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간 세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부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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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는 내 인생 소설 중 한 편이다.

국내 최신간으로 소개되는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2016~17년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로 일본에선 <OMOKAGE>란 원제로 2017년에 단행본 출간되었던 작품이다. 원제와는 다르지만 <겨울이 지나간 세계>라는 국내 출간명은 작품의 이미지를 제대로 형상화한 문학적인, 박수쳐 주고픈 작명이다.

이 소설은 칠순이 된 작가의 깊은 연륜이 사골 국물처럼 진하게 우러나오고 여기에 '아사다 지로'표 감동이 첨가된 또 하나의 수작이다.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장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아사다 지로! 도쿄의 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아사다의 집안은 망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이래서 오늘도 뛰어난 이야기꾼 아사다 지로의 신간을 읽는다. 참 다행이다.

「한 남자가 있다.

다케와키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직장인으로 성실하게 살아왔고, 집과 직장만을 지하철로 통근하는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았다. 65세 정년퇴임 환송식까지 마치고 마지막 퇴근을 하던 중 그는 지하철에서 뇌출혈로 쓰러지고, 신비한 기억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

대기업 임원으로 어느 정도 성공한 직장 생활을 한 다케와키. 아내와 외동딸 가족을 둔 단란한 가정사는 타의 모범으로 언뜻 겉보기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전혀 비추지 않는 듯하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여행을 다른 세상인 이세계(異世界)로 떠나 미지의 인물들을 만나고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다케와키에게는 아들 하루야가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저세상으로 보낸 아픈 기억이 원죄처럼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그리고 거의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부모가 누군인지 모르는 고아다. 이름도 독지가의 성과 프로야구 선수의 이름을 조합해서 만들었고, 12월 15일이라는 생일조차 명확하지 않다. 사실 그는 이러한 태생적인 불행을 한마디 불평 없이 견디며, 묵묵히 자기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어내며 고분분투했던 거다.

'지하철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인생사는 이세계 여행을 통해 지하철이 갖는 커다란 의미가 다시금 드러난다. 그리고 출생의 비밀이라는 풀리지 않던 매듭을 풀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다케와키는 1951년생이다. 아사다 지로 역시 '51년생이니 주인공의 설정이 우연만은 아닐 터이다.

<겨울이 지나간 세계>는 '51년생들과 그리고 전후에 태어난 그 윗세대('전후세대'로 칭할 수 있겠다)에게 전하는 소설가의 따뜻한 정종 한 잔이다. 술잔과 더불어 깊은 공감과 따뜻한 위로가 함께함은 물론이다.

전후세대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에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로 일본의 고도성장기, 경제부흥을 이끌었다.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고통은 뻔할 뻔자다. 그런데 남들한테 말할 수 없는 고생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P 41

"시시한 이야기가 너무나 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 230~231

'이야기'를 '인생'으로 바꿔 보자는 게 저자의 의도는 아닐는지. 시시한 인생은 없다!

"하지만 65년 만에 끝나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양이 똑같다면 내게는 아직 15년이나 20년쯤 행복한 시간이 남아 있어야 한다." - P 237

저자의 동년배인 이들에게 아사다가 꼭 전하고픈 한마디.

"당신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 P 101

 

"따분함은 참 좋다.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 오직 사고와 상상만 하는 비생산적인 시간. 옛날 인류는 풍요로운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며 살다가 우아하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일들은 나태함이 되고 비생산적인 행위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을 봉쇄하며 살게 되었다. 아무리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그런 인생은 너무나, 그런 죽음은 너무나 빈곤하지 않은가." - P 192

 

어느덧 인생의 후반전을 뛰는 사람들, 특히 남성 독자라면 <겨울이 지나간 세계>를 통해 아사다 지로가 선사하는 "BRAVO, MY LIFE & YOUR LIFE!"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격한 공감을 피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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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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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에 표시된 홍보 문구 "2020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넷플릭스 영화 원작 소설"이 눈길을 확 끈다. 영화 <365일>의 원작 소설이라...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토록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았을까?

