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인간의 동반자
제임스 서펠 지음, 윤영애 옮김 / 들녘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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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개를 키운 적이 있는 나는 가끔 ‘개고기 논쟁’에 휘말리면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약간의 논쟁을 거쳐 사람들이 도달하는 합의점은 ‘키우는’ 개와 ‘먹는’ 개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즉, 먹는 개는 식용이기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먹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일부의 개는 원래 인간의 친구로 태어나고, 다른 일부의 개, 그리고 모든 소나 돼지는 원래 인간의 식량으로 태어나는 것인가? 동물에게 부여한 인간의 질서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제임스 서펠의 <동물, 인간의 동반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인간들은 잔인한 과정을 거쳐 도륙된 돼지를 태연하게 먹으면서도 애완 동물에 대해서는 그토록 한없는 애정을 쏟을 수 있는가? 서펠은 이러한 종류의 문제가 이른바 ‘사회과학’에서는 이상하게도 봉쇄되어온 질문이라고 지적한다.

서펠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단순한 차원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는 애완동물이 다른 인간을 찾지 못해 끌어들이는 대용물이라는 해석, 인간정신이 지닌 미약함의 증거라는 시선, 그리고 잉여생산물의 존재와 함께 등장한 기생성의 단편이라는 비판 모두를 거부한다. 서펠은 애완동물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의학적인 증거와 역사적인 지식을 넘나들며 솜씨있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기능적인 관점과 단순한 설명을 거부하는 대신, 서펠은 동물이 인간 사회에 정서적인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약하게’ 수용한다. 즉, 인간 사회에 대한 동물의 독특한 기여가 그들을 인간의 친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동물에 대한 이러한 갑론을박은 서펠에게는 하나의 징검다리이다. 그는 여기서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의 신화를 추적한다. 그는 전형적인 사냥꾼과 채집자들은 자신의 사냥감을 열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동물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기 보다는 동반자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경사회는 전체 시스템이 자연 정복 그리고 생물에 대한 지배와 조작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산 조건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식 속에 더욱 많은 균열을 일으켰고, 이는 어떻게든 봉합되어야 했다. 그리고, 자연 앞에 우뚝 선 인간이라는 관점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서펠은 이러한 지배와 패권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다시 인간을 향해 겨눠진 것이 ‘제국주의’와 ‘노예제’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농경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서펠의 관점이 매우 신선했다. 생태학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태’라는 좌우를 아우르는 모호한 정치적 구호 속에 느꼈던 일말의 찜찜함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정교한 생태학이랄까? 서펠은 자연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니는지가 중요하다는 기본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일깨워주고 있는 셈이다.

서펠의 인식론적인 전환은 분명 값진 것이다. 하지만, 망설여지는 부분이 없다면 거짓일 터이다. 자연에 대한 정복적 관점이 결국 인간에 대한 착취를 낳았다면, 관점의 탈식민화를 통해서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여전히, 비참한 인간사회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애완동물에 대한 애착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직 근본적인 전환을 이루지 못한 탓일지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선은 하나씩 차례대로 걷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한번에 움켜쥐고 맞서나가는 것이 싸움인 법이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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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백인들
마이클 무어 지음, 김현후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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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때 세미나를 하거나, (당분간 '어쨌든' 공부를 직업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학문’을 하다 보면 세상을 필요 이상으로 심오하게 보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특히나, 이른바 변혁/개혁 이론들에 대해서 그런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즉자적인 반대보다는 근본을 파헤쳐야 하며, 경박한 행동주의 보다는 과학에서 비롯하는 참된 '실천'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의 압박 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액티비즘을 낮게 평가하곤 한다. 머리는 빈 놈들이 목소리만 크다는 식일까?

<멍청한 백인들>이 북미에서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올랐을 때 무척이나 놀랐다. 이 넉넉하게 생긴 아저씨가 걸출한 다큐 작가인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책까지 쓸 줄이야! 그것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꽤 오래 지켰으니 말이다.

한번인가, 책을 사려고 집어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주제를 다루기에는 책이 경박스러워보였다고나 할까? 어쩔 수 없이 먹물티가 발동했는지,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책이 경박스럽다는 무의식에 책을 집지 못했다. 마이클 무어의 작품을, 그리고 그의 홈페이지에 게재되는 통렬하고 강렬한 메시지들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미국사회의 근본적인 폐부를 논하는 책이라면 이렇게 가벼워서는 안 된다는 편견을 품고 있었을 게다.

