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이 노는 정원 - 딱 일 년만 그곳에 살기로 했다
미야시타 나츠 지음, 권남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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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야시타 나츠는 2016년 <양과 강철의 숲>으로 일본서점대상 대상을 받은 작가이다. 피아노 조율사를 꿈꾸는 청년의 조용하면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열정을 그린 멋진 작품이었다.

작가의 다른 대표작 <스콜레 NO.4>도 읽어 보았다. (번역본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화려한 여동생에 비해 자신은 평범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 한 여성의 자아발견의 여정 및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열렬한 팬까지는 아니지만 이렇게 관심있는 작가의 에세이가 나왔다고 하니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삶과 생각을 얘기하는 에세이 장르라는 것만으로도 기대되는데, 게다가 남편과 자녀 셋, 5인 가족이 홋카이도에서 1년 동안 지낸 이야기라니 정말 기대가 됐다.

미야시타 가족은 남편분이 홋카이도를 워낙 동경해서 홋카이도행을 결심했다. 초반엔 그나마 도시인 오비히로로 마음먹었다가 더 산중 깊은 마을인 도무라우시로 가기로 변경했다. 이 지역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 말로 '신들이 노는 정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산촌유학제도(아래 단락 참조)'를 이용해 가게 된 것인데 중학생 아들 2명, 초등학생 딸 1명은 지역의 학교에 1년간 다니게 된다.

'산촌유학'이란 도시지역의 초, 중학생이 장기간 부모 슬하를 떠나 자연이 풍부한 농촌, 산촌 및 어촌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여름방학, 겨울방학, 봄방학 기간에 체류하는 단기 산촌유학, 1년 단위로 실시하는 것을 장기 산촌유학이라고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재팬)

막연히 동경은 하지만 그곳도 동화속의 마을이 아니라 사람들이 울고 웃고 사는 '사람사는 곳'이었다. (물론 흔히 볼 수 없는 큰곰과 북방 여우, 홋카이도 사슴도 같이 사는 곳이긴 하다.)

☆아이들의 생활
그곳에서는 소수의 아이들이 선생님과 지역 주민의 애정 어린 시선 속에 보호받으며 아이가 안심하고 아이로 있을 수 있다.(207쪽) 학예회에서 아이들이 각본도, 연출도, 연기도 스스로 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도 각본을 쓰고 의상도 모두 만들어 극을 올린다. (192쪽) 마을의 팔방미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웃집 소녀가 도시의 고등학교로 가 심리적요인인지 걷지 못하게 되어 마을로 돌아오지만 마을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도 된다고 맘을 먹고나서 낫게 되는 일도 있었다. 어느 곳에나 슬픔과 아픔, 좌절과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해결될 수도 있다.

☆산골마을 풍경
가장 가까운 슈퍼는 차로 삼십 분 이상 걸린다. 작가는 도시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삼십 분 이상 걸리는 건 예삿일인데 슈퍼까지 삼십 분 걸리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건 사고가 유연하지 않다고 꼬집어 말한다.(227쪽) 도시 사람들이 모두 약아빠진 것이 아니듯 시골 사람들이 모두 소박하다는 선입관 역시 좋지 않다고 말한다.(226쪽) 막 내린 눈에 멜론 시럽을 부어먹는 맛, 창문으로 뱀이 들어오려 해 부랴부랴 창문을 닫기도 하고 북방여우와 홋카이도 사슴과 눈이 마주치는 설렘, 컨택트렌즈가 어는 혹한, 멀미가 날 정도로 별로 가득한 밤하늘, 눈이 내리는 뜨끈한 노천탕.

☆ 엄마로서의 작가
아이들이 험준한 산 등반을 가니 부모 마음으로는 안절부절 걱정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몰라도 된다. 부모의 걱정 따위 몰라도 돼. 알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라고 말한다.(120쪽) 빨리 크는 아이들을 보며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하지만 정신 바짝 차리고 하루하루 아이들과 즐겁게 살자, 바동거리며 열심히 살자는 결심을 한다.

부모의 걱정은 몰라도 된다는 말에 울컥했다. 나의 걱정이 아이들의 인생이라는 길의 돌부리가 되지 않길, 나의 품이 아이들이 날기 위해 절벽으로 가는 길에 안주해 버릴 동굴이 되지 않길... 작가님의 마음과 같이 내 걱정따위 등 뒤로 감추며 아이들이 모험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달성했을 때의 기쁨을 온몸으로 안아줄 수 있길 간절히 바라게 됐다. 작가님, 우리 엄마 동지네요.

