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데이즈>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파인 데이즈
혼다 다카요시 지음, 이기웅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 문학을 직접 대하는 일이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되지 못한 실력으로 일본원어 소설을 읽고자 했던 치기 어린 도전을 뺀다면 그것이 분명하다. 드라마나 만화로 접했던 것과는 달리 오로지 글자로만 구성된 일본문학이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마치 개미지옥처럼 처음에는 조금의 경사에 속아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것처럼 일본 미스터리 단편집 <파인데이즈>는 몰입하게 했다. 일본문예서 만화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대단히 커보인다. 이 책의 첫 번째 단편 만화에서 그림을 빼고 읽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 생소한 느낌이 다음 편까지 쉬지 않고 관심을 갖게 했다. (한편으로는 편집자의 꾐에 넘어간 것이기도 하겠다)

낯설기도 하고 한편 익숙하기도 한 미스터리 단편들을 읽어가면서 문득 이외수가 떠올랐다. 요즘은 이상한 잡필가처럼 변했지만 초기의 이외수의 소설에는 초현실(이 아니라면 최소한 비현실)적인 상황들을 일상처럼 대하는 작가의 모습이 역력했다. 초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지만 이외수의 대단히 적극적인 현실회피는 지금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고 듣고 있다. 최근까지도 그는 우주인과의 교신을 하고 있다고 전해들은 바 있다.

모든 이야기꾼들이 그럴까 궁금했지만 어느 한 때 한국에서 유명하다는 소설가 3명과 며칠 여행을 갔을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네들의 경계가 컸던가 그도 아니라면 간만의 여행을 아주 평범하게 보내고 싶었던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네들의 소설에도 역시나 이야기꾼으로서의 상상은 그렇게 며칠 간 뻔하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봤던 일상과는 분명 달랐다. 나로서는 그 속을 보고자 했지만 소설가 3명은 아주 평범한 수다와 뒷담화로 며칠을 다 보냈다.

<파인데이즈>을 읽으면서 우선 즐거웠던 것은 문장이 영어 번역소설에 비해서 대단히 살갑게 느껴졌던 점이다. 때때로 이것이 번역된 사실을 잊게 해서 원래 한국어로 써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일본어로 쓴 책이니 일본어로 읽어야 제 격이겠지만 문장의 친숙함은 일본문학의 특성을 찾고자 했던 애초의 다짐을 쉬이 잊게 했다. 그러나 마지막 책 장을 덮고 나서는 "야빠리 치가우"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일본 문학과의 다른 점을 말해야 하는 지점에서 문득 내가 한국 문학에 대해서 잘 알고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딱 아는 만큼의 전제 속에서 <파인데이즈>는 일본문예의 독특함을 대표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미스터리 혹은 판타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화화됐다는 Yesterday도 분명히 나는 봤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막장 일색인 한국드라마보다 골라보는 일본드라마가 훨씬 낫다는 생각에 일본 드라마와 영화를 깨 찾아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기억보다는 문자 하나하나가 새로 그려가는 원작의 느낌이 영화보다 훨씬 간결하고 애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작가의 특징인지 아니면 일본문학의 공통점일지는 누가 대신 대답해주면 좋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두 개의 밥그릇이었다. 흔히 고동밥 혹은 머슴밥이라고 불리는 한국의 밥그릇 위로 한참 쌓아올린 것과 조금씩 여러번 덜어먹는 일본의 작은 것이다. 이 책은 마치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한국의 고봉밥같은 강렬한 기대감은 없었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더 먹고 싶은 밥처럼 한 그릇 더, 한 그릇 더 해서 결국 고봉밥과 진배없는 과식을 하게 된 결과와 같아진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파인데이즈는 분석으로 대하면 미스터리고 판타지겠지만 그 특성이 이 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폄하하는 빌미는 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이 책을 청춘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청춘들이 좀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 - 티베트에서 만난 가르침
현진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사실 수필은 지루하다. 게다가 선문답스러운 의미까지 담기면 호감은 가면서도 선뜻 손에 들게 되지 않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서점에서 우연히 봤다면 단연코 먼저 짚거나 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평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덤덤히 책장을 넘겼다가 시쳇말로 빵터진 귀절로 인해 흥미를 갖고 계속해서 읽어갈 수 있었다.  


