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새로운 DNA, 창업 강옥래 신서 1
강옥래.강민구 지음 / ceomaker(씨이오메이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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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혁신은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여러분은 혁신으로 회사를 세워야 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한시라도 혁신을 게을리하면 그 회사는 괴사가 시작됩니다.

단언컨대, 지금 잘 나가는 어떤 회사도 혁신을 게을리하고 그 혁신이 타사와 비교하여 부족하면 도태될 것이며, 그 붕괴의 속도와 규모는 이전과 달리 빠르고 또 클 것입니다. 한시라도 혁신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혁신은 바로 자신, 자기 주변의 작은 것부터 시작됩니다.

-앞으로는 "자기의 의지에 따라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데 더욱 고민하십시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었으며, 왜(WHY) 창업을 해야 하고, 어떻게(HOW) 구상하고 기획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새롭고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 창업은 하나의 트렌드이자 문화가 되었다.

주변에는 이미 창업한 사람부터, 회사를 다니며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당장은 아니지만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년 후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DNA, 창업>이라는 책도 우리가 왜? 창업을 해야하고, 어떻게? 해야 창업을 잘 할 수 있을지 전문가의 입장에서 알려주고 조언해준다.

강옥래 저자는 삼상전자에 입사 후 신입 사원부터 임원 시절까지 해외시장 신규개척과 확대라는 도전을 해왔는데, 그런 그가 느낀 성공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창업과 스타트업에 성공하기 위한 비법들을 전수해준다.

그렇다면 성공을 부르는 창업자의 기본 덕목 4가지인 기획과 설계, 사람경영, 자금, 시스템과 함께 혁신에 대해 배워본다.

 

 

 

 

 

 

 

 

 

 

 

 

"혁신할 수 있느냐?"

 

-5개의 쌍기역이 부자의 요건이라고 한다. 끼, 끈, 꼴, 깡, 꿈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우리는 '깡'을 가지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이 혁신하는 것이다. 이 깡이 바로 도전 정신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끼',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꿈'을 도전 의식인 '깡'으로 구동시켜 완성하는 것이다. 이 도전 의식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요한 자산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자주 쓰는 부사가 무엇인지 혹시 알겠는가? 다름 아닌 '진지하고 절실하고 간절하게' 이다. 누구에게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면박을 받을 수 있다. 다들 열심히 잘하면 잘과 열심히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가 헷갈리게 된다. 진지하고 절실하게 간절해야만 파괴적 혁신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혁신 그 자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어떠한 혁신을 그리고 있는 줄도 모른다. 성과를 얻었을 때도 끊임없이 혁신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멈출 때 경중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또는 그 브랜드는 "혁신적인가?"하고 생각하기 전에 "혁신할 수 있느냐?"라고 물어보는 관점을 새롭게 제시해줬다.

우리가 혁신하면 흔히 떠올리는 애플이나 페이스북처럼 기존에 없던 새로운 플랫폼과 변화를 가져왔는지 혁신이라는 요소를 찾아내기 전에,

이미 혁신이라는 자질이, DNA가 있는지부터 묻고 찾아내야 한다.

혁신이 없다면 그건 도태와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DNA, 창업>에서는 '진지하고 절실하고 간절하게'를 내세운다.

이제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면접 준비를 하면서 '진지하고 절실하고 간절하게'의 중요성을 체득했었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이 진정성은 단순히 '열심히, 잘'하겠다는 사람과는 결이 다르다.

심지어 어떤 기사에서 읽었는데, 면접자의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하겠습니다'라는 멘트는 이제는 볼 수 없는 구시대의 자소서의 정석인 "자애로운 어머니와 엄격하신 아버지~"로 시작하는 그것과 마찬가지란다.

내가 왜 지원했고, 어떤 준비를 해왔고, 어떻게 성과를 낼 수 있으며, 어떤 인재로 자리매김할 것인지 논리력과 구체성을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시켜야 한다면, 창업과 혁신도 마찬가지로 내가 가진 무기를 '진지하고 절실하게 간절하게', 그리고 '구상하고 설계해서' 펼쳐내야 한다.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누구든 조직의 수장이 되거나 리더가 되면 내가 그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여 조직을 잘 못 이끄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훌륭한 리더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배울 것은 배우는 열린 자세와 정직이 필요하다. 어떻게 개인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잘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파트너가 있고 조직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배우면 된다. 그래서 우리 창업자의 학슴 능력은 필수적이다. 사업을 하면서도 우리는 계속 배워야 한다.

-배우는 방법 중에 아직 독서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바쁘더라도 틈을 내어 꾸준히 독서하고, 포럼, 세미나, 학회, 전시회 등도 기회가 닿는 대로 참가하여 트렌드, 신기술 업계 정보 등 타인 또는 다른 회사들과 교류하면서도 배우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좋다.

-그리고 실수하는 것을 두려아하지 마라. 누구나 실수는 한다. 때로는 실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수한 이후의 행동이 중요하다. 실수를 빨리 인정하고 그 실수의 원인을 분석하여 똑같은 실수가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적으로 보완하도록 한다. 그리고 또 다시 도전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의 실수를 기다리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들에게 우리가 자주 실수하여 약점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아니 잡아먹히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얼마 전 교육원에서 배운 것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사람은 배우는 것을 멈출 때 늙는다."

나는 늙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배우는 것을 멈추고 싶지는 않다.

만약 내가 정해진 수명을 살아가는 동안 더 온전히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배우고 또 배우는 방법이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리더 또는 멘토가 된다면 실무와 동떨어지거나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도움이 되고 곁에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실력뿐 아니라 인성도 곁들이면 정말 좋겠다.

