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열걸 1
미야기 아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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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지의 남다른 패션 감각을 가진 세련된 여성이 연필과 원고지 들고 있는 모습이 모든 걸 말해 주는 것 같다. 이렇게 멋진 여성이 교열 보며 능력도 발휘하고, 돌직구도 서슴없이 내뱉고, 탐정같이 사건 해결도 해 주고, 사랑도 한다는 것.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읽고 프라다 입는 악마들이 가득한 패션 잡지 에디터가 되기 위해 경범사에 입사하였지만, 얼굴 없는 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교열부에 배치된 고노 에쓰코.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으면 그토록 원하던 칸막이 저 너머의 패션 잡지부로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투지를 불태운다.

저렴한 편의점 도시락을 먹더라도 패션은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에쓰코의 지론. 겉모습에만 신경 쓰는 허영 덩어리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업무 능력은 그야말로 부러울 정도로 탁월하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기억력과 앞뒤를 읽어내는 뛰어난 이해력, 그리고 사소한 것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철저함이 삼위일체가 되어 그녀는 뛰어나게 교열 작업을 해낸다. 교열 세계는 그것이 다가 아니어서 너무 꼼꼼하게 하다가 눈 밖에 나기도 했지만, 놀라운 능력이긴 하다.

출판에 막연한 동경이 있어서인지 <배를 엮다>, <중쇄를 찍자>, <싸우다 서점 걸> 등 출판사 및 서점과 관련된 드라마나 책을 정말 좋아한다. 교열을 다루는 건 참 기가 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딱 눈에 보이는 동적인 장면보다는 문장과 씨름하는 정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에서는 교열 작업을 하며 의문을 갖게 되는 앞뒤가 안 맞는 문장들을 통해 작가의 비밀을 파고들기도 하고, 흡사 미스터리 소설처럼 문장 속에 나오는 단서들을 가지고 실종된 작가의 부인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 놀라운 일을 고노 에쓰코가 한다는 것.

버릇처럼 틀린 한자를 찾아내는 모습을 보고 큭 하며 웃었다. 나의 버릇이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생 때 초등학생용으로 나온 셰익스피어 작품집 같은 걸 보면서 맘에 안 드는 표현이나 틀린 맞춤법은 책에다가 줄 찍찍 긋고 고쳐가면 읽었던 사람이다. 중학교 때 고전문학을 읽으며 서서히 독서에 흥미를 잃어가고 글이나 문장과는 크게 관련 없이 살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 역시 책으로 회귀하였다. 태어난 곳으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그러나 문장에 대한 감각 따위 잃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에 그냥 읽었다. 번역이 이상한 것 같아, 정도만 감지했다.

4년 전부터 프리랜서로 어학 동영상 강좌를 검수하는 일을 하면서부터 다시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 자체가 영어 및 우리말의 모든 오류를 잡아내야 하므로 내가 아는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공부를 해나가야 했다. 맞춤법 검사기를 끼고 살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를 뒤지고 그래도 안 되면 국립국어원에 카톡을 뻔질나게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것들이 나는 즐거웠다. 언어 속에 숨어 있는 특이한 조개 껍데기를 찾는 것이 너무나 즐거운 것이다. 일할 때도 해야 할 일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 즉, 굳이 안 해도 되는 것들까지 내 맘에 들게 싹 고쳐서 보냈었다. 그랬더니 관련 일까지 의뢰가 들어왔다. 즉, 교정/교열하는 일과 번역문을 검수하는 일이다. 원문과 번역문 대조하여 번역이 바르게 되었나부터 해서 번역문의 표현까지 교열하는 일이다. 정답도 없고 노가다에 상응하는 일이지만 나는 즐거운데 어찌하랴. 돈을 너무 쪼끔 준다는 게 함정이지만, 이게 다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잔뼈를 굵게 하는 통로가 되니 즐기며 하는 걸로! 끝도 없이 공부해 갈 수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나도 비록 집에서 머리카락 뜯으며 컴퓨터 앞에 놓고 고민을 하더라도 에쓰코처럼 스타일 멋지게 하고 일을 할까 보다. 한때는 '클래식해 보이는데 어딘가 꼭 하나씩 포인트가 있다'라는 말을 들었었다. 무지하게 특이한 코르사주라든가, 평범한 H라인 치마 뒤에 리본을 하나 묶는다든가... 그게 내가 추구하는 취향이었다. 그걸 콕 집어내 준 같은 부서 선배 언니가 갑자기 그리워지네. 지금은 '취향'이라는 것 자체가 '부재'이다.

