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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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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양미술사,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경계에서

 

 

‘종전 후 세계 미술의 주도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예술의 탈정치화’다. ‘예술이 공개적인 사회적 표현을 삼가고 개인의 자유를 표방’하게 된 것이다. 현대 예술은 현대 개인의 자유의 문제로 국한 된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모더니즘 운동의 주도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좌익’이었다. 어쩌면 무정부주의적이기까지 했던 그들의 자유가 졸지에 자본주의적 ‘자유’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애초에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원근법을 거부하면서 환상을 걷어내려 했고 뒤샹은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제 현대 미술은 미적 가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아예 사물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미술이 일종의 사물이 되어 존재할 때 그것은 관객의 참여를 요구하는 연극에 가까워’진다. ‘정적이고 관념화된 매체로부터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매체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더니즘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포스트모던한 예술들이 등장한다.

 

 

포스트모던한 팝아트는 모던의 서사를 무너뜨리면서 기의를 거부하고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는 등의 예술적 혁신을 꾀했다. 잭슨 폴록은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는 종류의 그림’을 그렸고, 혼돈과 부조화, 비조직화, 기법의 부재 등을 실험했다. 말하자면 포스트모던 예술은 그 자체로 ‘사건’이었다. 이 ‘새로운 미국 회화의 요체는 추상이 아니라 행위였고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과정이고 행동’이었다. 회화의 본질이 이처럼 ‘행위’에 있다면 이제 더 이상 그려진 그림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작가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포스트모던은 ‘형태에 대한 공격, 물질성에 대한 관심, 즉흥적 화법 등을 통해 모더니즘의 기획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모던의 기획에 대한 환멸, 문명의 위선에 대한 반발은 결국 문명 이전, 형태 이전에 대한 취향’으로 이어졌다.

 

 

모던에 대한 저항은 높은 것과 낮은 것, 안과 밖에 대한 구분법을 무너뜨리고 순수 사물로 나갔다. 물질에 대한 숭배, 죽음으로 돌아가자는 바타유의 유물론 등이 이들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아무것도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장소를 창조하고 공간을 창조했다. 뉴먼은 검은 바탕에 하나의 획을 그으면서 이곳과 저곳이라는 사건의 체험을 그렸다. 말레비치에게 모든 형태를 하나의 정사각형이고 모든 색채는 흑백의 무채색이다. 이제 예술의 대상, 제재는 사라진다. 그는 무게, 속도, 운동의 방향을 중시하면서 존재론적 해방을 모색했다. 그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숭고를 찾았는데 숭고는 미와 달리 무한성을 지닌다. 유한한 형태와 윤곽이라는 아름다움에 갇힌 미와 달리 숭고는 무한하고 어쩌면 공포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이 숭고의 체험이 우리를 미에서 해방시키고 무한한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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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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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왕정의 시대

 

 

 

로마사 연구를 집대성한 근·현대 학자의 대표작으론 두 가지가 꼽힌다. 이번에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몸젠의 '로마사'와 영국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이 쓴 '로마제국쇠망사'가 그것이다.

 

 

 

독일 역사학의 대가인 테오도르 몸젠(1817~1903)은 1854년부터 세 권으로 나눠 '로마사'를 펴내 1902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몸젠의 '로마사'는 로마 역사를 '신화'로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인의 삶과 로마의 흥망성쇠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몸젠은 로마 역사가 곧 이탈리아의 역사라고 보고 분석을 시도한다. 몸젠에 따르면, 인간 삶의 물적 토대에 해당하는 모든 부문에서 희랍 민족과 이탈리아 민족은 동일한 언어 및 풍습의 기원을 갖는다.

 

 

가족은 로마 국가의 토대였다. 이러한 가부장적 토대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권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로마에서 시민과 원로원은 로마 국가의 또 다른 구성요소였다.

 

 

몸젠은 또 로마가 피호민 중심의 상민 공동체 형성, 세르비우스 개혁을 통한 군대 정비, 그리고 그에 따른 토지 개혁으로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고 본다. 시민이 아니었던 사람들, 즉 피호민은 초기에는 오직 보호자의 중재로만 법적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후기에 국가가 더욱 강력해지면서 피호민은 보호자의 중재 없이 유일한 보호자인 왕에게 손해에 대한 공정한 재판과 배상을 요청했다. 왕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좀 더 긴밀한 복종의 의무를 가진 이들 피호민의 확보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왕권 강화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군역을 시민이 아닌 토지 소유자들에게 무관하게 부과하는 군대 개혁을 실시했다. 인적 부담에서 물적 부담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와 함께 국가에서는 토지 소유에 대한 세심한 감독을 진행했다. 군대 정비에 따라 공시적 토지 거래 및 토지조사에 관한 법률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로마는 더 강대해져 갔다.

