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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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소설을 많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평이 좋고 <인생> 무언가 많은 말이 담겨 있는것 같아 구매를 해 놓고 읽을까 말까를 망설였다. 다른 작가의 <청의>를 읽고 난 후 느낌이 괜찮아 위화의 소설을 잡았는데 처음부터 술술 나간다. <살아간다는 것>의 개정판이라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작가의 전작 <허삼관 매혈기>도 읽고 싶어졌다.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느낌, 할머니 다리를 베고 누워 질펀한 옛날이야기 한토막 듣고 난 느낌이랄까. 신선놀음 구경하다 도끼자루가 썩는 줄 모른다더니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느낌은 무언가에 나도 모르게 빠져 들었다 나온 기분이다.
 
농촌 마을을 돌며 민요를 수집하는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밭을 가는 농부가 소에게 하는 말을 듣고는 그에게 다가가 소에게 한 말들을 물어 본다. 농부인 할아버지는 늙은 소에게 두런두런 말을 하며 밭을 갈고 있었다. 그가 왜 소의 여러 이름들을 나열하며 소에게 말을 하는지 그의 소를 다루는 특별한 능력이 있나 했는데 농부인 푸구이는 소와 만났던 일이며 자신의 지난날을 술술 풀어 놓기 시작한다.
 
조상이 물려준 넉넉한 재산으로 넘쳐나는 재산덕에 기생질과 노름에 빠져 있던 쉬씨 집안의 망나닌 푸구이,어느 날 길에서 만난 이쁜 처자인 자전을 만나 그녀와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하여 결혼을 했지만 노름에 빠져 가정을 등한시 하고는 노름방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드디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말아 먹고 만다. 빈 손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마져 저당이 잡혀 모두 넘어가게 되어 초가집으로 옮기게 된 푸구이, 아버지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남겨 주신 자산을 반은 말아 먹었는데 자신의 아들이 재산을 모두 말아 먹자 갑자기 죽고 만다.
 
자신의 재산이 노름꾼 룽얼의 손에 모두 넘어가고 푸구이는 비단옷을 까끌한 옷으로 갈아 입고는 룽얼에게 얼마 안되는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 그런중에 어머니가 병이 나시고 성안으로 의원을 부르려 갔던 푸구이는 전장터로 끌려간다. 얼마동안 전장터를 헤매이다 돌아온 푸구이는 딸 펑샤와 유칭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펑샤는 병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고 유칭은 자신을 낯설게 느낀다. 하지만 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신 뒤, 유칭을 학교에 넣기 위해 펑샤를 남의 집에 보내기도 하지만 가난은 펴지지 않고 남의 집에 갔던 펑샤가 집으로 돌아와 살림을 돕지만 고생만 하던 자전이 병에 걸리고 만다.
 
아들과의 사이를 좁히려 하지만 잘 되지 않고 달리기를 잘 하는 유칭을 위해 양을 사주지만 시국이 어려워 당국의 재산으로 몰 수 되기도 하지만 다시 돈을 모아 양을 사준다. 푸구이는 유칭이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라지만 유칭은 공부엔 관심이 없는듯 하다. 그러다 유칭이 현장의 아내가 아이를 낳는데 피가 모자라 헌혈을 하다가 의사의 어이없는 처사로 죽고 만다. 아들의 죽음을 아내에게 속이고 있지만 아내 자전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 말못하는 펑샤도 고개가 삐딱한 사위 얼시에게 시집을 보내지만 아이를 낳다가 아들을 낳자마자 하혈이 심해 죽고 만다. 두 아이를 모두 잃고 말았는데 얼마 후에 아내마져 곁을 떠나고 만다. 사위와 손자 쿠건과 남겨진 푸구이 하지만 사위마져 사고로 죽고 쿠건을 데려와 잘 살려고 노력하지만 쿠건마져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죽고 만다. 혼자 남겨진 푸구이, 그는 손자와 약속했듯이 소를 한마리 장만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소를 사람대하듯 자신과 비교하며 소에게 지난 자신의 생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름을 넣어가며 말을 해준다. 자신도 늙고 소도 늙고.. 자신을 그동안 거쳐간 삶과 죽음이 운명이지만 어쩌면 숙명처럼 받아 들이는것이 옳다는 것을 말해주듯 자신을 대신하여 죽어간 룽얼이나 전장터에서 만났던 춘성이의 아내때문에 죽어간 아들 유칭, 하지만 춘성만은 죽지 말라며 아내와 함께 용서를 하듯 ’꼭 살아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마져도 자살을 하고 마는 순탄치 못한 자신의 인생, 그래도 삶은 지속되고 있고 살아야 함을, 수를 바라기 보다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해주듯 그는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보며 현실에 남겨진 늙은 자신과 소와 인생을 비유하듯 말한다.
 