어쨌든, 이렇게 한번 멀어져 간 책을 다시 찾게 된 계기는 아카데미 시상식이었다. 미국 사회의 “fiction/non-fiction의 역설'을 말하며 'Shame on you, Bush!'를 외치던 그의 당당함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역시! 책은 그의 다큐 작품들 만큼이나 예리한 비판의식과 블랙 유머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통렬한 책을 만난 것이 얼마만인가? 책의 주제는 산만한 듯해도 몇 가지로 정연하게 나눠져 있다.

우선, 미국 대선에서 고어의 승리를 무대포로 짓밟은 부시와 그 공화당 깡패사단들에 대한 고발로 시작된다. 미국 대선에 대해서 우리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주로 접한 나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운 내용들이었다. 현재 부시 행정부의 참여한 내각의 숨기고 싶은 악행들 및 부시 자신의 백수스러움과 무식을 꼬집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 다음으로는 미국 내 흑인에 대한 구조적인 인종차별, 여성차별, 빈부격차의 문제가 도마에 오른다. 익히 알려진 문제들이지만, 꼼꼼한 통계수치와 통렬한 유머를 섞는 그의 입담이 새삼스럽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비단 이 땅의 일만은 아닌 듯 했다. 기업에 스폰서로 변해가면서도 변변히 가르치는 것이 없는 학교에 대해 무어는 10대들에게 교묘하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적들을 약올리라고 권한다.

민주당 역시 그의 면죄부를 받지는 못한다. 클린턴이 되도 않는 '흑인대통령'을 자처하면서 뒤로 깐 무수한 호박씨를 무어는 일일히 센다. 클린턴이 저지른 은밀한 악행에 비하면 되려 솔직한 레이건 시절이 좋았다고 늘어 놓으며,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정액은 그가 민중들에게 저지른 몹쓸 짓에 비하면 무시할만한 정도라고 깐죽대기도 한다.