 

 

그러나 로마의 권력과 영토 확장을 전해줄 역사적 전거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몸젠은 로마가 거대 제국을 이룩하는 데에서 중앙 집중 체제를 주변 국가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덕을 보았다고 말한다. 로마는 그러한 중앙 집중 체제의 확립을 통해 라티움 연맹의 거점 도시였던 알바롱가를 복속시키고 라티움 연맹의 패권국으로 올라선다. 라티움 연맹이 로마에 의해 통일됨에 따라 영토는 동서로 확장되었다.

 

 

이렇게 커진 로마를 다스리는 데 현실의 로마를 숭고하고 이상적인 차원에서 반영하는 데 종교가 큰 역할을 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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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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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분업화하고 전문화했다. 나는 신발 밑창만 만드는 사람이어서 신발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도 못하고 누가 그것을 만드는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노동의 즐거움을 도대체가 맛볼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은 분업화되고 쪼개지고 나눠졌다. 자신의 노동조차 통제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고립되어 개인채로만 살아간다. 이제 내가 죽어도 관 들어 줄 친구도 없다. 짐멜은 현대인이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즐거움으로부터 주관적인 상황으로 이주해왔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자기개발에 힘쓰며 어려운 수학 문제는 친구와 같이 푸는 게 아니라 책가방을 가운데 세워놓고 혼자만 푼다. 1등을 해야 하고 성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거노인으로 쓸쓸히 죽어간다. 그렇지 않으면 그전에 지독한 외로움이나 우울증으로 자살 한다.

 

 

 

 

민주주의는 모두를 평등하게 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빈부 격차를 느낄 뿐이다. 겉으로만 평등한 체제는 연대와 결속만을 파괴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협력하고 더불어 살기 보다는 경쟁하고 짓밟으며 살아간다. 마르셀 모스는 원주민 사회에서 ‘선물 주기’로 인해 만들어진 강력한 연대를 경쟁적 자본주의의 허약한 사회체와 대비시킨 바 있다. 그는 대가 없이 헌혈한 사람들과 돈을 받고 피를 뽑은 사람들을 비교했다. 기부자는 건강한 신체 상태로 참여하면서 피를 선물로 주는 반면 대가를 받은 자들은 돈에만 관심있을 뿐 자신의 피가 건강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19세기에 공공 생활은 언어적인 것에서 시각적인 만남으로 이동했다. 도시의 산책자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자신이 본 것에서 자극을 받았다. 18세기 여행자가 19세기에는 관광객으로 바뀐 것도 이와 동일한 변화였다. 여행자는 자유롭게 문을 두드리고 그 집이나 농장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오늘날 관광객들은 관광 안내서를 들고 둘러볼 뿐이다. 자신들이 여행하는 지역의 주민들을 대화에 끌어들이는 것은 꺼려했다. 대화없이 이렇게 시각적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에서 협력이라는 게 가능할까. 대화는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인간은 피비린내 나는 경쟁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사회에 없는 예절도 알고 의례도 안다. 인간은 예술도 하며 책도 보고 사랑도 한다. 사랑은 흔히 국경도 나이도 인종도 초월한다고 여겨진다. 이게 바로 사랑의 급진성이다. 사랑에는 위계도 차이도 없다. 상징 질서가 만들어 놓은 법도 관습도 모두 뛰어넘어버린다. 회사에 불이 났다고 가정해보자. 사장이니 말단 사원이니 할 것 없이 모두 양동이로 물을 퍼다 나르게 될 것이다. 여기에 위계가 있는가. 이런 공백의 순간이 새로운 인간형, 주체성을 가져오게 한다. 이 공백은 체제 외부에 있지 않다.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이 공백의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토크빌은 평등의 찬양이 불평등에 관한 불안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의 아이들은 서로를 더 잘 믿으며 더 잘 협력한다고 한다. 반면 불평등의 정도가 심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는 자신을 입증하기 위한 강박적 투쟁(자기개발 따위)에 타인은 낄 자리가 없다. 타인은 기껏해야 도구, 수단으로만 사용된다. 타인은 ‘적’인 것이다. 이 확고부동한 좌파, 저자 리처드 세넷은 함께 더불어 협력하는 사회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시종일관 침착하게 말하고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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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의 폭력 -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1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심성보 옮김 / 갈무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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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서 자본의 사회화로

 

 

- 크리스티안 마라찌의『금융자본주의의 폭력』을 읽고

 

 

 

 

오늘날 실물 경제와 금융 경제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금융 경제는 더 이상 실물 경제에 기생하는 것도 아니고 비생산적인 것(p.65)도 아니다. 우리는 슈퍼에서 장을 보고 신용카드를 결제할 때부터(자본주의는 이제 우리의 생명 과정 전체에 파고들어(생명자본주의) 우리의 감정, 느낌까지 파괴(p. 97)한다) 자동차 산업에 이르기까지 신용 메커니즘(금융)에 따라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하면서 이제 소비자는 소비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품과 서비스의 공동생산자(p. 146)가 된다.