푸구이 노인을 둘러 싼 인물들이 모두 죽고 자신도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꿋꿋이 살아 있음을 그저 인생은 받아 들이는 것이라는 달관의 삶을 말하는 노인의 삶이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어떠한 어려움 혹은 가난이나 팍팍한 삶이라 할지라고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이 인생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짧은 듯 하면서 긴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위화 소설의 매력에 빠졌다. <허삼관 매혈기>도 기회를 만들어 읽어봐야 겠다.
 
’저는 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푸구이의 아내 자전의 말중에서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네.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잠은 아무데서나 자서는 안 되며, 문간은 잘못 밟으면 안 되고, 주머니는 잘못 만지면 안 되는 거야.’ -2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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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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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에 울려 퍼진 첼로 진혼가, <아다지오>
 
 
이 책을 처음 접하며 웬지 <피아니스트>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그는 전쟁중에 살아남은 피아니스트이지만 그가 처했던 폐허, 그리고 사라예보에서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장면이 괜히 오버랩이 되면서 동장면처럼 날 괴롭혔다.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하여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읽어보니 너무도 참혹하다. 사라예보 내전, 사라예보 룰렛처럼 어느 순간에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설지 모르는 참혹한 곳에서 살기 위한 그들만의 투쟁이 얼마나 참혹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 참혹함을 잠재우듯 울려 퍼졌을 사람이 목소리와 닮은 첼로곡 알바노니의 <아다지오>. 난 워낙에 <시크릿 가든의 아다지오>를 너무 좋아하기에 사라예보 죽음의 현장에 아다지오가 울려 퍼졌다고 하니 더욱 소름이 끼쳤다. 가슴 밑바닥을 울리는 듯한 아다지오가 22명이 죽은 구덩이에서 22일동안 울려 퍼졌다니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도시를 둘러 싼 언덕에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 사람들을 향한 무차별적 죽음의 사격을 가했다니 너무도 참혹하다. 그들의 총구를 피해 살기 위해 양조장으로 아래층의 성깔있는 할머니의 물까지 뜨기 위해 집을 나서는 <케난>. 그는 집에서는 웃고 나기지만 현관을 벗어나면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으로 발을 디딜때마다 그의 온몸은 겁에 질려 있다.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 올지,저격수의 목표물로 들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후들거리는 다리로 양조장까지 폐허의 길을 걸어 도착하지만 물을 뜨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날아든 포탄, 자신이 터진 포탄의 조각에 맞은 것인지 안맞은 것인지 무감각해진 무서움, 살아 있어도 이젠 집까지 돌아가는 길이 무척이나 긴 고행길처럼 힘들기만 하다. 무겁게 어깨에 걸쳐진 물병들과 저격수의 눈을 피해 물을 나르는 케난, 그를 통해 한방울의 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아내와 아들은 이탈리아로 떠났지만 누이의 가족과 자신이 먹을 빵을 구하기 위하여 빵집으로 나가는 드라간, 그가 빵집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나이이지만 누이의 집에 언쳐 살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는 그도 저격수를 피하며 빵집으로 가는 길은 늘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아내의 친구인 에미나, 그녀의 코트가 맘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저격수의 목표물이 되어 총알이 뚫고 지난간 코트는 코트의 생명을 잃어 버리고 같은 거리에서 저격수의 목표물이 되어 희생양이 된 사람들, 그들의 죽음과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겨지는 것을 원치 않는 드라간, 하지만 사라예보를 떠나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이탈리아에 가고 싶지는 않다.
 
