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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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 여자만의 문제란 없거나 지극히 적다. 여성이란 말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남성이 있어서이고 따라서 여성의 문제란 언제나 남성과 관련된 문제를 뜻한다. 그런데 상대인 남성을 적대 개념으로 다루고 방법을 투쟁만으로 일관한다면 너희 선택의 폭은 너무 좁고 비극적이 된다. 곧 이겨서 포악한 상대를 온전히 제압하나 져서 이전보다 더 엄혹한 예속과 굴종 속에 떨어지는 길밖에 없다. 더 있다면 남녀의 철저한 결별로 인류사의 진행이 중단되는 것 정도일까.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점점 줄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이룩한 것만큼만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소박하고 겸손한 여인들이 아직은 더 많다.
진정으로 괴로운 사람에게도 비명도 신음도 겨를이 없다. 괴로움을 견딜 만하면서도 그것을 내세워 얻고자 하는 무엇이 있을 때 비명과 신음소리는 높아진다. 내가 너희 괴로운 부르짖음을 애처로워하면서도 걱정하는 것은 거기서 진하게 풍기는 과장의 혐의 때문이다.
다같이 져야 하는 짐이라면, 끝내 피할 수 없는 짐이라면 조용히 지고 가는 것도 아름답다.

요즈음 유행하는 여성의 자기 성취에 관한 논의에 영악하고 탐욕스런 자본주의의 간계가 끼어들지 않았는지 솔직히 의심이 간다. 문화마저 상품화에 성공한 자본주의가 방대한 시장 개척을 위해 여성에게 걸고 있는 집단 최면이 바로 그 요란한 자기 성취의 논의는 아닐는지. 또는 그들의 논리로 보면 가정에 사장(死藏)되어 있는 값싼 노동력을 거리로 끌어내기 위해 창안해 낸 효과적인 구호가 바로 그 여성의 자기 성취는 아닌지.

여성은 제 살과 피를 덜어내고 열 달의 불편과 짐스러움을 견뎌낸 뒤 어떤 모진 형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피 흘려 가며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별로 힘들 것도 없는 원인을 제공한 남성의 것이 되고 오직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만 <무자(無子)>란 항목의, 변명할 기회도 없이 내쫓길 죄가 된다. 또 아이를 기르는 일로 손발이 닳도록 수고롭고 애간장이 마르는 것은 여성이지만, 잘 자란 아이가 성취한 것은 오직 남성의 가계를 빛낼 뿐이고 잘못되면 먼저 손가락질 받는 것은 여성이다. 남성들의 약속 위반에 대한 항의조차 <투기(妬忌)>란 이름으로 가차없이 내쫓길 죄로 만들었다.

출가 전에 깊이는 아니지만 학문의 맛을 보고, 그런대로 성취도 누렸던 기억은 여느 새댁네들과는 달리 내가 고정 관념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다. 학문은 가문이라는 것이 개체로서의 나를 우선할 만한 것인가를 이치로 따져보게 했고 포기했던 성취들은 과연 가문이 그것들 중 어느 하나와도 바꿀 만한 값어치가 잇는 것인가를 헤아려보게 했다.

어쩌다 찾아드는 손님마저 푸대접으로 내쫓는 오늘날의 안주인들을 보면 나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질 다음 세상이 진심으로 걱정스럽다. 내가 보기에 간밤 자정이 넘어 취한 그대의 남편과 함께 찾아와 술을 조르다 그대의 차가운 눈초리에 번쩍 술이 깨어 돌아간 남편의 옛 친구는 귀하디귀한 손님이다. 며칠 전인가 무언가 아쉬운 일로 찾아 왔다가 그대의 쌀쌀맞은 대꾸에 말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간 새댁 피붙이는 물론 어제 하루 종일 그대를 대신해 집안의 궂은일을 해준 중년의 파출부도 모두 귀한 손님이다. 그런이들이 모두 사라진 뒤 정연한 이해득실의 인간 관계와 핵가족으로만 짜여진 세계란 얼마나 부스러지기 쉽고 외로운 것일까.

어머니는 여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이름이다. 여인의 가장 중요한 생산은 자녀이며 가장 위대한 성취는 그 양육이다 -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배워왔고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폐할 수 없는 진리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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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파 남편의 편지
안정효 지음 / 민음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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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파 남편의 편지를 읽고...

