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양장)
정성진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트로츠키는 지금은 '비운의 트로츠키'로 불리우는 된 깡마른 안경잡이의 이름이다. 인생의 질곡이 남극의 크라바스보다 깊다보니 자기를 자기라 부르지 못하고 저작권도 안주고 깜방간수 이름을 도용했다. 이름도용 당한 오뎃사의 교도관은 어쨋거나 이름 하나는 길게 남기게 되었다. 최소한 자본주의가  여름날 아침 풀입에 대롱대롱 달린 이슬처럼 햇살 아래 한순간 소멸하지 않는한 트로츠키는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윤건차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의 지식인 지도를 보면 이 책의 저자 정성진의 이름이 발견된다. 구좌파의 트로츠키주의자에 그를 포함시켜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내용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주로 알튀세르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 가끔 인용될 뿐이고 좌파 사상의 메인스트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윤건차가 정성진과 술 한잔 안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윤건차가 트로츠키주의를 강건너 불보듯 다루고 넘어가는 것은 80년대 이후 한국 좌파 사상 흐름을 나름대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나 한국에서나 또 그 어디서나 소수였을 뿐이다.

정성진식으로 말하자면 80년대까지 스탈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던 PD와 NL의 한국좌파는 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좌충우돌 상황에 들어가 버렸다. 대략 이제 마르크스의 재전유라는 이름으로 신사회 운동이라는 좌파흐름으로 옮겨탄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고전 마르크스의 전통은 지식인 지도에서 흐지부지되고 신좌파와 개량주의가 좌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대략적으로 정성진의 울부짖음을 정리하자면 그런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책의 3부에 해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자원들>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하면 트로츠키주의 입장에서 세계체제론이나 위기종식론,자율주의 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들은 이미 <이론>,<마르크스연구> 등에 게재되었던 글이고 나 역시 이너넷을 통해서 접했다.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화접변 세대인지라 밑줄 못 긋는 한때문에 책을 사들었다. 물론 모니터로 읽다가 눈알이 빨게 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보건위생적 차원도 한 몫을 했다.그러므로 안구가 튼튼하거나 밑줄의 강박이 없는 분이라면 굳이 이 책을 살 필요가 없다. 약간의 인터넷 파도타기를 한다면 이 책에 씌여진 정성진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니면 한국의 IS그룹인 '다함께' 홈페이지를 이용하던지 말이다.

책은 치즈냄새 폴폴 풍기는 쥐가 쫓는 미로 같다. 미로 곳곳에 마르크스 사상 논쟁사가 있다. 길을 따라가다보면 신좌파들의 마르크스 해석에 대한 비판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트로츠키와 고전적 트로츠키를 발전시킨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 경향까지 이르게 된다. 정성진의 정치적 입장도 이와 같다. 스탈린 치하에서 부관참시 당한 트로츠키를 살려냄과 동시에 제4인터내셔널의 '구 트로츠키'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트로츠키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적통이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에 있기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역사적으로 과거 좌파나 우파가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렀던 스탈린주의는 변종이 주인 행세를 한 것 뿐이다.트로츠키는 "볼세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단지 한 줄기의 피가 아니라 피의 강이 흐르고 있다.'라고 본인 입으로 하늘 아래 양립할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한다.트로츠키주의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의 계보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붕괴' 가 아니라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 ... ' 이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가 '역사의 종말'일 리 없듯이 해방의 가치로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살아난다. 그래서 이 책의 1차 주적은 스탈린 주의이다. 제 5장 <소련 사회의 성격>을 비롯해서 책 곳곳에서 수 십 차례에 걸쳐 '스탈린은 마르크스와 관계가 없다.' '스탈린의 1928년은 반동적 혁명이다' 가 강조된다. 즉 소련이 무너진 것은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인 '스탈린주의'가 붕괴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정치적 악연으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지젝 역시 <혁명이 다가온다>에서 소련 사회가 트라우마적인 트로츠키를 삭제했다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소련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동안 내내 그랬다. 고르바초프 역시 트로츠키를 복권시키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스탈린 비판에 올인했지만 정성진은 여기서 소련 사회의 성격 분석에서 트로츠키의 분석을 따르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스탈린 하의 소련사회를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보았다. 1917년 혁명으로 노동자 국가가 되기는 했으나 고립된 상황에서 당의 관료들이 망쳐놓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내에서 트로츠키의 전투 방향은 사회 혁명이라기 보다는 정치혁명이 될 수 밖에 없었다.이 점은 트로츠키의 한계로 지적 되기도 한다. 정성진은 영국 사노당의 중심이라고 할만한 토니클리프의 '세계체제론적인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으로 소련사회 성격을 설명한다. 쉽게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중심으로 봤을 때 세계체제론적인 입장에서 소련은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양식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계승 발전하고 있는 마르크스 일가의 무공은 스탈린주의를 비롯해서  여러 신좌파 이론들과의 논쟁에 무기로 등장한다. 다른 비책없이 '교과서에 충실하고, 기본기가 힘이지요'를 연상시키는 초식이다. 마르크스의 공황론,시장론,가치론,계급론,혁명 주체론,국제주의 등이 중심이된다.특히 트로츠키하면 연상되는 '영구혁명론'은 '일국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의 전통과 관련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레닌에게 '사건'이라고 할 말한 1차세계대전과 '혁명적 패배주의'의 전통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 '영구 혁명론'이다. 이것을 단순히 '국가의 소멸'로 이해하는 것도 트로츠키에 대한 오해이다. 마르크스가 기존의 사회학과 달리 자신의 이론을 '과학'이라고 했듯이 그 가문의 아들 트로츠키도 과학을 이어간다. 영구혁명이 일어나는 장소는 일국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트로츠키는 직시하고 있다.

신좌파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서도 이 책은 트로츠키주의적인 입장에서 '비마르크스 이론이며 개량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스탈린주의에 이어 이 책에서 공격하고 있는 제 2 주적이 자본주의 하에서 진보의 이름으로 거론되는 개량주의 흐름이다. 제 6장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에서는 앰허스트학파의 '반본질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계급의 현실체에 대해서 부정하고 분석의 입구로서만 이용한다는 점도 도마에 오른다.이들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읽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들이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는 알튀세르의 중층결정과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까지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또한 마르크스 전통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할 만한 변혁 주체로서 '노동자 중심성'을 부정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체제론 역시 분석단위의 범위를 넓히고 새로운 방법론을 제기한 것 까지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행론에서 계급의 역사적 인과관계 설정에 오류를 범함으로서 신고전파 경제학에 가깝와져 버린다고 비판한다.또한 자본주의 순환적인 자본주의 위기론에 있어서도 콘트라티예프 곡선에 의지한 나머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법칙을 외면하고 있다고 본다. <제국>논쟁과 관련되서는 항간의 세계화론을 포스트구조주의 방식으로 재서술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제 2인터내셔널의 황제였던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재판이라고 폄하한다.당연히 모호한 개념인 '다중'은 '노동자 중심성'의 부재로 비판당하고 '제국'의 강조는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면죄부로 비판당한다. 트로츠키주의의 경우 자본주의를 끝내는 혁명의 핵심은 로쟈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의 전통에 있다고 본다. 슬라보예 지젝의 <제국>비판을 인용하여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은 전(pre) 마르크스주의적이며 혁명없는 혁명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하트와 네그리에 대해 정성진은 '급진적인 아나키즘 수사학으로 무장한 개량주의' 라고 칭하고 있다. 물론 각각의 이론들은 비판만큼이나 많은 반비판을 담고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것들을 모였다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 중에 걸러지는 것들이 -내게는-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녹색평론식 생태공동체주의가 그런 과정을 거쳐 내게서 비판적 거리로 재구성된 생각들 중에 하나다. 현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정성진은 책 마지막에 <참여계획경제론>을 들면서 몇 가지 이론들간의 차이를 비교한다.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의 인생 동안 몇 개의 다른 노동 형태를 계획한다거나, 대의제에 대한 비판으로 그리스 민주주식 공무원 제비뽑기 선발 제도 등은...글쎄 더 따라가기 힘들었다. 정성진이 극렬히 싫어할 말이지만 좋은 의미든 나쁜의미든 유토피아적이다. 결국 나의 시선은 마지막 장 보다 그 지난과 현재의 담론 분석에 더 큰 비중을 둘 수 밖에 없었다.. 

