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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슨살인사건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67
S.S. 반 다인 지음, 정광섭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평점 :
에드거 앨런 포가 최초의 추리소설을 쓴 이후로 탐정의 대명사인 셜록 홈즈의 아버지 코넌 도일이
등장하면서 추리소설의 주도권이 영국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미국 추리소설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스타작가가 바로 S. S. 반다인이다.
기존에 출간된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분석하고 각종 기법들을 마스터한 후
독자들과의 지적게임이라는 본격 추리소설의 토대를 완성시킨 것은 그의 큰 공적이다.
반다인에 뒤를 이어 등장한 엘러리 퀸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추리문학사에서 그의 업적이 적지 않은데 국내에선 인기나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기대에 못 미친다.
나도 그의 작품 중에 읽은 게 '그린 살인사건'밖에 없으니 뭐라 말할 입장은 못 되는데
반다인의 데뷔작인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다.
앨빈 벤슨이란 남자가 자택에서 권총으로 살해된 사건을 다루는 이 작품은
파이로 번스라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명탐정의 화려한 등장을 알린다.
파이로 번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 그는 미술애호가에다 심리학의 조예가 깊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스타일이라서 실존 인물이라면 좀 재수없을 수도 있었다.
암튼 사건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매컴 지방검사의 의뢰로 사건에 처음부터 관여하는 파이로 번스는
매컴 검사가 유력한 용의자로 제시하는 사람들마다 전부 태클을 걸면서도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용의자가 등장함에도 말이다.
말로는 자신이 사건 현장을 딱 보는 순간 범인이 누군지 알았다고 떠벌리면서도
용의자들을 지목하고 있는 여러 증거들에 대해 논리적인 반박을 하지 않아
매컴 검사는 용의자들에 대한 의혹을 거둘 수도 없고 확신을 갖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사실 매컴 검사가 여러 증거에 바탕을 둔 논리적인 추리를 제시하는 반면에
파이로 번스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범인이 누군지를 접근해 완전히 예상을 벗어났다.
본격의 대가 엘러리 퀸의 롤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반다인이었기에
당연히 정통 본격물일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증거에 기한 추리를 반박을 하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새롭게 등장하는 용의자들을 가리키는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파이로 번스 나름의 추리에 따라 용의자들을 제외해 나간 결과 드러나는 범인의 정체는
범죄 현장에서의 피해자의 모습 등 여러 상황을 종합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범인의 성격을 신경질적이고, 흥분하기 쉬우며, 충동적이고 겁이 많은 사람은 제외하고
공격적이고 결단적인 정신, 정적이고 의지가 강하며 일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처리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며 심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파이로 번스의 방식은
확실히 다른 탐정들과는 차별화된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심리적인 접근 방식이 과연 현실에서 얼마나 범인을 잡는데 도움이 될 지는 좀 의문이 들긴
하지만 파이로 번스라는 독특한 탐정의 등장은 분명 추리소설 역사에 있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반다인의 데뷔작인 이 책은 '그린 살인사건'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진 못했지만 파이로 번스라는
괴짜 탐정과 그만의 사건해결방식으로 추리소설의 역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음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