한달살기, 일년살기 유행처럼 번지는데 그 이면에는 아이들과 의미있는 시간을 밀착하여 친밀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물론 자기가 사는 바로 그곳에서도 가능할 테지만 자신과 타인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고 비일상 속에서 신선함을 찾아 작은 모험이 가능한 곳을 찾는 것은 무척 좋다고 생각한다.

미야시타 가족은 저자는 작가이므로 계속 글을 쓰고 저자의 남편은 현지에서 일을 구했다. 그렇게까지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겠지만 언젠가는 2주씩 혹은 한 달씩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 아이들과의 농밀한 시간을 보내보고 싶다. 바로 어제까지 3박 4일간 괌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참 좋았다. 아직 많이 어린 둘째를 업고 안고 다니느라 나의 왼쪽 목과 어깨에는 동전 파스10여개가 영광의 흔적으로 남았지만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들을 마음을 포개어가며 지내고 싶다.

소설에서보다 더욱 재기 넘치고 유머 가득한 작가님 더욱 사랑하게 됐다. 저자도 엄청 에너지가 넘치고 활력 넘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공황장애와 부정맥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울고 웃고 살아내고 있다. 나도 에너지도 달리고 쉬이 몸과 맘이 지치는 사람이지만 나대로의 인생을 만족하며 살아봐야겠다.

일년살기를 한다면 따뜻한 남국에서 하고 싶다. 홋카이도는 7~8월 딱 두 달만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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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종활 일기
하시다 스가코 지음, 김정환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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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의 각본가 하시다 스가코 씨가 안락사로 죽게 해 달라는 내용으로 쓴 에세이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오싱>의 작가이자 30년 이상 방송된 일본의 국민 드라마 <세상살이 원수천지>의 각본가이다. 1925년생이시니 우리 나이로 94세이시다.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주장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적 성격이 강하다. 안락사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된 경위를 거슬러올라가다 보니 자연히 그간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고 왜 안락사로 죽고 싶은지에 대한 소회가 담겨 있다.

우리에겐 일제시대, 일본으로서는 한참 군국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1925년에 태어나 10대 소녀시절을 제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보낸 경험이 이분의 삶을 크게 좌우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전쟁의 비애와 배고픔을 이겨냈건만 패전하자마자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지배자들을 보고 큰 회의를 품는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씨와 같은 감정이다. 미우라 아야코 씨는 교단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쳤었는데 패전이 되자마자 어제까지 맞다고 믿고 가르쳤던 것을 오늘부터는 틀리다고 가르쳐야 함에 좌절을 느끼고 교단을 떠난다.

비단 이 분들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는 피해국가이므로 일방적으로 일본이라는 한 덩어리 전체를 비난하지만 그 안의 개개인도 어쩌면 국가라는 권력의 피해자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전쟁의 기억이 저자의 정신세계의 기반을 형성한 것은 틀림없다.

남성중심적인 일본 사회에서 성공한 각본가로 살아왔고 더 이상 생에 미련은 없다고 하며 치매나 중풍 등 중병으로 자리보전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기 전에 안락사로 죽고싶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존엄사(연명치료 거부)는 허용되어있지만 적극적인 의미가 강한 안락사는 허용되어 있지 않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적제도와 실제로 안락사 여부를 판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달라고 주장한다.

병이나 부상을 치료해 목숨을 구하는 것은 의료인의 중대한 사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살리는' 것만을 생각한다는 느낌이 든다. '행복하게' 혹은 '편히' 죽을 수 있게 하는 일 역시 의료인이 감당할 역할이 아닐까? (128쪽)

어려운 문제이다. 어떤 마음인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게 의료인의 역할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스치는데 죽음에 대한 결의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일정하고 일관적이고 주체적으로 확립된 것인지 그걸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행복의 빵>이라는 원제의 일본 소설이 생각난다. 동명의 영화(국내에서는 <해피해피 브레드>로 알려짐)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한겨울에 찾아온 세 번째 손님...
고베에 살며 목욕탕을 운영해 온 사카모토 부부.
50년간 인생을 함께 해 온 75세의 남편과 80세의 아내 아야...
켜켜이 그 긴 세월을 함께 쌓아오며 고베 대지진으로 인해 딸을 잃기도 하고
불에 타 버린 목욕탕을 다시 일으키기도 했다.
아내 아야는 페암으로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삶의 의욕을 잃고 한겨울 동반자살을 꾀하러 추억의 장소를 찾은 이 부부...
그러나, 평생 빵을 입에 대지 않던 아내 아야가
"내일도 이 빵을 먹고 싶다."며
내일도 살고 싶다는 삶에의 희망을 붙들자
다시 살아가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아내 아야가 죽은 후에도 목욕탕을 지키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남편...

