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뜨겁게
배지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재미있는 한국소설을 읽었다. 다른 소설이 재미없다는 것이 아니라 국내 도서는 많이 읽지 않고 읽을 때는 보통 번역서를 많이 읽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번역이라도 번역투에서 자유롭기는 참 힘든 것이라 번역본을 읽을 때 긴장을 하는데, 자연스럽게 강물 흐르듯 유려한 우리말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깨에서 힘을 빼고 내용 자체에 몰입해도 되는 자유를 느끼게 해 줌을 간만에 느낀다.

제이(J)라는 주인공은 요즘 세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20대 비정규직 여성이다. (본문을 읽을 때는 이름이 '윤제이'인 줄 알았는데, 저자의 후기에서 J라고 쓰신 것을 보니 이니셜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해방 이후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라는 20대에,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게다가 여성이다. 제이라는 이니셜도 요즘 어린아이들에게야 많이 없는 이름이겠지만 지영, 지은, 지혜, 지애, 지연 등으로 대변되는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가진 보통 여자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많은 20대 여성들이 겪을 법한 성장통을 몸으로 부대끼며 치열하게 겪어내는 이야기를 약간의 소설적 허구(UFO와 외계인, 그들과의 교신)를 곁들여 풀어내고 있다. 지극히 빈곤한 상상력을 소유한 독자인 나는 처음에는 UFO에 외계인, 그들과 교신하는 남자, 그들이 납치해 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난감하긴 했다.

그런데 제이와 제이의 가족과 회사 동료들이 보기에는 단지, 아줌마, 아저씨, 젊은 여자, 젊은 남자일지라도 각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화해해 나가는지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그래서 독특한 존재로서의 개별성이 중요한 것 같다.

제이는 29살이 되기까지 그럴 듯한 경력 없이 아직도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있다. 대단한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보통, 평균의 삶도 손에 넣기가 쉽지 않다. 제이의 엄마는 십여 년 전, 아빠의 중병 앞에서는 생활인으로서의 비정함을 서슴없이 내보이더니 노년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은 새로운 사랑을 시도하고 있다. 소위 '엄친아'로 제이의 자랑이었던 제이의 오빠는 소위 '애 딸린 이혼녀'와 소설 같은 순정의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하려고 한다. 사회의 잣대로 판단되어지는 것이 못내 싫은 제이도 그 사회의 잣대로 오빠의 신붓감을 재단하고 자른다. 모순투성이 보통 여자이다. 사람이 그런 것이지 않을까? 완벽하게 일관성 있고, 완벽하게 논리적이며 완벽하게 앞뒤가 맞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그녀에게 더욱 공감이 된다.

제이는 과거에 꽤나 명성 있던 잡지 <좋은 이웃>의 기자이다. 제이의 회사 사장은 명색이 출판인이면서 출판의 사명따위 안중에 없고 어떻게 권력의 하수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려볼까 생각하며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갑질의 원조이다. 예전의 명성의 흔적에 기대어 입사한 서울대 출신의 조 기자는 얼마 못 버티고 때려치고 나가고 나이도 같으면서 주민증 운운하며 언니 노릇하는 한 기자(보람 언니)는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처세술을 읊어대나 실상은 현재 급여로는 삶이 빠듯하여 주말에 투잡을 뛰고 있다. 그저 사람 좋고 무능한 손 부장은 존재감 없다.

​제이의 회사 옆 성인용품 가게 주인은 그야말로 색안경 끼고 보기에 좋은 존재이지만 제이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실은 좋은 이웃이다. 그리고 기사가 될까 하여 접근한 배명호 씨는 외계인이 납치하여 잃어버린 아내를 찾고 있는 사람이다. 행방불명된 제이의 아빠도 함께 찾아달라고 하며 제이가 접근했다. 주변에서 정신병자로 분류되는 사람이지만 제이는 묘한 편안함을 그에게서 느끼고 외계인의 단서를 함께 추적해 간다.

이 모든 사람들과 일련의 사건 속에서 제이는 봉인해 두고 있던 20대의 가슴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고 인정하며 과거로 흘려 보내는 작업을 한다. 이별을 정식으로 고해 주지 않고 말 그대로 산에 버리고 간 사람에 대한 상처로 사랑에 철벽을 쌓아왔으나 아픈 사랑도 과거로 보내고, 갑자기 말 없이 사라져버린 아빠에 대해서도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의 온기만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충전한다.

단순한 몇 마디의 말이 아닌, 공유했던 기억들, 미처 기억으로 남지 않았던 시간들. 그것들이 아주 길고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내게 들려주고 있었다.

이젠 내가 아빠에게 말하고 싶다. 내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어 고맙다고, 그런데 인사도 없이 갑자기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좋은 기억마저 잊으려 했던 나를 용서해달라고, 미안하다고.

지질하고 못나빠진 나의 20대를 향해서도. 짧은 순간이나마 사랑이 충만했던 순간에 대해 고맙다고. 사랑 때문에 헤어짐이 너무 힘들어서, 시랑의 시간마저 저주했던 순간에 대해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리고...... (p. 284)

​그리고, 또 성공과 처세에 대해 읊어주는 언니 노릇하는 보람 언니에게 이렇게 외친다.

"내가 언제 성공하고 싶다고 했어요? 누굴 이기겠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방법을 알려주는 건데요. 난 그냥 평범하게, 땅바닥에 발 딱 붙이고서 살고 싶을 뿐이라고요."(p. 251)

그럼으로써, 기존 사회로의 편입만이 생존의 유일한 끈인 것처럼 애를 쓰던 제이는 자신을 해방한다. 그리고 자유로워진다. 오빠의 결혼도, 그 상대인 '애 딸린 이혼녀'도 수용하게 된다. 그렇게 30대를 맞는다. 늘 훈수 두었던 보람 언니는 갑자기 닥친 질병으로 인해 입원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녀도 이제 진정한 20대다운 방황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난 말이야.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누가 알았냐고, 내가 이렇게 쓰러져버릴지. 모을 땐 그렇게 힘든 돈이 병원비로 나가는 건 순식간이더라고. 억울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계획대로 되지 않는 미래는 그냥 공포야. 더구나 난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주변에선 자꾸 '괜찮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거야. 누가 넘어졌다는 거야? 난 쉬고 싶지 않다고!" 그러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아니야, 실은 나 괜찮아. 지금은 심리적인 공황 상태인 거야. 미안해.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만 같아"라고 말했다.

 

괜찮다. 그녀도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면 된다. 20대이기 때문에 괜찮다.

 

나도 그랬는데... 충실히 살고자 노력했는데, 어쩌면 계획 없이는 못 사는 보람 언니같은 나였는데, 살다보니 나의 계획만이 다가 아니고 갑자기 닥친 위기도 꼭 새드엔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삶에서 체득하고 나니, 좀 더 부드러워 진다고 할까, 둥글어진다고 할까 그런 연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미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힘든 과거를 가진 배명호 씨도 치유를 얻었을까? 어찌 생각하면 뉴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호러 영화보다 더 호러스러운 현실을 보면 제정신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혈육보다도 더 좋은 이웃(제이가 일했던 잡지 이름이기도 한)들이 있어 공허한 마음 보듬고 또 일어서서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20대를, 그리고 그 20대를 겪어 '어른'이라 불리게 된 사람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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