정하게 가꾸어 주었고 오랫동안의 사유는 그의 글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의 글은 거침없다.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사람다운 자신감이 그의 글을 거침없이 만든다. 그는 세상을 향한 일갈을 내뱉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그 일갈들이 매번 통쾌하다. 예를들면, 이런 식이다.

「……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면 나는 우습고 꼴같지 않아서 대답하지 못한다.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지성이다. 제발 이러지들 말라. …… '자유'와 '정의'를 앞장세운 이 절망적인 개수작들은 당장 집어치워라.」

그는 언론자유와 조세정의를 가지고 싸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개수작'이라고 일갈한다.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하하, 그건 개수작일 뿐이다.

그는 '언어'와 '언론'으로 평생을 벌어먹고 산 사람이다. 그가 '존엄하다'라고 말하는 밥과 돈을 그는 평생 '언어'와 '언론'을 통하여 벌어들였다. 때문에 그의 산문에는 여기저기 언어와 언론에 대한 통찰이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언론'을 통해 다듬어 지고, '언론'은 언어를 통해 가치를 획득한다. 그는 사실 (팩트 fact)만을 통한 신문기사 쓰기를 꿈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 전달이란 처음부터 모순적이다. 그 사실을 보는 자의 주관이 처음부터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냉철한 이성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차갑지 않다. 다만 냉정하게 사실을 파헤치고 있을 뿐, 그것이 그의 인간 됨이 차갑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다른 누구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주변을 본다.

그는 버려진 마을에 동정을 가지고 있고, 밥을 굶는 어린 아이들을 걱정하며, 고통을 전담할 수밖에 없는 이 나라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낸다. 그가 삼엄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고통을 전담시키는 무능하고 후안무치한 정부에게 일뿐.

이렇게도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가 이렇게 서정적인 문장을 써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설 같다. 그의 문장 전체가 역설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삶 자체가 역설이기 때문인지도. 그는 적극적 보수주의자이면서 한편으로 몹시 페미닌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 적극적 보수는 아름답다. 어째서 이 사회에서는 보수를 악으로만 보는가. 보수는 어차피 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지속적인 힘이다. 진보는 사회를 개혁하지만 보수는 그 사회를 지탱해 나간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는 자신이 보수임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보수는 곧 악의 상징과 동일하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김훈은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보수주의자이고, 나는 여성의 능력은 신뢰하지 않고, 나는 뚱뚱한 여자를 여자로서 싫어한다, 고.

그의 당당함은 스스로의 삶에 충실한 것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는 "여성의 능력은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대신 아들에게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능력을 불신하는 여성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으려는 그의 언행일치. 그것으로 그의 보수는 정당하다.

우리도 이제, 냉정한 이성을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 한 사람쯤, 가질 때가 되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훈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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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민음사 모던 클래식 5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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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사성 강한 소설을 좋아한다. 선이 굵고, 스토리 라인이 확실하고. 그래서 박완서를 좋아한다. 박완서의 그 튼튼한 서사성은 그야말로 소설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박경리역시 마찬가지. 튼튼한 서사성 위에 질박한(?) 묘사는 완벽한 소설의 첫 번째 조건 아닐까. 박완서의 묘사는 허공을 짚지 않는다. 플로베르가 누님~ 하고 울고 갈 판의 완벽한 일물일어다. 그래서 박완서는 대가다.(박경리조차도, 박완서의 그 일물일어에는 닿지 못했다, 싶다.)

『키친』에 실려있는 세 편의 단편은 서사성은 약하다. 그렇다고 묘사가 질박하게 땅에 붙은 일물일어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동화를 쓰듯 애매한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꿈결의 이야기를 늘어놓듯 늘어놓을 뿐이다. 묘사가 아니라, 감각만이 남아있다. 모양이 어떠하다, 라는 시각은 사라지고 따뜻하다, 포근하다, 하는 촉감, 향긋하다 하는 후각, 등만이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에게 가장 강하게 전달된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소설 전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이질감.