책의 뒷부분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 그리고 랠프 네이더가 이끈 녹색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한 계기(그와 네이더는 개인적으로 좋은 인연은 아님에도)와 부시의 당선을 도왔다는(역시, 비판적 지지나 대동단결론은 이땅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판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이 주는 미덕은 솔직한 통렬함이다. 그는 복잡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범 지배블럭이 아니라, 공화당의 누구, 민주당의 누구이다. 그들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고 그들을 낙선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부시 일가에 대한 그의 공격을 읽노라면,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역시 무어는 얇팍하고 표면에 머무르기에 역시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기에는 너무 경박한 인물이 아닌가? 어쩌면, 그 무거움 때문에 혹자는 너무 깊이 들어가버렸고, 또 누구는 굴레를 아예 버리고 권력의 치마폭에 의탁한 것이 아닐까. 카메라를 든 '투사' 마이클 무어라면 이들을 가볍게 비웃고 넘어갈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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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 만문만화로 보는 근대의 얼굴
신명직 지음 / 현실문화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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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문화연구에서 나온 이 책은 일전에 출간된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와 쌍을 이루는 책이다. 김진송에 책에 크게 실망했던 바, 이 책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만화만평'들이 상당수 실려있다는 것을 알고는 냉큼 구입했다. 역시, 책의 가치는 저자의 논리 전개보다는 당시의 만화만평을 직접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사실, 저자의 분류나 해설은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로는 방해가 된다고 편이 맞을 것ㅇ,이고, 지나친 과잉해석으로 읽는 도중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 식민지배기 근대와 전근대가 혼융된 시기의 신문 만화만평들을 보는 일은 경이 그 자체이다. 당시 식민지의 삶 속에서 형성된 '모던'이라는 것과 오늘날 우리의 삶들은 어쩌면 그리도 닮아 있는 것일까!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식민지 근대화론 혹은 남한의 왜곡된 근대화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때, 한국 사회 변혁론의 주류를 이루었던 NL/PD론은 현실인식과 혁명 노선의 차이가 있었을 뿐, 남한사회가 근대화/자본주의화의 과정에서 어떤 의미로든 일탈/왜곡되었다는 점에서는 닮아있었다. 이와는 다르지만, 압축성장을 통한 (정상에서 벗어난) 근대화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된 근대적 '의식'이나 삶의 양식(모두스 베빈디)을 지닐 기회를 박탈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만평들을 접하면서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식민지라는 일제시대, 그 굴절/왜곡된 환경 속에서 움텄던 근대의식과 근대의 모습은 '식민지'이든, '제국주의 속의 자본주의'든, '압축성장'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속에서 배양된 오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해설이 방해가 되었던 이유도 식민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들기 보다는 이러한 왜곡된 근대화라는 렌즈 속에서 억지로 잡아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왜 당시의 삶과 지금의 삶이 닮아 있는가? 우리의 삶은 결국 '식민지 근대화'의 장기지속이었던가? 우리는 그 미몽에서 여전히 깨고 있니 못한 것인가?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우리가 갈망했고 지향했던 정상적인 근대의식, 정상적인(혹은 혁명적인) 근대화라는 이런 이미지가 미몽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남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주변부 자본주의/제국주의 하의 근대화/근대의식라는 또다른 유형으로 마땅히 제대로 분류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근대의 '다양한' 얼굴의 하나로 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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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 포 콜럼바인 : 재출시(2disc)
마이클 무어 감독, 마이클 무어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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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러시코프는 미디어와 하나가 되어버린 (미국의) 문화풍경에 대해 '데이터 스피어'라는 표현을 썼다. 어찌보면, 섬뜩한 말이기도 하다. 즉, 사람들이 정보를 받아들이고(프로세싱?) 자신의 의사를 표현함에 있어(아웃풋팅?), 미디어의 공백을 상상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유비쿼터스'다. 중세의 신이 어디에나 존재하듯이 이제는 미디어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러시코프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류) 미디어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고민했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전제는 누구도 미디어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는 것. 주류 미디어에 젖어서 살든, 아니면 이를 비판하든 모든 것은 '미디어를 거친 형태'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대단히 불쾌하고 우울한 묵시록적인 SF영화('너는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없다')를 보는 것 같지만, 러시코프는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 의외로 낙관적이다. 그는 데이터 스피어라는 실체가 탄생한 순간부터 주류 미디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미디어가 세계를 지배하는 순간 현실과의 연관을 지닌 강고한 통제 역시 흔들리게 된다(마치, 완벽을 추구한 매트릭스의 균열이 시온을 낳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주류 미디어의 의미와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이 내파될 가능성이 움트게 되고, 이를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불온한 바이러스들이 생성된다. 그의 책 제목인 '미디어 바이러스'란 바로 이러한 작동원리를 일컫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의 화제의 다큐멘터리 '콜럼바인의 볼링'을 보노라면 더글러스 러시코프의 명제가 떠오른다.

영화는 좁게 보면, 컬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것이지만, 중간 범위에서는 헌법에 총기 보유를 허용한 미국 사회의 딜레마를, 더 넓게는 세계 전체를 공포와 위험에 빠뜨리는 주범이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에 대해서는 과잉반응하는 집단 소아병에 빠진 미국의 역설을 말한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마이클 무어의 육성은 꽤나 진지할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의 주장은 명제로 추려놓고 보면 반미/반제의 구호에 가까울 정도로 앙상하고 까칠하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명제를 풀어놓는 수단은 다름 아닌 다큐멘터리이다.

마이클 무어는 역설적으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미국 사회의 풍경이 헐리웃, 네트워크 뉴스, 그리고 신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현실' 보다 훨씬 희극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총기 사건이 발생한 도시에서 NRA(미국무기협회)는 반드시 후속 집회를 개최한다. 꼭두각시 회장인 찰튼 헤스턴은 주먹 높이 불끈 쥐며 외친다. '죽는 순간까지 놓치 않으리.'(생각해보면 참 골때리고 싸가지없는 짓거리다) 컬럼바인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미국은 코소보에 대해서 유래없는 폭격을 퍼부었다(인과응보?). 두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비극의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이걸 미국의 학부모들과 청교도적 정치인들이 제대로 보지 못할 때, 그들이 청소년 범죄와 타락의 주범으로 꼽는 (컬럼바인 사건의 종범인) 마릴린 맨슨은 이 모든 사태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우리가 이 공포의 주범입니까?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구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가 흥미로운 건, 진실을 전하려는 그의 웅장한 목소리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펼치는 전략으로 데이터 스피어를 활용한다. 현실들의 조각을 이어붙이지만, 현실을 그리고 데이터 스피어를 자원 삼아서 이를 횡단하고 반성할 수 있는 유쾌한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가 만드는 불손한 다큐멘터리들이 여느 극영화 못지 않게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그가 미디어들이 들어찬 '데이터 스피어'의 틈새에서 무기를 벼려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마이클 무어가 조합한 미디어 바이러스를 통해 자신들의 살고 있는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적어도 <볼링 포 컬럼바인>에 비친 미국은 동경의 땅이라기 보다는 악몽의 땅이다.