 김동춘은 80년대 이후 좌파의 흐름을 '완고파'와 '개량파'로 나누었는데 트로츠키주의는 완고파의 흐름에 속해있다. 한켠에서 보자면 마르크스를 교조화해서 '이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다르다'라는 식으로 비판과 주장의 근거를 '마르크스'에게만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완고한 주장이 시대조류에 어긋하는 훈고학적인 것으로만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나 역시 고전적인 마르크스보다는 포스트쪽에 더 관심이 많은 측면에서 이런 책들은 여러모로 질문과 고민점들을 되짚어보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와 관련되어 '케인즈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는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의 답변이다.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담론은 기본적으로 '나쁜자본주의'와 '좋은 자본주의'를 상정하고 시작된다. 진보적인 사람들 입에서 '그래도 신자유주의보다 낫지 않냐'고 이야기하면 ..더 이상 할 말 없어지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알라딘 진보의 문제가 그것이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보다 못하냐? 그럼 현실적으로 그거면 됐지.' 이런 식 말이다. 근본적인 질문에 왜 우파 초딩같은 댓글 밖에 못할까가 문제 제기인거다. 우파보고 초딩같다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다. (2MB가 바보짓 하니까 갑자기 노무현이 성군이 된다. 물론 한끗 차이로 노무현이 이명박보다 낫다. 그런데 문제를 이런식으로 설정하는 것은 초딩 짓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역시 노무현이 낫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뇌세포에 박수를....물론 2MB보다는 낫다. 이 말이 그렇게 듣도 싶다면 천 번 쯤은 더 해줄 수 있다.) 이 책은 다분히 경제 이론을 중심으로 역사적 평가들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권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11장 케인즈주의인가,21세기 사회주의인가? >는 인터넷으로라도 읽어 보길 바라는 부분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 방파제가 된 듯 한 장하준 교수의 제도주의 학파도 크게 보면 케인즈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정성진은 케인즈주의가 '나쁜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로 대체하자는 제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착취 자체를 거부한다고 비판한다.그런데 왜 케인즈주의가 다시 진보의 이름으로 등장할까? 정성진은 기본적으로 케인즈주의의 자본주의 친화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짜 사회주의의 종말과 함께 '대안'이 없다는 광범위한 믿음이 '자본주의 수정,개량론'을 진보 진영의 과제로 상승 시킨 역사적 실망의 결과라고 본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성진은 제2 인터내션널의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등의 수정주의 노선을 비마르크스적이라고 공박한다. 이미 정성진과 장하준은 몇 차례 논쟁도 했다.(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작금의 야만적 자본주의보다 케인즈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낫다...하지만 그러니까 그게 뭐가 왜 나빠요?... 라고만 이야기하지는 말자.) 정성진은 케인즈주의의 이론적 한계가 신자유주의를 몰고 왔으며 케인즈주의의 역사적 조건들이 재현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르체디의 말을 인용하여 진보 진영의 선택을 묻고 있다. "마르크스인가,아니면 케인스인가?"  로쟈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인가,야만인가?' 를 물었던 것의 업그레이드된 반복같으나 사실 전자가 더 많은 선택의 고민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비판적 지지'나 '개량주의'만큼 잠시나마 사람 심사 복잡하게 하는 것이 또 없기 때문이다. 

정작 마르크스의 적자 트로츠키에 관한 책인데 트로츠키 이야기는 별로 하지 못했다.국제사회주의경향의 주된 흐름을 읽어내면 그 안에 트로츠키 사상이 들어가 있으리라 생각된다.국내에서는 <다함께>가 바로 IS그룹니다. 가끔 그 완고성때문에 좌파 내에서 비판이 되기도 하고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영국 사회주의 노동당의 2006년 where we are stand 내용이다. 자본주의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사회주의,국제주의,인종주의,제국주의 및 억압에 대한 반대,혁명정당......과거 강령에 비해 의회주의와 개량주의 비판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한다. (1992년에는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행동,개량이 아닌 혁명,의회적 길은 없다...등이 있었다) '완고파'도 시대의 정세를 정확히 읽어 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그것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뛰어났던 점 아니었던가? 

 .....미친 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가 아니다.그 안에는 여고생도 있고,민주당 당원도 있고, 진보 신당 당원도 있다. 생태주의자도 있고 트로츠키주의자도 있고 자율주의자도 있다.행동은 같이 할 수 있지만 함께 줄 설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명확하다...나는 내가 무슨 주의자인지 몰라서 '범좌파'라고 두리뭉실 이야기한다. 그런데 '무슨 주의자가 뭐가 중요하냐? '고 묻는 '결과주의',','반지성주의' 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다. 이론은 세계관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역사가 그렇게 알려 준다. 하루 하루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무얼 위해 가는지 알고 하루 하루 가는 것이 더 낫다. (하도 쓸모 없는 오해가 많아서 이런 사족까지  단다. 앉아서 책상 물림하는 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과 행동의 상호침투라고 해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도장을 찍었다. 붉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이다. 무림을 통일한 맹주 '자본주의'는 자기 내공의 한계점을 확인하려는 듯 맹렬히 팽창한다. 목적론적이라고 비판 받는 마르크스는 그 팽창의 임계점이 바로 자본주의가 끝장나는 지점이라고 예견했다.  즉 자본주의는 이미 그 안에 붕괴의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고전 <사기>에 보면 '치솟아 오른 용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운다' 고 했다. 결국 인류의 역사가 빙하기 얼음의 침묵속으로 사그라들 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자본주의도 다른 형식에 그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요즘 봐서는 그 전에 빙하기가 올 것 같다.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으로 붕괴된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그렇다면 뭐하러 이런 책을 읽겠는가. 그냥 두면 터질터인데..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는 레닌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를 형식화해내고 현실화해내는 기획가이자 정치 지도자로서의 레닌이다. 끈에 묶여 광장에서 질질 끌려 다니던 레닌 동상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뭐 별 구태의연한' 이란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렇지만 지젝은 우리가 다시 레닌에게 돌아가기를 요구한다.그것은 책 결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레닌을 반복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레닌으로 되돌아가서, 레닌을 복기하면서, 레닌을 가지고 현실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를 쉽게 읽기 위해 레닌의 행적을 알아야 하는가?  절반은 그렇고 또 절반은 그렇지 않다. 특히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역사와  러시아 사회 민주당 내의 이념적 갈등 등에 대한 선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책에 나오는 '레닌의 고독'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고독'의 상황을 돌파해낸 실천가이자 이론가로서 레닌을 관뚜껑 열고 부활시킨 지젝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레닌과 러시아 혁명사에 대해 논문을 쓸 필요는 없다. 책의 부제가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이지만 정작 레닌이 이 책의 주인공은 아니다. 지젝은 기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마르크스,라캉,헤겔을 가지고 '탈출구가 없는 자본주의','혁명의 전망이 사라진 자본주의' 를 헤집는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폐쇄 갱도'로 생각되는 '현재 대해 다시금 전복의 가능성을 타진한다.이 책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지젝은  현 시점에 서구 좌파가 놓여 있는 서글픈 상황을 적시한다. 진정한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문화전쟁을 해방의 정치학에서 주요 영역으로 승인하는 것.복지국가의 성과물을 지키는 순수한 방어적 입장,사이버 공산주의에 대한 순진한 믿음,그리고 최종적으로 항복 자체인 제 3의 길....결국 지젝은 레닌에게서 다른 단초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해방구는 아니어도 돌파구 같은 것 말이다.

