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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변화의 경계에는 항상 '과도기적 진통'이 따르는 법이다. 최초의 자동차, 비행기와 같
은 과학기술 뿐 만이 아니라, 최초의 미니스커트, 나일론 스타킹과 같은 현대생활의 필수품도
모두 그러한 최초의 진통을 겪으면서 점차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잡았다. 물론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이 과거에는 낮부끄러운 수치스러운
일이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폭거였던 경우도 있고, 이와 다르게 당시의 가치관이 오늘날에 비
교해서 한번쯤 겪고싶은 아련한 추억의 가치관으로 자리잡은 경우도 있는것이다... 그렇다.
예를 들면, 과거의 순수한 플라토닉 사랑에 대한 환상과 같은 것 말이다.
이 소설은 이제 고전이다. 작품 속의 시대는 대략 1960년대, 2015년의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바라보면, 때론 답답~하고, 또 유치하고,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쉽게 눈에 띈다. 실
제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인희의 삶과 선택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었다. 믿었던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한 슬픔을 '스스로 망가짐으로서' 표현하려는 가련한 여인, 그녀는 계모의
음모와, 무기력한 아버지의 설득에 굴복해 나이많고 탐욕스러운 부호인 이성태에게 시집을
간다. 물론 근대식 신식교육을 받은 그녀의 상식에, 자신의 선택은 그야말로 '인신공양'에 불
과하다. 물론 주변의 친구들과, 최근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 '강진호'도 그 어리석은
선택을 말리며, 자신과 함께하자 부탁하기 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빚을 대신해 팔려간다. 그리고 오로지 그녀의 몸을 탐하는 짐승
같은 남자가 기르는 '황금새장 속의 카나리아'가 되어, 하루하루를 지옥과 같은 고독과 혐오
로 버티는 삶을 산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강진호를 잊을 수 없었고, 또 자유를 잊을 수도 없
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선택한 어리석은 운명에 속박된다. 아니...달리 선택이 없다 체
념하였다는 것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인가? 그녀는 이성태의 탐욕과 불륜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
간다. 그러나 그녀의 '탈출'은 오직 그것 뿐이다. 강진호가 "아직 늦지 않았다" "그 남자
와 이혼해 나와 살자" "이 나라를 떠나 진정한 자유를 찾자" 라고 아무리 요구해도 그녀는 "나
는 이미 더러워진 몸이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같은 한심한 소리만 하고있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과연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해설자는 1960년대 당시 한
국의 사회속의 여성의 지위를 말한다. 이혼 과 미망인에 대한 편견의 눈길, 개인적인 사랑
에 대한 연예결혼의 비중을 뛰어넘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형식의 결혼문화가 아직 그
만만치 않은 세력을 자랑하던 시대... 전통적 가부장 사회를 살아가는 '신 시대의 여성'들
은 이처럼 상상 속의 소설이나, 논평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계몽을 외치며, 변화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도래하기를, 그야말로
박경리의 '은하'는 그러한 여성들의 소망을 은연중에 표현한 소설이다. 근대의 여대생들,
신 시대의 지식을 흡수한 여성들이 바란 세상... 과연 오늘날의 시대는 그러한 소망이 가능한
세상일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꼭 한번쯤 이러한 주제를 생각하고 그 답을 구할 필요
성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