어제까지 몰랐지만 오늘 알게된 맛있는 빵 하나 때문에라도 살 수 있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므로 생일이 올 때마다 지나온 삶의 의미와 기쁨을 곱씹으면서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 좋다. 자신이 태어난 날에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습관이란 말인가. (224쪽)

엔딩노트를 쓰라고 권한다. 이건 꼭 따라 하고 싶은 일이다. 매년 생일에 죽음에 대해 기록해놓으라는 것이다. 어떻게 죽고 싶은지, 누구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싶은지 등등... 친절하게 책 말미에 엔딩노트까지 실어주었다.

저자의 인생관에 동조하지 않지만 나와 주변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며 존엄사와 안락사 논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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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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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는 유명한 신경과학자이자, 작가이다.

'신경과학'이라는 분야가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는 의학의 영역인 만큼

일반인들에게는 생경하게 느껴지는데,

올리버 색스는 일반인과 '글'이라는 매체로 소통을 해 온 분이다.

2015년 안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이 책은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저서이다.



사실 최근 들어 책을 끝까지 읽는 데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린 책이다.

나의 모국어로 읽는데, 외국어로 읽는 책만큼이나 힘들었다.

나의 배경지식이 부족한 것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러나 지적 욕구를 자극하고 많은 부분 반짝! 하는 통찰력을 준 책이었다.



일상의 자잘한 사건도 탐구하는 마음을 가진 탐구자에게는 탐구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가 생생히 기억하는 어떤 화재 사건에 대해 그의 형은

그 사건 발생시 저자와 그의 형은 현장에 없었고,

아주 생생한 설명을 삼촌에게 들어다고 알려준다.



나 또한, 동일한 경험이 있다.

다섯 살 때 미술원(유치원 같은 데)에 안 가겠다고

길바닥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기억이 있는데

이것이 정말 내 기억인지, 엄마가 말해 준 것과 길에서 울고 있는 예전의 내 사진을 보고

내가 재구성해 낸 기억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해서 어린 나에게 전적인 감정이입을 해서 실제 기억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것들, 혹은 자기자신이 예전에 썼던 글들이

뇌리에 남아 그것을 재생산해 내는 의도적이지 않은 '표절'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매스컴에서 많이 나오는 표절 사건들을 보면 고의로 베낀 경우도 있지만

어디선가 언젠가 들었던 어떤 멜로디나 이미지가

어느 순간 자신에 의해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표절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사고과정이라는 것이

그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올리버 색스의 지적이 무척 신선했다.



어려서부터 사부작사부작 앉아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도 만들기도 했었다.

창작동요대회라는 게 있었는데, 내가 만든 곡으로 동생을 내 보겠다고 열중하기도 했다.

뭐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한번 맘 내키면 뭐든지 홀라당 버려버리는 성격 탓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러고 혼자 놀곤 했었다.

(첫 작사작곡한 노래는 생각난다. 이름하여 '몽당연필' ㅋㅋㅋ)



어쨌든 그러면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몇 곡 만들었던 것 같다.

어느날은 무척이나 쉽게 음이 잡히는 것이다.

악보 그리는 것을 정식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적당히 내가 보고 치고 부를 수 있는 만큼 그렸다.

꽤나 만족스러워 했던 곡이었는데, 세상에나.

그 다음 주 교회에서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같은 멜로디의 익숙한 곡을 불렀다.

가사는 달랐지만 그 음이 머릿속에 남아서 그걸 그대로 베껴서 그려놨던 것이다.

스스로도 신기해했는데 저자가 그런 내용을 다뤄서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



진정한 독창성은 '기억과 차용'에서

'동화와 통합'의 수준으로 도약하는 잠복기를 통해 탄생하며,

이 과정에 관여하는 핵심 요인은

심오하고 의미 있고 능동적이고 개인적인 몰입이다.



...​



'남의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자기 자신의 경험, 생각, 느낌, 입장과 혼합하여

얼마나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흔히, 작가들이 '필사'를 글쓰기 연습의 한 방법으로 제시하는데,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필사함으로써 좋은 문장구조와 어휘를 체화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의 코미디언 코난 오브라이언도 같은 말을 했었다.