나는 이것이 일본적 정서라고 파악했고, 한국적 정서에서 자란 내가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이질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든다면 그런 것이다. 남자 주인공 유이치의 집안에 대한 설명.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것에 나는 늘 동의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들의 관계는 나의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상상치도 못한 이야기인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면 그것은 엽기다. 성전환 수술을 해서 엄마로 살아가는 아버지, 라니, 한국적 정서에 길들여진 "보수적인" 나로서는 상상 밖의 영역이다. 이해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시초부터가 상상 이외의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질감은 시작된다. "성전환"수술이 상상 밖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상상 밖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유이치는 문제아가 되어 있어야 맞는 거 아닐까.

그 다음으로 말하자면, 사건 자체의 이질성이다. 살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동안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의 집에 덥석 들어가 살 수 있다는 것, 이것 역시 한국에서 가능한 사고는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로 해서 요시모토 바나나는 동화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또 있다.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 그것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개인적인 특성이라 하더라도, 한 인간을 형성하는 것은 그 사회와 문화인 법이니까, 그녀의 글 전체에 배어있는 일본적 사고랄까, 그런 것이 내게는 확실히 기묘한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기묘한 이질감이 오히려 『키친』의 매력을 배가시키고 말았다. 기묘하고 동화적인 이야기에 기묘한 이질감이 더해져 버림으로써, 매력이 가중된 결과라고 할까. 또, 그 기묘함의 덮개로 덮어놓은, 소설의 기저에 흐르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흐름(그 역시 내가 사고하기에는 벅찬 것이기는 하지만)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다름"에서 오는 호기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랄까.

여튼,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다른 소설집 두권을 구입해 쌓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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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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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가 보면 어떤 사람의 '깊이'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깊이'란 재능과는 관계없는-(물론 '깊이 내려갈 수 있는' 것도 재능이기는 하다. 기본적으로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랄까, 그 사람의 지금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할까.

깊이가 얕아서 매력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지금은 얕으나 앞으로 깊어질 사람이고, 또 하나는 본디 깊으나 스스로 얕음을 택한 사람이다. 김영하는 전자에 해당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란, 조금 웃기지만. 확실히 고난 없이 자란 사람은 빨리 어른이 되지 못한다. 어떤 일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난 없이 자란 사람의 이해의 폭은 좁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왕따를 당해본 자 만이 왕따의 고통을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의 힘으로 하여 현재 왕따를 당하고 있는 자를 배려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간단한 이력사항만을 가지고 남의 인생에 관하여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김영하는, 안정된 집안에서 잘 성장하여서, 명문대학을 재수도 없이 괜찮은 학과에 들어가 대학원까지 잘 마쳤고, 중간에 재수의 경험도 없는 똑똑한 사람이더라, 라는 것으로 그의 인생에 그늘이 없으니 그는 이해의 폭이 좁을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은 김영하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다, 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해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상처를 드러내거나 숨기거나 두 가지가 있는데, 글쓰기는 보통 전자의 방식으로 행해지게 마련이다. 상처를 까발려 나의 고통을 치유하는데 글쓰기의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방식 역시 가능한 법이니까, 그의 산문에서 그의 상처가 드러나지 않더라, 라는 것으로 그를 상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은 가볍고 유쾌하다. 유쾌해서 유쾌하기 보다, 가벼워서 유쾌하다. 그의 가벼움은 원태연 같은 부박함의 가벼움은 아니다. 깊어질 가능성을 내포한 가벼움이다. 그는 아직 '아이(자라기를 아직은, 스스로 거부한 것 같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벼움을 택한 것이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깊은 글을 보여줄 것 같은 가벼움이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유쾌하게 즐겁다.

또 하나, 그의 글을 읽는 것의 즐거움은 그의 똑똑함에 있다. 그는 글의 깊이나 무게대신 유쾌한 지성을 택했다. 그의 문체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글의 구성능력이나 글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까지, 그는 상당히 똑똑한 사람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랜 세월 갈고 닦아 가지게 된 시골 농부의 삶의 성찰이나 깊이는 없는 대신 주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천재소년의 똑똑함과 지성이 있다. 둘 중 하나라도 가진 게 어딘가, 싶다. 그리고 그 똘똘함을 바탕으로 언젠가는 깊어지겠지, 싶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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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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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알라딘에서 22권의 책을 한꺼번에 주문했는데, 지난 화요일에 도착했다. 책은, 몇가지 단계를 가지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첫 번째는 포장 박스를 뜯을 때, 두 번째는 첫 장을 넘길 때, 세 번째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마지막은 책장에서 이 책의 위치를 결정할 때. 나는 가능한 한, 크기를 맞추어서 비슷한 책들끼리 꽂아두려 노력하는 편인데, 책의 크기는 대부분 비슷비슷하니까. 그 안에서도 자리는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책은 가까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책은 멀리.