그나저나 에쓰코가 시쳇말로 '썸'을 타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되려나 궁금하다. 결국, 2, 3권 사게 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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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뜨겁게
배지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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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재미있는 한국소설을 읽었다. 다른 소설이 재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국내 도서는 많이 읽지 않고 읽을 때는 보통 번역서를 많이 읽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번역이라도 번역투에서 자유롭기는 참 힘든 것이라 번역본을 읽을 때 긴장을 하는데, 자연스럽게 강물 흐르듯 유려한 우리말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깨에서 힘을 빼고 내용 자체에 몰입해도 되는 자유를 느끼게 해 줌을 간만에 느낀다.

제이(J)라는 주인공은 요즘 세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20대 비정규직 여성이다. (본문을 읽을 때는 이름이 '윤제이'인 줄 알았는데, 저자의 후기에서 J라고 쓰신 것을 보니 이니셜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 이후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라는 20대에,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게다가 여성이다. 제이라는 이니셜도 요즘 어린아이들에게야 많이 없는 이름이겠지만 지영, 지은, 지혜, 지애, 지연 등으로 대변되는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가진 보통 여자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많은 20대 여성들이 겪을 법한 성장통을 몸으로 부대끼며 치열하게 겪어내는 이야기를 약간의 소설적 허구(UFO와 외계인, 그들과의 교신)를 곁들여 풀어내고 있다. 지극히 빈곤한 상상력을 소유한 독자인 나는 처음에는 UFO에 외계인, 그들과 교신하는 남자, 그들이 납치해 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난감하긴 했다.

그런데 제이와 제이의 가족과 회사 동료들이 보기에는 단지, 아줌마, 아저씨, 젊은 여자, 젊은 남자일지라도 각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화해해 나가는지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그래서 독특한 존재로서의 개별성이 중요한 것 같다.

제이는 29살이 되기까지 그럴 듯한 경력 없이 아직도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있다. 대단한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보통, 평균의 삶도 손에 넣기가 쉽지 않다. 제이의 엄마는 십여 년 전, 아빠의 중병 앞에서는 생활인으로서의 비정함을 서슴없이 내보이더니 노년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은 새로운 사랑을 시도하고 있다. 소위 '엄친아'로 제이의 자랑이었던 제이의 오빠는 소위 '애 딸린 이혼녀'와 소설 같은 순정의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하려고 한다. 사회의 잣대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못내 싫은 제이도 그 사회의 잣대로 오빠의 신붓감을 재단하고 자른다. 모순투성이 보통 여자이다. 사람이 그런 것이지 않을까? 완벽하게 일관성 있고, 완벽하게 논리적이며 완벽하게 앞뒤가 맞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그녀에게 더욱 공감이 된다.

제이는 과거에 꽤나 명성 있던 잡지 <좋은 이웃>의 기자이다. 제이의 회사 사장은 명색이 출판인이면서 출판의 사명따위 안중에 없고 어떻게 권력의 하수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려볼까 생각하며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갑질의 원조이다. 예전의 명성의 흔적에 기대어 입사한 서울대 출신의 조 기자는 얼마 못 버티고 때려치고 나가고 나이도 같으면서 주민증 운운하며 언니 노릇하는 한 기자(보람 언니)는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처세술을 읊어대나 실상은 현재 급여로는 삶이 빠듯하여 주말에 투잡을 뛰고 있다. 그저 사람 좋고 무능한 손 부장은 존재감 없다.

​제이의 회사 옆 성인용품 가게 주인은 그야말로 색안경 끼고 보기에 좋은 존재이지만 제이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실은 좋은 이웃이다. 그리고 기사가 될까 하여 접근한 배명호 씨는 외계인이 납치하여 잃어버린 아내를 찾고 있는 사람이다. 행방불명된 제이의 아빠도 함께 찾아달라고 하며 제이가 접근했다. 주변에서 정신병자로 분류되는 사람이지만 제이는 묘한 편안함을 그에게서 느끼고 외계인의 단서를 함께 추적해 간다.