당대의 최고의 코미디언들을 따라하고 모방하며 그들이 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코미디 스타일을 구축해 내게 된다는 것이었다.



완벽히 처음인 창조는 없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고 들은 것들을 통해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 같다.



저자는 정말 타고난 탐구자라는 생각을 했다.

청각을 잃어가면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비슷한 음운을 가진 전혀 다른 말로 들리는데

그것을 탐구대상으로 삼아 노트에 자기가 들은 말, 실제로 상대방이 한 말을 기록하여 분석하였다.

또한 색전술을 받고 수면발작과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섬망 등 정신적인 증상까지 겪으면서도

자신의 자서전의 교정쇄를 수정하였다.

글쓰기가 즐거움이었고 오히려 글쓰기가 있었기에 고통을 이겨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던지...



상이한 동물들을 갈라놓은 심오한 생물학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든 동물들은 나름 다양한 수준의 정신을 발달시키거나 보유하고 있다.

우리도 그런 동물들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종교적인 이유로도 그가 신봉하는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

일부 각 종이 적응하기 위하여 변형되어 왔다고는 생각하지만 종 간의 진화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가 가진 "우리도 그런 동물들 중 하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모든 자연계 속의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행하고 있는 모든 횡포에 대해

경종을 울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등생물이며 모든 것을 지배할 유일하게 높은 정신적 수준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오만하고 폭력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적 영역에서 그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지적한다.

우리가 흔히 예술가나 과학자 등에 대해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올리버 색스는 "여건 미성숙"이라고 지적한다.



모든 과학 분야에서 놀랍도록 흔히 발견되는 암점의 원인은 여건 미성숙뿐만이 아니며,

지식 상실, (한때 뚜렷이 확립된 듯 보였던) 통찰력 망각,

때로는 통찰력이 부족한 설명으로의 퇴행도 단단히 한몫을 한다.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려면,

뭔가를 순간적으로 파악하거나 알아듣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우리이 마음이 이를 수용하여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에 맞닥뜨리도록 허용해야 한다.



평생을 탐구자로서 살아온 노학자가 죽음에 임하여 남겨준 이 주옥같은 지혜를 깊이 간직하고 싶다.

여담이지만, 과학, 의학 분야의 최고의 번역자의 경이로운 작품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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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여로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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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만 아래에 소개한다. (스포일러는 없음)



삶의 의미를 찾지 못 하고,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대생 리카코.

그녀는 유흥업소에서 만난 애인 도모나가의 제안으로

도쿄 근교의 으슥한 산중에서 동반자살을 결행한다.

그런데 과다복용한 수면제를 구토해내고 살아나게 되는데

살아난 그녀의 손에는 칼자루가 쥐어져 있고,

그녀의 곁에는 칼에 찔려 죽은 애인인 도모나가가 죽은 채 누워있다.



그녀는 자기가 함정에 빠졌으며,경찰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고

자기의 결백을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필사적으로 여명이 밝기 전의 현장을 빠져나와 도쿄로 돌아온다.

그녀는 도모나가 아내 유키노를 살인 용의자로 의심하고

유키노의 반응을 보러 남장을 하고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간다.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고 뒤돌아오던 골목길에서

리카코는 괴한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도모나가의 집을 감시하던

다키이라는 남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다키이는 실종된 매형의 행방을 찾기 위해 유키노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 매형의 이름 '이와타'는 리카코가 일하던 유흥업소에서 전화로 들어봤던 이름이고

리카코는 이와타를 살인 용의자 중 한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렇게 리카코와 다키이는 함께 사건에 얽힌다.

리카코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다키이는 매형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이 둘은 긴 여로를 함께 나선다.



일본의 애거사 크리스티로 불리는 저자 나쓰키 시즈코의 1975년 작품이다.

40년도 더 전에 나온 작품이니만큼 읽다 보면 1970년대 느낌이 물씬 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게도, 방 안에서도, 택시 안에서도 담배를 피우고

찻집에서도 종업원이 재떨이를 바꿔 주고 가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단서를 찾아 두 사람이 택시를 타고 추적하는데,

택시기사에게 어딘지 아는지 묻고, 택시기사는 잘 모르지만 가 보자고 한다.

생각해 보면 네비가 지금처럼 일반화되기 전에 늘상 나눴던 대화이다.

또, 지금은 통화하며 버튼 하나만 누르면 통화내용이 녹음되는데,

리카코와 다키이가 녹음기능이 있는 전화기가 있는

다키이의 사무실을 굳이 빌려서 전화를 거는 장면도 있다.