전에 읽은 전준하 저자의 <불안과 불만사이>라는 책에서는 전문성과 전문가라는 척도에 대해 3가지 관점으로 살펴보라고 제시해주었다.

1. 전문성은 상대적이다.

2. 전문성의 핵심은 암기의 양이다.

3. 전문성은 전체를 알고 나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그 중 혁신과 함께 살펴볼 것은 2번째 요소인 암기, 즉 공부하는 양이다.

배움이 암기는 아니지만 암기는 배우고 공부하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해왔던 것을 패턴분석해서 반복하거나 "그거 내가 다 해봤어.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고 계속 계속 변화하는 리더나 기업가가 되고 싶다.

창업이 필수가 된 요즘, 자신이 깊이 깊이 좋아하고 몰입할 수 있는 그런 요소를 고민하고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포인트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DNA, 창업>에서 알려주는 성공의 요소를 이루어 맞추는 것이 또 다른 과제로 생각해봐야겠다.

*이 글은 씨이오메이커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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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우즈
린다 라 플란테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수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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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냥 집에 들어앉은 하찮은 여자들이 아니야. 우린 남편들이 뭘 했는지 알아. 왜 했는지도 알아.

... 해리는 우리가 혼자 남기를 원하지 않았고, 우리가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어. 이건 우리 몫이야."

 

 

 

<위도우즈> 책의 표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브리미널같기도 하고, 암호같기도 한 심볼들을 찾아낼 수 있다.

돈, 총, 무장강도, 다이아몬드, 그리고 미망인들...

<위도우즈>는 말 그대로 미망인들이 주인공이 되어 처절한 계획과 음모로 진실과 거짓속에서 투쟁하는 이야기다.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편의 드라마와 영화같이 펼쳐진다.

근데 이거 진짜 드라마화되고, 영화화되었다. (아니, 드라마가 원작이니 소설화되었다고 해야 맞는 말일까?)

범죄 드라마의 여왕, 린다 라 플란테의 출세작으로 1983년 영국 템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어 지금까지 회자되는 작품이다.

2018년에는 영화 <노예 12년>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스티브 매퀸' 감독이 동명 영화로 제작하였다니 더 유명세를 탔다.

그렇다면, 1983년 영드와 2018년 영화 이미지를 좀 찾아봤다.

> 2018년, 영화 <WIDOWS>

 

 

 

>1983년, 영드 <WIDOWS>

 

 

 

 

영드의 첫번째 이미지는 '문학수첩'의 공식 포스트에서 가져왔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1764202&memberNo=6309726&vType=VERTICAL

 

 

 

스틸컷이나 포스터만 봐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딱딱간다!

멋쁨 넘치는 4명의 위도우즈의 활약을 기대하면서 책을 편다.

일단 주요인물들이 있는데, 각자의 남편과 부인들(슬프지만 곧 미망인이 된다), 그리고 각종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이 있다.

해리 롤린스 - 테리 밀러 - 조 파이렐리

돌리 롤린스 - 셜리 밀러 - 린다 파이렐리

 

 

 

이렇게 혼인 관계되어 있고, 주축인 해리 롤린스와 경쟁구도인 '피셔 형제' (아니 피셔 & 토니 피셔),

아니 피셔의 이중 애인 '카를로스', 순진한 부하 '복서 데이비스', 이들을 쫓는 '레스닉 경위', 후반부로 갈수록 쫄깃해지는 추격자들 '빌 그렌트'와 해리의 사촌 '에디 롤린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스테리 '지미 넌'과 '트루디'까지 쫓고 쫓기고, 속이고 속이는 관계가 계속 된다.

드라마와 영화 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여주가 4명이다. 근데 남편은 3명..?

스포일러는 아니고 읽다보면 금방 나온다. 매력적인 4번째 인물인 '벨라'를 린다가 영입한다는 것을!

 

 

 

 

프롤로그

-1984년, 런던

-계획의 청사진은 완벽했다. 해리 롤린스는 완벽하지 않으면 실행에 옮기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는 고가의 미술품과 은제품, 보석을 전문적으로 취합하는 부유한 골동품 거래상이었고, 아내 돌리와는 근사한 커플이었다. 그러나 해리 롤린스에게는 다른 얼굴이 있었다. 범죄와 돈세탁에 탁월한 그는 부하들에게서는 깊은 존경과 충성심을 자아내는 반면, 적으로 만나면 냉혹하고 계산적이며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경찰은 그가 범죄에 깊이 발 담그고 있다고 의심했지만 해리 롤린스는 단 하루도 철창신세를 진 적이 없었다.

-무장한 세 멤버는 차량 속에 갇혀버렸고, 불길과 연기 탓에 아무도 운적석 문을 강제로 열 수 없었다. 누구도 그들에게 다가가거나 도울 수 없었고, 연료 탱크가 결국 폭발하면서 밴의 나머지를 폭파시키던 순간의 비명만이 처절하게 들렸다.

무시무시한 혼돈이 이어지는 동안 아무도 빵 트럭의 운전자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초 동안 지켜본 다음 빵 트럭으로 도로 달려가 터널을 빠져나왔다.

-포드 에스코트 승합차의 운전자였던 해리 롤린스는 젤라틴 폭약 폭발의 총격을 온전히 떠 안았다. ... 불에 탄 왼쪽 손목에 채워진 롤렉스 금시계에는, 이제는 희미해진 "해리에게. 사랑을 담아, 돌리. 62/12/2"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경찰은 첫 시신 덕에 두 번째 시신이 조 파이렐리인 것으로 추정했으나 얼굴이 너무 심하게 타버려 100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 전과 3범인 테리 밀러는 불에 탄 왼손에 남은 엄지 일부와 검지의 지문으로 신원을 파악했다.