'하늘에 물들다'라는 제목이 붙은 글의 끝부분에 고사성어 때문이었다. 음만 적자면 대단히 낭패가 될 수밖에 없는 글이다. 여인음수 냉난자지. 한자는 다소 작게 인쇄되어 습관처럼 음만 읽었다가 퍼뜩 " 아 이 스님이 땡초신가?"싶었다. 그러나 한자를 대하자 그런 오해는 금세 풀렸다. 如人飮水 冷暖自知. 풀어 말하자면 '물이 차고 더운 것을 마셔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해는 풀렸으나 이 현진이란 점잖은 법명 뒤에 숨겨진 스님의 장난기를 느낄 수 있어서 친구라도 삼은 듯 즐거워졌다.

그렇지만 그런 장난기는 뒤로 가도 좀처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려운 말 써놓은 것도 아니고 잠결에 들어 이내 흘려버린다 하더라도 크게 아쉽지는 않은 평범한 이야기들을 덤덤히 읽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종이장에 침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읽다가 문득 여행을 가고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커다란 제목을 달아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하늘에 물들다' '시간의 수레바퀴' 그리고 '내일과 다음 생 가운데'라는 근사한 제목이다. 그런데 그보다 지은이 혹은 편집자는 그 큰 제목 위에 또 작은 부제를 달아놓은 것에 어떤 의미를 남겨두지 않았나 싶다. 큰 제목들은 서로 따로인 듯 하지만 작은 부제들이 큰 제목들을 연결하는 새끼줄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한걸음 걷고 하늘보기 - 또 한걸음 걷고 생가하기 - 다시 한걸음 걷고 그리워하기. 수수한 점층 수법의 이 부제들로 인해서 낱장의 심상들을 흩어지지 않게 꼭 묶어두는 것 같았다. 그 걷고 걷고가 자꾸 이 책 군데군데 떠남을 자극하는 티베트 사진과 힘을 보태서 여행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처없이 걷는 여행은 겉보기와 달리 여행자 자신에게는 개고생인 법이다. 이외수 초기 작품인 꿈꾸는 식물에서 따오자면 "보는 사람에게는 낭만이지만 하는 사람에게는 다리 아픈" 것이 걷는 여행이다.

엄홍길 대장쯤 되지 않고서는 그런 개고생 여행에 쉬지 않고 씩씩하게 전진 또 전진할 중생은 없을 것이다. 자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쉴 틈을 찾기 마련이고, 어느 한적한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서면 괜히 폼잡고 가부좌라도 틀고 싶어진다. 그때 이 책을 딱 꺼내들고 몇 장 넘기면 발이 다소 저려와도 가부좌를 풀지 않고 버티게 해줄 것 같다. 
 

날이 사정없이 덥다. 이런 삼복더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절대로 현명한 일은 아니다. 태어나길 책사라면 몰라도 운동도 필요하고, 복날 닭이나 멍멍이를 괴롭힐 줄 아는 속된 나로서는 굳이 여름 더위를 이기자면 무협지나 추리소설 쪽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중간쯤에서 이 책을 내려놨다. 속되긴 해도 끈기는 있어 책을 읽다가 멈추는 법은 없는데, 대략 중간쯤에서 읽기를 중단했다. 그리고 이번 주말 하다못해 가까운 산이라도 올라 마저 읽기로 다짐한다.