빵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서 있던 22명이 희생당한 구덩이, 그 죽음의 순간을 목격한 첼리스트는 가까이 살기도 하여 그곳에서 22일 동안 연주를 하기로 한다. 첼리스트를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맡게 된 <애로>. 그녀는 누구보다도 냉철한 판단력으로 저격수와 저격위치를 가려내지만 움직이지 않는 저격수는 죽이고 싶지 않다. 아니 첼리스트의 <아다지오>를 듣는 순간부터 그녀가 왜 소총을 잡고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지 회의에 빠져들기 시작하듯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첼리스트를 겨누고 있던 저격수를 사살한 다음부터 자신의 본연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그녀, 첼리스트의 마지막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그녀도 소총을 버렸다. 그 장소에.
이제 더이상 죽고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가 않다. 첼리스트가 아다지오를 연주하는 순간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아닌 꽃과 나무가 자라고 총구멍이 아닌 깨끗이 페인트가 칠해진 벽으로 변한것처럼 순간적으로 생각이 들었듯이 사람들도 변해간듯 하다.비록 죽음이 난무하고 저격수의 목표물이 되어 폐허의 도시에 살고 있지만 저격수였던 애로가 그 이름을 버리고 '내이름은 알리사야..' 하고 소리친 것처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인간다운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너무도 가슴 아픈 소설이다. 우리에 사람을 가두어 놓고 죽이는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일들이 벌어졌는지 이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전쟁의 상처를 달래주듯 울려 퍼지는 첼로음악, 아다지오. 그는 아무 이유없이 죽은 22명의 혼을 달래듯 22일동안 연주를 하고는 첼로의 활을 버렸다. 그의 몰골은 참혹했지만 음악만은 아름답게 흘러 나왔을듯 싶다. 그리고 처절하게 전쟁의 상처가 깊이 패인 사라예보의 사람들 가슴 가슴을 울려 주고 내 가슴까지도 울려 주었다. 점점 사람들이 죽은자에게 무감각해지고 총알이 박혀 흘러 내리는 피에 무감각해져가는 것은 전쟁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놓았기 때문인것 같다. 그 생지옥과 같은 곳에서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것과 다르지 않음을 그들은 알고 있는 듯하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자신을 잃어버린 그들이 나의 발목을 잡으며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느낌이다.
 
 
'드라간, 전 두려워요.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다 두려워요.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고, 그래서 이 전쟁이 그냥 하나의 전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삶으로 완전히 굳어질까봐 두려워요.'
 
'부인은 오랫동안 유령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으면서 유령으로 지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 좋든 싫든 조만간 우리 모두는 유령이 될 테고, 그러면 땅에서 완전히 씻겨 없어져 우리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령이 아닌 때가 있고 우리는 그 차이를 알아야만 한다. 일단 그 차이를 잊으면, 그때는 유령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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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마리나 네이멧 지음, 박미경 옮김 / 예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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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은 소중한 거란다, 버리지 말고 다시 살아...
 
 
겉표지의 여인의 얼굴은 무언가 할 이야기가 가득 담긴 표정이다. 커다란 눈동자에 금방이라도 독자를 다 담을듯이 바라보는 그 모습이 이 책을 보자마자 빨리 읽고 싶어 병이나듯 했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와 <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도 이란의 모습을 글로나마 만났지만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면서도 선이 굵어 잊혀지지 않는 올 해의 책이었는데 이 책인 마리나 역시 이란에서의 삶을 그린 실화이기에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리다.우리와는 다른 문화권이라 그런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도 있지만 생사를 오가는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캐나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겐 묻혀 있던 '에빈'에서의 일을 끄집어 내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한 방법이었으리라.
 
