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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배신 - 시장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라즈 파텔 지음, 제현주 옮김, 우석훈 해제 / 북돋움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8년의 금융대공황은 단순히 경제적 피해 규모에서 뿐만이 아니라 경제사학적인 의미에서도 1929년의 대공황 이후 가장 큰 충격과 여파를 미국은 물론 전세계 경제계에 던져주었습니다. 그것은 비로 경제에서의 선과 악에 대한 생각과 고민입니다.
2008년 금융대공황은 표면적인 시작은 모기지론에서 촉발되었지만,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폭발은 파생 상품에서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대공황에 필적할 만큼 엄청난 사건을 겪고난 뒤에도 사건의 핵심인 파생 상품의 본질과 규모에 대해 자세하거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기관이나 개인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대공황을 일으킨 폭탄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대폭발 위험성을 안은 채로 미국 경제의 깊숙한 곳에 잠복해 있다는 것이지요.
파생 상품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의 산실인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를 중심으로 젊고 똑똑하며 야심만만한 경제 엘리트들이 금융 공학이라는 새로운 체계를 통해 발명해 낸 완전히 새로운 상품입니다. 그런만큼 금융대공황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성장 동력을 상실하고 침체에 빠진 미국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구원해 줄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발명품으로 찬사와 칭송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신용도가 매우 낮고 위험한 불량부실 채권들을 여러 개씩 묶고 재포장해 전혀 낯선 이름을 붙인 새로운 금융 상품으로 둔갑시킴으로써 재무재표상의 불량부실 채권들을 정리하고 그 댓가로 받은 새로운 채권을 유통시킴으로써 오히려 이익을 얻는 사기에 가까운 이러한 금융 공학은 결국 금융대공황을 필연적인 결과로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파생 상품과 금융 공학이 미국 경제계의 찬사를 받았던 근저에는 미국 경제가 지닌 과도한 탐욕과 사악함이 뼛속 깊이까지 베어있기 때문입니다.
라즈 파텔의 <경제학의 배신>은 경제의 기본 단계인 사물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금융 공학이 만들어낸 파생 상품은 기본적으로 가치가 없는 악성 불량 채권과 부실 채권들을 재포장해 가치가 있는 채권으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의심할 바 없는 사기 행위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파생 상품을 만들어 낸 똑똑한 수학 천재들과 금융 전문가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행위를 ‘사회가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악성 부채를 재무재표에 가지고 있든 기업과 금융사를 그들은 ‘사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회인 실제로 존재하는 미국과 세계라는 사회 전체는 그들에게는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책임을 질 대상으로는 전혀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회’는 다른 의미로는 ‘효율적 시장 가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장은 가장 좋은 것을 스스로 조절하고 만들어 낸다는 시장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도그마이죠. 그러면서 모든 책임을 사회 자체에 전가시킵니다. 하지만 과연 시장은 가장 좋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조절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대 경제를 주도하는 개체인 ‘기업’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도덕성이나 공익성과는 거리가 먼 불법적이고 불공평한 행위들을 상시적으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기심을 극단적으로 부추키는 것은 금융 자본입니다. 이익을 위해서는 온갖 불법과 부당 행위를 아무런 죄책감이나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기업과 금융 자본의 전횡 앞에서 시장은 일찌감치 자정 기능을 상실하고 효율적으로 시장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탐욕의 댓가로 사회 전체의 공동 재산인 공공재가 가장 먼저 탈취당하고 피해를 입습니다.
여기에서 정부와 사회 세력들의 개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경제학파가 가장 먼저 주창했던 것이 정부는 시장에 무제한의 자유를 주자는 것이었고, 그 근거로 내세웠던 것이 바로 효율적 시장 가설이었죠. 그런데 그들의 주장을 들어준 결과가 바로 방종과 무책임을 넘어 탐욕의 극대화가 낳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기 행위였고, 그 결과가 금융대공황으로 발발했으니, 그들의 주장은 근거를 잃은 셈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시장 자유를 정부가 나서서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와 보수 양쪽 진영 모두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보수 진영이 말하는 ‘자본주의 4.0’이라는 것이 너무 경제적 이익을 소수 계층에게만 집중시켜 계층 양극화에 의한 혁명이나 대결 구도를 조장하지 말고 적당히 이익을 나눠주자는 식의 대중에 대한 얄팍한 회유책인 것과는 반대로, 라즈 파텔이 주장하는 것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 문제에 개입해 전체 사회가 발전의 이익을 골고루 누리도록 단순히 경제적 산물만이 아니라 생활 방식과 기회, 식량과 환경 등 사회와 경제의 모든 부분을 새롭게 재편하고 재분배 하자는 근본적인 해결책이자 대안의 제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부와 사회는 계몽주의와 민주주의의 본래의 이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경제적 이익만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시장에서 끌어내리고, 새로운 가치 체계를 그 자리에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은 ‘경제학’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경제 철학’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경제’는 알고 ‘경제 이론’에는 해박하지만, 제대로 된 ‘경제 철학’은 전무한 우리나라의 위정자들과 경제관료들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인 것입니다.
ha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