여주인공 라우라의 시선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호텔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다 남자 친구 마틴과 함께 이태리로 여행을 떠난 라우라는 신비한 마성의 섹시남 마시모에게 납치당한다. 그가 라우라에 꽂힌 이유는 매우 특별하지만, 당사자인 라우나에게 마시모는 정체 모를 유괴범일 뿐이다. 이 남자는 돈을 그야말로 물 쓰듯 써대고 주변 모든 인물들 위에 군림하는 젊은 폭군이지만 치명적으로 섹시하고, 침대에선 여성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섹스를 선사하는 짐승남이다. 영화 <대부>를 비롯한 다수의 갱스터 장르물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총 본산으로 묘사되는 코사 노스트라(시칠리아 마피아)의 카포파미글리아(capofamiglia_마피아 가주)가 바로 '돈' 마시모다. 결국 365일의 이야기 구조는 "말하자면 포르노 장면이 곁들여진 마피아 영화 같은 삶이 될 것이다."(P 341)」

 

솔직히 라우라에 대해선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운명의 변화구를 만난 미모의 젊은 여성이란 점 외에는. 이 운명이 행운이냐 불운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독자들은 행운이라고 그녀를 질투하지 않을까. 섹스에 적극적이란 점 외에 그녀는 별다른 특장점이 안 보이고, 선택지도 거의 없다.

반면 '포식자' 마시모는 언급할 부분이 많다. 시칠리아에 거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그의 패밀리는 사업을 안 하는 지역을 말하는 게 더 쉬울 정도인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이고, 5개 국어에 능통한 젊은 수장인 마시모는 고위직(!)임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며, 제트기나 초호화 요트, 슈퍼카를 소유하고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미국 드라마 「다이너스티」의 세트장과 비슷한 대저택에서 살지만 늘 생명의 위험을 느낀다. 그는 원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얻어내고, 타인을 지배하는 명령에 익숙하며, 본인의 말을 거역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365일>의 배경은 마피아 패밀리가 제공하는 상상을 뛰어넘는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이제는 합법화된 패밀리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마시모 월드'지만, 주된 향신료는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친 섹스다.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마피아의 세계, 럭셔리 명품도 매력적인 배합 요소이긴 하지만 그거로는 부족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이 정도 강도의 섹스를 일상생활에서 영위하지 말란 법은 없겠으나, 그 수위는 사뭇 19금을 초월한다. 비교 대상으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언급할 정도니, 29금 이상의 자극을 원하는 독자들은 이 대목에선 환호할 만하다. 유기농도 좋지만, 언제나 불량식품은 필요하다.

"허리의 반동이 어찌나 심하던지 온갖 종류의 오르가슴이 홍수처럼 차례대로 나를 덮쳤다. 눈사태처럼 몰아치는 절정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난 하릴없이 이를 갈고 말았다. 엉덩이에 부딪치는 남자의 허벅지 소리가 귓가에 박수소리처럼 들려왔다." - P 333

럭셔리가 기본값인 마피아 월드와 거칠고 격한 섹스의 향연이 배합된 <365일>이 거둔 소설과 영화의 글로벌한 성공은 이런 자극과 판타지로 대리만족을 얻는 다수 대중의 존재를 입증한다. 여기서 남성이 철저히 밤낮으로 지배하는 세계에 던져진 무개념 인형처럼 묘사된 여성에 대한 페미니즘 차원의 비판은 논하지 말자. 그런 분들은 안 보고 안 읽으면 된다.

이 소설은 전체 3부작 중 첫 편에 해당되기에 독자적인 마무리를 맺지 않는다. 감질나는 이야기는 다음 편 <또 다른 365일>로 이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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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평온을 아껴주세요 - 마인드풀tv 정민 마음챙김 안내서
정민 지음 / 비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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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이라는 저자 이름을 처음 접하고, 한문과 고전에 조예가 깊은 정민 교수를 생각했더랬다. 그럼 그렇지... 그분이 '마음의 평온'까지 책으로 내지는 않았구나. 아직까지는.

<내 안의 평온을 아껴주세요>는 유튜브 마인드풀tv를 진행하는 정민이 쓴 마음챙김 안내서다.

이력만 봐서는 금수저 쪽으로 보이는 정민은 이런저런 내적 고통에 시달리며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를 거쳤고, 성인이 돼서도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스스로 명상에 입문하여, 여러 시도를 통해 서서히 자신에게 잘 맞는 방법을 찾고 고안했단다. 명상을 따로 배우거나 공부하지 않고 독학으로 길을 찾았기에 명상을 어려워하는 일반인의 눈높이에 잘 맞는 방법을 조언할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2년 만에 11만 명이 넘는 인기를 얻었다.