셋은 모두 기혼이었고, 세 아내는 이제 모두 미망인이 되었다.

프롤로그부터 아주 중요하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무장강도 4인조는 결국 폭발사고와 함께 실패하고 세 부인은 모두 미망인이 되었다.

리더인 '해리 롤린스'는 와이프 '돌리 롤린스'에게 중요한 연락책과 이력이 적힌 수첩을 남겨놓는데 이를 계기로 돌리는 이 무장강도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기 위해 계획을 차근차근 세우고 조력자를 영입한다.

그건 바로... 동병상련, 미망인들!

처음에는 울고 불고 사별의 아픈 시간을 보내며 지내다가 돌리의 부름에 사우나에서 셋이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서로의 고통을 나누며 다시 눈물로 서로를 토닥인다. 이 부분이 그렇게 짠할수가 없다... 힘내요, 위도우즈!

그렇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언제 그랬냐는듯이 아드레날린 솟구치는 강인한 모습으로 재탄생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바뀌는 심경과 변화들이 또 재밌다.

 

 

 

 

 

-벨라가 어디선가 번개처럼 나타나 린다를 돌리로부터 떼어놓으며 세차가 귀싸대기를 날렸다. 이어진 침목 속에서 돌리와 벨라는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벨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둘이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려면 그렇게 하든가. 하지만 나 때문에 싸우진 마셔." 벨라의 굵은 목소리를 침착하고 자제력이 있었으며, 그녀의 두 눈은 조용한 경고로 이글거렸다. "이봐요, 롤린스 부인. 린다가 한 말, 나 다 잊었어요.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커피 잘 마셨어요."

-돌리와 벨라는 서로를 응시했지만, 이번에는 왕좌를 차지하려는 두 알파걸 같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의 눈에는 존중이 있었다.

... "좋아, 벨라." 돌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돌리야."

드디어 제 4의 멤버, 벨라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조금은 입이 가벼운 린다의 친구인데 허락도 없이 데려와서 리더인 돌리는 매우 격분했다.

그 순간 포스있고 정중하게 벨라가 인사를 하고 떠나려하자 돌리는 좋은 팀원이 될 것을 직감하고 벨라를 더이상 함부로 지칭하지 않고 정식으로 이름과 함께 인사한다.

사람의 이름이나 별명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지가 고스란히 묻어 있달까.

두 사람의 팽팽한 기싸움 끝에 서로의 이름과 존재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진짜 멋있다.

물론 무장강도 계획이라는 필요에 의해서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영국드라마가 나온 1983년이라는, 무려 36년 전 시대에 여자 주인공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가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그 중 한명은 멋진 흑인이라는 것, 그리고 '후장 보이'라고 놀리긴 하나 게이가 서슴없이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 센세이션이다.

하나의 작품으로 짜임새 있는 플롯과 시대상을 반영한다니 여러모로 멋진 소설이나 드라마이자 영화이다.

 

 

 

 

 

 

-벨라의 팔을 붙드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돌리의 긴장한 모습에 놀란 벨라가 그녀의 손을 잡고 빙긋 웃었다, "당신이 우릴 이끄는 한 실패는 없어요."

-돌리는 여전히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셜리는 겁을 내겠지만 의지가 있으니 잘 해낼 거야. 벨라, 셜리를 격려해줘. 계속 강인할 수 있도록. 무슨 말인지 알지?"

-돌리가 가늘게 눈을 떴다. "내 걱정은 마. 실망시키지 않을게." 그녀가 돌아보니 셜리와 린다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리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때가 왔어." 그녀는 모두에게 말했다. "모든 게 준비됐어. 너희 모두가 준비됐어. 쉽지 않겠지만 거사 일 전에 좀 쉬어두도록 해." 그녀는 혹시 울컥할까봐 거의 문 밖으로 나설 떄까지 작별 인사를 아껴두었다. "너희가 정말 자랑스러워."

돌리는 돌아보지 않고 울프를 불러 떠났다.

돌리가 나가는 못브을 지켜본 세 여자는 지금이 강도 전까지 서로를 보는 마지막 만남임을 알았다. 셋만 남자, 그들은 다 같이 얼싸안았다. 그저 서로를 안을 뿐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사를 앞 둔 마지막 날, 위도우즈 4명이 연대하는 장면이다.

그토록 강인했던 돌리도 과연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남편 해리 롤린스가 실패한 그 계획을 성공할 수 있을지 불안해한다.

가장 마음이 여렸지만 성장도로 따지면 가장 높이 점프한 셜리, 돌리에게 틱틱 반격하며 신뢰에 의문을 갖지만 자기 할 일은 묵묵히 해내는 린다, 그리고 잃을 게 없는 강인한 전사 벨라까지 4명의 미망인들은 서로 의지를 다지며 위로와 응원을 건낸다.

때론 침묵이 가장 많은 말을 담고 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끌어 안고 있지만 이 순간 만큼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이 세상에 남겨진 가장 강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마냥 순탄하게 끝나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과연 4명의 위도우즈는 치밀한 계획을 성공해서 100만 파운드를 손에 쥐고 행복하게 새출발하며 살 수 있을지?

그리고 잠시 잊고 있었으나 남편들이 계획에서 탈출한 생존자 빵 트럭 운전사는 어디로 갔을지?

