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정치 : 이제 소수를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4
이남석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구판절판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지배 집단에게도 불이익이다. 왜냐하면 비교 대상이 없음으로 인해, 지배 집단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를 무시한 정치가 전횡적으로 진행된다면, 차이 집단은 지배 집단의 문화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도록 강요당하게 된다. 그 강요가 강화되면 될 수록 차이 집단은 스스로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를 무시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들의 존재 이유마저도 상실한다. 결국 차이를 무시한 정치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이렇듯 차이의 정치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난점은 위와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차이를 배제함으로써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지배 집단이나 차이 집단이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롭지 못하다. 이것은 특정 차이 집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이 집단에 적용된다. 따라서 모든 차이 집단은 지배 집단의 억압적이며 배제적인 권력에 저항하게 마련이다. -19쪽

차이의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단까지 몰고 간다. 현대 국가의 정부는 대부분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되므로, 국민 개개인이 지닌 다양한 차이는 그 정부 아래서 은폐된 채 하나의 동일성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동일성에 의해 다양한 차이는 ‘국민’이라는 통칭 명상로 통합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 점에서 차이의 정치론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동일성의 정치’라고 한다. -20쪽

개인은 모두 평등한 존재로서 법적․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은 ‘동일성’으로 존재하며, 법적․정치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근대 정치의 주체가 된다. 따라서 정치의 주체인 개인은 자연적 성이나 사회적 성, 타고난 부, 지위, 인종과 무관하다. 개인은 모두 기본적으로 동등하며, 차이와 불평등을 거부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정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모든 인간의 구체성을 사상해버린 추상 명사이다. ‘개인’이란 말 속에는 형태상의 차이와 질적인 차이는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추상 명사로서의 ‘개인’만 남는다. (중략)
근대 정치의 주체를 구성하는 추상적 개인은 지배 권력을 구축하는 존재로서 삶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단일 규범을 제시한다. 이 규범이 곧 지배 규범이 된다. 지배 규범이 강하면 강할수록 차이의 주체는 대다수 사람들이 속해 있는 규범 밖의 주변적 존재로 전락한다. -22쪽

대의제 민주주의의 ‘1인 1표’의 형식적 평등 아래, 차이 집단은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출하지 못하고, 자신의 권리를 직접 대표하지 못한다. 또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표성을 강조한 나머지 차이 집단의 견해를 수용하지도 못하고, 차이 집단의 대표성을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로써 차이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는 한계성을 갖게 된다. 이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시민의 형식적 평등을 정당화할 뿐 실질적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38쪽

차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의제 민주주의는 "진리는 의견의 무제한적인 충돌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으며, 경쟁은 조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이르기는커녕 조화도 창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는 지배 이익의 봉사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이 곧 그 사회의 주류 구성원이자 주류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차이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41쪽

권력 교체의 이면에는 다수결의 원리가 있다. 다수결의 원리는 자유토론의 보장, 다수의 소수 포용,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존중, 소수와 다수의 상호 역전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전제되지 않는다면, 다수결의 원리는 다수와 소수의 항구 불변을 초래하여 정당성을 잃게 된다. 소수가 자유로운 토론과 설득에 의해 다수가 될 수 없다면, 그 국가는 이미 다수에 의한 전횡 국가이다. 따라서 다수결 원리의 존재만이 전횡 국가를 막을 수 있고,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한다. 상대적 소수는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다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해 ‘진정한 동의’를 하고,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중략) (계속)-43-45쪽

(이어서) 그러나 소수와 다수의 상호 역전 가능성은 다수결의 원리의 한계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다수결의 원리의 근본적인 한계는 사회적 약자와 차이 집단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략)
이들(소수)에게 ‘1인 1표’는 소수를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감옥에 영원히 묶어두는 주술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의 다수 가능성은 그 정치 체제의 주류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사회적 약자나 소수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원한 소수이고 영원한 약자이다. 어떤 조건이 변화해도, 소수는 투표를 통해 다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소수가 다수결의 원리에 의한 결정에 순응하는 것은 ‘진정한 동의’가 아닌 ‘마지못한 동의’일 뿐이다. -43-45쪽

다수의 견해는 사회 내에서 보편성으로서 도덕적 지위를 획득하는 반면, 소수의 견해는 도덕적 지위를 상실하고서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마저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다. (중략) 보편성을 획득한 집단은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집단에게 보편성에 따를 것을 강요함과 동시에 고유한 정치적 가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이로 인해 다양한 소수 집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가치에 회의를 품게 되어 결국 가치의 자포자기 상태를 초래한다. -49-50쪽

하버마스는 권력과 관련된 ‘진리의 생산’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억압과 왜곡이 없는 이상적 담화 상황에서 토론한 결과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푸코는 이상적인 담화 상황에 근거하여 사회 구성원들이 진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이상적 담화 상황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루소주의적 환상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그 개인이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인간의 마음이 소통할 수 있으며, 각 개인의 관점이 장애물에 가로막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견해가 각 개인의 견해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몽상이다."-66-67쪽