이 모든 사람들과 일련의 사건 속에서 제이는 봉인해 두고 있던 20대의 가슴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고 인정하며 과거로 흘려 보내는 작업을 한다. 이별을 정식으로 고해 주지 않고 말 그대로 산에 버리고 간 사람에 대한 상처로 사랑에 철벽을 쌓아왔으나 아픈 사랑도 과거로 보내고, 갑자기 말 없이 사라져버린 아빠에 대해서도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의 온기만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충전한다.

단순한 몇 마디의 말이 아닌, 공유했던 기억들, 미처 기억으로 남지 않았던 시간들. 그것들이 아주 길고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이젠 내가 아빠에게 말하고 싶다. 내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어 고맙다고, 그런데 인사도 없이 갑자기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좋은 기억마저 잊으려 했던 나를 용서해달라고, 미안하다고.

지질하고 못나빠진 나의 20대를 향해서도. 짧은 순간이나마 사랑이 충만했던 순간에 대해 고맙다고. 사랑 때문에 헤어짐이 너무 힘들어서, 시랑의 시간마저 저주했던 순간에 대해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리고...... (p. 284)

​그리고, 또 성공과 처세에 대해 읊어주는 언니 노릇하는 보람 언니에게 이렇게 외친다.

"내가 언제 성공하고 싶다고 했어요? 누굴 이기겠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방법을 알려주는 건데요. 난 그냥 평범하게, 땅바닥에 발 딱 붙이고서 살고 싶을 뿐이라고요."(p. 251)

그럼으로써, 기존 사회로의 편입만이 생존의 유일한 끈인 것처럼 애를 쓰던 제이는 자신을 해방한다. 그리고 자유로워진다. 오빠의 결혼도, 그 상대인 '애 딸린 이혼녀'도 수용하게 된다. 그렇게 30대를 맞는다. 늘 훈수 두었던 보람 언니는 갑자기 닥친 질병으로 인해 입원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녀도 이제 진정한 20대다운 방황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난 말이야.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누가 알았냐고, 내가 이렇게 쓰러져버릴지. 모을 땐 그렇게 힘든 돈이 병원비로 나가는 건 순식간이더라고. 억울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계획대로 되지 않는 미래는 그냥 공포야. 더구나 난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주변에선 자꾸 '괜찮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거야. 누가 넘어졌다는 거야? 난 쉬고 싶지 않다고!" 그러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아니야, 실은 나 괜찮아. 지금은 심리적인 공황 상태인 거야. 미안해.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만 같아"라고 말했다.

 

괜찮다. 그녀도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면 된다. 20대이기 때문에 괜찮다.

 

나도 그랬는데... 충실히 살고자 노력했는데, 어쩌면 계획 없이는 못 사는 보람 언니같은 나였는데, 살다보니 나의 계획만이 다가 아니고 갑자기 닥친 위기도 꼭 새드엔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삶에서 체득하고 나니, 좀 더 부드러워 진다고 할까, 둥글어진다고 할까 그런 연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미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힘든 과거를 가진 배명호 씨도 치유를 얻었을까? 어찌 생각하면 뉴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호러 영화보다 더 호러스러운 현실을 보면 제정신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혈육보다도 더 좋은 이웃(제이가 일했던 잡지 이름이기도 한)들이 있어 공허한 마음 보듬고 또 일어서서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20대를, 그리고 그 20대를 겪어 '어른'이라 불리게 된 사람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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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어디 계세요?
햄햄 지음 / 이야기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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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
버린 자에게도 이유는 있겠지요.
그러나 버림당한 무언가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거죠.

버려진 한 마리의 개가 있습니다.
주인을 찾아다니며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봄을 지나고
대나무 끝줄기가 하늘을 찌르는
여름도 지납니다.
형형색색 코스모스 하늘하늘 가을을 지나
온세상이 눈에 덮이는 겨울도 지나지요.

햇살이 눈부신 화창한 날에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도
주인을 찾아다닙니다.