공산주의혁명과 이슬람혁명은 결과적으로 독재를 낳았다.
러시아혁명이후 내쫓기듯 이란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 그녀는 크리스천으로 이슬람혁명을 겪었고 학교에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수학수업을 하기에 수업을 거부하며 교실밖으로 나가게 된 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게 된다. 수업거부로 시작한 일은 점점 커지고 급기야 정치범으로 '에빈'이라는 형무소에 붙잡혀 들어가게 된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에빈, 죽음의 순간에 알리라는 남자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등되어 죽음을 면하게 되지만 알리는 그녀에게 결혼을 요구한다. 가족을 볼모로 하여... 할머니의 죽음과 사랑하던 아라시의 죽음은 그녀에게 충격이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녀에겐 가족이지만 냉담하다. 하지만 이슬람인 알리의 가족은 그녀의 가족에게서는 느끼지 못하는 따듯함이 있다.살기위해선 결혼을 해야하는 마리나, 알리의 협박같지만 자신이 살기위해 알리와의 결혼을 선택하여 지옥과 같은 에빈과의 생활을 청산하려 하지만 자유를 눈앞에 두고 자신의 집앞에서 반대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알리. 그녀는 다시 에빈으로 돌아가 예전의 끔찍한 생활로 돌아간다.
 
시린,아무도 우리 말을 듣지 못해.우리는 여기 홀로 남겨진거야..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 주던 알리도 죽고 그와의 사이에 가졌던 아이도 유산을 하게 되면서 그녀에게 약간의 모성이 자라나고 그가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안드레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하지만 곧 자유의 몸이 될 줄 알았던 에빈의 생활은 끝나지 않고 지속되다가 알리의 부모님의 힘으로 그녀는 그곳을 나오게 될 수 있었다. 알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만을 생각하여 그녀의 부모에게 돌려 보내라고 아버지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자신의 재산도 그녀앞으로 상속을 해 놓는다. 알리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것 같은데 그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 들이지 못했던 그녀,에빈을 벗어나면서 알리와 결혼하기 위해 이슬람이 되었던 그녀는 다시 안드레와 만나며 크리스천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둘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에빈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지만 이미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곳은 나야. 내게 남겨진 곳이 당신뿐이듯..'
안드레를 만나 자신감을 되찾은 그녀는 자헤단으로 옮겨 새로운 삶을 꾸려간다. 자헤단에서의 3년을 채워 외국비자를 얻을 수 있게 된 그녀는 오빠가 이주해 있는 캐나다로 가기 위해 길을 모색해 보지만 이란을 벗어날 돈이 부족했다. 하지만 다행으로 안드레의 아버지가 투자해 놓은 일이 잘 되어 여비를 마련하여 캐나다행을 이루게 되는 그녀, 그곳에서 그녀는 에빈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마리나' 를 탄생시킨 것이다. 에빈의 생활은 2년2개월이지만 친구들의 죽음을 직접 겪으면서 그녀 또한 죽음직전까지 가면서까지 겪어야 했던 고통과 혼란, 그 깊은 상처를 어찌 다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의 가슴에 맺힌 상처를 모두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숨소리를 들은 것 처럼 '마리나'를 읽는 동안은 나 또한 숨이 멎을것만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끔찍함... 남자와 눈도 마주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히잡과 차도르로 몸과 얼굴과 머리카락을 숨기고 그 안에서 숨쉬어야 하는 여인들.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 정치범이 되고 죽음에 까지 이르러야 하는 정말 안타까운 영혼들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아름다운 그곳이 종교와 이념으로 갈라져 죽고 죽이고 서로 등을 돌려야 하는 현실이 실화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가슴이 아팠는데 이 책이 출간되어 또 다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다.
 