명상을 누구에게 배우거나, 어디 학원에 가서 습득한 게 아닌 만큼 정민은 명상하면 떠올리는 거추장스러운 형식을 버리자고 제1부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를 통해 시종일관 강조한다.

'어디 가서 배워야 하는 거 아냐, 옷은 어떻게?, 장소는 어디서?, 적어도 호흡법 정도는 배워야 하지 않아' 우리가 명상하면 떠올리는 이 모든 조건은 스스로 만든 제약과 구속일 뿐 마음 닿는 데로 편하게 시작하고 행하라 한다. 마치 매일매일 세수와 양치를 하듯 말이다. 이런 접근 방법이 우선 독자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명상의 과정을 글로 풀어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정민의 글은 그의 주장처럼 쉽고 편하게 다가온다. 일단 시작하고, 마음이 가는 데로 길을 찾으면 된다. 한 번에 안 되면 다시 해보면 되고,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으리니. 명상은 복잡하고 정해진 절차가 있으리라는 선입견은 '친절한 정민씨'를 만나 무장해제된다. 그 점만으로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하다.

제2부 '오늘의 명상' 편에서는 다양한 사례별 명상법을 해설한다.

아침을 여는 명상, 저녁에 하는 마음 목욕 명상, 과거의 상처를 돌보는 명상, 생각을 흘려보내는 명상, 원하는 삶을 내 것으로 하는 심상화 명상, 여기다 팬데믹 시대를 위한 명상까지...

살다 보니 좋은 인연만 있진 않더라.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도 내게 오고 그 사람으로 인한 고통이 있어서 그런가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는 명상'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사람 관계에 일방통행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나만 홀로 그에게 진정 무해한 사람이었을까.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제3부 '묻고 답하기'에서는 '현존하기'의 울림이 컸다.

'현존하기'란 한마디로 평온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단 의미다. 살아가는 매 순간에 집중하면 우리의 일상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손을 씻을 때는 다른 생각에 잠기지 말고 물의 온도와 촉감, 비누의 향기에만 집중하는 거다. 운전을 할 때는 핸들을 잡은 손의 감각과 핸들의 움직임, 양발의 감각에 집중하고, 밥을 먹을 때는 음식을 몸에 욱여넣지 말고, 음식의 맛을 충분히 느껴본다는 각오로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마인드풀 이팅 mindful eating'을 습관화하자. 걸을 때도, 잠잘 때도... 이 논리대로라면 대화를 나눌 때는 무조건 상대방에게 집중할 수밖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조차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현대인은 반드시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

◈ 내 안의 평온을 위한 몇 마디

"우리는 흔히 생각을 해야 답을 얻는다고 여기지만, 사실 진짜 답은 머리가 비워져야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 P 26

"억압된 감정은 반드시 분노나 폭력과 같은 건강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출되거나 질병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 P 97

"그 또한 용서하기 명상을 통해 해결하고 천국과 지옥은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는 걸 배웠답니다." - P 103


이 책을 읽고 명상의 세계에 입문하고 말고는 당신의 자유지만, '명상과 거리 두기'를 무너뜨린 소득만으로도 '평온보스' 정민의 역할은 크다. 물론 명상을 할 때는 마인드풀tv와 함께. :-)

"내 마음도 제대로 못 다스리면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화두는 쉬운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은 우린 지나간 세월로 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생겨도 내 마음의 주인은 나인 바, '친절한 정민씨' 명상을 통해 'Highway to hell'보다는 'Stairway to heaven'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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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이름 - 부모의 뇌를 치유해야 아이의 뇌가 달라진다
도모다 아케미 지음, 김경인 옮김 / 마인더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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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 뉴스는 잊을만하면 등장해서 사람들을 비분강개하게 만든다. 어제도 이모에게 맡겨진 10세 여아가 학대로 사망했다는 신문 기사를 접했다.