서로 속고 속이고 도망치고 살아남는 남은 이야기가 끝에 숨어 있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으면 원작 소설을 먼저 읽어보는 편이다.

이야기에 생략되거나 추가된 부분이 있는지, 결말은 같은지, 기억에 남는 장면을 어떻게 비주얼화하는지 상상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위도우즈>도 500쪽 분량의 영미 장편 소설인데 하루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다.

이제 영드와 영화까지 섭렵하러 가봐야겠다.

그리고 여자 작가가 여자 주인공으로 쓴 책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이 참 좋다.

무지막지하게 주먹이나 총, 마약을 가지고 싸우는 기성 백인 남자들의 어떤 작품들과 달리, 논리적으로 일을 헤쳐나가고 꼭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하는 정의로운(?) 폭력과 방어, 마음을 움직이는 대화에 솔직한 감정표현까지.

비록 강도는 강도지만 미워할 수 없고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돌리, 린다, 셸리, 벨라.

이 4명의 위도우즈가 꼭 성공하길 바라며,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이 글은 문학수첩으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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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의 재발견 - 나를 더 성장시키는 스트레스의 힘
나카타니 아키히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북아지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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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는 좋지 않다"는 생각이 스트레스가 된다.

스트레스를 지녀야 더 즐겁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

-나카타니 아키히로

 

 

<스트레스의 재발견>은 하쿠호도 광고기획자, 작가, 연극배우, 연출가, 강연자, 라디오 DJ 등 다양한 분야와 직업을 섭렵한 일본 베스트셀러 저자 '나카타니 하키히로'의 스트레스와 삶에 대한 조언이 가득한 책이다.

<스트레스의 재발견>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스릴 것인지, 그리고 내 편으로 만들어서 성장할 수 있는 63가지를 알려준다.

-이 책은 세 사람을 위해 썼다.

장시간 노동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

상대의 스트레스를 없애주고 싶은 사람

앞 단에 이 책을 선사하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아닐까?

책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는 스트레스도 종류와 유형이 있다는 거다.

플러스 스트레스와 마이너스 스트레스,

자발적 스트레스와 수동적 스트레스,

일류와 이류.

이미 발생한 스트레스와 상황은 어찌할 수 없으나, 이를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행동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건 결국 나다,

일류와 이류,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를 넘나드는 이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에서 NO 스트레스!...가 아니라, YES 스트레스를 외치려면 어찌해야할까.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라"

 

 

-일의 결과를 생각하느냐, 일의 과정을 고민하느냐

-스트레스는 그 시작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일류와 이류로 나뉠 수 있다.

... 일의 '의미'와 '과정'을 생각하는 사람의 스트레스는 플러스로 작용한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높은 성장의 계단에 올라가 있게 된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사람도,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람도, 일하는 건 동일하다. 하지만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남이 보기에도...

-같은 상황에서 결과에 목을 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이 끝날 때까지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할 때 더 고려해야 할 건 과정이다. 과정에 주목하면 일 집중도가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떠오르게 된다.

-중요한 건 결과 예측이 아닌, 그 결과를 예측하는 과정이다.

너무나 잘하려는 마음이 앞서면 오히려 더 안된다.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초연히 내려놓을 때 마음도 편안하고 더 잘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역시 실천하는 건 또다른 문제.

<스트레스의 재발견>에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라는 의미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열심히 했을 때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떳떳한 그 자신감은 거져얻을 수도 없고 누가 줄 수도 없다.

그리고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다는 어쩌면 뻔한 클리셰가 실제 업무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된다.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안좋으면?

그럼 어쩔꺼야, 이번에 배운 것을 다음 번에 잘 써먹으면 되지. 하하하.

이렇게 마음 먹었는데 되게 잘 나왔다 결과가.

근데 만약에 이렇게 했을 때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럼 이 상황을 타계할 묘안을 고민해보고 더 성장하는 길을 찾아서 뚫고 나가면 되겠지.

갑자기 이렇게 생각의 생각의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니까 거창하고 어려웠던 일들이 간단하게 느껴진다.

스트레스도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좋은 쪽으로 몰고 가야겠다.

 

 

 

 

 

"점차 잘하게 되는 과정을 즐겨라"

 

-조금씩 착실하게

-모든 일을 한꺼번에 잘하는 사람은 없다. 당신의 능력 좋은 상사도 어설펐던 신입 시절을 거쳐 지금 그 자리에 올랐다.

높이 올라가고 싶다고 해서 한꺼번에 두세 계단을 올라갈 수는 없다. ... 조금 가다 그칠 게 아니라면, 계단 높이 올라가고 싶다면, 조금씩 착실하게 성장하는 게 좋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게 좋다.

-조금씩 착실하게 성장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더구나 조금씩 성장할수록 작은 성공의 경험을 더 자주 실감할 수 있어서 그 기쁨의 맛으로 다음 단계로 갈 힘이 생긴다. 작은 성공을 맛봄으로써 큰 성공에 닿을 수 있다.

이 말도 깊이 공감한다.

나는 이걸 '성공의 경험을 쌓는다'라고 표현하는데, 작든 크든 성공의 경험을 차곡 차곡 많이 쌓은 사람만이 더 성장하고 폭발적인 내공을 지닐 수 있다는 거다.

점차 잘하게 된다는 건 확실하게 믿을 수 있으나, 도대체 그게 언제인지 인내심에 다다를 때가 있다.

그때 느끼는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마이너스 스트레스'로 작용해서 결국 나만 힘들게 될 뿐이지만 말이다.

조금씩, 한 계단씩, 착실하고 견고하게 나가는 스텝 바이 스텝은 나를 더 고수로 만들어줄 것이다.