이제 내게 중요한 건,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거였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도 무척이나 선이 굵은 소설로 잊혀지지 않는 소설인데 이 책 또한 오래도록 남을 듯 하다. 이렇게 가슴을 울려주는 실화가 너무도 아름답게 표현되어 나온것도 가슴 아픈데 책이 묻혀 있는것 같아 조금은 안타깝다.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선물도 하고 많이 추천해 주었을텐데 이제부터 마리나를 알려보고 싶다. 그녀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내 작은 힘을 보태고 싶고 그녀가 다 부르지 못한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려 했던 자유와 신념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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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靑衣)
비페이위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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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비페이위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접했다. 국내에도 그의 작품은 처음인것 같은데 느낌은 괜찮았다. 이런 작품이 잘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이 작품에는 <청의> <추수이> <서사> 세 작품이 실려 있는데 다른듯 하면서도 20세기 많은 변화 속에서 물질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기에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청의> 경극 분월에서 '항아'라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샤오엔추는 자신이 곧 항아인양 제일 적격이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이 항아역을 하는 것을 보고는 틀렸다고 믿는 그녀, 리쉬에펀에게 뜨거운물을 끼얹고는 사고후 무대를 떠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이십여년을 보낸다. 그중에서 자신을 꼭 닮은 춘라이를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쳐 가르친다. 그런 그녀에게 다시금 분월에서 항아역을 맡아 할 기회가 찾아 오지만 예전이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다이어트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이어트후 다시 젊어진것이 아닌 추함이 들어나자 자신이 아닌 제자에게 항아자리를 양보한다. 하지만 제자에게 양보하였던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믿게 되고 다시 무대에 오르면서 자신감이 넘치는데 그녀는 뜻하지 않는 임심을 하여 유산을 하고 무대에 올라서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하혈을 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해 있게 된 동안 자신의 제자인 춘라이가 항아역을 맡게 되고 자신은 스스로 분장을 하고 극장밖에서 항아역을 처절하게 연기한다.
 
작가는 샤오엔추의 아픔을 노래했다고 하지만 나는 웬지 아픔보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이기주의가 빚어낸 자멸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아름답게 물러서서 제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자신의 아이까지 잃어가면서 어거지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발버둥친 댓가가 무참히 무너진 여인인가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하는 섬뜩함도 느꼈다.
 
<추수이>도 물질적으로 풍부한 집안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훔치려는 순간에 물난리가 일어나 자신과 형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 모두 죽었지만 그 참혹한 죽음보다도 물질에 더 탐욕을 부렸던 망나니 아들,기어이 아버지의 마지막 재산처럼 남겨진 서화들을 들고 집을 나가 기생집을 차리지만 자신의 욕심이 과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서사>라는 작품도 자신의 할머니가 일본인에게 당해 나은 아들인 자신의 아버지, 정체성을 찾던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 정체성을 찾아 헤매이는 자신. 세 작품에는 아픔이 진하게 묻어 있다.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자신의 욕망이 곧 파멸로 이르는 길인것을, 하지만 샤오엔추처럼 자신에게 닥친 행운을 잡고 싶어 안달하는 누구든 그러고 싶겠지만 과한 욕심은 자신을 파멸로 이른다는 것을 작가는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전 연습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그저 나 자신이 고스란히 항아였을 뿐이라구요.' ....<청의>중에서
'세상 만물에는 모두 자기만의 목숨이란 게 있지. 그 무엇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는 없단다...<서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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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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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똥주 좀 죽여 주세요.. 완득이의 진심일까...
 
'제발 똥주 좀 죽여 주세요. 이번 주 안에 안 죽여주면 나 또 옵니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아고 뭐 이런 무섭고 발칙하고 겁나는게 없는 애가 있어 하면서 첫장을 펼쳐서 읽는데 킥킥.. 웃음이 절로 나온다. 똥주,그는 그의 담탱이며 그와 같은 동네 옆집의 옥탑방에서 산다. 그가 시간이 날때마다 불러대는 '완득아, 완득아..' 에 앞집남자는 열받아 소리친다. 그렇게 둘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도 없고 멀리할래야 멀리할수도 없는 찰거머리같이 시간을 함께 한다.
 