이 책<혁명이 다가온다>를 나는 한국적 상황에 놓인  진보주의자들(?) 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동어반복적인 '약자', '독재', '저항' 등의 단어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 단어와의 '동일시'를 통해 확인하기 여념없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 책은 필수적이다. 이것은 그 단어들이 의미가 없다는,괜한 짓 한다는 의미의 보수주의적 시각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들을 해체하고 재전유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진보주의 알라디너들이 좋아하는 노암 촘스키나 하우드 진, 피터 싱어 같은 이들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지젝은 비판한다. 그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이다. 나는 이 지점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선'이 '선'이 되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사고 역시 멈춘다. (나는 이 문제를 오프라인 상에서 설명하려다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생태주의'는 왜 나빠요? ..내가 언제 나쁘다고 했냐...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자는 것이 좋은 거 아니에요...누가 좋지 않다고 했냐...결국 나온 말은 '생각이 너무 많으면'..   쯥쯥 ) 아마 온라인 상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그저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남겨 놓는 것에서 더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말만 남기자. 선불교에서 하는 말 중에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이 있다.

지젝은 이 책에서 '탈산업화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의 합의에 대해 먼저 말문을 연다.그것은 레닌의 유령을 지우는 것이다. 비타협적 계급투쟁,전위당 노선,폭력 혁명에 의한 권력 쟁취 등에 대한 폐지..지젝은 이런 공통된 합의를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사회주의 정당들의 '애국주의 전선' 과 이에 대항하던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 전선과 병치시킨다. 이런 예 이외에도 레닌의 주장과 이론은 멘세비키 사이에서도 또한  볼세비키 사이에서 언제나 소수자의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현실의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안목과 그것을 이론화하여 실천의 방향타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강단좌파들과 다른 위대한 점이 거기에 있다.

지젝은 레닌의 유령을 복기하기 위해 탈근대 자본주의의에서 주를 이루는 진보적 가치들을 먼저 도마위에 올린다. 다문화주의에 바탕을 둔 포스트 식민주의는 고통을 '서사할 권리'만 가진다고 비판한다. 지젝의 칼카로운 송곳니는 이렇다.

 "착취당하는 소수를 위한 진정한 사회적 참여와 미국의 급진 강단에서 번창하고 있는 ,위험하지도 결함도 없는,여가 시간에 혁명을 하는 듯한 다문화적이고 포스트 식민주의적 작업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

다들 '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관용'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들어보자.

"우리가 트라우마적인 차원을 건드리는 순간 관용은 끝난다.간단히 말하면 관용은 타자가 '불관용적인 근본주의자'가 아닌 한 유효한 타자에 대한 관용이다.이는 곧 실재적 타자가 아닌 한 관용된다는 뜻이다. 관용은 실재의 타자,자신의 '향유'에 실체적 무게를 가진 타자에게는 '무관용'이 된다....(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자는) 이런 향유때문에 불편해지고,이런 이유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전반적인 전략으로 삼는다."

아닌가? 나는 타인에 대한 '관용'을 당연히 해야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젝의 지적이 맞다고 생각한다.물론 민주노동당을 '한나라당 2중대'라고 비난했던 '열린 우리당'의 전례를 흉내내서 "기본적 '관용'도 없는 곳에서 거기까지 나아가는 것은 결국 '관용'의 가치를 희석시킨다...너무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라는 식으로 말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 분들께 정말 싸가지 없게도 지젝은 한 걸음 더 나가는 질문을 한다.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이 실제로 궁극적인 윤리의 영역인가?" (너무 생각이 없으면 이런 질문 자체도 생각하지 않을 듯 하다.)

고통받는 타인들에 대한 거리두기도 지젝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그것은 타인을 추상적 사회기능의 담지자로 축소시키고 거기에 대한 주체의 차가움을 풍부한 개인의 정서적인 삶이라는 유령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나 몰라'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래도 그들에게 무언가 해' 라고 말하는 주체에 더 가깝다. 지젝의 말을 그대로 들어보자

"우리는 고통받는 타인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현실로부터 우리의 안전한 고립이 위협받지 않은 채 정서적인 공감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희생자들의 분할이 바로 희생담론의 진실이다. " 결국 이것은 지젝이 비판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은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이웃은 죽은 이웃이다...지젝은 이제 오늘날 좌파 자유주의자들의 상황까지 비웃는데...(나는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적용되리라고 본다.) "그들은 체제를 위험하게 하지 않으면서 보수주의자들에게 대응하여 점수를 얻기 위해 인종주의,환경주의,노동자의 불만을 자극한다."라고 다분히 위험한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다들 좋아하라하는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서도 지젝은 지젝거린다.그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확신적 위임을 문제삼는다.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선험적으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체제임을 지적해야만 실제로 반자본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반세계화 운동 내에 존재하는 실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개량주의적 태도들에 대한 지적으로 읽힌다.그는 급진성의 유무를 떠나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을 문제삼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또한 자유민주주의적 유산을 붕괴시키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붕괴시킬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야말로 요즘 사랑받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문화자본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에서는 제러미 리프킨이 링 위에서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리프킨은 이미지가 상품을 대표하는게 아니라 상품이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말을 한다.이런 역설적인 방식이 또한 매력적이다.하지만 지젝은 리프킨의 전망이 탈산업적 질서를 너무 앞서서 나아가고 잇다고 지적한다.즉 문화적 경험의 상품화만이 아니라 '실제적' 물질 생산까지 포괄해야만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물질적 생산은 탈산업화 시대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로 숨을 뿐이라는 것이 지젝의 올바른 지적이다. 지젝은 그 예로 '헐리우드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생산장면' 과 우리들이 쓰는 상품 뒤에 존재하는 '메이드 인 차이나,인도,인도네시아' 등에 주목하라고 이야기 한다.(조만간에 그건 것고 삭제될 것이다.그렇게 무대 뒤로 숨기려는 의도와 그 영향을 읽어야한다.)