 

 

 

거의 모든 것은 자동화되거나(지하철표 판매기부터) 소비자에게 떠넘겨 지면서 기업은 그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스웨덴의 한 가구 회사는 가구를 자동차에 싣는 과정까지 고객이 알아서 하게(p. 68) 했다. 알게 모르게 고객이 스스로 알아서 생산에 기여,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지만 그 이익은 임금 인상이나 안정적인 고용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적 이익으로 횡령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모든 일들은 무정부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시장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불안정적이고 불확실하게 움직일 뿐이다. 부동산 가격이 무한히 상승하고 무한히 성장할거라는 기대는 금융 자본주의를 작동시키지만 이러한 기대는 사실이 아니라 그저 허구이며 인간의 헛된 욕망일 뿐이다. 그 거품이 꺼지는 날 시장은 불안정에 빠지지만 국가는 당분간 그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다. 은행의 구제를 책임지고 자본과 고소득에 대규모 감세혜택(p.127)을 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근본적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국민의 혈세는 이렇게 낭비되고 이들이 지갑을 열지 않으면서 내수 시장은 다시 불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는 다시 민간 부채로 일시적인 수요를 창출하지만 이 게임이 걸고 있는 것은 '미래'이기 때문에 위기를 유예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고 보았던 세이의 법칙은 거짓이라는 게 입증된 셈이다. 언제나 공급의 과잉이 수요의 원인(p. 98)이었던 것이다.

 

 

 

공급의 과잉, 포드주의 모델의 위기는 결국 금융화를 가져왔는데 결국 금융화는 실물 경제에 기생하는 비생산적인 일탈이 아니라 그 초기부터 자본 축적의 형태로 발전했던 것이다. 우리 삶의 일상 속에 전 생명의 과정에 거쳐 퍼져 성장한 금융 자본주의는 점점 더 많은 공통재를 사유화하면서 식민화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시종일관 자신의 종말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처녀지를 착취하기 위해 정복하자마자, 그 처녀성을 제거해버리고 결국 자기 자신의 번영 조건을 고갈시켜 버린다(p. 150)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 이 자본주의는 겉보기에 건재한 것 같다. 부채의 계속적 반복 생산은 공통적인 것을 함께 생산하고 있다. 공통적인 것 즉 지식, 정보, 이미지, 사회적 관계와 같은 모든 우리의 생명 과정 전체는 금융 자본주의 아래 종속되어 있다. 천연자원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 새로운 인지적, 비물질적 공통재는 이론적으로 무제한적(p. 152)이다. 부채 관계는 이 공통재를 착취하면서 삶의 방식을 통제하고 빈곤을 강제하고 있다. 마치 16세기 인클로저 상황이 토지를 사유화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1985년부터 지금까지 시장의 탈규제화를 통한 신자유주의는 평균 2년 반마다 금융 위기를 반복해서 일으키고 있다(p.104). 방법은 하나다. 납세자들이 쌓아 올린 금융 자본을 사회화해야 한다. 이것은 자본의 코뮤니즘(p. 142)이라 부를만한 것이다. 기본소득의 형태로 국민들에게 나누어주던지 교육과 보건, 사회복지와 도시 기반 시설의 유지, 청년 고용 프로그램과 가계에 대한 지원, 문화예술 프로젝트와 과학연구 등의 지원(p. 148)으로 돌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 삶의 질을 높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존엄을 수호해야 한다.

 

 

 

끊임없는 개발과 발전이 능사가 아니라 발전을 저지하고 분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생태계를 보호하고 공통재를 수호해야할 뿐 아니라 그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생태계를 모델로 하는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 생태적 공동체는 협조적이며 참여적으로 위계를 거부하고 경쟁도 부정한다. 또 전체의 일부에게 권력을 몰아주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전체의 이해관계를 우선시(p. 153)한다.