완득은 편부아래서 외모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에 나올듯한 완벽함을 갖춘 '나름 삼춘인 남민구'와 함께 산다. 아버지도 난쟁이라고 놀리듯 모자란데 옆에서 함께 다니는 삼춘마져 입을 열면 다다다다.. 하듯 말더듬이라 모두의 웃음을 사지만 그래도 꿋꿋한 우리의 완득이는 엄마한번 안찾고 씩씩하게 잘자랐다. 카바레에서 일하는 삼촌과 아버지때문에 싸움이 몸에 베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회에도 꾸준히 나가고 학교에도 열심히 나간다. 비록 책상에 엎드려 퍼질러 잠자지만 씩씩하다.
 
그런 그에게 날마다 교회로 향하게 하는 인물이 있으니 담탱이인 '똥주',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그가 진짜 죽을까봐 몹시 걱정하는 어린 소년이기도 하다. 완득이네는 정말 돈이 없어 옥탑방에 살지만 똥주는 부자인 아버지를 두고 왜 옥탑방에 살면서 외국인 이주자들을 위해 일하는지 그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도 몰랐던 엄마의 존재가 베트남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똥주와 함께 술도 마시고 싸움이 아닌 운동을 하기 위해 킥복싱장에 나가 운동을 배우기도 한다. 학원비를 대기 위해 어려운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기 보다는 손수 알바를 해서 학원비를 충당하는 믿음직스런 아들이기도 하다. 그가 주먹을 날리고 몸을 날리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할때만이다.
 
까마득했던 엄마라는 존재가 부각되면서 완득이의 삶도 조금씩 변해간다. 엄마가 가져다 주는 반찬이며 낯선 '어머니'를 부르게 된것이며 엄마에게 전화까지 하는 완득이, 엄마와 어느날 시장에 가면서 폐닭은 사는 엄마를 보고 엄마가 자신을 위한 반찬을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점점 엄마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완득이. 엄마의 낡은 분홍 꽃술이 달린 단화를 보고 굽이 높은 구두를 사주는 따듯함에 가슴이 뭉클.
 
똥주, 진짜 선생님 자격증이라도 있나 검사해봐야 할것만 같은 선생같지 않은 선생님.학생보다 욕을 더 잘하고 완득이 햇반이나 뺏어 먹지만 그는 않보이는 그림자처럼 완득이네와 외국인이주자들을 돕고 있어 알면 알수록 괜찮은 인물이다. 누구보다 완득이의 미래를 걱정하고 삐뚫어나갈까봐 옆에서 지키는 선생같지 않은 선생이다. 일자리를 잃은 완득이 아버지를 위해 그가 산 교회집을 댄스장으로 바꾸어 아버지와 동업을 하는 이상한 선생님, 그래서인지 더욱 정감이 간다. 목에다 괜히 힘이나 주고 다니며 큰소리 치는 것보다 학생과 그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보려는 따사로움이 숨겨져 있어 더욱 인간다운 정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이 소설에는 완득이가 사이비교회라고 생각하는 그곳처럼 사이비만 등장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정이 넘쳐난다.모자란듯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완전함을 이루는 소설이다. 그러면서 성장해 나가는,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키득키득 거리다가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장면장면들이 영화처럼 금방 영상으로 생각할 수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옥상에서 둘이 서로 마주보며 큰소리로 불러대는 똥주와 완득이, 문자로 보내거나 전화로 하면 간단할 것을 꼭 큰소리로 불러 앞집 아저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점이며 폐닭으로 만든 백숙을 놓고 먹는 장면들이 넘 웃긴다. 웃다가도 속으로는 완득이에게 은근히 건투를 비는 '홧팅'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오뚜기처럼 꿋꿋하게 일어나리란것을 알지만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완득이 만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이며 그 시절을 거쳐왔기 때문일까. '고완득,암튼 너때문에 한참 웃었다.' 아껴가며 읽기를 뒤로 미룬 보람이 있다. '완득아! 완득아, 새끼야! 꾀꼬리는 얼어 죽을, 어제 호박죽 나왔지! 하나 던져!' 마지막까지 웃음의 끈을 놓치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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