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고전적인 질문에 차분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던 영화다. 낳은정이냐 기른 정이냐는 닳고 닳은 주제를 가지고 과연 들어볼만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의아했었는데, 기필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 합격점을 받아도 좋지 싶다. 부모의 비통한 심정이나, 자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막다른 선택 앞에 선 자들의 갈등등 모두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것들은 가볍게 넘어가는 대신, 아이를 바꾸는 과정속에서 변해가는 두 가족의 마음의 결을 곱게 따라간 것이 특징. 특히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제목이 암시하듯, 바뀐 아버지의 주인공중 한 명인 료타의 심정 변화가 압권이다. 그렇다면 이 뻔해 보이는 주제 속에서 감독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아버지 료타의 시선을 따라 가보기로 하자.

 

대기업 간부 료타는 자신의 아이 케이타가 병원에서 바뀐 남의 자식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 자신의 현실이 되어 버렸을 때의 충격이란 ...글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에게 생겨났는지 분노할 새도 없이 상대 부모와 만남을 가지게 된 료타는 다소 의기양양해진다. 자신의 친 아들 류세이를 키우고 있는 상대방 아버지 유다이가 거의 백수이다시피한 게으르고 무식한 전파상 주인이란게 한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만나자 마자 위자료 운운하는 속물 근성에 쉬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부부 사이등...료타는 은근히 자신이 두 아이를 다 키워도 되지 않을까 자신만만해 진다. 일단 두 부부는 아이들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시간을 두고 친해진 뒤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합동 나들이, 만나면 만날 수록 두 가족은 접점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없다 싶게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동경의 고급 아파트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긴 했지만 다소 쓸쓸해 보이는 케이타네와 달리 류세이네는 시골 가게 뒷방에 살림집을 차려 놓고 올망졸망 동생 둘과 치매끼가 있는 할아버지등 여섯이 복작대며 살아왔다. 얌전하고 예의바른 케이타와 거칠 것 없는 야생마 같은 류세이, 정이 든 케이타와 낯설기만 한 류세이...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라는 기로에서 선 료타는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는 것이 신기하다. 정답을 알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하련만, 그것을 알 수 없기에 답답한 마음만 커간다. 아이들을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료타와 몸 부서져라하고 아이와 놀아주는 유다이...처음 유다이를 만만하게 봤던 료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자인 자신보다 그가 더 좋은 아빠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당황한다. 아내 역시 그에게 부족한 아빠라고 질타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은 그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억울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게 타격을 입힐 상대는 바로 다름아닌 자신의 친아들이었으니...과연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닮은 그 아이의 도발을 어떻게 해결을 해 나갈까?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기른 정이냐 낳은 정이냐.>라는 질문이 대변하듯, 부모들의 입장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6년간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이가 바뀐 아이란 소리를 들었을때 기겁을 하는 것은 물론 부모들일테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가족으로 지내온 사람들이 타인이라는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충격 역시 만만찮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 역시 부모만큼이나 충격을 받고, 현실을 받아 들이기 힘들어 하며, 미래를 두려워 할 것이다. 다만 차이라면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서도, 아이들의 경우는 그 사건이 그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탄스러운 것은 부모들이 더할 지도 모르지만, 정작 더 심각한 것은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른들에겐 위로를 해주는 사람들이 많겠지만서도, 아이들에겐 위로는 커녕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어른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반면,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어휘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래서 우리는 지레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상처를 받는 것은 어른이라고 말이다. 가장 갈등을 하는 것도 역시 어른이고, 여지껏 부은 사랑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아파하는 것도 어른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이 영화는 말한다. 사랑을 주는 것은 어른뿐만이 아니라고 말이다. 우린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우리가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만 생각하지만 실은 그들 역시 우리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 ...그러니 그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떻겠냐고 관객들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런 생소한 질문에 충실하게 대답하고 있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지 싶다. 아버지 료타...그는 직장 일에 바빠 아이 키우는 것은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린 인물이다. 홀로이다 시피 아이를 키우면서 반복되는 서운함과 외로움이 딱지로 자리잡았을 무렵 아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료타의 아내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충격은 남편에게 당신은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는 일갈을 하게 한다. 이에 료타는 억울하다. 그는 단지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었을 뿐이고, 여리고 순하기만 한 케이타가 어떻게 사회 생활을 해나갈지 걱정이 되었을 뿐이며, 거기에 재능까지 없는 아들이 누굴 닮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아이와의 현재에 마냥 행복한 아내와 달리 료타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케이타가 아들로써 부족했기에 아이가 바뀐 것이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게 아니냐는 아내의 말에 료타는 상처를 받는다. 료타는 자신의 진심을 알릴 길 없어 답답하다. 그렇게 오해가 쌓이면서 가족의 불화가 계속될 것 같았던 그때, 그에게 강적이 나타난다. 똑똑한데다 버르장머리까지 없는, 어른이 하라는 대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줏대를 가진 인물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자신의 미니미, 류세이다. 류세이의 눈을 통해 비로소 그는 자신의 행동이 오해받음직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그제서야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던 케이타가 사실은 상처를 받았다는걸 깨닫게 된다. 과연 그는 아이의 상처를 어떻게 보살펴 줄 수 있을까? 