제목이 우선 마음에 끌렸고, 낭만파 남편은 어떤 내용의 편지를 아내에게 쓸까 무척 궁금해서 그동안 그가 전혀 낭만파로 생각지 않았는데, 줄곧 이 글을 읽으며 낭만파 남편을 안정효로 생각하며 읽었고, 낭만파 남편과 그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첫 장을 넘겼고, 낭만과는 전혀 연관 없는 익숙한 생활들의 반복을 나열하는 소설 기법이 지루하게 느껴지다가, 그 표현들이 아주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일상적인 내 생활의 반복과 그 생활에서 갑갑증 내지는 답답증을 품고 살고 있던 그 즈음의 내 자신의 모습을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는 느낌 바로 그거였다. 그러면서 그런 소설 기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처음에 읽을 때는 비슷한 대목은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지은이는 반복되는 부분을 마음놓고 듬성듬성 건너뛰며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미세한 움직임의 장치를 여기저기 숨겨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읽어 가면서 글로 읽는 보물찾기를 하게 되었다. 그의 말처럼 거듭되는 반복이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나름대로의 맛을 자아내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각도로 보든 <낭만파 남편의 편지>는 무척 잔인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남편이 벌이는 심리적인 놀이도 그렇고, 시원하게 사건을 빨리 전개시키지 않고 바늘 끝으로 모기의 날개를 떼어내는 기분으로 글을 써나간 작가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사디스트적인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흐뭇해서 웃겠다고 할만큼 이 작품을 쓰는 과정은 남을 괴롭힐 때처럼 재미있었다고 고백한다. 인상깊은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인가 이상해야 하는데 이상해야 할 무엇이 이상하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남편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복제된 하루, 복사기로 무수히 찍어낸 하루를 하루씩 살아가면서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상적이 아니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p100 그렇다. 결국 나 역시도 다시 찾아 나선다고 해도 지금의 남편과의 삶보다 나을 것이 따로 없을거란 생각을 한다. 오히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서로에게 적응하기 위해... 헛된 시간을 낭비하느니 현재의 위치에서 작은 낭만(?)들을 하나 하나 모아가면서 살아가고 싶다. 편안함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쉬운 듯 하면서 어려운 것이다. 그런 편안함을 언제부터인가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데 새롭고도 위험한 모험을 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정신적인 사랑을 어떤 여자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도 나눠준다면 그것은 죄가 될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아닌 다른 여러 남자에게서 정신적인 사랑을 받기만 하고 되돌려주지는 않는다면 그것은 여자에게는 남몰래 수집하는 보석처럼 소중한 비밀은 될지언정 결코 죄가 아니라고 아내는 믿었다.'는 내용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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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2
류시화.정채봉 엮음 / 샘터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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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엮은이 정채봉씨는 아름다움이 가시 돋친 엉겅퀴 세상을 구원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함께 엮은이 류시화씨는 인간끼리의 진정한 소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임을 깨달으며, 사랑과 친절이 곧 자신의 종교라고 말했다.

작은 이야기를 읽으며 잔잔한 감동을 여러 번 경험했다. 진정한 행복, 작은 것들의 소중함, 부자유한 신체를 딛고 최선을 다하는 장애인들의 모습, 부모님의 진한 사랑, 이웃에 대한 선의, 진실한 우정의 관계, 진정으로 큰 사람이 작게 작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아름다움 등...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어쩌면 간과해 버리고 지나가 버릴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조금씩이나마 알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것들은 오직 가슴으로만 느껴진다.' 는 헬렌 켈러의 말처럼 작은 이야기에서 난 가슴으로 느끼는 따스함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행복의 원리가 참으로 간단함을 이 책을 통해서 배웠다. 자신의 욕망을 줄이면 행복해 질 수 있단다. 내 욕망을 난 얼마나 줄여 나갈 수 있을까?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야 할 나의 욕망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진 후 무지개가 생기는 아름다움처럼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작은 이야기 속에서 배울 수 있었다.

<진정한 만남>이란 글에서 매우 인상적인 내용을 일부 옮겨보면 이렇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오'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인생은 마라톤이다> 마라톤 같은 인생! 새옹지마 같은 인생! 순간마다 일희일비할 필요 있을까? 내 삶이 고되다고 생각되면 이 글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솔직한 표현과 반성할 줄 아는 용기> '너의 솔직한 대답이 맘에 든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는 자신의 소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반성할 줄 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정신을 잃지 말아라. 그러면 너는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 자신의 소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되자고...