친부모든 양부모든,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는 어린이를 학대해서 '아무도 구하지 못한 생명'으로 만드는 과정은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 천인공노할 범죄다. 이는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한데, <부모라는 이름>은 아동학대에 관한 다수의 서적을 낸 바 있는 소아정신과 의사인 도모다 아케미 박사가 집필한 책이다. 아동학대 예방모델을 학술영역에서 심화하기 위해 꾸준히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저자는 2020년도 「문부과학대신 표창 과학기술상(연구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자는 벌어진 불행의 불씨부터 살펴보자고 하는데, 그 불씨는 바로 학대아동의 부모가 가지고 있기에 '우선적으로 부모를 치유해야 한다'는 주제가 핵심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는 '부모의 뇌를 치유해야 아이의 뇌가 달라진다'이다.

 

저자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아동학대를 당한 사람들이 부모가 되어 자녀에게 학대를 대물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섬뜩한 본문 몇 가지를 인용한다.

"부모 중 어느 한쪽의 폭언보다 양쪽 모두의 폭언이, 아빠의 폭언보다 평소 아이와 접하는 시간이 많은 엄마의 폭언이 아이의 뇌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또 폭언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빈번할수록 뇌에 가해지는 손상은 커진다." - P 34

"유아기에 부모로부터 폭력을 당하거나 심한 욕과 꾸지람을 들으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자란 사람은,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신체적 혹은 심리적 폭력으로 괴롭히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 P 61

"내가 치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린 시절에 멀트리트먼트를 경험한 사람은 멀트리트먼트 가해자가 되기 쉬운 상대와 교제하거나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멀트리트먼트를 당한 사람이 폭력적인 상대에게 끌리게 된다면, 그 배후에는 애착장애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그러진 애착관계가 '표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관계를 맺기 쉬운 상대방을 고르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가정에 항상 긴장감이 감돌고 언제 폭력적인 언동이 분출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 P 69~70

☞ 애착장애 : 일그러진 애착관계 때문에 나타나는 온갖 부정적인 증상

본문을 통해 저자는 어떻게 부모의 아동학대 경험이 자녀에게 대물림되고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거기에 대한 부모 트레이닝(Parent Training, PT)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돼야 하는지 입증하고 관련된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저자의 경험상 아이 문제로 병원을 찾았다가 부모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게 된 경우가 많단다. 상처받은 아이의 치료도 물론 중요하지만, 부모의 상태를 확인한 후 병행치료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이런 치료의 문턱(접근성, 비용 등)이 높으면 형편이 녹록지 않으리라 예상되는 대부분 가정에선 쉽게 이용하기 어려우리란 점이다.

책의 후반부, 저자의 스승 격인 스기야마 선생과 대담을 통해, 일본 멀트리트먼트의 근원을 찾은 결과, '전쟁'의 영향이란 분석을 내놓는다.

스기야마 : 요즘 부모 세대는 대부분 전후(戰後) 세대에 해당하지요. (···)

그런데 대체 왜 전후세대가 이렇게 황폐한 것인지 원인을 찾아보니 결국 '전쟁'에 도달하더란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전쟁에 나갔잖아요.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산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결과, 그들의 자녀는 온갖 문제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도모다 :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전후세대 중 일부는 마음의 상처가 깊은 부모로부터 멀트리트먼트를 받으며 자랐고, 이제는 그것이 그들의 트라우마가 되어 표출된다는 말씀이군요. - P 175~176

 

"모유로 자식을 키우는 포유류 중에서 갓 태어난 새끼를 양육하지 않는 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진화과정 중 뇌 속에는 '모성적 양육행위를 하는 데 필요한 신경회로'가 존재하다고 할 수 있다. (···) 그 때문에 대부분의 포유류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 즉 학대는 하지 않는다." - P 24

어렸을 때 사랑과 보살핌 대신 학대를 받고 자라 어른이 되어 자식에게 또다시 학대를 한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도 아니고 참 안타까운 인생유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범죄 영화 많이 본다고 다 범죄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학대받는다 해서 다 비정상으로 크는 건 아니다. 멀트리트먼트를 경험하고도 발달단계에서 정신적인 질환을 앓지 않고 성장하는 아이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바로 리질리언스(resilience),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하거나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안고 생활하더라도 잘 순응하는 능력 혹은 그 과정이나 결과를 일컫는 단어다. 우리 말로는 '정신적 회복력', '정신적 탄력성'이다.