 

 

 

 

 

 

"계속하라, 끈기를 가져라"

 

 

"계속하라, 끈기를 가져라"

-담담하게 계속 이어가는 힘

-무언가를 배울 때는 지나치게 힘을 쏟지 않고 담담하게 계속하는 편이 좋다. 지나친 의욕과 열정은 어느 순간 시들해지기 쉽다. 계속 나아갈 동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페이스로 장시간에 걸쳐 계속할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무엇인가를 한 번이라도 오래 한 적이 있는 사람은 계속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에 비해 지금까지 한 번도 오래 계속한 적이 없는 사람은 처음에는 의욕을 불태우다가 단숨에 기운이 빠져 버린다. 멘탈이 심하게 흔들리고,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게 된다.

무언가를 배울 때는 지나치게 의욕을 불태우지 말고 담담하게 계속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원하는 곳에 도착한 당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끈기는 참는 게 아니다. 물 흐르듯 담담하게 계속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힘이 나는 말 중 '그릿'이라는 게 있다.

그릿(GRIT)은 IQ, 재능, 환경을 뛰어넘는 그 무엇인데 흔히 끈기라고 말하는 열정이다.

그릿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힘, 역경과 실패 앞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견디는 근력과도 같은 것인데 내가 주어진 환경이나 유전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과 마인드셋을 줘서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긍지를 준다.

그리고 그 끈기는 참는게 아니고 그저 묵묵히 해내가는 것이다.

나는 인생이란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는데 그저 살아가는 것 안에는 초연함의 힘이 있다.

흔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존버는 승리한다!"라는 게 있는데, 비속어긴 하나, 존X 버티면 승리한다는 말이다! ㅎㅎ

또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미생에서 나온 말이던가? "강한 놈이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놈이 강한 것이다"라는 말.

나는 참거나 버티지 않고 잘 살아내서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싶다.

 

한 떄 김연아의 연습법으로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는 짤방이 있다.

바로 이 것!

MBC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인데, "무슨 생각하면서 (스트레칭을) 하세요?" 라는 질문에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거지"라는 일류의 답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되더라도 어느 순간 정상에 오를 순간을 생각하면서 물 흐르듯이 해쳐나가야겠다.

<스트레스의 재발견>에서 계속 말하는 중심은 스트레스를 피하지 말고 즐겁게 맞이하자는 거다.

그게 우리가 스트레스를 좋은 쪽으로, 내 편으로 만드는 길이고 우리가 성장하는 길이고 인생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길이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하는 스트레스라는 동반자를 그렇게 껴안고 가야겠다.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북아지트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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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순간 - 삶의 의미를 되찾는 10가지 생각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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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가"

<철학이 필요한 순간>은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덴마크 베스트셀러 저자의 통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스벤 브링크만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서 생각해보니까 전작 <스탠드펌>을 쓴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의 분야를 크게 가리지 않아서 자기계발서도 읽어보는 편인데 다른 책들을 읽어보면 내가 좋아하는 소설 작가나 인문학자 중에서 자기계발서를 경멸하는 사람도 꽤 많다.

자기계발서는 한번씩 마음가짐을 다잡거나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읽다보면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데 뻔하디 뻔한 말, 또는 다른 자기계발서나 통계, 실험의 부분을 그대로 옮겨온 책들도 많다는 게 흠이다.

<스탠드펌>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 이라는 책과 함께 유명한 '안티-자기계발서' 책인데 일부러 자기계발서를 풍자해 7가지 꼭지로 목차를 짠 것이 정말 기발했다.

이렇게 넘치고 넘치는 자기계발의 홍수 속에서 스벤 브링크만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삶'이라는 부제로 <스탠드펌>을 내서 되게 통쾌했다.

스벤 브링크만의 신작, <철학이 필요한 순간>도 본인만의 줏대와 잣대가 느껴져서 생각할 거리를 마구 던져주는 책이다.

영제 'Standpoints'라는 말처럼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굳건하고 단단히 서 있을 관점들을 제시해주는데 책이 던지는 10가지 의미를 천천히 따라가보면 정말 재밌다.

목차와 함께 시작하는 글에 있는 작가의 생각들을 조합해보았다.

목차 X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10가지 생각'

1강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 우리에게 있는가_아리스토텔레스의 선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

2강 쓸모없기 때문에 쓸모가 있는 목적의 왕국_칸트의 존엄성

-'존엄성은 가격으로 따질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

3강 지키지 못한 것들에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_니체의 약속

-'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다'

4강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_키르케고르의 자기

-'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

5강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뢰를 쌓는 방법_아렌트의 진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할 수 있다'

6강 타인에 대한 나의 영향력을 점검하라_로이스트루프 책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의 삶 무언가를 손에 쥐는 일이다'

7강 내가 아닌 존재에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가_머독의 사랑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

8강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것_데리다의 용서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9강 어떤 순간에도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가_카뮈의 자유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

10강 내 삶의 노예가 되지 않는 방법_몽테뉴의 죽음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

 

 

 

 

-어쩌면 의미는 삶의 외부, 이를테면 물리학자의 관점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닐까요? 우리가 시를 감상할 때 시집의 무게를 재거나 잉크의 성분을 분석하지는 않으니까요. 이처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바깥에서 삶을 관찰하기보다는 오히려 삶 속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삶의 의미가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얻기 위핸 도구적인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과 그 자체를 위해 몰두하는 활동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우디 앨런처럼 천문학적으로 먼 거리에서 삶을 관찰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제가 이 강의를 통해 다루려는 '태도 또는 관점 standpoints' 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을 만한 단단한 토대를 제공하지요.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기본적인 전제 가운데 하나는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을 포함해서 많은 학문은 바로 그 쓸모없음 덕택에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서는 쓸모만 따져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깊은 의미에서, 더 실존적인 의미에서 쓸모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과 놀이, 사랑, 윤리 같은 가치는 쓸모없을 때, 그러니까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쓰이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일 때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

이 책의 43쪽까지는 책을 시작하는 서문으로 할당되어 있는데 다른 책에 비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만큼 중요하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다 들어있달까!

