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다시보기
박홍규 / 필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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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활약한 그런 독재철학자들은 대학에서는 이미 없어졌다. 그러나 그 후배나 제자들이 여전히 그들의 자리를 이어받아 차지하고 앉아있고, 심지어는 국회나 청와대에까지 진출해 플라톤을 팔아먹으면서 민주주의를 모독하고 있다. -31쪽

"박정희 대통령은 이 민족의 절망에 가까운 빈사상태에서 헤매던 1960년대 초에 혜성과도 같이 나타나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겨레에게 나아갈 길을 올바르게 제시해준 위대한 영도자이다. 그의 신분은 비록 군인이었으니 그의 인격과 통찰은 일직이 역사상에 보기 드문 철학자요 사상가요 예언가임을 우리는 그의 탁월한 리더십에서 역력히 찾아 볼 수 있다. 세기의 현자 플라톤은 그 옛날 이른바 철인정치를 제창하였거니와 우리 영도자 박 대통령이야말로 철인정치가의 표본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민족의 등불>, 김명회, 김점곤, 민병기, 박준규, 여석기, 유형진, 이정식)-36-37쪽

"플라톤의 <국가>에서 우리는 자립적인 인격체로서의 개인은 거의 존재할 수 없는 국가, 기계와 같은 가공할 만한 사회상을 볼 수 있다. <국가>에 묘사되어 있는 유토피아는 플라톤 이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이르기까지 줄을 잇고 있는 비슷한 환상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가 중대한 사회적 변화들을 효과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 권력자들을 고무시켜온 저작이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러셀-지혜, 99)-41-42쪽

소피스트는 대부분 아테네가 아닌 다른 도시국가 출신으로서 아테네에서는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돈이 필요했다. (중략) 소피스트는 인간의 제도는 금기나 마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며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라고 보았고, 노예제와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강조했다. (중략)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프라타고라스가 죽은 뒤에 그의 책을 불태우는 데 앞장섰다. -113쪽

소피스트는 인간은 교육을 통해 무한히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혈통에 따른 도그마와 신화, 전설, 인습 등의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덕이란 후천적으로 계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자기인식과 비판을 중심으로 한 서양문화의 합리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는 소피스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그들은 과학적 진리나 윤리적 규범이나 종교가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인간노력의 산물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소피스트가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들이 펼친 활동의 중심은 변론술 교육이었다. 물론 그들이 현대의 민주주의자들과 같이 민주주의를 이념적인 이상으로 삼아 그 실현을 도모하고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주의적 철학에 근거해 민주주의적 이념을 대변한 점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113-114쪽

(소크라테스가 고발된 이유에 관해서)
그것은 기원전 411년과 404년에 적국 스파르타와 공모한 불만세력이 민주정을 전복시키고 독재정권을 수립해서 공포정치를 실시한 데 이어 소크라테스 재판이 열리기 2년 전인 기원전 401년에 그 불만세력이 또 다시 민주정의 전복을 기도한 탓이었다. 그리고 세 번의 반민주 책동에 소크라테스와 가까운 젊은이들이 주동 돌격대로 가담한 탓이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들이 재판에서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선동했다고 한 말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킨 것이었다. -165-166쪽

포퍼는 국가의 복지가 제도굿어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개인적 책임감에 달린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라고만 보는 플라톤식의 견해를 피상적이라고 비판한다(포퍼, 177). 왜냐하면 플라톤도 미래의 지도자를 교육하고 선정하는 과업은 제도에 맡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규제 받지 않는 주권 이론"과 "견제와 균형의 이론"의 대립을 제도주의와 인격주의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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