이 책은 포장박스를 뜯을 때부터 나를 특별하게 즐겁게 해 준 책이다. 장정이 몹시 이쁘다. 사실 미적 감각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책의 외모(?)에 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을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심각하게 엉망이지 않으면 책의 외모에 신경 써 본 일이 없다.) 이렇게 책이 이뻐서 즐거워 해 본 경험도 새로운 것이다.

이 책은 외모만큼이나 문체도 나를 기쁘게 했다. 이 책의 문체는 잘 다듬어진 은빛이다. 정철의 관동별곡 중 한 구절을 빌어서 말하자면 "은하수 한 구비를 촌촌히 버혀 내어, 실같이 풀어내어 베같이 걸어둔" 것과 같은 아름다움이다. 이 글의 문장은 흐르는 물(은하수)와 같이 맑고 투명하며,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내용 여하를 떠나 문체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매혹시키는 글도 찾아보기 힘들 터인데.

더구나 소설의 서사성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문체에 매혹되는 일이 드물다. 최근에 김훈의 문체에 매료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또한 이 글은 문체만이 투명하고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도 투명하게 반짝인다. 뭐, 그만큼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점에서는 경박함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을 탓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 소설의 인물들의 투명한 반짝임은 사랑스럽다.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 미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쇼코와 무츠키의 부모님은 그 부박함으로 인하여 현실성을 상실하고 현실성이 상실됨에 따라 미워지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을 미워하기란 어려운 일 아닐까.

소설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은사자'들처럼, 멀리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해 나가려고 하는 이 세 사람, 쇼코, 무츠키, 곤. 소설은 그것에서 끝난다. 공동체 생활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고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아, 그들의 공동체에 아무도 개입하지 말고 그냥 그들을 내버려 둬 주었으면(사실 무작정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곤' 이라는 존재가 조금 애매하기는 하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저들대로 행복해, 당신들의 잣대를 들이대어 그들의 행복을 파괴하지 말아. 하는 생각. 이 생각은 그들의 투명한 은빛 맑음에서 기인한다.

삶을 영위하는 방법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구나, 하는.

PS. 차라리, 무츠키, 쇼코, 곤은 이해하겠는데 그들의 부모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 역시 '일본적 부모'인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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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3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3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정과 불안 1
조선희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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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윈터스쿨』이라는 소설을 읽은 일이 있는데, 그 소설보다는 그 소설 뒤에 붙어 있던 양귀자의 추천의 말 덕분이었다. 정작 소설은 읽다 중간에 접어버려(나중에 다시 다 읽기는 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기억나지 않는데, 양귀자가 했던 말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약속시간을 조금 앞두고, 잠시 시간이나 때울까 하고 잡았는데 결국 약속을 취소하고 끝까지 읽었다." 라던. 양귀자는 내가 몹시 좋아하는 작가중의 하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추천의 글에는 약하다. 박완서가 추천한 신경숙의 『바이올렛』도, 공지영의 『고등어』도, 둘 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박완서'이기 때문에 읽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책 『열정과 불안』역시 박완서이기 때문에 잡았던 소설중의 하나다.

아니다, 우선은 '조선희'라는 한 사람의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이 책으로 끌어들였다고 해야 한다.

직업상 한 달이면 근 4-50권에 달하는 신간소설, 에세이집 등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덕분에 책을 고르는 것도 나름대로 신중하다. 게다가 매달 2번씩 하는 문학관련 스크랩 덕에 새로 등장하는 작가, 매스컴이 관심을 가지는(즉 출판사에서 미는) 작가, 재미있을 만한 책 등에 대한 정보도 빠른 편이다.