전형적인 일본 영화답게 미묘하고 (subtle) 은근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특징. 이런 작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적응이 되면 그것도 영화의 묘미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다고 하던데, 아마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톤은 상당히 바뀌지 않을까 한다. 보다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풀어나갈테지. 뭐, 명백하고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킬 것이라는 것이 다른 매력이 되긴 하겠지만서도, 이 영화가 가진 생명력과는 다른 맛이지 않을까 한다. 등장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사랑을 들려줘서 고마웠다. 특히나 주연인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그를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배역을 만난 것 같아 흐믓했다. 그의 필모에서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을만한 영화가 아니었을지...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줘서 감사했다. 처음엔 영화의 제목이 탐탁치 않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이 제목외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렇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아이가 생긴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기나긴 시간을 동반한...아버지가 되어 가는 한 남자의 멋진 여정에 동참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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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왔다 - New York Story by Snowcat
스노우캣 글.그림 / 모요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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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양이 노튼 시리즈를 출간한 미디어 2.0의 편집장 이 현수님 덕분에 알게 된 스노캣의 책을 오랜만에 들어보았다. 우습지만 내가 블러그를 하게 된 계기는 노튼때문이다. 파리로 간 고양이를 너무도 재밌게 읽은 나는 아쉬운 마음에 책을 뒤적이다 표지 날개에 쓰여 있는 문장 하나에 주목하게 된다. 노튼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으신 분은 네이버 노튼네 클럽으로 와 달라는 말이었다. 호기심 삼아 찾아간 김에 이웃을 추가 하라는 단추를 보고 누르게 되었고, 이웃을 누르고 나니 내 블러그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연히 생긴 텅빈 공간에 장난삼아 한자 두자 어설프게 끄적이게 된 것이 어느덧 8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최초의 이웃으로 노튼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블러그를 하고 있을 수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녀 덕분에 나는 블러그가 굉장히 좋은 것이라는 선입견을 왕창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오래 하지도 애정을 가지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은 블러그를 쉬시고 계셔서 오랜동안 소식을 알 수 없는 노튼님...아마 그녀가 아직도 블러그를 하고 있었더라면 이 책의 출간은 오래전에 알았을 것이다. 노튼님이 나서서 나발을 불어주셨을 테니 말이다. 책 출간이 아니라도 간간히 본인의 블러그를 통해 스노캣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곤 해서 늘 귀동냥을 하곤 했었는데, 노튼님이 블러그 상에서 사라진 후로 잊어 버렸다. 스노캣에 대한 것을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책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새삼 감회에 젖고 말았다. 아, 맞다. 스노캣이 있었지.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네 라는 생각과 함께...