충분히 어두워졌을 때 인간은 비로소 별을 볼 수 있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남을 도울 수 있는 큰 기회가 우리 앞에 오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남을 도울 수 있는 작은 기회들은 날마다 우리를 찾아온다. -- 샐리 코흐
완전한 소유는 오직 줌으로써 가능하다. 당신이 주지 못하는 것은 결국 당신을 소유해 버린다. -- 앙드레 지드

<나의 행복은 걷는 것> 구절초꽃, 고마리꽃, 물봉숭아꽃들을 보며 걷는 분교 교사의 삶이 맑고 아름답다. 그가 걷는 것에 맛을 붙인 것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걷는 것'이라고 자랑을 하는 것은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보는 자연의 온갖 변화를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산도 한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라고 했다. 걸으면서 산을 보는 그 행복이 그를 산중에 잡아 둔다고 한다.

<자랑하리라> 여러분의 자랑 스무 가지를 써 보세요!
'......... 순간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나도 저런 것을 자랑할 수 있는데, 그래 나도 그렇게 하면서 사는데........ 그것은 아주 평범한 진리이면서 우리가 늘 해오던 생활의 전부였다. 평소에 우리가 너무나 시시하게 생각하고 재미없게 보던 조그마 한 일들이 커다랗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
여러분은 가족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자! 자신의 자랑을 마음껏 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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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 범우사르비아문고 11 범우 사르비아 총서 705
이미륵 지음 / 범우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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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줄 곧 내마음이 엷은 청색, 맑은 하늘색으로 물들어가듯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역자 후기에서 표현했듯이 고결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어린 시절 동무들과의 즐거움이 생생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윽한 평화가 지배하는 고장에서 수암과 먹냄새 향기로운 가운데 훈장에게 글공부도 하고, 독약을 먹을 정도의 장난꾸러기 짓을 하는 수암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미륵은 영육간에 균형을 잡으며 아름답게 성장해나간다.

무엇보다 미륵과 아버지의 관계는 내게 오랜 여운을 남길만큼 고결했다.
미륵은 외로운 아버지에게 주법을 배웠으며 더불어 술친구가 되었다. 그러면서 왠지 자신이 무척 자랐고 큰 것처럼 느낀다. 미륵은 현명하고도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는 아버지의 술친구가 된 것을 얼마나 기쁘게 생각했는가! 밝은 달빛아래서 향그러운 살구향을 맡으며 아버지와 술 마시며 함께한 대화의 시간은 미륵에게 훗날 얼마나 값지고 윤기도는 추억이었을까?

하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너의 영혼을 맑게 하기위한 높은학문이니 조심스럽게 경청하라고 진지하게 충고해 주는 아버지. 바둑을 가르치면서 '상대방이 돌을 놓거든 소리가 울리는 동안 기다려라. 그리고는 너의 돌을 놓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경솔하게 놓지는 말아라.'고 교훈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그려보았다.

미륵은 그런 아버지의 곁에 있을 때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늑히 안겨 있는 기분을 느꼈고 아버지의 핏줄이었으며, 아버지의 품은 언제나 자신을 받아 들일 수 있을 만큼 넉넉했음을 훗날 느끼리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푸근한 정서로 미륵이 성인되었을 때도 남아있으리라. 그런 정서가 미륵의 독일유학생활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새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참다운 교양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만 공부를 하여야 할 것 같았다.> 유럽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이틀동안이나 걸어서 사야 하는 신막 시장을 향한다. 북쪽 국경을 통과할 기차를 타기위해서... 결국 기차를 타지 못하고 귀로에 오르지만, 그런 유럽에로의 꿈은 그래서 미륵을 유학생활에서 더욱 열심히 정진하게 한 촉진제가 아니였나 생각한다.

새로운 학문을 위해서 의학 대학에 입학하지만, 해부실습후 의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는 <존재의 이론>이라는 철학서적에 깊이 빠져들기도 한다.
불안의 시기에 아들의 안전을 위하여 어머니는 말한다. <너는 자주 낙심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충실히 너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너를 무척 믿고 있단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사리 국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에는 유럽에 갈 것이다. ………………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자!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그리하여 미륵은 공자라도 낯선 나라에 가서는 그 나라의 풍습대로 살아야 되는 것처럼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은 시작된다. 붉은색 지붕이 많은 독일에서의 생활에 적응이 되기까지 그는 노스텔지어와 페이소스가 엄습하는 유럽 땅위에서의 일몰을 맞이해야 하리라.

늘 말이 없고 너무 많이 생각하는 미륵에게 봉운은 서방에서의 문화를 설명한다. 그러한 태도가 비사교성의 표시로, 심지어는 거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고... 언제나 여럿이 대화할 때는 섞여 같이 대화를 나누라는 조언을 하고 그는 프랑스로 떠난다.