지젝은 이제 레닌의 가진 '진실의 정치학'을 찾자고 한다. 탈근대적인 상대주의가치관 속에서 뻔뻔하게 진실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로 점프하자....1차 세계대전 당시 당신이 러시아에 있었다면 레닌처럼 '혁명적 패배주의'를 주창하는 편에 설 수 있었는가...그렇다고 말한다면 지금도 같은 급의 질문을 할 수 있다.....'혁명은 그렇게 불가능한가? )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은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철학자들에 대해 훅을 던질 준비를 한다.특히 정치적인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지젝과는 그래도 가까와 보이는 알랭 바디우는 자코뱅당적이라고 비판받는다. 자크 랑시에르,에티앙 발리바르등도 문화연구와 인정투쟁 중심자들로 경제 영역의 몰락을 공유한하고 비판한다. 지젝은 여기서 조금 더 마르크스에 뿌리를 견고히하고 이들 프랑스 정치철학자들이 정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경제의 영역을 실증적인 사회 영역의 하나로 축소하고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고 있다고 말한다.일종의 '신사회 운동'의 적자들에 대해 지젝은 '혁명 없는 혁명을 꿈꾸는 자' 들이라고 비난한다.그러면서 일련의 반세계화운동(또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교화되어 단지 또 하나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장소'로 이용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지젝은 레닌을 그대로 적용하여 '당이라는 형식어 없는 운동은 저항의 악순환'에 빠진다고 말한다.즉 정당이라는 조직의 형식 없는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라는 셈이다.그는 이어서 레닌의 예를 들어 '극단적인 정치 전략가 레닌과 생산의 과학적인 재조직을 꿈꾼 테크노라트 레닌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정치경제학에 바탕을 둔 연타를 날린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제목은 <슈베르트를 듣는 레닌>이다. 지젝의 좌충우돌형 글쓰기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실제 레닌이 듣는 슈베르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겨울나그네>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데올로기가 자리바꿈을 통해서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지젝은 고급문화와 정치적 야만이 아무런 문제 없이 일체화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권력 투쟁 가운데서 예술이 가진 '적대 관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레닌을 말하고 있다.또한 고급 문화의 공유를 위한 또하나의 토대인 외설적 연대가 낳는 배제에 대해 지적한다. 즉 풍월당에서 클래식을 듣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함께 고급 와인을 마셔야지 되며,거기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배제된다는 것이다.또한 자본주의적 주체에 대한 영화'파이크 클럽'을 텍스트로 한 분석은 쉬우면서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절단이나 자기구타는 아니어도...다들 겨울의 칼바람 맞으며 '아...살아 있구나.'의 물질성을 느껴보았다면 이해할 수 있을 내용이다.9/11 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한 <현실의 사막에 온것을 환영하네> 역시 그 자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시의성 있는 내용이다.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삭제의 정치학은 존재하는가>에서는 바디우의 용어 '20세기는 실재의 열정'이다 라는 말을 이용하여 그 두 측면 '정화'와 '삭제'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다.즉 폭력적으로 껍질을 벗겨 실재를 드러내는 정화와 텅 빈 영역으로서의 삭제를 중립적으로 지켜내었던 레닌의 모습을 통해 '사라진 혁명'에 대한 기획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책<혁명이 다가온다>에서 지젝은 정말 조자룡이 헌 창 쓰 듯이 각종 문화적 콘텐츠들을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동원한다. 21세기형 철학자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것이다..... '지젝은 어떻게 혁명을 상품화 했는가?' 과연 '그의 혁명'은 또다른 동유럽'강단좌파'의 출몰은 아닐까?" "우리에겐 레닌의 시대와 다른 어떤 종류의 혁명을 준비해야 하는가?"  질문거리는 많고 지젝은 여전히 흥미롭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8-05-11 19:19   좋아요 0 | URL
뒤늦게, 재밌게, 읽었습니다.^^ 동유럽'강단좌파'란 비판은 지젝이 가장 혐오할 만한 것인데요.^^; 지젝에 대한 그런 식의 '수용'이 있을 뿐이죠. 특히나 국내에서의 '동유럽의 인문학 천재'라는 특이한 비아냥(천재다! 하지만 그래봐야 '동유럽'!)...

드팀전 2008-05-11 23:25   좋아요 0 | URL
^^..제가 지젝을 그렇게 생각치는 않습니다. 지젝에 대한 그런 비판들이 있다는 것에 어떤 답변이 필요한 가를 생각해본 것이지요. 물론 현재 돌아다니는 '지젝 비판'이 그에 대한 몰이해나 오독에서 오는 일방적인 것일 수 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
샹탈 무페 지음, 이보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자본주의에 경도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끝이 난 것 처럼 보인다.최근의 신자유주의는  초기 상인 자본주의의 재도래인 양 역사가 이룩해 놓은 민주주의적 전통 마저 숨통을 조은다.한국의 상황은 '실용주의'라는 외피를 둘러쓴 이런 '신자유주의'의 클론에 지나지 않는다.실제 좌파라고 할 수도 없는 구정권에 남의 옷을 입히며 이제 유일한 징벌자로서 역할을 자임한다.그 징벌자의 헤게모니는 다른 모든 가치있는 논의를 '구태'와 '구습'이라는 단어로 독점해 버린다.

유구한 전통의 자유민주주의의 천칭은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기울어졌다.누가 그랬는가? 

2차 세계대전 중 한 독일 장교가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그곳에서 독일 장교가 피카소의 걸작<게르니카>를 발견하고는 다음과 같이 피카소에게 물었다. "당신이 한 것이오?" 이에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아니 바로 당신이 한 짓이오.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중....

자유 민주주의의 전통을 무너뜨린 것은 좌파가 아니다.한국에서 좌파는 이론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이 궁극적 대안이 아님을 말했을 뿐,실제 자유민주주의를 흔들만한 힘을 가진적이 단 한번도 없다.그렇다면 누가 흔들었는지는 명약관화하다.당신들이 입고 있는 그 옷은'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무엇일 뿐이다.무페는 말한다."그 모든 거짓 딜레마는 특정 환경들 속에서는 함께 접합되었지만 필연적으로 관계가 없는 일련의 서로 다른 담론들을 '자유주의'의 용어 아래 융합한 결과이다."

시대가 암울하다는 불평과 자조가 주위에서 많이 들린다.이것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그것이 역사의 종말이 아님은 역사가 스스로 이야기해주고 있다.우리는 한숨과 실망으로 열려 있는 역사라는 강물에 허무의 방파제를 알아서 세울 필요가 없다.

 칼 슈미트의 '정치'와 '정치적인것'

  상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먼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을 요구한다.일단 무페의  선행적인 전제가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부재로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전자는 '제도로서의 정치'다.우리가 뉴스에서 만나며 말그대로 '정치'(politics)라고 믿는 그것이다.그렇다면 '정치적인 것(the politcal)'은 무엇인가? 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나치 협력자였던 칼 슈미트에게서 빌어온다.('나치' 그러니까 또 '생각의 얕음'을 드러내는 질문을 또 하고 싶지? )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인간 사회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규정이라고 말한다.그것은 '적대'와 '친구'로 나뉠 수 밖에 없는, '갈등'과 '분열'의 영속적인 상태를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대다수의 '자유주의자'들은 이 지점에서 깜짝 놀란다.'적의'라는 개념이 그들에겐 낯설기 때문이다.무페는 자신의 '급진적인 자유민주주의 기획'의 주요 비판의 대상이 될 '자유주의'적 사유가 '대중들'이 표출되어 나타나는 정치 운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그들에게 이것은 병리적인 것으로 분류되거나 비합리적인 힘들의 표현일 뿐이다.무페의 기획은 여기서 시작된다.즉 정치적인 것이 필연적이며 적대가 없는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그리고 이 조건 하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법이 그녀의 관심 주제이다.