해서 감회에 젖어서 읽게 된 책. 스노캣의 책은 그간 몇 권 읽은 것 같은데, 이 번 권이 제일 맘에 든다. 노튼님이 블러그를 활발하게 하실때 스노캣이 뉴욕에 있다고 소개해 주셨었는데, 이제보니 그게 6년 전이란다! 하~~ 세월이 어쩜 이리도 빠르다냐 싶다. 1년 머물자고 했던 스노캣의 뉴욕행은 미국 체류 5년으로 연장이 되었고, 지금은 한국에 들어오신지 1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2년전이니까 ,이젠 한국에 들어오신지 3년이 된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입양이 된 고양이 나옹이와 함께 미국 살이 5년간을 담담하고 정겨웁게 그려내고 있던 만화책이다. 뉴욕이 배경이라고는 하나 스노캣 이 작가의 머리속에는 그저 나옹이 나옹이 나옹이 뿐이라서, 나옹이를 주연으로 한 동물 만화집 내진 사진집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니까, 뉴욕의 경치나 여행기, 내진 뉴욕을 더 잘 알기 위해 정보를 얻기 위한 용도로는 거의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머나먼 타국에서 아는 사람 거의 없는 공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보호해줘야 하는 나옹이와 함께 생활한 행복한 5년을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만화로는 나옹이의 깜찍함과 새침함을 제대로 만끽하시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 간간히 사진이 들어있는 것도 좋았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것이지만 사진을 보면 이 작가의 나옹이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대번에 짐작이 되더라. 피사체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아서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개를 보면 주인을 알 수 있다고. 그게 어느정도 사실이라면 이런 말도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고양이를 보면 그 주인을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스노캣에게는 행복하게도 그녀에게 너무도 어울리는 나옹이가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보낸 시간들을 충실하게 기억한다.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그러하듯이, 그녀는 나옹이에 대해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바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에서 종종 그러하듯, 그 둘 사이에는 기적이 일어난다. 스노캣이 정말 100% 과장없이 진실이라고 빡빡 우겨대는 사건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비오는 날 나옹이에게 먼지나게 맞았다는 것이나 약을 먹일때 차분차분 설명해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 고분고분 먹는다는 것이나 칸막이 벽을 뛰어 넘고는 얌전히 앉아 있더라는 것등등... 난 정말로 그녀가 과장없이 100% 진실만을 말했을 것이라 본다.아니 어쩜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 축소해서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사랑하는 존재들 사이에선 말 없이도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는 법이니 말이다. 그게 동물이건 말 못하는 아기들이건 연인들이건 간에...특히나 영특한 고양이의 경우야 뭐...고양이를 영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근거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종종 고양이들은 나를 놀라게 하니까.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이 아닐까 했던 적도 여러번 있었으니 말이다. 하루키가 어떤 수필에서 자신은 고양이가 말을 하는 것을 맹세코 들어 봤다고 단언하던데, 난 그의 말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나 역시도 고양이가 말을 한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아마 흔연스럽게 대꾸를 할지도 모른다. 역시 그런 것이었어 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하여간 결론은 애견 나옹이와 스노캣이 함께 한 이야기가 그렇게 다정하고 다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간결하고 깔끔한 그림체에 군더더기 없는 설명이 이 책의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핵심만을 짚어서 조곤조곤 설명받는 기분이랄까. 이런 책을 보면서 흐믓한 미소를 짓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최강 매력쟁이라는걸 아는 나옹이를 그린 것이라면 말이다. 다만, 스노캣이 말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언젠가는 나옹이와의 작별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암담한 부분이긴 했다. 둘이 하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타자로써 걱정이 되더라. 저자는 오히려 남들의 그런 시선이 상처가 된다고 하더만은, 일리있는 말이다. 나 역시도 이제부터는 누군가의 애완 동물에 대해 나이를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만 그들의 행복한 인연을 축복해 주기로...특히나 그 인연이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것이었다면 더군다나 더 말이다. 스노캣과 나옹이의 행복한 한국 생활을 기도해 본다. 