혼자 독일에 남게 된 미륵은 항상 매 구절마다 단어를 찾아가며 한 줄 한 줄 고생스럽게 독일어공부에 정진했다.

어느 집 정원에 서 있는 한포기 꽈리나무를 보며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현실적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는 미륵. 그러던 얼마 후 눈내리는 날 아침, 늘 자애로우셨던 어머니가 지난 가을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미륵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오랫동안 슬프고 잔잔한 여운이 가슴속에 전해짐을 느끼며 <압록강은 흐른다>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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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7시에 떠나네
신경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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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그리스(?)민요의 노래제목이다. 가끔 FM을 통해 그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가슴에 파고드는 애절함이 배어있는 노래였다.

소설속의 주인공 하진처럼 사람의 기억이란 게 잊고 싶은 부분은 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시적인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긴 했지만 선택적인 사항으로 잊을 수 있다니...

인간이란 얼마나 편리하고 자기본위의 존재인지.
얼핏 얼핏 보여지는 기억의 잔해들로 자기를 찾고자 노력하는 하진의 노력은 눈물 겹다. 만약 나라면 그녀처럼 과감히 찾아 나설 용기가 났을까? 자신할 수 없는 부분들의 익명성과 은밀함을 찾아낼 용기가 있을까? 현재의 자신을 부정해야 할 위기가 생길 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서서히 다가설 수 있을까?

하얀 제주의 백사장이 눈에 아른거렸다. 여러번 여행을 했기에 산방굴사의 풍경도 금방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찾아낸 기억의 완결을 이뤄냈던 장소는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듯 선명한 장소였기에 매우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햇살에 그을린 과거의 사랑을 보면서 느꼈을 하진의 애잔함과, 그의 온전치 못한 사랑의 분신을 보면서 가슴 한 곳이 무너지는 하진은 내게 인간적인 친구(?)의 모습으로 전해져왔다.

신경숙의 소설에는 가슴 아픈 세상의 군상들이 너무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아빠같은 형님을 매일 마중나가는 소년의 꼬질꼬질한 얼굴과, 가족사진 한장으로 세상에 달랑 혼자 남겨진 이의 허망함들이 생생한 느낌으로 또한 전해져서 눈물이 찡했다.

책을 다 읽고나니 창밖에서 비가 내리는 듯했다.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하진의 곁에서 몸을 쓸어주고 씻겨주고, 더운 음식을 먹게 하고 가만히 안고 잠자주는 사람들의 안개같은 마음이 내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따뜻함이 절실한 11월이다.

인스턴트가 아닌 잣죽 맛은 어떤 것일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기억이란, 나의 과거와 미래는 어떤 것일까. 나도 어쩌면 어느 한 시절을 '빈집'에 가두고 서글프게 그 주변을 배회하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그 시절을 찾기위해 현실을 버리고 과거를 찾아 떠나고 싶어한 적은 없었나?

신경숙 소설에서 느껴지는 보살핌은 애틋하기 그지없어 종일토록 그 느낌을 매만지게 한다. 그래서 난 누군가 느끼고 싶거나, 그리워질 때 신경숙을 찾는다.

산문을 배반하는 문체, 논리나 합리는 언제나 바깥에 있는 듯한 그녀의 문체, 정서적인 울림이나, 운명적인 흐름, 살면서 쌓이는 이미지들과 얼토당토 않은 연민들을 소중히 보듬어 안는 그녀의 문체에서 인간의 냄새를 맡는다. 가끔 가슴에 한줄기 산산한 바람이 몰아치면 난 그녀의 책을 편다. 아무곳이나... 그리고 읽는다.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그녀의 문체는 언제나 촉촉히 젖어 들어가는 포근함과 동시에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글을 읽고 나면 머리가 비교적 맑아진다는 것이다.

P65 <한 순간, 마포대교의 가로등에 일제히 불이 켜지고 있다. 한 순간이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던 다리가 꿈결같이 환해졌다.> 그런 경험을 파리 샹제리제 거리를 걸으며 했다. 그 환희의 순간이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 그 감동적인 순간. 파리 야경을 신나게 걷다가 어느 일순간 고개를 들었을 때 동시에 켜지던 그 가로등. 그 때 확인한 시간은 정확히 밤 10시였다. '아! 파리 샹제리제 거리의 가로등은 밤 10시에 켜지는구나'하고 선명한 추억으로 남게한 그 날의 감동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느끼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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