주로 나오는 말은 목적, 수단, 도구, 쓸모... 우리가 흔히 따지는 가성비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관점들에 경종을 울리며 우리는 쓸모없음 덕택에 쓸모가 생기는 다소 역설적이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다.

요즘 핫한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라는 배스트셀러에서도 바로 그 점들을 언급해주고 있다.

우리가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역사'가 우리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무엇보다 쓸모있는 것들이 되어주고, 삶이라는 문제에 있어 완벽한 해설서가 되어준다는 통찰이다.

알기 쉬운 예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김부석의 <삼국사기>의 이야기 중 민간 설화나 쓸모없다고 빠져버린 바로 그 이야기들을 묶어서 이렇게 오래토록 전해오는 유의미한 자료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퇴근 후 가게 되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게 되었는데 가장 많이 들은 소리는 "그거 왜 해?", "그거 한다고 바로 업무에 써먹을 수도 없어"이다. (사실 이것보단 더 장황하게 들었지만 요지는 그랬다.)

참 어이가 없어서 말문을 잃었으나 나름 유하게 답을 하고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때 "왜 당신은 철학을 왜 공부하나요? 인문은 왜 공부하죠?" 라고 역질문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다!

나만 해도 거창하지 않은 이 공부를 가지고 주변에서 난리인데 이런 '쓸모없음'에 온 생애를 걸고 사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구나 라고 웃어넘기기엔 하기엔 내가 아직 편협한가보다.

그래서 저자가 계속 팩트폭력하는 것도 바로 이 사실이다.

그 어떤 학문이나 관점도 철학보다 쓸모없지 않고,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라는 것.

우리는 너무 쉽게 지나쳐버리거나 남용했던 '철학'이라는 말을 다시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보고 쪼개보고 들여다봐야한다.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것이 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도구화에 저항하는 최전선에서 우리를 지키고 이끌어줍니다. 쓸모없는 것이란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것들이지요.

우리는 그런 쓸모없는 활동에 시간을 쓰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요즘처럼 도구화된 시대에서는 그런 쓸모없는 활동이야말로 삶의 진짜 의미를 되찾아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쓸모없는 일을 하세요. 쓸모없음이야말로 최고의 선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하는 연습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건 별 뜻 없이 중얼대는 말이 아닙니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주관이나 취향도 아니고, 도구화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도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말이니까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상에는 그 자체로 목적이면서 선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읨를 되새길 수 있고, 선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우리 삶을 이끄는 관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빙고! 내가 그동안 생각하고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거였다.

왜 사람들은 당장 눈 앞에 이익만 따지면서 근시안적으로 살까, 남을 헤칠까. 그렇게 살아서 그러면 더 행복해지고 넉넉해졌을까?

하지만 지혜와 덕이 부족해서 이렇게 멋들어진 말을 하지 못했는데 내가 살면서 느낀 것들이 녹아있었다.

만약 이렇게 철학하면서 살 수 있다면 나는 쓸모를 따지는 사람보다 불행하더라도 더 행복할 것 같다.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

-아이리스 머독

 

 

-사르트르가 삶의 관점을 선택하거나 창조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머독은 관점이 선택될 때보다 주어질 때가 많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주어진 것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일이지요. 머독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 주변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충분히 관심을 가진다면, 별다른 문제없이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러 관점을 통해 무슨 일이 옳은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머독은 우리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존주의가 말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따지고 선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에, 그리고 주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관점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라는 문장 뒤에는 이런 구절이 이어집니다. "예술과 도덕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발견이다."

-머독은 사랑을 말할 때 느낌이 아닌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사랑은 특정하 감정이나 느낌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그렇게만 설명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가볍고 가변적인 것이 됩니다. 사랑을 그렇게 정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자기애를 넘어 지속적인 관심을 다른 이에게 꾸준히 쏟는 것으로 여겨야만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머독의 말에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발견을 배울 수 있었다.

나 살기 바쁜 이 세상에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 자체가 사랑이라고 정의했고, 순간 순간의 발견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쏟는 관심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쏟는 관심이자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곱씹을수록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말들의 무게를 그 자체로 목적이되는 사랑, 용서, 관용, 선, 자유, 죽음... 과 같은 수많은 철학들을 연관해서 살고 싶다.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

-미셸 드 몽테뉴

-"철학은 본질적으로 죽음을 위한 준비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의 공부라는 게 죽음에 대한 탐구일 뿐이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것 같네." 또한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올바르게 철학하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일을 위해 수련 중이고, 따라서 죽음을 누구보다 덜 두려워한다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설과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죽음을 위한 수련이며, 철학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죽음을 덜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라 말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한 사업가가 <뉴옥타임스>에 쓴 <더 행복해지려면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라>라는 글에서 더 분명한 사례를 마주했습니다. 저라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네요. "아니예요. 우리가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요.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죽음을 생각해서 행복해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요."

이번에 계속되는 의미와 쓸모와 도구에 관한 이야기.

