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급주의 - 따뜻하고 불행한
김이슬 지음 / 책밥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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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고 집어든 책이 어른 아이의 일기장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내 일기도 솔직하게 쓰지 못하는데 다른 이의 적나라한 일기에 간간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카피라이터 같은 짧은 단상들이 콕콕 가슴에 박힌다.

"엄마의
몽타주
억새가 엄마를 닮아 주웠다.
희끗희끗하고 억세다.
너네도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

"또
만났네요
행복이 너무 멀리 있는 거 같아요.
"달려가서 안기기 딱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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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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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이다. 인성론에 대한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질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순자의 성악설,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백지상태라는 고자의 성무선악설 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느 쪽 일까? 그 답을 상상력의 끝 판인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 루이스는 이 책에서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이 책이 전제로 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바른 행동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음양사상으로 세상을 말한다면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선한 존재' 와 '악한 존재'로 나누어 싸우는 전쟁터이다. 그런데 이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의 힘은 정확히 5:5로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합쳐지면서 만물들이 생겨났고, 영원히 이 세상은 끝나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C.S 루이스는 '이원론'이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사상 인지를 논증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순전한 기독교>는 루이스의 변증서 이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이 세상의 선과 악을 가장 잘 설명한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왜 악 한 것들이 원래 선한 것에서 타락한 존재라고 말하며, 기독교가 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이원론과의 비교를 논리적으로 설명과 옳고 그름의 도덕적 기준에 대한 얘기들을 담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른 행동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자연법'이라고 부른 것은, 굳이 따로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자연법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좋은 생각으로 만드셨는데 세상은 그 뜻을 거스름으로 나빠졌다. 악함은 선한 것의 그릇된 방식으로 추구한 것이며, 선은 선 그 자체이다. 그러나 악은 선이 부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각각 독립적일 수 없다고 말한다.

C.S 루이스 작품 자체가 서구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다소 어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 신학, 철학 등 모든 교육을 철저히 받아서 '박학다식' 하다. 고전 학과 영문학, 철학 강사로도 일했다는데 그런 이력들이 철학적 변증의 탄탄함이 되어 나타나게 된 것 같다. 그의 이력만큼 회심도 독특하다. 철학을 공부하다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신론에서 기독교인이 될 때 성경을 읽고 된 것이 아니라, 고대 여러 신화들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개발하고 상상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더니 성경이 사실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나니아 연대기'가 탄생했다. 나니아 연대기는 그가 아이들을 위해 상상력을 가미해 성경을 쉽게 이야기 한 책이다.

루이스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에는 그의 영국인들을 향한 애정이 담겨있다. 1940년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런던 대공습'과 연이은 전투의 패배로 희망을 잃고 침공에 대한 불안감에 싸여 있는 영국인들을 위하여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스퍼드에서 런던을 오가며 BBC에서 방송을 했던 내용을 모아 만든 책이다. 희망이 없는 망막함 속에 처한 당시 영국인들에게 희망을 갖게 해 주었다.

교파를 초월한 모든 기독교 인들이 오래전부터 공통적으로 믿어 온 것들과 본인이 겪어왔던 경험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한다.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 그리고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신 존재의 물음에서부터 신앙인의 삶까지 쭉 이어지는 이야기가 체계적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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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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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난 뒤 내 몸에 밴 글의 향기가 사라질까 마음이 서둘러진다. 읽는 내내 따뜻함이 전해지고 사람 냄새가 났다. SF 장르라는 거리감 때문에 읽기를 망설였는데 사이보그, 인간 복재, 우주, 미래 얘기가 이렇게 사람 냄새를 풍길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은 단편집이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문명이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하여 생활 방식은 많이 바뀌었지만 태도는 그대로이다. 여전히 서열과 차별, 사회적 약자와 이탈자들이 존재한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에서 릴리는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외모와 재능이 완벽한 맞춤형 인간을 만드는 '인간 베아디자인'에 성공한다. 남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차별받거나, 재능이 없어 무시당하지 않는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만들고자 한 유토피아에도 한계는 있었다. 그녀의 시술은 거금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층 만이 눌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재정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저렴한 값에 '태생 시술'을 받을 수 있는 해커들을 찾아 시술을 받아 개조에는 성공했지만 태생적 문제와 성격 결함 등의 부작용이 생겼다. 실패한 개조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도시는 그들을 분리하는 분리주의 정책을 시행한다.