그들에게 앞으로 더 많은 기적들이 생겨 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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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즈 하이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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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직내에서의 벌어지는 권력을 향한 암투 과정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부서간의 갈등을 주로 소설속에 그려냈던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경찰서의 내부를 현미경 들여다 보듯 상세하게 분석해주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전직 기자출신 답게 신문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해서 취재에서부터 어떻게 기사가 만들어 지고, 정치적인 역학 관계에 따라 지면이 할당되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편집국의 모습과 윤전기의 돌아가는 상황에 판매국과의 알력까지...신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판매되어 가는지 신문사의 뒷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작가만의 특유한 시선으로 다른 기자출신들은 말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작가분은 사람들간의 사각이나 입장차에 의한 갈등이나 그로인한 절망등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이 아닐까 하는데, 미숙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갈등 과정들을 통해 서로를 미워하고 오해하고 백안시 하다 결국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성숙해나가는 과정들을 주로 작품들 속에 그려내고 있지 않는가 한다. 거기에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의 시각에 맞춰 이야기를 줄곧 풀어나가고 있는 것도 그만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이번 책에서는 마흔살의 사내 최고참 기자 유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부하 직원의 사고사로 인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동료 직원과의 산행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물론 그 산이 왠만한 산악인들도 두려워 하는 산이고, 중년의 초보 산악인인 그가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도 알지만 친구가 있기에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산에 가기 위해 퇴근할 무렵 신문사는 갑자기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한다. 524명을 태운 JAL 123편이 추락했다는 전문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마침 당담자가 아무도 없던 탓에 사건을 총괄한 데스크로 지명된 유키는 이때부터 정신없이 보도 전쟁이 뛰어들게 된다. 전례없는 사상 최악의 사건을 맞이해 과연 그는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는 톱을 무엇으로 정하는가부터 취재 기자로부터 기사를 송고받는 일까지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불어 부서간의 알력은 그가 하는 일 하나 하나 태클을 걸어 그의 피를 말려 대기 시작한다. 몸이 부서져라 하고 싸워 대던 통에 그는 그간 알려 하지 않았던 두려움과 자신이 맞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에게 많은 것들을 배우게 해주는데...


사람들은 결코 혼자 살 수 없으며 아무리 미성숙한 인간일지라도 부딪히면서 살아가야 배우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던 소설이다. 조직내에서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다. 그런 사정들이 부딪히고 갈등하다보면 성숙하게 되더라, 라는 것이 요쿄야마 히데오가 조직을 보는 관점인 것 같던데, 이 소설속에서도 그것이 주효하지 싶다. 이기적이고 미성숙하며 오해 투성이인 인간들이 함께 모여 일을 하다보니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겠는가. 그것이 어떤 것은 오해이고, 어떤 것은 심각한 인간적인 모자람일 수도 있고, 때론 치기어린 분노로 인한 복수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작가의 특징이라면 그걸 모두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한다는 데 있다. 즉, 인물 각자가 자신이 알아서 깨닫도록 일부러 상황을 그대로 둔다는 것. 이런 면들은 지극히 일본적인 정서이지 않는가 한다. 인간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미성숙이면 영원히 미성숙이라는 전제하에서 모든 것을 미리 통제하는 것이 서양식 사고 방식이라면, 일본은 아무리 미성숙해도 그것을 그냥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치하건 잘못된 사고 방식이건 간에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남이 아무리 말해 줘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일본식 정서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답답하기도 한데, 다른 일면으로는 인간을 그만큼 믿어준다는 뜻 내진 내 일이 아니니 상관해선 안 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것이 낫냐고? 솔직히 일본식은 내겐 좀 답답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난 사람이 그렇게 잘 깨닫는 존재라고도 생각지 않기 때문에, 과연 일본식 지켜보는 자세가 그들을 진정으로 깨닫게 할 수 있는가도 자신하지 못하겠다. 