사람은 왜 태어나고, 왜 죽는걸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걸까.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을 던지다보면 결국 삶이란 죽음을 위한 수련이며, 죽음을 위한 연습이고, 더 잘 죽기 위한 거라는 믿음이 확실해진다.

가끔 '메멘토모리', 즉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우리나라에서 보통 번역되는 이 말을 쓸모의 관점에서 끼워맞추는 사람들에게 또 한번 뼈 때리는 말을 날린다.

그래요. 아니예요. 죽음은 그것이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에요.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도구화란 목적보다 수단을 중시함으로써 수단이 목적으로 변질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그런 현상에 맞서 제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활동을 삶의 지침이자 토대가 될 관점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활동은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면 쓸모없는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무척 쓸모 있는 형태의 쓸모없음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통해 철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생각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바로 철학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도구화에 맞서는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여기서 제가 철학을 도구화화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저는 가치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철학적 삶은 의미를 향한 수단인 동시에 그 자체로 목적이지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선으로 여긴 행복을 묘사할 때 했던 말과 같습니다.

결국 <철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철학을 통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삶을 살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다.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거나 바꿀 수 없는 가치들을 요즘 팽배하는 수단이나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에 관해 쓸모없음의 역설을 가르쳐준다.

누굴 만나고 어떤 것을 배우고 이걸 하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따지기 전에 내 안의 질문들이 숙성되어 자신만의 관점으로 살아갈 힘을 준다.

누구나 철학은 필요하다.

근데 그 철학이 왜 필요하고 의미가 있는지 이 책에서 계속 계속 던져주는 철학적 물음들을 따라가면서 쓸모와 무쓸모에 관해 생각해봐도 좋겠다.

말하듯이 흘러가면서 중요한 의미들을 얘기해주는 강연식의 책이 참 좋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 <담론>, 그리고 박웅현 CD의 <여덟 단어>, <책은 도끼다> 처럼 이 책도 내가 좋아하는 리스트에 꼭 넣어야겠다.

*이 글은 다산초당으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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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좀 빼고 삽시다 -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명진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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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좀 빼고 삽시다>의 저자는 무려 50년 간 수행하고 남들보다 많은 경험을 하신 명진 스님이다.

영성 지능에 관심이 많아서 특정 종교나 분야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수련하신 분들의 책은 꼭 읽는 편인데,

이 <힘 좀 빼고 삽시다> 책은 그동안 명진 스님이 겪어오신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인생, 그리고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기분이다.

근데 어투는 어찌나 거침없고 빵빵터지시는지 울다가 웃다가 한 편의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같고 예능 같기도 하고...

아무튼 겉 잡을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음공부를 하는 초심자나 젊은 친구들이 읽으면 참 좋겠다싶은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있다.

부제인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일침이 정말 힘들거나 아플 때 읽으면 더더욱 위로받는 기분이다.

명진 스님이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고, 스물다섯 살 때 하나뿐인 남동생을 군 사고로 잃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학을 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다가 우연히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무주 관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불교에 귀의하셨는데 그 마저도 평탄치 않았다.

누군가의 삶이 평범하다면 명진 스님의 삶은 정말 기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항상 질문하고 깨어있는 삶을 사셨나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누구보다 치열한 시간이 있었다.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도대체 죽는 게 뭔지, 사는 게 뭔지, 나는 누구인지를 간절하게 물었을 뿐이다."

 

 

-"왜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까? 남들은 부모와 같이 행복하게 사는데 나는 왜 친척집으로 떠돌아다녀야 합니까? 어째서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한 겁니까?"

-그때 누가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라,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해주었다면 내가 조금 덜 괴로웠을까? 우리들 각자의 삶이 모두 인연에 따라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더라면 조금 덜 불행했을까? 인생이란 것이 고통의 바다이며 본디 무상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의 내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힘든 시절, 때로는 책과 노래에 위로받았다. 어쩌면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더 많이 '나는 왜 살까?' 하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알게 모르게 부처님이 손바닥 위를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학생?"

"예."

"무엇이 '예'라고 대답했소? '예'라고 대답한 놈이 뭐요?"

-남악 회양이 선종의 육대 조사인 혜능을 찾아갔다. 그가 엎드려 절을 하고 법을 물으려고 하는 순간 혜능 선사가 먼저 물었다.

"어떠한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너는 누구인가?'하고 물은 것이다. 회양 스님은 그 물음에 앞뒤가 꽉 막혔다. 물어보려던 질문도 잊은 채 돌아갔다. 그리고 팔 년 동안 '그때 뭐라고 대답을 했어야 할까'를 화두로 삼아 공부했다.

-나는 스님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이야기,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뭇엇인지 고민하던 것,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는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겁니까?"

"내가 나를 알아야 돼. 다른 일은 전부 다 그다음 일이지. 나는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가는 공부를 하는 게 바로 불교야."

내 인생을 바꿔 놓은 말씀이었다.

젊은 날의 명진 스님을 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보통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아마 청년기 때는 주먹 깨나 쓰셨을 것 같다.

그만큼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세상과 인생을 비관하며 삐딱하게 바라보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아마 운명인지 필연인지 책과 음악, 그리고 교리로 그 에너지를 바꿨다.

'내가 누구인가.'

아마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자 가장 쉬이 잊어버리는 질문인 듯하다.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그 말에서 중심이 느껴지는데 결국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리송해지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 평생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그 클리셰를 잊고 살았다.

나도 그 화두로 시작해서 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알고 싶다.