핸드폰이 없어서 여관의 전화, 경찰서 전화를 빌리며

전화 교환수가 몇 번이나 나온다.



전형적으로 whodunit를 좇는 미스터리인데

솔직히 시대적인 차이로 인해 감정이입이 되지 않은 것인지,

추리소설다운 숨 가쁜 느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해결을 향해 가는 과정은 꽤 재미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지리한 느낌이었다.



반전을 꾀한 것 같긴 하지만 반전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없었다.

스포일이 될까 봐 말은 못하겠지만 나중에 밝혀진 범인과 트릭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리카코는 왜 처음부터 몰랐지? 어두워서? 에이 좀 그렇다.'



어쨌든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아무 죄도 없고 아무 관계도 없는 리카코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이 사실 용서가 되지 않는다.

리카코가 다시 살아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죽었으면 어쩔 뻔했어...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하고 싶다.

70년대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화두를 던지고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의 '성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정체성 문제'.

그것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인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지...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은 성 소수자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권리 주장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70년대에는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전적인 아닐로그 느낌 물씬 나는 미스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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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가 이혼할 뻔
엔조 도.다나베 세이아 지음, 박제이.구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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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기획이 신선하여 돋보이는 책이었다. 부부가 모두 전업이든, 파트타임이든 작가기에 가능한 기획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책을 권하고 상대방은 그 책을 읽고 웹진에 서평을 올리는 것을 번갈아 근 1년간 했던 연재글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의 취향이 너무 다르다는 데 있다. 나 같으면 못할 것 같다. 내 취향은 분명하고 생활 속에서 주어진 시간은 짧고 읽고싶은 책은 너무나 많은데 부부라지만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타인, 즉 남이 골라준 책을 읽고 있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를 잘 알고 내 취향을 아는 친밀한 누군가가 선정해 준 거라면 대환영이다.

이 부부처럼 우리 부부도 극과 극이라고 할 정도로 독서 취향이 다르다. 일단 남편은 책을 많이 안 읽는다. 나는 많이는 아니어도 최대한 읽으려고 하는 독서 애호가이다. 그나마 남편이 책을 읽을 때는 실용성에 근거한 독서를 한다. 즉, 자기 업무와 관련된 경제, 투자 관련 책 일색이다. 나는 철저히 행복해지기 위한 독서, 즉 즐기고 감상하고 감동하기 위한 독서를 한다. 남편이 골라준 책을 읽는다고 하면 ... 그건 재난이다. (그 반대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에서 좋았던 건 수 백권에 달하는 새로운 책들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일어원서, 영어원서, 심지어 만화책까지 수많은 책들의 제목을 접하고 몇몇 관심 가는 책들은 메모를 해두었다. 일어원서 고를 때도 참고가 될 것 같다. 하지만 국내 미번역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벽이 높은 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작가인 두 사람답게 편안한 문체로 써내려간 글이지만 재기발랄하고 흐르는 물같이 자연스러운 글들이어서 읽는 것이 재미있었다. 책에 관한 서술보다는 오히려 두 사람의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한 각자의 관점과 의견이 더 재미있었다. 너무 모르는 책들이 많아서 책에 대한 담론 자체는 '그런가 보다.'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받는 돈도 많지만 나가는 돈도 많다.
그것이 미국 이노베이션 도시의 생활이 아닐까?
미국에서는 사는 곳에 따라
계급의식도 다르고
평균 수명조차 크게 차이난다.
평균적인 삶의 차이가 그다지 없는
일본이 중류층에게는 오히려 편할지도 모르겠다.(91쪽)

괴담도 그렇지만 이야기와 글은
아무래도 다르다.
들을 때는 등골이 얼어붙을 정도로
무서운 이야기라도
들은 그대로 글로 옮겨보면
전혀 무섭지 않은 경우가 있다.
체험을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과
문장으로 쓰는 것.
둘 다 어렵고 각기 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126쪽)

책을 읽으며 뇌리를 스치는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는 면에서 독서 에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옥신각신, 주거니받거니 말장난도 재미없진 않았다. 그러나 이 부부에 대한 애정은커녕 어떤 책을 쓴 누구인지조차 정보가 없는 독자로서는 독자에게 발신하는 글에 대한 진지함이 결여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원래 웹진에 정기적으로 올리는 포스팅 같은 것이었으므로 매체의 특성상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컴퓨터 화면으로 매주 이런 글을 봤으면 더 흥미로웠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혼 안 하시고 잘 사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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