비록 여행은 아직 형편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한걸음 걷고, 또 한걸음 걷도 다시 한걸음 걷고난 후에 나머지를 읽어봐야 이 현진스님의 멋을 비슷하게나마 흉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이 삼복더위에 산을 오를라면 그것도 참 개까지는 아니어도 강아지 고생은 될 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탁발 > 서평단 리뷰 시 먼댓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서재지기님 안녕하세요~ 서평단에 운 좋게 뽑혀서 첫 번째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리뷰 조건 중 먼댓글을 넣으라는 지시대로 작성을 마치고 해당 도서(아메리칸 러스트)의 해당 페이지에 가서 찾아봤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메리칸러스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메리칸 러스트
필립 마이어 지음, 최용준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550쪽 정도의 아주 긴 소설이라면 뭔가 강렬한 호객성 데코레이션을 쓸 법도 한데, 녹가루가 떨어진 낡은 정 한 자루를 큼지막하게 배치한 표지는 적어도 두 가지에 대한 암시 혹은 경고를 담고 있을 거란 생각을 들게 했다. 그 한 가지는 이 소설이 시간 때우기에 적합한 눈요깃감을 제공하지는 않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었고 다른 하나는 뭔가 거칠게 가슴을 파고 들 것이라는 인상이었다. 그 예감과 짐작은 잘 들어맞았다.  

아메리칸 드림이 유효기간 지난 특별상품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아직도 제3세계 어디에는 유일한 돌파구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한국인 몇 퍼센트쯔은 그 꿈을 꾸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소설 초입에도 간단하게 언급하는 이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아주 신랄한 리포트가 바로 아메리칸 러스트이다. 미국에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라지만 사실 한국 정서와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선입견은 내게 아집이었을 수도)는데 의외로 책장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계속 읽어가면서도 차마 미국이라는 배경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아메리칸 러스트의 배경 도시는 비참한 꼴을 감추지 못한다. 아주 젊은이와 아주 늙은이만 사는 도시. 얼핏 우리 농촌을 떠오르게 하지만 이 소설의 배경인 뷰엘이라는 곳은 오히려 태백 등을 떠오르게 한다. 한국 기업을 모두 국영으로 아는 무식함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런 오해에 대해서 조금은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망해버린 철강도시의 우울한 풍경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아메리칸 러스트는 크게 여섯 명의 인물을 핸드 카메라를 들고 따로 따로 쫓아가는 컬트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간혹 그 인물들이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여전히 소설의 화자는 그들을 공간적으로 유리시킨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그들이 겪는 심각한 소외를 외면하지 못한 치밀한 묘사라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소설은 일인칭과 삼인칭의 변화 속에서 독백과 묘사를 반복하는데 그렇게 시점이 변화해도 자주 그 변화를 놓칠 정도로 소설 속 화자가 누가 되었건 덤덤하다. 