결국 이 책속에서는 미성숙한 사람들 대부분이 어느 순간은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있던데, 아마도 이런 식의 성장 소설을 일본 사람들은 많이들 좋아하지 싶다. 미천한 자리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 가다보면 뭔가를 일궈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국민성중 하나인가보다.그래서 아마도 이 책이 일본에서는 인기가 있었던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산 정상을 향한 유키의 집념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감상적인 것이 대부분이라서 조금은 남사스럽기도 했다. 아마 실제 산악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이렇지 않은데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런 감상들은 작가들이 그들을 바라봤을때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일 지도...해서 기대를 많이 하고 보게 된 책인데, 난 그저 그랬다. 기자들의 한계는 그렇다. 아무리 그가 상황에 몰입하고 유가족이나 기타등등에 안타까움을 가진다고 해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절대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안다고 자신한다면 그건 오만한 것이거나 아주 아주 멍청한 것이거나...해서 때론 차라리 사건이란 그들이 벌어먹고 사는 이야기감일 뿐이라고 말하는 기자들이 차라리 낫지 싶다. 난 당신을 깊이 이해해요 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적어도 사건 관계자들을 우롱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의사나 변호사나 기자나 경찰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해서 난 조금은 당신들의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이 작가가 난 별로였다. 그건 그냥 이야기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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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 가장 경이로운 자연의 걸작
소어 핸슨 지음, 하윤숙 옮김 / 에이도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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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었을때 제목만 보고도 호기심이 절로 동하던 책이다. 이런 저런 사족을 달지 않고도 제목만으로도 뭔가를 상상하고 호기심이 생겼다는 점에서 깃털이라는 소재에 어느정도는 흥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긴 인간이 다른건 다 해도 혼자서 날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동력을 가지지 않고도 잘만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경외감을 갖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새들 기타 날아다니는 동물들로 하여금 우리 인간도 못하는 일을 아주 아주 자연스럽게 매일 매일 하도록 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걸작품, 깃털...과연 그 깃털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진화해 왔고, 그리고 그들의 다양성은 어떠한지, 그 깃털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동경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쓰임새에 이르기까지 아우르고 있던 책이었다.


일단 진화론적 측면에서 시조새가 과연 공룡인가 아니면 그저 새일 뿐인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시조새의 아름다운 모습에서부터, 그것이 어떻게 날아 다녔는지, 그리고 그들의 깃털은 어떻게 진화하게 된 것인지 아직까지 갖가지 주장만이 있을뿐 정설이 없다는 것은 나로써는 충격이었다. 왜냐면 공룡에서부터--즉 파충류에서--새가 진화해 온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보니, 시조새가 날았다는 것만큼은 이견이 없지만서도, 그것이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고, 어떻게 날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들의 후손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연구가 계속 진행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중 하나는 시조새 화석이 아주 희귀하기 때문이라고...연구할만한 사료가 거의 없다시피하니, 대충 상상력과 감과 직감에 의해 때려 맞추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공룡 화석들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조새가 그렇게 희귀한 것은 깃털의 속성상 화석으로 남아 있기 어렵기 때문라고도 하던데,그렇다보니 지금 남아 있는 시조새 화석은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속에서도 살아남은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했다. 해서 과거 그들이 이 지구상을 얼마나 장악하고 활개를 치고 다녔던지 간에 지금 남아 있는 화석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만큼 희귀하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계속 발굴 하고 있는 중이라 기대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서도, 그들이 아무리 많아 봤자 과연 시조새들에 관한 궁금증을 쌈박하게 풀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마 내가 죽을때 까지도 과학자들은 갑론을박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는게 아닐런지...물론 그 과정 속에서 정설이 나타나고 , 무언가 확실한 그림을 그려내기도 할 수 있겠지만서도, 의외로 간단해 보이는 이 깃털이 사실은 엄청난 진화적 함의와 함께 놀라운 과학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자연의 진화에서의 기적이라는 부제가 절대 과장이 아닌 것인, 곰곰히 들여다보니 깃털이라는 자체가 그야말로 기적이더라. 어떻게 생물이 진화해가다 이런 기관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퍼트리게 되었을지 과학자들이 호기심을 가질만 하다 싶었다. 

거기에 화려한 색채 감각들에 각기 새들에 알맞게 진화해온 다양한 깃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진화학자들이 새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이해가 되더라. 다양성이라는 점에서 새들만큼 사람들의 넋을 빼놓은 것도 없을 듯 싶으니 말이다. 인간은 그에 비하면 너무도 단조롭고 재미없는 생물이라고나 할까? 전세계에 분포해서 살고는 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골격에 생김새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새들이야말로 찬란한 진화와 다양성의 표본이라고 할만하지 않는가. 거기에 이미 멸종해버린 그 수많은 종들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안타까움까지 더해진다. 그들의 아름다움이 지구를 얼마나 찬란하게 만들었을까 싶어서다.