아..무페의 자상함을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자

무페는 '적'이란 말에 '붉은 기'를 연상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도 '적'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준다.(핵심은 그 '적'이란게 '인민재판 기소자'가 아니라는 뜻이다.그러니'적','적대','적의' 이런 학술적인 표현이 나오더라도 겪어보지도 않았을 '한국전쟁'의 기억은 잠시접고..붉은 깃발 좀 떠올리지 말자..제발 좀..무페 말에 따르면 그런 자가 진짜 '적이다')

'이런 질서를 위해서는 '적'과 '반대자'를 구별해야 한다.그것은 정치 공동체의 맥락에서 대립진영을 파괴해야 할 적이 아니라 그 존재의 정당성을 용인해야 할 반대자로 고려하기를 요구한다.우리는 반대자의 생각에 맞서 싸울 것이지만 그들 자신을 방어할 권리를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적'의 범주는 민주주의적 '게임규칙'을 받아 들이지 않아서 정치 공동체에서 스스로 배제된 사람들을 가르킬 때는 여전히 타당하게 남아 있다.<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몇 줄 밖에 할애되지 않은 내용인데  이렇게 낭비적인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쯥 하다.)

롤즈의 <정의론>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비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허술한 합의 형태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통명사처럼 사용된다.하지만 이 두 개념은 상호 배치되는 가치관이다.칼 슈미트나 이사야 벌린 같은 학자들이 오래전에 제기한 주장이다.이제는 거의 상식적인 개념이다.흔히 자유주의하면 '개인의 자유'를 말하지 않는가.슈미트는 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는 특정 가치관을 형성할 수 없다고 말한다.즉 모든 것이 개인에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나야하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이고 이것은 정치적인 것을 부인할 수 밖에 없다.그런데 '민주주의'는 어떤가? '대의제'로 대표되는 '민주주의'는 불행히도 '개인의 선택'을 그대로 반영해 주지 않는다.초등학교에서도 배우는 내용인다.예를 들어 나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그래서 그 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그런데 우리 동네에 '진보신당' 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선거에서 나의 정치적 자유 의지는 소멸되는 것이다.물론 다른 대타를 구할 수 도 있다. 그런데 그건 차선의 선택이지 진정한 의미의 내 '개인의 정치적 자유'의 의사표현은 아니지 않은가? '

 무페는  가장 진척된 형태의 자유주의 교과서라 할 만한 존 롤즈의 <정의론>을 텍스트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의무론적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을 한다. 물론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좋음보다 옳음의 우선성' 이 야만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방어적 테제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무페도 그 장점은 장점 대로 인정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롤즈식의 '정의'만 구현되어도 지금 보다 한결 나아질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롤즈의 <정의론>이 갖고 있는 이론적 한계를 지적한다. 롤즈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이익에 근거하여 이를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공유해낼 합의를 중요시여긴다.그는 이 시민 대중이 갖는 공통의 직관적인 도덕관념을 이미 '선험적 전제'로 상정하고 논리를 전개한다.그에게 '목적론적 자유주의자'라기 보다는 (칸트적인 의미의)'의무론적 자유주의자 '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결국 롤즈는 '도덕의 담론'과 '정치의 담론'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슈미트는 그래서 '자유주의적 개념들이 전형적으로 윤리학과 경제학 사이에서 움직인다'라고 말했다.그럼 '정치'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느냐는 문제남는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둘의 일치를 주장했다.그러나 근대 정치의 정초자로 보는 마키아벨리는 달랐다.그의 <군주론>이 갖는 중요 미덕은 '정치'와 '도덕'을 분리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이후 근대 정치는 그 지평 위에서 발전 되어 왔다.왜 마키아벨리가 중요한지.. <군주론>을 단순히 '국왕 독재 지침서'만으로 읽어서는 안돼는 이유가 그런 맥락 속에 있다.

또한 롤즈의 <정의론>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사소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또한 도덕관념에 바탕을 둔 '합의'문제에 있어서 '구성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롤즈에게 평등과 자유는 도덕적 인격체들로서의 인간 속성이다.그리고 이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직관에 기초한다.하지만 왜곡되지 않은 '합리적 소통'과 '합리적 합의'에 기반을 둔 사회적 통일성에 대한 열망은 사실은 반정치적이다.과연 우리는 '왜곡되지 않은 도덕적 인격체들의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신그람시주의자로서 무페의 헤게모니적인 주체를 만날 수 있다.

또한 무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전통에서 자유주의와 항상 맞서 왔던 공동체주의자(공화주의자.공리주의자)들에게도 비판을 가한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이 전통적인 대립은 미국 건국 이념에서 갈등 양상을 빚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맥킨타이어나 샌들같은 이들이다.무페는 먼저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공리주의자들의 비판을 소개하고 그 비판이 담고 있는 또 다른 한계를 지적하는 형식을 따른다.공리주의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 또한 다양해서 한 그릇에 담긴 어렵다.무페는 자신이 마르크스를 떠났던 같은 이유로 공리주의가 가진 '공동체의 선'이라는 '본질주의'에 대해 비판을 한다.기본적으로 공동체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을 소환한 것이다.이런 시민 공화주의적 전통은 '구성적 공동체'를 말한다.시민이 참여자로서 정치 공동체에 통합되는 것이다.참여정부가 있었을 만큼 '정치공동체의 참여'를 일종의  선으로만 여기는 한국의 진보주의 입장에서는 이게 뭔 문제가 될 까 하고 말할 수 있다.문제는 시민공화적 전통의 참여의식은 개인적 자유의 희생을 담보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확실성의 표지'가 사라진 시대에 '본질주의'로서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무페의 비본질주의적 정치관으로 보면 시민 공화주의의 단일하고 실체적인 공동선 관념은 현대 정치의 특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뿐이다.물론 무페는 정치와 윤리의 끊어진 고리를 연결하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지는 않다.대신 그것이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물을 희생해가면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페는 오크쇼트의 "소키에르타스'의 관념을 이용하여 비본질적인 개인들이 공동의 관심사에 대한 결합으로서의 결사체를 적절한 것으로 본다.중요한 점은 절대적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하에서 분화된 주체들 사이의 관계를 중심점으로 한 구성이라는 것이다.웃자고 예를 들자면... 두산 베어스와 짜장면을 좋아하는 A와 롯데 자이언츠와 짜장면을 좋아하는 C는 결사의 형식을 이루어낼 수 있다.둘다 짜장을 좋아하니까...삼성 라이온스와 짬뽕을 좋아하는 C는....어떡게 하냐구? 피식..상상력을 동원하쇼.사실 B는 축구팀 FC서울을 좋아하고 C도 축구팀은 FC서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무페는 근대적 형식의 정치 결사체가 공동선이라는 실체적 관념이 아니라 공동의 유대,공동의 관심사에 의한 결합이라고 말한다.따라서 이것은 규정된 형태나 유대 없이 끊임없이 새로 제정되는 공동체이다.이것은 전근대적 공동체와도 자유주의적 공동체와도 다른 형식인 셈이다.이런 소키에르타스 개념은  다원주의와 개인적 자유를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규범적 측면을 사적 도덕의 영역으로 나몰라라 하지 않는다.무페는 오크쇼트가 이런 소키에르 관념을 '공통의 언어'라는 보수적 개념으로 풀이한 것에 반하여 '갈등과 적대'의 모델을 도입하여 재전유할 것을 주장한다.

무페의 급진적 자유민주주의 기획이 어떤 정체를 띄는가를 찾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이는 다른 이론들이 그렇듯이 동시대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의미이다.무페의 의도는 "현대 민주주의의 본질로 구성된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어느 정도까지 다원주의를 옹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그녀는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의 역사적 성격을 끌어안는다.특히 구좌파에게 부르주아 정치 체제를 옹호하고 사탕발림해버린 것으로 비유되곤 하던 자유민주주의의 미덕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하지만 그녀는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본질주의' '도덕주의' '허구의식' 등을 해체하길 제안한다.그 대신 '합의'와 '안정'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가치에 매달려서 자기모순에 빠진 자유민주주의를 '갈등'과 '불확정성'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그렇듯이 '정치적인 것'을 귀환시켜야만 비로소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이론의 핵심은 인간은 부조화상태를 조화상태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무페는 역설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을 구현하려고 하지말고 '부조화'와 함께 뒹굴라는 것이다.(이미 책상 줄 안맞는게 불편해 미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사회를 보호하고픈' 분들.)