"도심은 개조인들의 구역으로, 도시 외곽은 비개조인들의 구역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도심은 화려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외곽은 버려진 이들의 세계였다. 도시 중심부는 매일 밤 쇼와 파티가 열렸다. 외곽에는 밤낮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은 도시 중심부에 가져갈 물자와 먹을 것을 만들었다. 외곽에서는 올리브는 로봇을 고용하는 것보다 사람을 고용하는 값이 싼 일거리들을 얻었다. "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기술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란 질문을 거듭했다고 한다. 여전히 답은 내리지 못했지만, 계속 그 답을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작가의 그 고민들이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진정한 과학기술의 발달과 사회적 실용성에서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하게 한다.
생각해 보면 원시 사회에서도 도구는 일부에 의해 독점되었다. 폭력은 생산도구를 독점하고, 도구의 독점은 생산을 다시 독점해 권력을 마련해 주었다. 석기에서 청동기로 발전은 했지만 일부 권력층의 장신구와 무기로만 사용되었고, 철기 또한 권력층만이 소유했다. 그리고 이 권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고 세습되었다. 그리고 세습은 계급을 만들었다.

"우주 연방은 우리를 외면했네.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로 개척 행성에서 '먼 우주'로 급격하게 밀려난 행성들은 수십 개가 넘는데, 그 수십 개의 행성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을 보내기에는 경제성이 너무나 떨어진다는 거야. 우스운 일이지.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그 경제성이 너무나 떨어지는 방식만을 사용했던 것이 연방 아닌가"

"내가 마을에 살았을 때, 나는 사람들이 나의 얼룩에 관해 무어라고 흉보는 것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나를 독특한 얼룩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과연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냉동인간이 가능하고, 유전자 조작이 가능해져 생명이 연장된다면 그것이 축복 인지, 저주 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노 요코의 그림 동화 "100만 번 산 고양이" 에서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고양이가 있다.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를 사랑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슬피 울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단 한 번도 누구를 사랑하거나 울지 않았다. 고양이에게 사랑과 이별은 무의 미 했다. 그러다 도도한 하얀 고양이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새끼를 낳았고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바람을 갖게 되었다. 하얀 고양이와 언제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그러나 하얀 고양이는 고양이의 바람을 뒤로한 채 죽는다. 그제서야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어느 날 낮에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고양이는 햐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엄췄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성경 시편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이라는 말씀이 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http://aladin.kr/p/hFr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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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소망 - 바벨론 세상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요한계시록
유기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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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Hell'을 넘어 소망마저도 없는 폭만의 시대라고 한다. 사회는 흉흉하고, 삶은 빈곤하고, 전염병까지 엄습하여,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지를 모른 체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런 혼돈의 바벨론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유기성 목사는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소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요한계시록은 '아포칼립스' 환상이나 묵시 내용이 많다. 때문에 대부분 인류의 종말, 예수의 재림에만 초점을 맞춰, 무섭고, 어려우며 부담스러운 책이라고 여긴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영화나 책도 대부분이 인류 종말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유기성 목사는 요한계시록은 소망이 넘치게 해주며, 기쁨으로 어려움을 이기게 해주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책이라고 말한다.

" '소망'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다. 소망의 눈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뜨이며,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해 주는 책이다. 바벨론 세상에서 성도들이 유혹과 시험으로 흔들리며 사는 것은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 없어서이다. 주님은 그런 유혹과 시험에 흔들리고 넘어지는 교회조차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

우리는 쉽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어렵고 힘든 세상을 하나님은 과연 그냥 '열심히 살아라' 거나 '잘 살아라'라고 말씀만 하실까? 그렇지 않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요한계시록을 통해 보여 주신다.

"초대교회에 핍박이 무섭게 닥쳐오자 어떤 교회는 무너졌고, 어떤 교회는 세상과 타협했고, 어떤 교회는 이단과 싸우다가 사랑을 잃어버렸다. 요한계시록은 성도인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은 당시 세상과 교회 문제로 크게 낙심해 있었지만 하늘을 보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앞으로 될 일까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4장 1절)
주님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잘 아십니다. 그러나 고난을 면제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고난 당한 자의 결과와 하늘의 더 큰 소망을 보여 주심으로써 이기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심판을 보여 주셨습니다.( 계6장 ~18장) 그 이유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는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 아무리 교회가 힘들고 세상이 어려워져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님은 재림 때에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 재림에 오실 주님이 지금 성도들의 마음에 와 계시는데 그것을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항상 함께하시는 주 예수님을 더 분명히 바라보게 한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그곳에 계시겠다'라고 하셨다. 우리 힘으로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거나 죄 안 짓고 살려고 노력하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좌절에 빠집니다.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되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주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요."

또한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깨어 있어서"라는 말은 항상 하늘만 바라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지 않기 위하여 옷을 갖추어 입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더럽고 지난날의 부끄러운 죄가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다고 말합니다. (계3:18)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죄를 가리는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로 옷 입었다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로 본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 13:14) 주님이 우리의 죄의 옷을 입고 죽으셔서 우리가 예수님으로 옷 입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처럼 느끼도록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주님이 친히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죽고 다시 사는, 처절하리만큼 선명하고 강력한 복음이며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복음입니다."

