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구하기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매우 역설적인 일이지만, 경제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중에서 <국부론>을 진득하게 읽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경제학설사 교과서에 몇 개의 문구나 어귀로 요약된 해설만을 익힐 뿐이다. <국부론>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저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표어는 지나가는 말로 잠깐 등장한다. 오히려, <국부론>은 시장 만능주의로 깔끔하게 요약되지 않는 복합적인 저술이다.

<국부론>이 이러할진대, 이와 마주 놓인 <도덕감정론>은 오죽하겠는가. 시장을 통한 무한 이기심을 외쳤던 그 사람이 시장의 형성과 작동이 이처럼 단순하게 환원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내면의 자아를 규준으로 삼는 타인에 대한 도덕과 동감이 없다면, “이기심”은 시장을 유지하는 지주이기는커녕 시장을 파괴하고 경제적인 자유와 발전 마저 말살하리라는 것이 스미스의 진실이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이러한 스미스의 오독과 무지에서 출발한다. 스미스가 환생해 오늘날의 세계를 다시 목격한다면? 스미스의 이름 아래 무자비하고 감정없는 세계화의 깃발이 휘날리고, 철혈의 시장이 지배하는 세상을 그가 보게 된다면 뭐라 말할 것인가?

박사 논문의 완성을 앞둔 리처드 번스, 그는 주류 경제학계의 거두 알렌 라티머 교수의 지도 아래 러시아 알루미늄 산업의 민영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이대로만 나가면 학자로서 출세길이 보장될 것은 당연했다. 이때, 번즈 앞에 자신 속에 애덤 스미스의 영혼이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자동차 수리공 해럴드 팀스가 나타난다. 팀스의 육신을 빌은 스미스는 자신의 가르침이 오해되고 있으며 시장 경제를 지탱하는 도덕의 원리가 담긴 {도덕감정론}을 무시한 경제학자들의 경박함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처음엔 팀스를 미친 사람 취급하던 번스도 점차 그의 진실성에 매료되어 시장 경제의 진정한 기초에 대한 스미스의 가르침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소설로서는 그다지 훌륭한 작품이 아닐지 모르겠다. 시장경제의 차가운 옹호자였던 번즈 박사가 더운 가슴을 지닌 박애주의자로 변화해간다는 설정은 여느 헐리웃 영화의 낡고 흔한 전개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책의 미덕은 대중 소설의 형식을 빌어 스미스의 숨은 모습을 드러낸다는 저자의 전략이 비교적 잘 실현되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부활한 스미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시장 경제는 그 외면적 무자비함은 물론 개개인의 도덕적 황폐함을 가져와 시장이라는 제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스미스의 이름으로 자행된 세계화와 시장의 횡포는 그 칼 끝을 자신에게 겨누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책은 스미스의 감춰진 일면을 잘 드러내고 있지만, 그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있다. 시장경제의 “도덕적 기초”에 무게를 실어 <도덕감정론>을 <국부론>에서 구해낸 것은 좋았지만, 이 역시도 일면적인 애덤 스미스에 불과하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 아니던가? 그가 시장 경제에 대해 던졌던 물음은 완성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행형이기에 값진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책에서 스미스와 번즈의 암살자인 반세계화론자 막스 헤스가 전형적인 악당으로 형상화된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위태로워 보이는 오늘날의 세계는 스미스의 가르침이 잊혀지고 봉인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평생을 두고 씨름했던 시장과 자본주의 경제가 그대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로, 시장 경제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와 그 비판자 칼 맑스 사이의 치열한 논전이 주선되었으면 어떨까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책은 이러한 흥미로운 가능성을 애초에 막아 버렸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서 스미스는 또 다른 모습을 지닌 스승으로 다가오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 역동적으로 그려지지는 못했다. 차라리 막스 헤스와 스미스를 묶었다면 어땠을까? 책이 너무 과격해졌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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