하염없이 옮긴 발걸음은 산에도 바다에도
어느 인적 드문 작은 역에도
평화로운 오후의 공원에도 닿지만
주인은 없습니다.

그리워하다 미워하다 지워버렸지 뭐.
한때 유행했던 어떤 노래처럼
그리워하다 미워하다 지워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개라는 존재는
유전자에 그렇게 입력되어
조성된 생물이 아닙니다.

어느 비 내리는 거리에서
주인의 내음을 감지합니다.
달려간 개를 우산을 팽개치고
꼭 안아주는 개의 주인.
비에 젖은 머리를 하고
그저 개를 꼭 안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이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많이 외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많이 미안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는 언제나 함께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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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다운 죽음을 꿈꾼다 - 마지막 순간, 놓아 주는 용기
황성젠 지음, 허유영 옮김 / 유노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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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생명만은 살려야 한다'는 의학계 및 환자와 그들의 가족의 고정 관념에 도전한다. 환자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마지막 순간에 불필요한 연명치료로 인해 신체적 손상, 경제적 손실, 가족들의 상처가 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놓아주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첫걸음은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DNR: Do Not Resuscitate)를 작성하는 것이다. 환자 본인의 의식이 뚜렷할 때는 직접 작성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가족이 작성할 수 있다.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존엄성을 지키며 편안히 생을 마감할 수 있느냐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144쪽)"

더 이상 장수가 미덕이 아닌 시대에 어떻게 죽을까?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건강수명을 최대한 늘리도록 건강하고 젊을 때 관리를 잘하고 정기적인 검진을 통해 조기발견, 조기치료를 하여 위험을 최소화하고, 혹여 불가항력적인 질병 혹은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를 대비하여 DNR 작성여부를 미리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며칠 전,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 마침 우리나라에도 연명치료 결정법이 통과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준비된 죽음은 환자 본인의 존엄을 지키고 가족들에게는 경제적, 정서적 부담을 덜어주며 전사회적으로는 의료자원 효율적인 배분을 실현한다.

"하지만 뇌사 문제는 근본적으로 의료 자원의 분배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160쪽)"

사실 환자 혹은 환자가족의 입장에 살 가능성이 100퍼센트로, 의료진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이런 말은 듣기가 거북한 말이다. 의료자원의 배분이라니... 무의미하게 병상을 차지하고 의료진의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시키는 소생 불가능한 환자 한 명 대신 수많은 건질 수 있는 환자를 돕는 게 낫다는 의미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말은 학회에서만 하면 좋겠다. 죽어가는 환자와 소중한 사람을 잃어가는 가족들이 사회 전체의 의료자원의 분배까지 생각해줄 필요도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환자는 고통 없이 존엄을 지키며 아름답게 세상을 떠나게 하고, 환자의 가족들은 안타까운 응어리를 남기지 않고 하루 빨리 슬픔을 극복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인생의 의의를 배우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호스피스 의료의 목표다. (165쪽)"

"DNR 동의서를 작성하고 호스피스 치료를 받는 것이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살릴 수 있다면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살릴 수 없다면 환자의 존엄을 지키고 고통 없이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183쪽)"

생명의 연장에만 집착하는 것보다 마지막을 평안하게 차분히 준비하는 호스피스 의료는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TED 강연에서 아동 호스피스에 관한 강연을 들었다. 죽음, 특히 아동의 죽음은 터부시되어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하다가 차가운 벽, 연결해 놓은 기계의 소음, 밝은 불빛, 한밤중에도 편히 쉬지 못한 채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어린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아동 호스피스가 비교적 활성화되어 있는 유럽에 비해 강연자가 대표로 있는 아동 호스피스 홈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생긴 곳이라고 한다. 비영리 조직으로 집과 같은 편안함(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음)을 누리게 함과 동시에 의료진이 상시대기하고 있어 안심할 수 있고 어린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각각 맞춤형으로 제공한다. 부모들은 아픈 아이들과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을 누리고 준비된 작별을 한다. 그리고 슬프고 괴롭지만 다시 삶으로 복귀할 준비를 할 수 있다. 제대로 이별하지 않으면 계속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없는 것 같다.