'긴장'-이것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간의 긴장이거나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원칙간의 긴장이다-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 기획이 다원주의와 더불어 풍부해지고 살아 있을 수 있는 최상의 보증물이다.이 긴장을 해소하려고 욕망한다면 정치적인 것의 제거와 민주주의의 파괴만을 이끌어 낼 뿐이다.

P.S) 이 책은 여러 논문을 합쳐 놓은 것이라서 중복되는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결과적으로 선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책 전체를 볼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꼼꼼히 몇 챕터만 읽어도 충분할 수 있다...처음에는 서로 서문도 써주고 친했다던 라클라우,무페 친구와 지젝이 점점 멀어지는 이유를 얼핏 알 것 같다.누군가 묻는다....무페는 빨갱이냐? ....자유민주주의를 보존하고 지키자는데 그게 빨갱이냐...하지만 그녀는 넓은 의미의 좌파다.(신사회운동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해가 안갈 것이라고 생각한다.왜냐하면 그들에겐 제도주의자 '장하준'같은 이들도 좌파,빨갱이이기때문이다.진짜 오랜만에 '빨갱이'란 말 써본다.언제부턴가 이 단어가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한다.아름다운 시절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8-04-04 15:30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근데 이 긴 걸 다 읽으신건 아니겠지요.소중한 시간에 부디 그러지 않으셨길...(진짜루요..)
왜 자꾸 이렇게 길게 쓰는지 생각해봤는데...정리하고 리뷰를 쓰는게 아니라 정리하면서 리뷰를 써서 그런것 같아요.다음번에는 좀 짧게 해야지...

점심 먹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땡땡이치고 해운대 바닷가 갔다 막 돌아왔답니다.
연두빛 봄바다가 꽃물을 뚝뚝 떨어뜨린 것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What's Up 1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랭 바디우에게 사도 바울은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문화 혁명가이다.흔히들 자주 하는 비교처럼 마르크스에게 레닌이 있었다면 예수에게는 바울이 있었다.레닌과 바울은 그들의 선지자가 세상에 던진 기획을 역사라는 지평 위에서 프로그램화 해낸다.

알랭 바디우는 서문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진리를 두고 벌어지는 지난 담론들에-거칠게 말하자면 근대와 탈근대 담론들-거리를 두며 이를 관통하는 그만의 접근법을 제안한다. '보편성'을 옹호하는 그는-스스로 '보편적 개별성'이라고 표현한다.-탈근대 철학의 메인스트림인,또한 우리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차이의 철학'에 대해 성찰적인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흔히 말하는 '정체성의 정치'가 가진 한계를 들뢰즈가 말한 '자본의 지속적인 재영토화'작업으로 바라본다. '차이의 정치',또는 '정체성의 정치'라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시장이 지닌 천편일률적인 특권들에 대해서 동일하게 노출될 권리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예를 들어 동성애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성애자들이 원하는 것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족제도 안으로의 가담을 인정해달라는 것에 멈춘다는 것이다.(바디우가 이들이 요구하는 동일한 권리에 대해 부정한다거나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바디우는 실제로 이주노동자 문제에 현실적 개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바디우는 이제 자문한다

이 모든 것(화폐적 동질성,정체성 요구,자본의 추상적 보편성,부분 집합의 이익을 위한 특수성)과 단절하는 가운데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교의 탄압자 '사울'에서  '바울'이 된 인물을 쫓아가면서 이 시대를 변혁할 수 있는 고정점으로 '보편성'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다.

2장에서 바디우는 바울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시작한다.여기서 참고가 되는 성경 편들은  <고린도서>,<로마서>등이다.바디우는 뒤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정전은 <4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의 글들이라고 말한다.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진리'에 선행하는 '사건의 철학'을 말한다.그가 바라보는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절대성'이라는 지평에서 보자면 '상대성'의 철학이다.그는 '진리 공정'이라는 말로 진리가 구성되어지는 방식을 말한다. 진리는 '사건에 대한 기입'이라고 말할 정도이다.(사실 사건과 진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꼼꼼히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다.)

 어쨋거나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바디우는 '진리'라는 것에 어떤 정체성도 어떤 법도 형성하지 않는 중심없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그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사건'과 '바울'의 양자 관계에서 '보편주의'를 끌어 내기 위한 '사건'은 무엇인가?  바울에게 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그 사건 이외에 복음서에도 수시로 등장하는 각 종 기적,치료,예언 등등은 아무런 상관없는 사건들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라는 존재 자체도 '사건'의 측면에서는 무관한 존재일 수도 있다.

'부활'이라는 사건을 보물로 간직한 바울에게 싸워야할 두 가지 담론들이 등장한다.하나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한-율법 중심의 유대-그리스도인들이다.다른 하나는 바울을 비웃고 말았던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다.바디우는 이것을 두 가지 담론의 상징으로 설명한다.율법은 '표징'이고 현인들은 '철학'이다.이렇게 해서 바울은 '반철학적 보편주의'의 선구적 인물로 기록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2장 1-5절)

 뒤에 다시 한 번 등장하지만 바울에게 '율법'은 '죽음의 형상'이었다.실재의 삶이란 것이 죽음의 편에서 바라본 삶이 되고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영역에 바라본 형상이 되었다.이것을 원래의 자리로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정초적인 '사건'이 요구된다.실제로 바울은 공의회를 통해 유대민족의 종교로 멈추게 될 그리스도교를 보편성에 입각해서 세계화시키는 이론적 지평을 만들어 낸다.

3장에서 바디우는 역사적 상황들-유대인의 봉기,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을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동방의 한 도시에서 제국의 중심(로마)로 이전 되는 과정을 말한다.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건설을 보편적이고 탈중심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려했던 바울의 기획과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그러면서 바디우는 바울의 사회적 불평등,제국주의.노예제도에 기반한 사회 모델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는 혁명가로서 이해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를 언급한다.(영화 공부를 하다보면 꼭 거치게 되는 사람이다.) 파솔리니는 바울의 현재성에 주목을 한 사람 중에 한명이다.파솔리니는 코뮌주의와 혁명가의 문제,좀 더 쉽게 말하면 혁명의 순수성,성스러움과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바울을 투사해서 설명한다.그에게 바울이 제 3인터네셔널의 투쟁가로 재현되는 것이다.그는 성경속에서 바울에 대한 배반과 체포가 결국 성스러움이 갖는 필연적 내부 배반운동으로 보고 있다.파솔리니는 바울의 텍스트를 통해 현실적 지형도 아래서 생기는 혁명과 당의 관계 설정 그리고 그 존재론적 파국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4장에서 바디우는 바울이 맞선던 유대담론과 그리스담론을 다시 언급한다.이 둘 다가 지배의 동일한 현상이라고 말한다.그는 이것을 '아버지'의 담론들이라고 규정한다.그렇다면 바울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아들'의 담론이다.바울에게 있어 삼위일체같은 교부들의 이론과 파스칼식 논리적 종교해명은 무의미하다.그에게는 '단절'이 더 긴급하다.극단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전복적'인 아들의 '사건'에 더 큰 비중을 둔다.또한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무화하면서-바디우는 그것을 '기적의 담론'이라고 하여 유대담론,그리스담론,그리스도교담론에 이어 제 4의 담론으로 설명한다- 증거의 부재,주체의 허약함을 최상의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의 전복적인 특징은 바디우의 말로 압축된다.

