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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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단순한 한 건의 파병이 한국 자본주의를 제국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절차적으로 이 사건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미 내부적으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 한국 경제가 절실히 해외 시장과 해외 자원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무이다. 두 번째 의미는, 조금 더 우울한데, 한국이 전쟁에 참가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과거처럼 권위주의 정권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게 아니라 대단히 민주적이며 절차적으로 하자 없이, 그야말로 ‘국민들이 원해서’ - 그것도 ‘경제적인 이유’로 원하기 때문에 - 행해진다는 점이다. -71쪽

"왜 도대체 필요도 없는 이런 도로들을 지어야 하고, 지방 주민들을 위한 복지대책에 지방 예산을 쓰면 안 되는 거지요?"
"네, 국민 여러분, 우리는 곧 중국으로도 진출하고, 또 만주로도 진출할 것잉니까, 바로 여기에 새로운 도시가 필요하구요, 또 그렇게 멀리 가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에 도로가 필요한 거예요, 아시겠어요?"
국민경제가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 가장 전형적인 패턴은 군수산업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기본인데, 한국의 경우는 건설산업이 보조 역할 정도가 아닌 주요 주체로서 제국주의화를 직접 추진하는, 약간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후의 노무현 정부는 건설 산업을 중심으로 국가의 제국주의적 재편을 아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는데, 그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에서 제시된 동북아 중심국가 개념이었던 셈이다. 물론 우리가 ‘삼족오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북방 진출에 대한 특수한 갈망이 바로 이 시기에 최초의 원형을 보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87쪽

한국 자본주의가 이미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단독으로 제국주의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을 등에 업고 사실상 제국주의로서 기능하려고 한다는 가설에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은 해외에서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식민지에 해당하는 다른 나라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러 경제협약 중의 하나일 뿐인 한미FTA에 노무현 정부가 그토록 집착한 것은 - 그리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국민들이 이를 열렬히 지지한 것은 - 일종의 식민지 없는 제국주의가 이로써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이것이 사실상 국정홍보처가 얘기한 ‘경제영토’의 실질적 의미일 것이다. 그들은 ‘오버’한 것이 아니라, 가장 정확히 현실을 짚었던 셈이다. 미국을 등에 업은 ‘경제영토’의 확장, 그것이 바로 ‘촌놈들의 제국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98쪽

한국 자본주의 내부에 누적된 다양한 불균형들이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이 커져서 외부의 식민지 혹은 식민지에 준하는 ‘경제영토’ 없이는 문제를 원활하게 풀기 어렵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시장과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장치로써 식민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이 고전적 정의는 현재 한미FTA를 바라보는 많은 정치 지도자 및 상당수 국민들의 시각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99-100쪽

다른 존재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지만, 의외로 증오는 집단 속에서 혹은 특정한 시스템 안에서 매우 쉽게 증폭된다. 또한 아주 먼 곳에 있는 나라들보다 자기 이웃 국가, 그리고 자기 주변의 존재 혹은 형제들이 더 쉽게 이런 증오의 대상이 되곤 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다. 전혀 다른 존재, 그리고 너무 먼 곳에 있는 존재와는 비교는 물론이고 별다른 감정도 생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러모로 매우 비슷한 관계나 상태에서 나르시시즘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설명이다. 왜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그렇게도 싫어하고 학살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때 사회심리학은 때때로 이 개념을 사용한다. -168-169쪽

군인도 하나의 직업이고, 군인들이 모여서 하는 활동을 하나의 산업으로 본다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최고의 공공 서비스는 국가 안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주적’ 혹은 ‘잠재적 적국’이 발생시킬지도 모르는 전쟁이야말로 이러한 서비스가 만들어질 수 있는 원천인 셈이다. 이런 독특한 구조 - 한 편의 존재가 다른 편에게는 편익이 되고, 그 편익은 다시 다른 편에서의 편익이 되는 일종의 무한대의 ‘포지티브 피드백’ 구조- 를 가지고 있는 산업은 그야말로 군대라는 공공 서비스밖에 없다. 그러니 비록 적성국가라서 매일 ‘적’ 혹은 ‘원수’라고 서로를 증오하게 되어 있는 관계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이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현상을 둘러싸고 있는 파트너 관계인 셈이다. 한국군은 북한군을 주적으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고, 이는 북한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서로 만나고 협상도 하게 되는 고위 군장성들의 눈으로 남북 분단관계를 본다면, 기묘한 동업관계가 성립되는 셈이다. -175쪽

전쟁으로 덕을 보게 될 사람들이 직업군의 50%를 넘지 않게 하는 것이 산업구조적인 관점에서 본 평화의 1차 조건이고, 전쟁이 벌어지면 "쫄딱 망한다"라고 할 사람들이 50%를 넘어서는 것이 평화의 2차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회 전반에 평화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어야 할 텐데, 이 조건은 평화산업 없이는 만들어내기가 아주 어렵다. -214쪽

평화란 ‘불안한 균형’이라는 사실이다. ‘전쟁 없는 상태’로 정의할 수 있는 평화는 고정되고 완료된 어떤 것이 아니라, 잠시 발생하는 불안한 균형과 같은 것이다. 이웃 나라끼리 무역 거래든 인적 교류든 이런저런 관계로 많이 얽히는 것은 전쟁을 줄여줄 수많은 필요조건 중 하나지만, 때때로 전쟁을 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충분조건까지 채워지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전쟁 없는 평화를 만족시키는 필요충분 조건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균형 상태일 뿐이다. -228쪽

평화가 지닌 공공재로서의 속성이다. 평화는 개인에게 줄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서비스 중의 하나로, 많은 공공재 혹은 공공 서비스들이 그렇듯, 이 서비스는 누군가 더 수혜를 누린다고 비용이 더 들지는 않는다. 그런 만큼 ‘전쟁 없는 상태’를 지키는 데 비용이 더 요구될 때 이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가능성도 적다. (중략) ‘국방비 지출’이라는 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일 강한 한 개의 국가, 즉 ‘제국의 심장’이 최소한 ‘자기 땅에서의 전쟁은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임을 지난 2세기 동안 전 세계가 자본주의를 운용해오면서 이미 깨달았다. 전쟁으로 간주되는 테러까지를 포함한다면, 사실 그 제국의 심장이 누리는 평화란 것도 상당히 위태로운 개념일 뿐이다. -228-229쪽

아직 교육 파시즘은 미완성 상태이다. 대부분의 지배자들은 자식들을 이미 미국으로 빼돌린 상태라서,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감시와 억압은 그 자식들이 나중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조건이 되고 있다. 이 바보 나라에서 교육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쟁력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약간의 제약 조건이 남아 있다. 지배자들이 지배자로서의 권한을 영원히 세습하기 위해서는, 그들 중 일부는 장관을 비롯한 국가 권력을 틀어쥐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2세 중 일부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남아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이들이 가난한 아이들이나 중산층 따위와 같이 얽혀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재산의 유무로 학교를 나누려는 것이 한국 교육 파시즘이 나아가는 궁극의 이상향이다. 2년 내에 이 이상향은 한국에서 현실이 될 것이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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