차이 몰이해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반면, 차이 집단의 특수성 자체는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자 하는 대다수 자유주의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에 해당한다. 모든 개인은 평등하며 존엄성을 지닌 주체이므로,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가 최대한 보장되면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고, 존엄성을 존중받는 인간은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을 받지 않으므로 사회에 차이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따라서 국가는 이러한 차이 집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들을 배려할 필요가 없고 자연스럽게 차이 집단에 대한 중립성을 지키게 된다. -75쪽

개인은 최대의 사회적 선의 실현이라고 하는 목적을 위한 대체 가능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아미 거트먼)

자유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완전성을 보호해주며, 다른 자유의 행사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아미 거트먼)

국가에게 개인의 기본적 자유를 파괴할 권리가 허용되서는 안 된다. (아미 거트먼)

자유주의적 토대에 근거한 정부는 내 동료 시민들의 요구가 아무리 가치 있다 할지라도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 동의 없이 내가 행동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아미 거트먼)-80-81쪽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의 구속을 받는 개인과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정하며, 이러한 공동체는 중앙 국가의 기능 중 일부를 양도받아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지는 정치 구현을 전제한다. 이와 같이 가정함으로써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혁명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의미 상실, 신사회 운동과 다양한 주체의 성장에 따른 사회주의 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의 밑바탕에는 다원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 깔려 있다. -86쪽

울린에 따르면 정치란 집단의 공적 권위에 유용한 자원을 둘러싸고서 조직화되고 불평등한 사회 권력들이 합법적인 동시에 공적으로 경쟁함을 의미한다. 반면 ‘정치적인 것’이란 공적인 협의에 의해서 권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될 때, 다양성으로 구성된 자유로운 사회가 공공선의 계기들을 향유할 수 있는 데 기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정치적인 것‘이란 다양한 주체들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협의를 거쳐 하나의 공통점에 이를 수 있는 공동선을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이상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은 다양한 차이 집단들이 정치적인 소외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동선 구성의 한 주체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90쪽

무페는 정치를 정형화된 고정체로 파악하여, 정치란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고 통일체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페는 이러한 포괄적인 공동체와 최종 심급의 통일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완전한 통일체를 가정하는 어떤 정치 공동체도 그 안에 포용되지 못한 소수 집단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이익 갈등은 균형에 이르고 의견 분열은 동의에 이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균형과 동의는 항상 부분적이며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의 영역에서는 적대적 행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정치는 항상 ‘갈등과 분열’로 특징지워진다.
무페는 갈등과 균열로 특징지워지는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것’을 제안한다. 무페의 ‘정치적인 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다원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사회적 성과 자연적 성, 인종, 계급, 환경 등의 민주주의 투쟁의 구체화된 범주를 수용할 수 있다. -91-92쪽

개인이 아닌 집단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히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집단을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차이를 권리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로크 이후 근대 정치의 주체인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천부적인 권리의 양도 불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집단도 천부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권리는 양도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100쪽

인간은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당연히 함께 결사를 구성해야만 하고, 자유 선택의 토대 위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허스트)-101쪽

차이의 권리는 양도 불가능하다.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이라는 이유나 동양인 또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성적 소수자, 가난한 자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소수 의견의 주장자라는 이유로, 기타의 이유로 권리르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 집단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이익을 대표할 대표자를 선출할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다. (중략)
이 차이 집단이 권리를 특정 정부에게 양도하는 것은 그 정부가 차이 집단과 결사의 정치적 권리를 보호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차이 집단과 결사의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차이 집단과 결사 집단은 정부에 저항해야 한다. (후략)-104-105쪽

차이의 정치는 집단이 정책의 피동적 대상에서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집단 해방의 논리이다. 집단의 해방 논리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집단이 정치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배제된 집단이 정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을 뜻한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집단이 스스로 정치적 권리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서 지배 사회에 문제를 던지는 것이 차이의 정치이다. 차이의 정치는 모든 집단이 정치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는 ‘민주주의=평등’이라는 등식을 본질적 의미에 더 가깝게 만든다. 따라서 차이의 정치는 민주주의 지향적이다. -112쪽

토론은 다양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고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해준다. 그 결론은 다수의 견해가 모아진 것으로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사회의 구성원은 다수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수결의 결과는 사회의 구성원이 수용해야 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차이 집단은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토론이라는 과정 자체가 ‘문턱이 높은’ 기획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토론과정에 진입하는 것조차 힘들 뿐만 아니라, 토론 과정에 진입했다 해도 자신의 견해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수용시킬 만한 결론으로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토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토론 과정의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토론 결과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과정에서 배제된 집단이거나 차이 집단이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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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7-3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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