"모든 진리는 파괴될 수 없는 젊음으로 특징지어진다." 바디우는 여기서 바울의 최대 공격자 중 한사람이었던 니체를 연상한다.니체가 말하던 그 단절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획이 바울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이외에도 바디우는 바울과 니체의 몇 가지 공통점을 제시한다.하지만 니체는 바울을 물고 늘어졌다.바디우는 그가 바울을 왜곡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적이 아닌 경쟁자로서의 질투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사건은 단절이자 또한 은총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여기서 바울은 사건을 통한 단절을 정식화해내는 문구 제시한다. "여러분은 율법하에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므로(로마서 6장 14절)" 바디우는 사간을 통한 단절이 주체를 항상 ".....이 아니라 .....임'의 분열된 형태로 구성하며 이런 형식이 보편성을 담보한다고 주장한다.이것은 전자가 폐쇄적인 특수성들에 대해 잠재적 해체를 가하고 후자가 사건에 의해 열린 이 과정의 주체들을 동역자로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바디우에게 주체는 자기적 주체는 없다.하지만 사분오열된 주체가 그 사분오렬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게 하지않는 것이 그의 미덕으로 보인다.그의 주체는 분열을 통해 다시 보편성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바울의 확신은 일자의 표징은 모두에 대해 있는 것,다시 말해 예외가 없음이라는 것이다...이는 하나의 말 건넴의 구조에 기반해 이해되어야한다.일자는 그 말 건네는 주체들 안에 어떤 차이도 기입하지 않는다.이것이 바로 사건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보편성의 준칙이다...일자에 대한 보편적이고 탈 율법적인 이해를 통해 주체에 대한 모든 특수적이거나 공동체적인 병합 그리고 주체의 구성적 분열에 대한 모든 법적,계약론적인 접근을 해체한다.주체를 정초하는 것은 주체가 당연히 받아야할 것이 아니다.왜나햐만 주체의 정립은 하나의 근원적인 우연 속에서 선언되는 것과 연결된다. 

이제 바울의 가장 유명한 말이 등장할 차례이다."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뭐 이런 것 성경 구절 말이다.바디우는 이 단어를 조금 다르게 번역하는데 믿음,희망,자애. 좀더 주체론적 접근을 위해서 확신,확신성,사랑이라고 말한다.바디우는 사건을 진리에 선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선언하는 것과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한다.이런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참된 것에 대한 열림그리고 그에 대한 선언이다.소망(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충실성의 근간이 되는 준칙의 확고부동함이다.그리고 사랑은 이런 과정이 보편화되어 실질성을 얻는 것이다.어떻게 보면 주체화를 설명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대중 노선'처럼 읽히기도 한다.

바디우는 책 말미에서 '은총의 유물론'이라고 해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이 주체화 하는 과정을 몇가지로 정리한다.각 문장들이 환유적이고 또한 함의한 바가 깊기때문에 각 선언만 때어놓고 보면 이해가 안될 가능성이 높다.

1.일자는 모두에 대해 있으며 율번이 아니라 사건으로 부터 유래한다.

2.율법과는 관련이 없는 우연으로서의 사건만이 그 자체를 넘어서는 다양성,즉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도래하게 할 수 있다.

3.율법은 주체를 사유의 무력함으로 구성한다.

4.구원의 문자,또는 진리 공정을 위한 문자적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5.주체는 진리의 보편적 말 건넴-자신이 이러한 과정을 지탱한다-을 문자적이지 않은 법으로 삼는다.

6.어떤 진리에 힘을 주고 그에 대한 주체적 충실성을 결정하는 것은 사건에 의해 정립된 자신과의 관계가 모두에게 말 건네는 것이지 그러한 관계 자체가 아니다.

7.진리의 주체적 과장은 그러한 진리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전투적 실재는 그와 같은 진리를 구성하는 모두에 대한 말 건넴이다.보편주의의 물질성은 모든 진리의 전투적 차원이다.

8.자체의 지속이라는 명령과 관련해 주체는 그를 구성하는 사건의 일어남이 보편적이며 따라서 그에게 실질적으로 관여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개별성은 보편성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벗어난 특수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바디우는 바울을 보편주의의 혁명가로 설명하고 있다.하지만 바울의 보편성은 차별성과 논쟁하는 보편성이 아니다.오히려 바울은 전술적으로 '로마에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순응자의 모습을 보이기도한다.혁명의 대중주의 전술과도 유사하다.마오주의자들이 외쳤던 농민속으로 처럼 말이다.바디우가 말하고자하는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것은 결국 각자를 각자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차이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차이와 관습을 횡당하고 초월하는 것이다.대신 차이들을 그대로 두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대목이 바울을 종파주의적 도덕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했다고 한다.이것은 이 시대 진보임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자성할 수 있는 질문이 된다.'울분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내 질문이기도 하다.폭발시키고 찢어버리고 분쇄시켜버리고 싶은 자본주의.천박하고 경박하며 식민적인 한국 자본주의...이런 배설형 진보가 쾌변용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궁금하다.그런 성토의 자본주의 비판으로 변비가 풀린다면 의미가 있겠으나 정말 '자본주의'에 어떤식이라도 손을 대고 싶다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디우는 보편/차이의 관계 정립에 대해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다.

'바울의 시도는 보편 지향적인 평등주의가 불평등한 규범의 가역성을 통과하도록 하는데 있다....남자든 여자든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중요한 것은 차이들이 그들에게 은총처럼 도래한 보편성을 담지하는 것이다.또 거꾸로 보편성 그 자체는 차이들 안에서 그들에게 도래하는 보편성을 담지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만 자신의 현실성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피리나 거문고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 전서 14장 7절)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최유준 옮김 / 이다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출근길에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를 들었다.자동차 앞 유리에 어두컴컴한 교실 안의 풍경이 맺혔다.대학에서 트럼펫을 전공했던 스타일리쉬한 음악 선생과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유일한 음대 지망생인 친구도 떠올랐다..

오늘은 4년 마다 한 번 찾아오는 겨울의 꼬리.봄의 앞섶이다.남쪽에도 아직 꽃 소식은 멀다.하지만 곧 아가의 입김같은 따뜻한 바람이 스칠 것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봄이 온다..."아름답고 즐거우 ..운..으 으 마 악 이여"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음악통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그가 한 때 줄리어드에서 공부를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음악을 하기에 자신이 너무 이성적이었다는 퇴교 사유가 웃음을 자아낸다.탈식민주의의 사도 바울쯤에 해당할만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이 책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선험적'이라고 믿는 '음악예술'의 성격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먼저 사이드가 다루고 있는 음악이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의 음악 임을 전제해야 한다.그것은 흔히 알고 있는 '클래식', 서구 고전음악이다.(그러므로 이하에 나오는 '음악'은 모두 그 '클래식'음악이다.)

