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5. 22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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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SF 천재 작가로 불리우는 필립 K. 딕의 원작소설 『골든맨』을 영화화한 <넥스트>는 소재 자체의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액션영화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실제 소설 속 주인공의 초능력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며 그 배경은 미래라 하지만, 영화에선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고, 배경 또한 현재이다. SF는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 내지는 변형ㆍ조작을 통해서 미래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런 기본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SF 느낌이 나지 않을 밖에. "필립 K. 딕" 원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영화관에 입장한 관객들은 영화 시작 전 머리 속에서 "필립 K. 딕"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싸구려 마술무대에 서는 크리스 존슨. 사실 그는 마술사가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2분 먼저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자 행운이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마술쇼로 생계를 이어간다. "내"가 개입된 사건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2분 뒤의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 있고, 이미 조금 뒤의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예측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단 2분은 충분히 나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다음날 미국 뉴욕에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2분이지만 잠깐의 2분은 이후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

언젠가 버스 안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그 여자 참 마음에 들었는데 어떻게 작업을 할까. 언제 내가 그 여자를 봤던 것도 아니고, 잠깐 버스 안에서의 우연한 스침일 뿐인데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머리 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어느 광고처럼 "저 지금 내려요" 라고 말하고 내려버릴까, 아니면 막무가내로 "저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하고 대놓고 데이트 신청을 할까, 그도 아니면 그녀가 내리는 정거장에서 같이 내린 다음 "도를 아십니까" 하고 접근할까. 여러 가지 가능한 작업들을 떠올려보고 2분 뒤를 예상한다. "저 지금 내려요" 했더니 대답이 없다, "저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그랬더니 그냥 내려버리더라, 그런데 "도를 아십니까" 했더니 "어머! 저 도에 관심 많아요" 하고 대꾸하더라. 어떤 방식이 그녀에게 먹힐지는 시도하기 전엔 모른다. 하지만 2분 뒤를 예상할 수 있다면 아무리 쑥맥이어도 작업은 통한다.

내 삶의 시작부터 끝이 정해져 있다면, 다시 말해 운명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2분 뒤에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고 나는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버스 안의 그 여자와 내게 그저 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함께 가는 정도가 정해진 운명의 전부였다면 나는 운명을 거부하고 그녀와의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잠깐만 기다려. 좌측 12시 방향을 겨냥해. 자신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는 크리스는 여러 목숨 살려냈다. 하지만 이 기이한 능력 때문에 그렇게 바라던 평범한 삶은 떠나갔고, 나는 지금 여기서 이들과 함께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또 어디에.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그의 책 『에티카』에서 "주어진 일정한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생긴다. 이와 반대로 일정한 원인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결과도 생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이 없으며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신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신의 변치 않는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말이다.

"정신 안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을 의지하도록 어떤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 원인 역시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결정되고, 이것은 다시금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렇게 무한히 진행한다." (『에티카』, 스피노자 저, 강영계 역, 서광사, 116쪽)

결국 내가 자유롭게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모든 행위의 원인에는 원인이 있고, 그 앞의 원인이 있고, 무한히 소급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크리스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리즈가 오게 된 것도, 거기서 그녀를 쫓아온 남자를 만나게 된 것도, 현실에서 오늘 내가 영화 <넥스트>를 혼자 보러 간 것도, 극장을 용산CGV로 택한 것도, 가는 길에 은행에 들러 현금인출을 한 것도 모두 나의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내가 고통에 처했을 때도 그것은 운명이니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도, 우리집의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것도, 남들 연봉 3000만원씩 받아가며 차 굴릴 때 학자금 대출 갚아가며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모두 운명이니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통은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확실히 인식할 때 벗어날 수 있다. 비록 주어진 상황과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객관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왜 남들 자가용 끌고 다닐 때 나는 버스를 타야 하는가, 왜 이 좋은 여름날 남들 이쁜 사랑 나누며 데이트할 때 난 방구석에서 타자 치고 있어야 하는가, 기타 등등의 현실 속에서 왜 그것이 필연적인 일인지를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극복 가능하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건 정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산다면 자기존재를 보존하면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였다.

 

영화 <매트릭스>는 저리 가라. 네오는 빠른 몸놀림으로 총알을 보고 피했지만 크리스는 저격수의 위치도 모른 채 네오보다 어설픈 동작으로 총알을 피한다. 멋대가리 하나 없지만 총알 피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다. 지금 외제 스포츠카 굴려가며 떵떵거리고 살던 사람이 내일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지금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사람이 뛰어난 소설을 써서 작가로 등단할 수도 있다. 고통과 불행은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고, 행복 또한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불행한 운명은 우리의 2분 후를 예측함으로써만 행복한 운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고통과 불행을 미리 차단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현실의 인식"은 바꿀 수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 너 없이는 못산다, 차라리 죽겠다, 고 결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 내가 너 아니면 못사냐, 두고 봐라 너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난다, 고 마음을 다잡는 사람도 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나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다. 함께 겪고 있는 많은 이들을 생각한다면 나의 고통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2분 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크리스 존슨의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분명 못난 외모와 허술한 옷차림, 어눌한 말투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리즈에게 접근해 작업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의 특별한 능력을 써먹기 위한 FBI와 악당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능력도 아니며, 내 인생의 미래를 바꿔주지도 못할 것이고, 나 혼자만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지금 당장은 유용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보아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대학입학을 앞두고 어느 대학을 가야할지, 결혼은 언제쯤 할지, 배우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게 적성에 맞는지,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와의 궁합은 어떤지, 심지어는 내 성격은 어떻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묻기 위해 점집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금의 내 답답한 심정을 토해내고 들어줄 맞장구쳐 줄 사람이 필요해 점집을 찾는 것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누군가 시원하게 결정해주고 이 길로 걸어가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내 인생은 결국 내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고, 내 결정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남에게 맡기는 건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긍정적으로, 내 인생의 결정은 내가.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는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극복하고 깨고 나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으며, 오늘 고통을 겪지만 이후에 다가올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만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다 괴롭고 힘들다. 다만 처해있는 상황과 현실이 다를 뿐.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겠지만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고 현재의 고통만 느낄 뿐이다. 2분 뒤 미래를 예언하려고 하기보다 지금 처해있는 현실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것이 현명하게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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