더불어 땅에서 날아 올랐을까? 아니면 나무에서 뛰어 내렸을까 라는 물음에 나 역시도 고개를 갸웃댔다. 마치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라는 질문처럼 헷갈린다. 이 저자의 생각엔 나무에서 뛰어 내리다가 결국 날아 오르게 되었을 거라 추측하던데--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어린 새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이다.--어느정도 일리가 있지 싶다. 하지만 고작 나무에서 뛰어 내리는 연습을 통해 결국 날아오르게 되었다는 말은 정말 믿기 힘들단 말이지. 진화론자들이 사실에 근거한 주장을 함으로써 우리의 과학 지식을 넓혀 주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서도, 종종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귀를 막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왜냐면 내가 오늘 나무에서 뛰어 내린다고 해도 내일 날아다닐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봐야 고작 100년을 살기 때문에 머리로는 얼마든지 억만년을 이해한다고 해도 감성적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월을 어떻게 이해하란 말이냐라는 점에서 어쩜 창조론자들은 멍청한게 아니라 솔직한 것일지도...뭐, 공룡이 시조새로 진화를 했고, 그들이 다시 그 다양한 새들로 진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긴 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벙찌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연결 고리의 증거들이 단단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 탓도 있는게 아닐까 싶어 객적은 소리 조금 했다. 그렇다고 내가 창조론자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작가가 서두에 밝히길 자신은 어떤 주제를 갖다 줘도 할 말이 아주 많다고 하던데, 그 말이 틀리지는 않는 듯하다. 실은 어떤 주제를 갖다 줘도 할 말을 찾아낼 수 있는 분 같더라. 작가로써 말이 많다는 것은 분명 장점 중의 장점. 덕분에 흥미진진하게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다만 단점이라면 뒤로 갈수록 약발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 깃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올만한 이야기는 다 집어 넣어야 한다는 사전적인 강박관념 때문인지, 진화론적인 이야기서부터 나중엔 깃털의 쓰임새까지 집어 넣던데, 솔직히 뒤의 장식이나 깃털펜이나 낚시 미끼로 쓰였다는 장은 넣지 않아도 좋았지 않는가 싶었다. 진지하게 과학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장사터로 나온 듯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그냥 진지하게 과학 이야기만 했어도 충분히 즐거웠을 것 같은데, 왜 갑자기 깃털의 쓰임새까지 우리가 알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사족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아마도 작가 성격에 마지막 장들을 넣지 않았더라면 잠이 오시지 않았을 듯...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 같으니 말이다. 기대하고 본 책인데, 기대할만했지 싶다. 물론 완전히 반했어요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서도, 그래도 이만한 글발을 가진 과학자--작가의 본래 직업은 보존 생물학자라고 한다.---드물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 볼만하지 않는가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니 깃털에 대해 뭔가를 좀 알았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몇 가지 세부 사항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이 날 듯 하다. 하지만 그 외엔 재밌게 읽었다는 느낌 말고는 얻은게 없긴 하다. 뭐, 원래 대부분의 책이 그러니 그러려니 한다. 재밌게 읽은게 그래도 어딘가? 재미도 없는 책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의 작가에게 나는 감사 인사를 올려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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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사계절 : 여름의 죽음 살인의 사계절 시리즈 Four Seasons Murder 2