"언어는 소통의 시작이다....환자나 환자의 가족들과 대화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알아듣기 쉬운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186쪽)"

환자의 눈높이에서의 소통은 이루말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나라는 과중한 업무 때문인지 현실화되지 못하는 의료수가 때문이지 의료진의 마인드 부족인지 하여간 환자 및 환자가족과의 소통이 힘든 경우도 왕왕 있는 것 같다.

큰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뭣도 모르고 겁이 나니 응급실로 달려간 적이 있었다. 각설하고 심폐소생술 해야 할 정도의 응급이 아니면 응급실은 가는 게 아니다. 침상 하나도 얻지 못하고 복도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기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침상 하나를 얻었는데 손에서 담배 냄새 나는 젊은 남성 레지던트가 와서 아기의 얇은 혈관을 보며 덜덜 떨며 몇 번이나 찔렀다 뺐다 하는 것이다. 초조해하는 환자 가족이 보고 있으니 가뜩이나 어려운 신생아 수준의 아기 혈관에 주사를 꽂기가 만무했을 것이다. 못하면 바로 IV 전문 간호사를 불러야 하는데 미적미적하는 모습에 애가 새까맣게 타버렸다. 결국 내가 울었다지. 그리고 IV 전문 간호사가 왔는지 안 왔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레지던트보다는 조금 높아보이는 전공의로 보이는 남자가 와서 설명을 하는데 입과 손에서 담배 냄새 풀풀 나고,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조사 빼고 전문용어였다. 핵심은? 아침 되고 외래 진료 시작돼서 전문의가 오지 않으면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결국, 야밤에 쓸데 없는 피 검사, X-RAY 검사, 심전도, 초음파까지 다 찍었는데 아침 외래 시작되니 다 제대로 안 되어서(피 검사할 피의 양이 모자라고, 초음파는 제대로 안 찍히고...) 다시 피를 뽑아야 해서 아기 팔에 또 주사기를 꽂겠단다.

반면, 같은 병원에서 우리 아이를 계속 봐주신 소아 외과 선생님과 소아 안과 선생님은 진정한 의료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아 외과 선생님은 당시에 이미 환갑이 넘으신 연세의 여의사 선생님이셨는데 그 연세에도 직접 집도하시며 외래 갔을 때도 세세히 설명해 주시고 질문을 하면 막지 않고 듣고 대답해 주신 분이다. 기사를 찾아보니 소아 외과계의 대모이신 분이었다. 비록 간단한 수술이어서 40분만에 끝나고 상태만 지켜보다가 당일 퇴원 가능한 수술이었는데도 수술 끝나자마자 잠깐 나오셔서 불안해할까봐 나오셨다며 다 잘 끝났고 회복하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일망정 7개월된 아기를 수술실로 홀로 보내는 부모 심정을 헤아려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소아 안과 선생님은 젊은 분이신데 명의라고 알려져 그냥 예약하려면 길게는 1년도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다. 이 분은 아기를 안고 방문에 들어서면 검사하는 전등을 아기 눈에 비추셔서 진료실 의자로 가는 동안 이미 아기 눈동자를 관찰하시고 진료실 안쪽 의자에 앉으면 "사시는 아무 문제 없고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실력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분인데 더 대단한 건 1년만에 찾아뵈어도 기억을 하신다는 것이다. 아기 때 얼굴이 남아있다거나 엄마 고생 많이 시켰다거나 항상 웃으며 얘기를 해 주시고, 담당 교수님 분위기를 따라 가는 건지 진료실에 계시는 전공의 선생님들도 너무나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전날 방에 함께 있는 전공의들을 데리고 다음 날 올 환자들에 관해 공부하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의 관심이시다. 그렇게 공부를 세밀히 하시기에 15분마다 환자가 5명 이상씩 배정이 되어 있는데도 진료가 가능하신가보다. 정말 인술(仁術)을 베푸시는 분이다.

"뇌사자의 장기 기증 때 마취를 하는 것은 마취의에게는 직업 윤리를 다하는 것이고, 수술에 참여하는 의사들에게는 장기 기증자를 존중하는 것이며, 가족들에게는 환자가 장기를 기증하며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위안을 준다. (194쪽)"

이 부분은 참으로 숙연해졌다. 장기 기증자의 수술에도 마취를 한다는 건 수술대 위에 놓인 환자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존중한다는 것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장기 기증자의 시신을 보고 기롱한 의사들에 관한 기사가 난 적이 있다.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이미 대학생 때 장기 기증 서약을 했는데 바로 취소했다. 나도 죽어서라도 그런 꼴은 당하고 싶지 않고 내 소중한 사람들도 죽어서라도 그런 꼴은 당하게 하고 싶지 않다.