다큐먼터리가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헤집고 들어가는 작가의 바이러스가 될 수 있될 수 있다니! 역시, 중요한 것은 전략과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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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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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역설적인 일이지만, 경제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중에서 <국부론>을 진득하게 읽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경제학설사 교과서에 몇 개의 문구나 어귀로 요약된 해설만을 익힐 뿐이다. <국부론>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저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어는 지나가는 말로 잠깐 등장한다. 오히려, <국부론>은 시장 만능주의로 깔끔하게 요약되지 않는 복합적인 저술이다.

<국부론>이 이러할진대, 이와 마주 놓인 <도덕감정론>은 오죽하겠는가. 시장을 통한 무한 이기심을 외쳤던 그 사람이 시장의 형성과 작동이 이처럼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내면의 자아를 규준으로 삼는 타인에 대한 도덕과 동감이 없다면, “이기심”은 시장을 유지하는 지주이기는커녕 시장을 파괴하고 경제적인 자유와 발전 마저 말살하리라는 것이 스미스의 진실이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이러한 스미스의 오독과 무지에서 출발한다. 스미스가 환생해 오늘날의 세계를 다시 목격한다면? 스미스의 이름 아래 무자비하고 감정없는 세계화의 깃발이 휘날리고, 철혈의 시장이 지배하는 세상을 그가 보게 된다면 뭐라 말할 것인가?

박사 논문의 완성을 앞둔 리처드 번스, 그는 주류 경제학계의 거두 알렌 라티머 교수의 지도 아래 러시아 알루미늄 산업의 민영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이대로만 나가면 학자로서 출세길이 보장될 것은 당연했다. 이때, 번즈 앞에 자신 속에 애덤 스미스의 영혼이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자동차 수리공 해럴드 팀스가 나타난다. 팀스의 육신을 빌은 스미스는 자신의 가르침이 오해되고 있으며 시장 경제를 지탱하는 도덕의 원리가 담긴 {도덕감정론}을 무시한 경제학자들의 경박함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처음엔 팀스를 미친 사람 취급하던 번스도 점차 그의 진실성에 매료되어 시장 경제의 진정한 기초에 대한 스미스의 가르침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소설로서는 그다지 훌륭한 작품이 아닐지 모르겠다. 시장경제의 차가운 옹호자였던 번즈 박사가 더운 가슴을 지닌 박애주의자로 변화해간다는 설정은 여느 헐리웃 영화의 낡고 흔한 전개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책의 미덕은 대중 소설의 형식을 빌어 스미스의 숨은 모습을 드러낸다는 저자의 전략이 비교적 잘 실현되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부활한 스미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시장 경제는 그 외면적 무자비함은 물론 개개인의 도덕적 황폐함을 가져와 시장이라는 제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스미스의 이름으로 자행된 세계화와 시장의 횡포는 그 칼 끝을 자신에게 겨누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책은 스미스의 감춰진 일면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그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있다. 시장경제의 “도덕적 기초”에 무게를 실어 <도덕감정론>을 <국부론>에서 구해낸 것은 좋았지만, 이 역시도 일면적인 애덤 스미스에 불과하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 아니던가? 그가 시장 경제에 대해 던졌던 물음은 완성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행형이기에 값진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책에서 스미스와 번즈의 암살자인 반세계화론자 막스 헤스가 전형적인 악당으로 형상화된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위태로워 보이는 오늘날의 세계는 스미스의 가르침이 잊혀지고 봉인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평생을 두고 씨름했던 시장과 자본주의 경제가 그대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로, 시장 경제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와 그 비판자 칼 맑스 사이의 치열한 논전이 주선되었으면 어떨까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책은 이러한 흥미로운 가능성을 애초에 막아 버렸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서 스미스는 또 다른 모습을 지닌 스승으로 다가오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 역동적으로 그려지지는 못했다. 차라리 막스 헤스와 스미스를 묶었다면 어땠을까? 책이 너무 과격해졌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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