조선희 라는 작가에 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소설을 쓰기도 전에, 소설을 쓸 것이라는 것만으로 유명해지는 작가가 있다면 조금 역설적이지 않을까. 바로 이 작가 조선희가 그랬다. 소설을 쓰기도 전에, 잘 나가던 《씨네21》의 편집장을 그만 두고 소설가가 되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신문에서는 꽤나 떠들어 주었다. 어쩌면 신문기자시절의 친분이 그녀의 띄우기로 이어졌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말이 많은 걸 보면 《씨네21》에 꾸준히 실리던 그녀의 짧은 단문이 썩 괜찮았던 모양이라고, 나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책이, 신간 서적들 틈에 끼여서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내가 집에 가져다 놓고 읽을 책으로 분류한 것은 조선희에 대한 그러한 호기심 덕이었다.

집에는 이미 읽지 않은 책이 20권 남짓 쌓여 있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독서 예비 목록 중의 하나로 편입되려던 중에 새치기를 하여 먼저 손에 넣게 된 것은 아무래도 박완서 선생님의 추천의 글이 큰 역할을 하였겠고.

과외를 가기 전에 잠깐, 그냥 조금 읽어보려고 했던 나는, 양귀자처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외를 끝내고 밤을 새어 두 권을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새벽 6시가 넘었다.

신문기자 출신 작가(김훈 말이다. ^^)들의 특징인가, 글은 전체적으로 단문이고 깔끔하게 똑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김훈보다야 문장이 길지만.

1권은 무슨 기업드라마처럼 이어진다. 대학시절 운동권이었다가 같이 회사를 세운 네 명의 친구, CEO가 된 한 명의 친구가 M&A를 제의 받으면서 나머지 세 명의 친구 뒤통수를 치고, 주인공 영준은 뒤통수를 맞은 얼얼함을 달래가며 사는 이야기. 평범하고 통속적인 스토리 갈피 갈피에 조선희는 인생과 삶, 인간에 대한 통찰들을 군데군데 끼워넣어 놓았다.

그 성찰은 은희경의 그것처럼 예리하거나(그래서 조금 불편하거나) 김형경의 그것처럼 치명적이거나(그러나 무디고 둔하거나) 하지 않다. 편안한 통찰이랄까. 인간에 대해 꽤나 오래, 참 여러모로 연구하고 생각해 보았구나, 싶다. 나의 고통에만 천착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열심히 들여다보았던 결과가 이거구나, 하는 생각.

「신문기자나 소설가나 정신과 의사의 공통점은 사람에 관심이 많다는 거다. 주로 표정 뒤에 숨은 생각을 궁금해한다. 드러나는 것 뒤에 숨은 진실을 궁금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굴 만나든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조선희, 『열정과 불안』2권, 생각의 나무, 2002, p.50」


이 구절을 읽고 나면 아하, 싶다. 신문기자로서의 오랜 생활이 그녀의 통찰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구나라는 깨달음이 오는 거라고 할까.

소설은 1권과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시점도 주제도 사건도 달리하고 있다. 1권의 주인공이었던 영준은 2권에서 이메일과 사람들의 대화에서 잠시잠시 등장할 뿐이고, 2권의 주인공인 인호는 1권에서 영준의 첫사랑이자 주변 인물로 잠시잠시 등장할 뿐이다.

이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삶을 영위해 가며 교차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썩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2권의 인호 부분이 재미있었다. 정신과 의사인 인호의 1인칭 이야기를 읽으며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의 3인칭 세진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았고.

처녀작(엄밀히 말해서는 처녀작이라고 하기 힘들지만)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보았을 때, 썩 잘 쓰여진 진 소설이다. 방금 '만들어'라는 말을 '쓰여진'이라고 고쳤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건 '만들어 진'소설이다 싶은 느낌을 주는 소설들이 있는데 이 소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소설을 읽는 것은 참 좋은 일이고 유익한 일이고 재미있는 일이다. 세상에 재미있으면서 유익한 일이란 있기 힘든 법인데, 나에게 있어 소설 읽기란 유익하고도 재미난 일이니, 소설가 이순원의 말대로 조선희라는 "힘 센 작가 하나가 새롭게 출현" 한 일이 나는 몹시 반갑고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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