죽기 전에 제대로 사랑하고, 화해하고, 감사하고, 작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칭송받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죽을 때 후회 없이 그리고 사랑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고 죽고 싶다.

죽음을 생각할 때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와서인지 더욱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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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작은 공간 - gallery.museum.place, 로컬이 추천하는 도쿄에서 가장 주목 받는 곳 136
마스야마 가오리 지음, 서수지 옮김 / 시드페이퍼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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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그리운 곳 한둘쯤 있는 삶은 풍요하고 행복하다고 늘 생각한다. 내게는 그러한 곳이 두 곳 있다. 한 곳은 일본 도쿄, 또 다른 곳은 미국 시애틀이다. 여행자로서가 아닌, 거주자 혹은 생활인으로 지냈던 곳들이다. 그래서 일상의 촘촘함이 오가던 길마다 새겨진 곳들이다.

도쿄는 굳이 말하자면, 갔다와서 뒤늦게 사랑에 빠졌다고나 할까? 나라고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공통적 국민적 정서가 없을 리 없다. 일본에 간 것도 상경계열도 어문계열도 법학계열도 아닌 문과생으로의 한계를 외국어로 극복해보고자 하는 꼼수가 컸다. 각설하고 한일월드컵 직후, 욘사마의 인기몰이 등 한류가 일본 열도를 덮어 양국 관계가 유사 이래 가장 우호적이지 않았을까 싶은 2002년 10월 도쿄로 갔다. 대학원에 소속되어 1년 반의 연구과정을 마쳤다.

그 당시는 아마도 블로그 초창기였고 전설의 싸이월드가 크게 유행하던 때였다. 특별한 호기심이 있지도 않고, 여행을 좋아하지만 일상을 떨어버리고 돌아다닐 만큼 여유롭진 않기에 지인들과 몇몇 곳들만 돌아다녔다. 그러고 나서 귀국하고 취직, 결혼, 임신 및 출산이라는 일련의 발달과업의 단계를 빏아가며 이국에서 나홀로 지내봤던 그 시간의 가치가 더욱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그립고 아쉽고 생각나고... 사랑에 빠진 감정인 것 같다.

도쿄와 인근 수도권의 작은 문화공간들을 소개하는 안내서를 만났다. 공항에 있는 듯한 설렘 가득한 울렁거림이 느껴진다.

목차는 도쿄의 지역별, 인근 현(우리나라의 '도'와 같은 행정구역)별로 공간이 나열되어 있다.

각 지역별 도입 페이지에는 지도에 빨간색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곳들이 표시되어 있다.

가장 먼저 언제나 가고 싶은 바닷마을 가마쿠라 지역을 살펴봤다. 이름만 들어봤던 가마쿠라 문학관의 고풍스러운 전경이 나와있다. 사진을 통해 내부 공간의 정갈한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옆 페이지에는 공간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나와 있다. 교통편, 입장료, 개관일, 특이사항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여행계획을 짜기에도 안성맞춤일 것 같다.

이 책에는 제목에 100퍼센트 부합하는 작은 공간들이 소개되어 있다. 더 크고 다양한 미술관들도 있고 여러 곳을 가봤지만 이렇게 작고 소박하여 여행책자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보석 같은 공간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놓았다. 이 책에 실린 곳들을 찾아 늦은 템포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면, 뉴욕, 서울과 함께 메트로폴리탄의 하나인 도쿄의 속살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 에세이 장르를 좋아하여 그런 것을 기대했는데 처음 책을 받았을 때 도감 같기도 하고 여행 책자 같은 모습에 조금 실망했는데 잘 배치된 사진들과 함께 가보고 싶은 곳들이 보물창고 속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듯하여 이 또한 큰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감각 있는 사람이 서울의 작은 공간에 관한 책을 내주지 않으려나 새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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