음악은 사회와 무관한 자율적 존재라고 하는 견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대중들에게 이같은 '예술 지상주의','순수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잘 먹힌다.그런데 음악은 조금 더 심하다.예를 들어 문학이나 영화 만 해도 텍스트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적 접근,정신분석학적 접근 등등 이리 찢고 저리 찢어 본다.그런데 음악은 이런 텍스트 분석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있다.여기에는 음악이 예술 장르로 갖는 특성도 한 몫한다.음악은 가장 절대적 형식의 기표예술이며 시간 예술이다.음표 하나 하나는 사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이런 기표들의 연쇄가 예술적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는 '추상의 순수'가 있다.베토벤의 '합창'에서 '인류애'를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딴딴딴 따아" 하는 4음표가 과연 운명의 노크소리인가? 아예 표제 조차 없으면 도대체 그 음표들이 어떤 걸 이야기하는지 어떡게 알까? 절대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규정하겠는가?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도 이런 말도 했다. "음악이 내게 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이 미학적으로 갖고 있는 특수성은 흔히 음악을 사회와 분리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여기에 사이드는 '전문성'이란 것이 더해져 음악의 자기충족성을 만족시켜 버린다고 말한다.고전 음악의 작곡가,연주가,음악학자들은 클래식이란 음악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포섭해버렸다.음악은 그렇게 저 멀리 북극성처럼 찬연하게 빛나는 무엇으로 남아있게 된다.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마추어음악학자로서 '인문학'이라는 사다리로 음악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려고 애쓴다.그가 가장 혐오하는 태도는 음악을 마치 선험적인 신처럼 숭배하는 태도이다.(불행하게도 음악에 미친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음악 안에 온 우주가 있다고 믿는 광신도들 말이다.)

그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음악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사이드는 '세련'이라는 말로 이 과정을 설명한다.그가 보기에 지난 세기 동안 음악과 사회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가장 예리하게 들어낸 사람은 아도르노이다.그는 아도르노의 음악론을 수용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한다.아도르노의 비관적 음악관과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세계관을 비판하고 종족음악의 분석을 지지한다거나 대중음악 또는 음악의 산업적 측면까지 내포하는 작업들을 긍정한다.대표적인 사람이 토스카니니와 글렌 굴드이다.1장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1장은 주로 퍼포먼스라는 측면에서 특이한 경험으로서의 콘서트를 다루고 있다.퍼포먼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공적 영역에 속한 부분이다.이것은 이미 일상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경험을 포함한다.글렌 굴드는 이런 한계 속에 있는 음악과 음악가의 정체성을 외부로 끌어 내는 작업을 기이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그는 피아노 콘서트를 일찌감치 접고 다른 매체를 통한 음악만들기 작업에 전념한다.레코딩이나 영화 등 비극장적이고 반미학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급진적인 방식으로 사회와의 복원을 꾀한다.주어진 것만 붙들고 연마하는 수도자적인 연주가를 스스로 거부하고 예술의 지평을 전복하는 예술가로의 실험을 죽는 날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2장에서는 '순수/정치'사이의 케케묵은 논쟁이 재현된다.폴 드망이라는 학자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다.과거 친나치 전력이 있었던 학자였다.이런 논쟁은 해방 이후 우리 예술계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낯설지 않다.(물론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해방이후 거의 논의되지 않다가 최근 몇 십년 사이에 많이 논의된것이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항상 등장하는 작곡가가 바로 바그너이다.히틀러는 바그너 매니아였다. 또한 그의 음악은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프로파간다송으로 제3제국에서 즐겨 사용되었다.바그너라는 인물은 아주 복잡한 인간이라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쉽지 않다.이런 것 저런 것 다 떼어내고 분명 인류가 만들어낸 천재 중에 한 명일 것이다.예술가로서 그의 포부도 한 시대의 흐름을 뒤흔들 만큼 거창한 것이었다.사이드의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이다.어느 한 쪽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의 예술적인 측면만 살펴도 곤란하고 또한 정치적인 모습만 봐도 안된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사이드는 바그너의 음악과 텍스트가 담고 있는-그는 주로 <반지>,<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언급한다- 반유대주의,반외국주의,제국주의의 맹아가 있음을 명백히 지적한다.사이드는 '음악의 침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즉 음악이 관련되는 여러 영역-가족,국가.계급,남녀관계,민족문제 등 공적 영역-에 끊임없이 넘나들었다는 것이다.앞에 예를 든 바그너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베토벤 이전의 작곡가들 역시 바그너와는 다른 형태로 사회적 관계에 복속되어 있었다.)사이드는 바그너를 통해 서구의 전체화 경향에 대해 말한다.이는 궁극적으로 그의 본영역인 '서양중심주의'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겠다는 의지이다.바그너의 반외국주의는 결국 타자에 대한 공포,그리고 지배를 숨기고 있다.이것은 그가 <오리엔탈리즘>에서 다루었던 주제이다.마이클 p 스타인버그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의미>를 재인용하는 사이드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독일 문화를 독일 이외의 세계에서도 공유하도록 하겠다는 잘츠부르크 민족주의적 세계시민주의의 핵심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인용한다.물론 이에 전적으로 동의할수는 없다.모든 문화라는 것이 결국은 지역성이라는 토대에 바탕을 둔 '민족문화'이기 때문이다.이것이 확산되는 과정에 분명히 부정적의미의 '민족주의'라는 혐의도 들어갈 수 있다.하지만 이것 자체를 강조하다 보면 '문화변동''문화이동'이라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물론 저자가 말한바는 '잘츠부르크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가진 사회적인 의미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한다.우리도 80년대 초반에 '국풍81'이라는 행사가 있지 않았던가.잘츠부르크페스티벌의 기획자 역시 애초에 그런 정치적 의미를 담았을 가능성은 농후하다.물론 이런 계보적인 접근이 현재 페스티벌의 의미와 곧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사이드는 여기서 슬쩍 푸코의 권력담론에 일침을 가한다.푸코의 이론이 담고 있는 서구중심주의와 자기 반성적인 자기중심성,미적 허무주의까지 아울러 비판하게 된다.

3장은 조금 읽기가 불편하다.악보가 몇 장 등장하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좀 더 많다.음악을 개인의 연상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한다.브람스의 이야기로 부터 끌어내는 음악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다.즉 브람스를 듣는 다는 것은 그 안에 누적된 베토벤을 연상하고 또 슈만을 그리는 작업이라는 것이다.일종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음악감상이다.사이드는 프루스트를 참고해서 '선율'이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선율이라는 것은 작곡가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무엇이며,미적 진술의 형성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도된 무엇이다.사이드는 이를 '음악의 음악'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 말년에 이 '음악의 음악'을 말하고자 했던 비범한 작곡가로 베토벤,브루크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든다.그는 소나타형식과 변주곡 형식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음악의 세련을 설명한다.물론 그가 관심을 갖는 스타일은 '대위와 변주'이다.베토벤의 푸가와 변주에 대한 관심,브루크너의 동일한 반복성의 반성적이고 명상적 요소,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으로 상징되는 변주와 다양성의 종합화되는 과정들이 그것이다.처음부터 음악과 사회와의 상호연계성을 주제로 이끌어온 사이드의 강의는 이제 마지막 역에 닿는다.그것은 여러문화 실천의 통합적 다양성을 통해 세련되어지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유토피아적  상황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사이드의 강의록을 보강해서 만든 책이다.전문적인 음악학자들의 책보다는 읽을 만 할지 모르지만 서양 고전음악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막막할지도 모른다.도대체 글렌 굴드가 누군데...이러면 읽는데 피곤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입체감도 떨어지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고.또한 사이드의 글쓰기 방식이 직접적으로 대상을 지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한번에 때려 잡는게 아니라 포위해서 잡는 방식이어서 논점을 잡으려면 집중도도 좀 필요하다.그리고 그의 글쓰기 탓인지 번역의 탓인지 문맥이 아름답지 못한 것들이 꽤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3-01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