몬스 칼렌토프트 지음, 강명순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살인의 사계절 겨울 편을 끔찍하게 읽고 난 뒤에도 뭔가 내가 놓친 것이 있지 않나 싶어서 다시 읽게 된 후속편이다. 전작에서는 아니었지만 이 번 편에서라도 이 작가의 매력을 제대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안고 집어든 것인데, 결론은 이제 확실히 이 작가에 대해선 학을 떼었다는 것이다. 두께를 보나(장편을 쓰는 능력을 아무나 가지는 것은 아니니까.)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나 추리 소설 작가로써의 능력에는 의심을 하지 않지만, 문제는 내가 그가 진짜로 싫다는 것이다. 왠만하면 정의 편에 서는 것이 추리 소설 작가들의 기본 전제라고 본다면, 내가 추리 소설 작가들을 싫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도, 그걸 이 작가는 두 편만에 가볍게 해내더라. 놀라운 능력이지 싶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는지 하여간 의문이긴 한데, 진짜로 그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작가가 정말로 싫어져 버렸다. 그가 어떤 인기를 누리건, 그가 쓴 이 책이 가공의 것이라는 것을 알건, 아니면 그가 알고보면 인간미 넘치는 인간이라는 증거를 나에게 가져와 들이민다고 해도...이 작가를 싫어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왜냐고? 그건 이 사람이 아동학대를 자신의 성공의 가도 발판으로 삼는 눈요깃 거리로 만든다는 인상 때문이다. 거기에 아동 학대를 당한 피해자들을 제 2의 가해자로 만듦으로써, 정의와 학대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첫번째에서는 좀 심하긴 하지만 하면서 넘어갔는데, 계절과 등장인물만 다를뿐 그 밥에 그 나물인 이야기를 두번째 들으려니 혐오감이 스물스물 넘어오더라. 왜 작가는 똑같은 이야기를 이다지도 반복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사람에게는 아동학대가 서커스처럼 남에게 주목받기 위한 서커스처럼 되어 버렸는지도 이해되지 않으며, 그걸 심각하게 다룬다기 보다는 그저 성공하기 위한 발판으로, 가장 주목받기 쉬운 일례로 드는 것 같아서 인상이 찌프려 졌다. 그러니까, 피해자들에게 공감이나 연민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넣은 것이 아니라 워낙 센세이셔널한 이야기다 보니 집어 넣는다는 것이다. 포르노나 섹시 비디오처럼 아동 학대를 선정의 소재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해서 그가 집어 넣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 구역질이 난다. 가엾다거나, 동정이 간다거나, 뭐 이런게 아닌...아동 학대에 대해 화가 난다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말아야 겠다는 자각이 생기는게 아니라, 그런 학대를 당한 사람들을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한다는 것도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단점이다. 말하자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혼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건 옳지 않아....그렇지 않는가?


 아동 학대를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절대로 벌어지게 두어서 안 된다는 정신으로 책을 쓰는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선정적이고 묘하게 현실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 나는 그가 믿음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애를 위해서라거나, 인간을 보다 한층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통찰력이 아니라, 그저 인기를 위해 현실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파렴치한 사람이지 않는가 싶었다.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서도. 거기에 감상적인 점도 싫다. 난 감상 딱 질색하는 사람인데, 이 책은 추리 소설임에도 감상이 넘쳐 난다. 간간히 넣어져 있는 죽은 자의 독백이라는 시들은 어찌나 유치하던지...거기에 싱글 마더인 주인공 여형사의 사생활도 처음엔 솔깃했는데, 듣다 보니 지겹다.  그래, 네가 딸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은 알겠어.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해서 정말 안 됐구만. 전 남편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았다는 것, 그럴만 하지. 인생이 그렇게 꼬였는데도 일에는 열성이라니 얼마나 다행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반복되니 지겹다. 작가는 자신이 전편에서 한 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있다는 것을 미쳐 알지 못하고 있는가 보더라. 뭐, 나야 이제 이 작가의 책을 더 이상 읽은 이유는 없지만서도, 작가는 이런 책을 아마도 쭉 양산해 낼 생각인 것 같으니 제발 부탁건데, 애인을 만들어 주던지, 전남편과 재결합을 시켜 주던지, 아니면 그냥 사생활 이야기는 빼라. 어쩜 그게 제일 간단한 방법일지도...그녀의 사생활 이야기는 계속 들어줄만치 매력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으니 말이다. 특히나 그녀의 딸은 어디론가 유학을 보내던지 아니면 남편에게 보내던지 했음 싶다. 사족처럼 주렁주렁 달려서 결국 사건까지 개입하게 만들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던데, 가소롭더라. 솔직히 죽여준다고 해도 상관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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