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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ㅣ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움과 신비로 가득 차 있다.·······삶은 경외로 가득 차 있다.
삶의 지혜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것을 덜 익숙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며, 또한 덜 익숙한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노력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을 통해 인간에게 말을 거는 신은 우리의 양심에 호소한다. 그 목소리는 바로 우리의 심연에 숨어 있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다.(386쪽)
성서, 특히 구약성서의 매혹 가운데 하나는 등장인물의 실수와 실패는 물론 편집자의 실수와 실패까지 고스란히 보존한 채 최종 텍스트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숭고의 길에서 빚어지는 인간 군상의 역동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매끈하고 고답적인 교훈이나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관념만의 내러티브가 지닐 수 없는 진한 냄새와 끈적이는 촉감을 잘 전해줍니다.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며 읽는 책이 결코 아닙니다.
<욥기>는 그런 면에서 백미로 꼽힐만합니다. 무엇보다 배철현이 지적한 ‘편집자의 어설픈 실수’가 트인 독자의 사유공간을 넉넉하게 제공해줍니다. 물론 막힌 독자가 대다수여서 장구한 세월 동안 욥의 심연은 찰방거리는 냇물로 ‘해결’되어왔습니다. 욥이 제기한 문제는 통속한 기독교 너머에서 ‘해소’됩니다. 신을 사유함으로써 장엄을 복원하는 것은 말글 밖에 있는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인간이 곡진하게 경험할 때뿐입니다.
말글이 끊어진다는 것은 앎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앎이 끊어진다는 것은 그렇고 아님,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고 아님,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도덕의 경지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고 또 그럼, 맞고 또 맞음, 옳고 또 옳음이 서로 어긋나는 진실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어긋남이 경이, 신비, 경외를 불러일으킵니다. 경이, 신비, 경외 앞에 겸허하게 무릎 꿇을 때 욥의 심연이 열립니다.
서구 사상사에서 신정론神正論 논쟁이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제로 남는 것은 형식논리의 한계 때문입니다. 하나의 명제가 참이면 그 모순 명제는 거짓이라는 ‘어설픈’ 진리 인식으로는 이 문제를 도저히 풀 수 없습니다. 깨닫기 이전 욥의 생각이 바로 이 덫에 걸려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없으니 나를 이리 만든 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논리였으니 말입니다. 정반대 입장이긴 해도 그를 논박한 친구들 역시 동일한 수준이었습니다.
우리사회의 지배집단이 걸린 덫은 본질 상 악마적인 것입니다. 욥은 옳아서 옳다 한 것이지만 저들은 옳지 않은데도 옳다 하니 말입니다. 박정희가 옳으므로 반-박정희는 그르다는 확신을 가진 미치광이 한 무리가 온 촛불시민을 빨갱이로 몰아가며 강도질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저들을 응징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여 다시는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트인 시민 각자가 자신의 심연에서 울리는 신의 목소리에 결곡히 응답해야 합니다.
“내가 공화국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