리질리언스가 강한 아이들은 3가지 특성을 지닌다.(P 90)

『1. 개인의 특성 - 지능이 높다, 자기긍정감이 강하다, 자아가 유연하다, 자제력이 있다, 필요에 따라 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상황 판단력이 뛰어나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 등

2. 가정의 특성 - 따뜻하고 안심할 수 있는 가정환경과 부모와의 건전한 애착 형성 등

3. 사회적 특성 - 가족 이외의 어른이나 친구와의 안정된 관계, 학습장소의 탄탄함, 지역 사람들과의 관계, 공적기관의 지원 등을 포함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충실도 등』

"멀트리트먼트가 심할수록 아이의 리질리언스는 훨씬 더 '사회적 특성'에 의존한다." - 구보다 마리 교수, 도요에이와여대, P 90

결론적으로 아이에게 리질리언스라는 보호막을 입히기 위해서는 개인과 가정은 기본이요, 사회적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 비극이 벌어지면 조건반사적으로 분노하기보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특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지 않나. 스웨덴은 1979년에 자녀 양육 관련법을 개정하여 세계 최초로 아이에게 어떤 체벌도 심리적 학대도 할 수 없도록 법률로써 금지한 나라가 되었고, 일본도 2020년부터 법이 시행되어 이제 가정 내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는데, 이런 다른 나라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아동학대라는 사회 문제에 대해 <부모라는 이름>은 적잖은 시사점을 주고, 근본적인 치유 방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문제 해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의 세심한 독서를 제안한다. '부모'라는 이름은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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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9 - 또 희한한 녀석이 왔습니다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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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묘인도 애견인도 폭풍 공감하는 마성의 고양이 만화 "콩고양이" 시리즈 9, 10권이다.

전작들을 보진 않았으나 독립된 에피소드로 9, 10권을 만나도 즐기는 데 큰 무리는 없다.

주인공 가족은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으며,

고양이 암수 한 쌍 팥알과 콩알, 누렁이 시바견 두식이가 주요 배역이다.

이 외에도 아침을 일깨우는 닭 '마당이', 비둘기 부부와 참새,

비단잉어, 작은 연못에 사는 거북이 무리가 동물 대가족을 이룬다.

시리즈 9권의 부제는 '또 희한한 녀석이 왔습니다'다.

여기서 '희한한 녀석'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이 집으로 날라온

희귀하고 몸값이 제법 나간다는 큰유황앵무다.

'슴가왕, 슴가슴가' 이런 경박한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읊조리는 앵무 '유황'은 자신의 의지로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사네를 떠나지 않는다.

9권에선 새로운 식구 '유황'의 등장과 더불어

35세 안경남의 직장 동료로 '유황'에 꽂힌 아이코가

주요 인물로 비중을 부여받고 초식남과 핑크빛 분위기를 조성한다.

고양이 집사는 새로운 빵집을 개발하지만

훈남 주인이 유부남임을 알고 좌절하기도...

10권의 부제는 '팥알짱이랑 콩알짱이랑'이다.

<콩고양이> 시리즈는 제목처럼 고양이인 팥알과 콩알이 주인공이지만,

9권에서 첫 등장한 '유황'과 '아이코'가 새로운 식구라 해도

무방하리 만큼 자리를 잡아 두 고양이의 비중은 부제처럼 높진 않다.

오히려 10권에선 점잖은 '~말입니다' 대사를 느긋하게 치는,

육포를 가장 좋아하는 두식이의 실종이 가장 큰 사건이다.

추억이 쌓이는 만큼 안경남과 아이코의 연애 온도도

조금은 더 올라간다.

이 정도면 거의 그린 라이트를 기대해도 좋을 듯.

처음 접하는 <콩고양이> 시리즈는 다정다감했다.

어찌 보면 초등학생 저학년이 그린 그림처럼

결코 잘 그린 그림 같진 않지만

연필로 그린 드로잉은 아날로그의 기운을

물씬 풍기며 독자들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집에 반려동물과 함께 하지 않더라도

<콩고양이>의 고양이 한 쌍과 시바견과 함께라면

마치 집안 어딘가에 그들이 있는 듯한,

현대인의 얼어붙은 심장에 훈풍을 불어넣는

푸근한 갬성을 전달하는 따스한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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