살인과 도주 그리고 또 다른 살인으로 결말지어지는 사건만 쫓는다면 이 소설은 몇 번을 읽어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그런 사건 따위는 마치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 정도로 여기는 것이 좋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인 포와 아이작, 아이작의 누나 리와 헨리, 포의 어머니 그레이스와 불필요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보다 나은 경찰서장 헤리스. 이 여섯 명 중 삶의 모습이 다른 것은 예일대를 졸업해 부자와 결혼한 리 하나뿐이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 모두는 같은 도시에 살뿐더러 직업이 뭐든 크게 다를 바 없는 칙칙한 색깔의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마치 책 표지의 낡은 정에서 떨어져나온 녹가루는 그 도시에 아직도 살아야 하는 모든 주민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등장인물 모두는 참 측은하다. 그런데 묘하게 공감이 된다. 대학조차 진학하지 못한 천재소년 아이작, 아이작보다 덩치는 두 배지만 머리는 그 절반도 안되는 포 그리고 미인에다가 머리까지 좋아 일찍부터 상류사회에 진입한 아이작의 누나 리. 이런 간력한 프로필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은 친구, 옛 애인 등으로 또 얽혀 있고 그것은 우발적 살인과 은닉으로 한번 더 엮이게 된다.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이란 것을 발견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아메리칸 러스트의 최종 추출물은 아닐 것이다. 한편으로 희망이라는 것은 현실의 절망을 인정하는 말이다. 희망이 발견될수록 현재의 절망요소를 그만큼 더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아메리칸 러스트의 결말은 550쪽의 긴 책장을 넘기면서 포와 아이작에게 이입된 독자에게 해피엔딩을 달콤한 사탕을 준 것같은데 그 사탕이 다 녹기도 전에 그것이 희망이 아닌 또 다른 절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고백컨데, 이 소설을 가능한 빠르게 읽고자 했다. 그 의욕은 책에게 버텨내지 못하고 촘촘히 읽게 됐다. 또한 가능하면 앞으로 최소한 한 번은 더 정독해야 할 용기를 갖게 한다. 번역문학이라 문장이 주는 맛이 없다는 것이 큰 아쉬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정말 집요하게 파고드는 마치 여러사람이 각자 발언하는 듯한 6중주의 하모니를 더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아니 그런 도전을 자극하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젊은시절의 많은 시간은 김수영의 시를 읽는데 썼다. 세월이 지난 후에 돌이켜봐도 다른 어떤 시간보다 만족스럽다. 하도 옆구리에 끼고 다녀서 겉장이 너덜너덜해지는 바람에 같은 시집을 몇 번씩 다시 사야 했는데, 간혹 사귀게 되던 여자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여자랑 팔짱을 죽어도 끼지 못하겠다는데 김수영 시집을 핑계로 내세웠던 탓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김수영의 시에 반가워하거나 하면 아낌없이 내주기도 했다. 그런 바람에 김수영 시집을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김수영도 생활에 뒤쳐지고 시도 문학도 모두 그러하였다. 그렇다고 와이셔츠에 넥타이에 매여산 것도 아니고 예술계에 줄곧 머무르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물 속에서도 갈증을 느끼듯이 김수영과 몇몇의 시인들은 술에 몹시 취한 날이면 모질게 떠난 여자처럼 머리 속에 떠올랐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지경의 나는 서가의 책들을 노끈으로 묶어 창고에 처박아두었다. 읽지도 않는 책은 전시용일 뿐이고 읽지 않는다고 책을 작부 신세로 만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창고 어딘가에 김수영의 시집이 분명 있을테지만 굳이 먼지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온라인 주문으로 하나를 구입키로 했다. 아침무렵에 주문했는데 저녁쯤에 배달이 된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태만한 중국집보다 나은 배달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오랫만에 김수영 시를 대하는 것도 그런데, 다음날쯤으로 생각했던 책이 도착하니 더 반가웠다. 1시간만 앉아있다가 일어나야 한다는 친구가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야, 오늘 제껴도 된다. 코 삐뚤어지게 푸자!"할 때 덤으로 얻어지는 시간의 기쁨처럼.

박스를 뜯어 책 중간을 아무렇게나 펼쳤다.아참, 나는 책을 읽는 못된 습관이 있다. 머릿말을 읽지 않는다. 그리고 옛날 시집들 끝에 꼭 집어넣는 해설을 죽어도 읽지 않았다. 반 영어 반 한글의 빨간책(오해하지 마시라. 과거 영어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이 지니고 다녔던 문고판 영어소설)도 아니고 적어도 시라면 나만의 감각과 고민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태도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펼치니 190쪽이다. 김수영의 시가 대체로 그렇지만 절묘하게도 현재를 무지 아프게 꼬집는다.
푸른 하늘을..이란 시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이 이 시를 쓴 것이 1960년 6월 15일이다. 지금으로부터 꼬박 50년전이다. 그때로부터 그많은 시간이 흘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한다. 돈이 없어 그렇지 세상은 살 만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김수영 식으로 말하자면 무엇이 있어야 살 만한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 아니다. 말장난같지만 자유에 대해서 엄격했던 김수영은 몇 퍼센트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모두 자유롭다고 하지만 이 시를 읽자니 문득 자유라는 말이 봉인에서 풀려나는 기분이 든다.

21세기 서울은 더 이상 자유라는 단어를 부러워할 시인도 없고, 그것을 보고 피 없이 무슨 자유!라며 힐난할 시인도 없다. 63년에 죽은 김수영에게 부끄럽고 또 부럽기도 한 2010년이다. 계발서가 호객하는 서점가에서 문득 자기 자신이 잘못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한번이라도 든 적 있다면 김수영의 시에 머리를 파묻어보기 바란다. 해답은 찾지 못하겠지만 해답을 찾고자 하는 열정은 얻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