 

 

 

생명자본주의가 파괴한 인간 생명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본의 사유화가 아니라 자본의 사회화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만성적인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불황과 실업, 비정규직으로 인한 인간의 기본권 침해는 결국 인간 사회를 병들게 하고 파괴시킬 것이다. 자본의 사회화로 인간 사회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로 새롭게 구성하지 않는 한 여러 사회 문제, 범죄를 비롯, 자살, 노동 시간 초과로 인한 삶의 질의 저하 등의 사회적 문제들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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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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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우리들의 국가

 

 

 

 

 

 

의술은 의술에 유익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유익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선장과 통솔자도 선장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선원과 통솔받는 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치자든 그가 치자인 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 대상인 피치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해야 한다. 또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이 점, 피치자에게 유익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60p). 치자는 70프로 이상이 비정규직인 피치자에게 유익한 정책을 펴야한단 말이다. 우리에게 집과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달라. 말이다.

 

 

 

플라톤이 이 책을 쓴 게 도대체 언제냐. 소크라테스의 말을 더 들어보자. 필요 이상의 다채로운 음식은 병을 낳고 무절제는 법을 낳는다. 그래서 병원과 법정이 문을 열고 법과 의술은 으스대기 시작할 것이다. 평범한 육체노동자뿐 아니라 명색이 자유민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 숙련된 의사와 재판관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주인이든 재판관이든 남들에게 정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교육이 잘못됐다는 명확한 증거다(185p). 교육을 재정비하란 말이다. 어디 교육뿐일까.

 

 

 

우리가 국가를 건설하는 목적은 한 집단을 특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무리하게 커져도 안 된다. 국가의 수호자들이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것은 부와 가난이다(사람들이 일단 토지와 집과 돈을 사유하기 시작하면 재산 관리인이 될 뿐이다). 부는 사치와 나태를 낳고 가난은 비열함과 기술의 퇴보를 낳기 때문이다(215p). 나를 가난에서 어서 빨리 구제하란 말이다.

 

 

 

아무튼 사유재산은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되도록 고통과 기쁨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사적으로 만들고 고립시킨다. 몸 말고 사유한 것이 없는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까닭에 그들 사이에 소송도 고소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소한 어려움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것,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비를 마련하는 어려움, 돈을 빌리는 것, 빚을 갚지 못하는 것, 학비를 마련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노동, 여보게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생기는 온갖 어려움은 너무나 분명하고 ‘지저분’해서 언급할 가치도 없네(295p). 그렇다. 이 사람이 보기에 우리 현대인들의 삶은 마치 백화점 명품관처럼 깨끗하고 치안도 잘되어 있어 나름 안락하지만 ‘지저분’해서 입에 담지 못할 삶인 것이다. 내 삶이 이렇게 더러운 것일 줄이야.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소크라테스의 일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학문과 관련하여 이것저것 가리는 사람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문학만 읽고 말하자면 뭐 이런 식인데...음,, 또 까인거지. 수천년 전 사람에게 말이지. 썩 기쁘진 않아. 꿈에서도 소크라테스는 금국자 가질래, 나무국자 가질래? 하고 금이 그렇게 좋으면 금국자 줄게 이런다. 그런데 문제는 무거워서 쓸모가 없다는 것!! 아오 열받아.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 재산 평가에 근거한 정체는 과두제인데 이런 국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두 개의 국가를 갖게 된다. 즉, 가난한 자들의 국가와 부자들의 국가 말이다(454p). 우리 나라가 과두제란 말이다.

 

 

 

문제는 이 과두제적 인간에서 민주제적 인간이 생겨난다는 것. 민주제적 인간은 교만을 교양이라 부르고, 무질서를 자유라, 파렴치는 용기라 부른다. 이들은 아무 쾌락이나 닥치는 대로 즐기며 닥치는 대로 먹고 나서 다시 물만 마시며 살을 뺄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생활에는 아무 질서도 필연성도 없는데 그는 이런 생활을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이라 여기며 평생을 지낸다. 민주제의 자유는 예속을 싫어하고 급기야 모든 법률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지경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참주이다. 지나치고 때이른 자유가 참주를 불러들인다(490p). 지금 우리 나라와 싱크로율? 되는가.

 

 

 

덩치가 커서 1박 2일 꼼짝 못하고 읽은 것 같다. 고전이란 게 안읽었는데 읽은 것 같고 그래서 또 안 읽게 되고 늘 그랬던 거 같다. 이것도 읽다말다만 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꾹참고 앉아서 읽어보겠다 다짐하고 엉덩이 욕창생길 뻔 했다. 이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이래서 고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논문 발표가 코앞이라 심장이 쫄깃해진 채 읽어야했지만 많은 걸 얻고 간다. 학교보다 알라딘이 날 더 많이 공부시키는 것 같다. 알라딘 서평 마감과 겹친 중간기말 레폿 마감이 함께 올 때 그 쓰나미에서 즐거움을 찾는 나는 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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