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열걸 1
미야기 아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표지의 남다른 패션 감각을 가진 세련된 여성이 연필과 원고지 들고 있는 모습이 모든 걸 말해 주는 것 같다. 이렇게 멋진 여성이 교열 보며 능력도 발휘하고, 돌직구도 서슴없이 내뱉고, 탐정같이 사건 해결도 해 주고, 사랑도 한다는 것.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읽고 프라다 입는 악마들이 가득한 패션 잡지 에디터가 되기 위해 경범사에 입사하였지만, 얼굴 없는 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교열부에 배치된 고노 에쓰코.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으면 그토록 원하던 칸막이 저 너머의 패션 잡지부로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투지를 불태운다.

저렴한 편의점 도시락을 먹더라도 패션은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에쓰코의 지론. 겉모습에만 신경 쓰는 허영 덩어리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업무 능력은 그야말로 부러울 정도로 탁월하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기억력과 앞뒤를 읽어내는 뛰어난 이해력, 그리고 사소한 것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철저함이 삼위일체가 되어 그녀는 뛰어나게 교열 작업을 해낸다. 교열 세계는 그것이 다가 아니어서 너무 꼼꼼하게 하다가 눈 밖에 나기도 했지만, 놀라운 능력이긴 하다.

출판에 막연한 동경이 있어서인지 <배를 엮다>, <중쇄를 찍자>, <싸우다 서점 걸> 등 출판사 및 서점과 관련된 드라마나 책을 정말 좋아한다. 교열을 다루는 건 참 기가 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딱 눈에 보이는 동적인 장면보다는 문장과 씨름하는 정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에서는 교열 작업을 하며 의문을 갖게 되는 앞뒤가 안 맞는 문장들을 통해 작가의 비밀을 파고들기도 하고, 흡사 미스터리 소설처럼 문장 속에 나오는 단서들을 가지고 실종된 작가의 부인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 놀라운 일을 고노 에쓰코가 한다는 것.

버릇처럼 틀린 한자를 찾아내는 모습을 보고 큭 하며 웃었다. 나의 버릇이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생 때 초등학생용으로 나온 셰익스피어 작품집 같은 걸 보면서 맘에 안 드는 표현이나 틀린 맞춤법은 책에다가 줄 찍찍 긋고 고쳐가면 읽었던 사람이다. 중학교 때 고전문학을 읽으며 서서히 독서에 흥미를 잃어가고 글이나 문장과는 크게 관련 없이 살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 역시 책으로 회귀하였다. 태어난 곳으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그러나 문장에 대한 감각 따위 잃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에 그냥 읽었다. 번역이 이상한 것 같아, 정도만 감지했다.

4년 전부터 프리랜서로 어학 동영상 강좌를 검수하는 일을 하면서부터 다시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 자체가 영어 및 우리말의 모든 오류를 잡아내야 하므로 내가 아는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공부를 해나가야 했다. 맞춤법 검사기를 끼고 살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를 뒤지고 그래도 안 되면 국립국어원에 카톡을 뻔질나게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것들이 나는 즐거웠다. 언어 속에 숨어 있는 특이한 조개 껍데기를 찾는 것이 너무나 즐거운 것이다. 일할 때도 해야 할 일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 즉, 굳이 안 해도 되는 것들까지 내 맘에 들게 싹 고쳐서 보냈었다. 그랬더니 관련 일까지 의뢰가 들어왔다. 즉, 교정/교열하는 일과 번역문을 검수하는 일이다. 원문과 번역문 대조하여 번역이 바르게 되었나부터 해서 번역문의 표현까지 교열하는 일이다. 정답도 없고 노가다에 상응하는 일이지만 나는 즐거운데 어찌하랴. 돈을 너무 쪼끔 준다는 게 함정이지만, 이게 다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잔뼈를 굵게 하는 통로가 되니 즐기며 하는 걸로! 끝도 없이 공부해 갈 수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나도 비록 집에서 머리카락 뜯으며 컴퓨터 앞에 놓고 고민을 하더라도 에쓰코처럼 스타일 멋지게 하고 일을 할까 보다. 한때는 '클래식해 보이는데 어딘가 꼭 하나씩 포인트가 있다'라는 말을 들었었다. 무지하게 특이한 코르사주라든가, 평범한 H라인 치마 뒤에 리본을 하나 묶는다든가... 그게 내가 추구하는 취향이었다. 그걸 콕 집어내 준 같은 부서 선배 언니가 갑자기 그리워지네. 지금은 '취향'이라는 것 자체가 '부재'이다.

그나저나 에쓰코가 시쳇말로 '썸'을 타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되려나 궁금하다. 결국, 2, 3권 사게 되려나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