-우리들의 흔한 오해-
1."천국은 죽고 난 다음에만 가는 곳이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항상 기쁜 일만 있고, 주위에 좋은 사람들만 있고, 따뜻하고 풍요하고 부족함이 없는 환경만이 천국은 아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왕이신 곳이다. 주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이미 천국의 삶, 영생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이 왕이신 삶을 살면 예수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왕 되신 삶을 살아 보면 금방 소망의 눈이 뜨인다. 소망은 '온전한 삶', '성결한 삶', '헌신의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 이유는 방향을 잃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유혹과 핍박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

2. 하나님은 인류를 멸망 시키기 위해 재앙을 내리신다.
"재앙을 보여 주신 이유는 "정신 차려 기도하라"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이 재앙에서 사람의 4분의 1이 죽고, 9장 나팔 재앙에 이르면 사람의 3분의 1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3분의 1이 죽어 가는 재앙을 당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재앙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만나도, 무슨 말씀을 들어도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 것이 무섭습니다. 죄를 짓고도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것이 죄인의 실상입니다. 그것을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동의 특징은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무 커 보이고, 하나님의 존재는 가물가물하게 보일 때, 세상이 큰 문제로 보일 때 요한계시록의 장면들이 떠올라 세상이 더 이상 커 보이지도, 두렵지도 않게 된다고 이 책은 말한다. 세상화된 교회와 성도들이 지금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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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머 철학을 만나다 - 소프트웨어를 사랑하는 기술 사람과 프로그래머 4
유석문 지음 / 로드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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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 길에 지도나, 네비가 있다면 가는 길이 수월하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에게 조언을 해주는 멘토가 있다면, 조금은 덜 헤맬 것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멘토를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떡볶이 하나 만드는데도 며느리 몰래 만드니 말이다. 그러니 대를 잇는 가업이 없고,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분들이 제자를 양육하지 못해 문화유산의 맥이 끊기고 있다. 이런 속에서 프로그래머를 꿈꾸고,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멘토를 자처하는 이가 있다. 자신이 경험한 것 들을 아낌없이 퍼주는 좋은 선배가 풀어 놓는 이야기 "프로그래머 철학을 만나다"이다.
이 책은 프로그래머로서의 기술과 지식 습득보다는 프로그래머로 살면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선배의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서점에 수많은 관련 서적이 있고 인터넷을 검색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방대한 자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무료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도 많다. 그런 자료가 풍부하다고 누구나 다 개발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문학과 철학이 무너진 지금. 무엇을 할까?보다는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라는 저자. 모든 학문의 기초는 철학에서 출발함을 강조한다. 철학을 바탕으로 '나'라는 존재의 기둥을 튼튼히 세우고 서까래를 얹는다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그 무엇보다 인성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의 일에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대기업, 벤처. SI, 포털서비스를 거쳐 지금 라이엇 게임즈 기술감독으로 재임 중이다. 프로그래머들을 위한 철학과 심리학 멘탈 관리 이야기. 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문제들과 논리적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며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논리적 선택이 연속되는 작업이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조직이 하나의 적합한 의견을 도출하려면 참여자 모두의 뛰어난 논리력이 필요하다. 논리 없이 절차만 신봉한다면 정작 문제는 해결 못하고 책임만 회피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불확실한 미래에서 벗어나 현재를 행복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저자는 그 행복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서 찾는다. 욕망을 줄이고 유쾌하고 즐겁게 현재를 즐기는소확행, 욜로를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저자는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 같다. 소확행을 실천하며, 욜로 욜로... 개발자가 행복을 누리는 방법으로 ATDD와 TDD, 릭팩토링..등을 얘기하는데 그쪽 전문 용어라 어렵다. 아무튼 실제적 조언을 해준다.

"미래에 대한 과도한 근심이나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오버 엔지니어링을 하는 것은 비용과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뛰어난 협업 능력을 갖춘 관리자가 가장 잘 하는 일은 '문제의 해결' 이지 '미래 문제의 예측' 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는 철저히 현재를 살아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아이팟은 MP3의 불편함을, 앱스토어는 소프트웨어의 불편함과 기존 문제를 을 해결한 서비스이다. 현실의 불편함이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거처 성공에 이른 것이지 미래의 문제를 예측한 것이 아니다. "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철학을 모르나 알고 싶다면 접근하기에 좋은 책이다. 철학과 심리학 이야기 위주라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프로그래머에 대해 1도 몰랐는데 조금은 눈을 뜬 듯하다.
내용 중에서 저자가 인용한 책을 따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내가 읽은 책이 나올 때는 반갑기도 하다.
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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