 

 

 

 

-복을 구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복은 누군가에게 빌어서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과란 것이 얼마나 무서울 정도로 분명한지,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마음 쓰는 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똑똑히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복을 짓고 좋은 일 하는 것은 남이 하는 게 아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극락도 내 발로 찾아가고 지옥도 내 발로 기어든다. 그것을 자작자수라고 한다. 나의 무엇이 그렇게 하게 하는가? 내 행동, 내 말 한마디, 내 마음 씀씀이가 복도 짓고 화도 부른다.

-불행한 일이 잇따라 일어나는 내 삶이 괴로웠다. 그 괴로움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어릴 때는 참 내가 박복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누구인지 묻기 위해 그 시절을 지나온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 고통의 세월이 나라는 사람의 운명 속에 감춰진 또 다른 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계속 쌈박질을 해댔다면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나이만 먹었을 것이다. 나는 고통스럽더라도 다음 생에도 어려운 환경에 태어나 갖은 고생을 하다가 부처님 법을 만나는 게 소원이다.

-힘을 빼면 우리가 집착하고 욕망하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생애 사람 몸 받고 더없이 수승한 부처님을 만났으니 부지런히 수행해 묶여 있는 모든 업력의 굴레에서 벗어나 생사가 끊어진 대자유, 해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뿐이다.

삶은 참 불공평하다.

그리고 평범하다는 건 어찌보면 가장 예외적이고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것을 꽤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던 것 같다.

명진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건 정말 몸소 경험하고 체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셀럽 같은 유명인이 단지 공부를 많이 해서, 운이 좋아서, 본인이 노력이라고 생각해서 배운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서 배운 이 날 것의 생생함이 더 좋다.

그리고 인과응보라는 말을 당연하게 믿고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인과응보라는 말도 한 줌의 재처럼, 신기루처럼 먼 나라 이야기로 느껴지게 되었다.

악한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착한 사람들이 더 힘든 그런 반해피엔딩 이야기가 어른이 되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려고 해봐도 도저히 천성인지 운명인지 되지도 않을 뿐더러 찝찝하고 불행해졌다.

명진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또 한번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든다.

비록 내가 마음처럼 큰 일을 당장 해낼 수는 없더라도, 지금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의 최선의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남에게 해나 폐를 끼치지 말고 되도록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오늘도 소망한다.

우연히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 나는 사춘기 때 다가왔던 그 순수한 물음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사춘기로 살고 싶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사춘기를 겪게 된다. 반항하고 대들고, 못된 짓, 엉뚱한 짓을 도맡아 하는 시기가 그때일 것이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가장 순수한 물음은 바로 그 사춘기 때 본능적으로 다가온다. 유년기에서 어른으로 가는 그 시기에 '왜 살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름이 남으면 뭐하고 남들이 알아주면 뭐하나? 나는 무엇일까?' 하는 아득한 물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실 사춘기 때 불현듯 나오는 그 물음만큼 순수한 게 없다. 자기를 향한 순수한 물음, 그것은 어린 새가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날갯짓과도 같다.

-사춘기 때 처음 다가왔던 물음으로 돌아가는 것, 나를 향한 물음으로 끝없이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도를 향해 가는 것이다. 순수한 물음에 욕심이 붙어버리면 이미 그것은 아닌 게 되어버린다. 욕망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도를 구하려는 욕심 또한 그렇다. 도를 구하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욕심은 좋은 욕심이기 때문에 버리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욕심 또한 모두 버린 상태여야 사춘기 시절의 순수한 물음에 다다를 수 있다. 구하거나 바라거나 얻고자 하는 것이 없는 상태, 버리고 버린 상태가 수행의 자리다.

나는 사춘기 때 다가왔던 그 순수한 물음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사춘기로 살고 싶다.

피카소는 평생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기를 바랐고,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이 천재임을 자부하는 진짜 어린아이와 유아틱함을 왔다갔다하면서 살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인간의 삶과 정신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나누며 궁극적으로는 어린아이처럼 살 것을 말한다.

명진 스님의 말씀에도 우리가 왜 다시 순수함을 가진 때로 돌아가야하는지 철학적인 질문을 훅훅 던지신다.

나에 대한 질문과 자기를 향한 순수한 물음. 그때로 회기해서 살아야 하고, 스님도 그렇게 살고싶어 하신다.

과거의 나를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들이 많다. 그래서 과거의 그 감정을 붙들고 아직도 놓아주지 못하는 후회와 집착들도 생기나보다.

그때 느꼈던 순수한 물음만을 남긴 채 다시 살아봐야겠다.

 

 

 

 

 

"절하되 자연스러워야 한다. 마음에 힘을 빼고 쉽고 편안하게 하라."

 

-정성을 다해 수행하면 꼭 그 결과가 나타난다. 한 생각 한 생각 속에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을 때 그 정성스러움으로 기도가 이루어지고 수행에도 진전이 있다.

-노파는 물과 물방울이 둘이 아닌 것처럼 생과 사가 둘이 아님을 알았다. 나고 죽는 문제, 존재의 문제에 대해 한 생각이 바뀜으로써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고 생사가 끄달리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삶과 죽음이 무엇인가를 물었으니 그 물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겠는가. 그런 절절함을 바탕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게 수행의 핵심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아, 내가 공부가 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잘된다는 생각이 오히려 공부에 장애가 될 수 있다. 나도 공부가 조금 되었던 것에 집착하여 오히려 공부가 안되었던 것이다.

...

일체 구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흙탕물에 빠뜨린 구슬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구슬을 찾겠다는 급한 마음에 연못에 들어가 이리저리 뒤적거리면 흙탕물이 더 뿌옇게 일어나 도저히 구슬을 찾을 수가 없다. 가만히 기다렸다가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아졌을 때 구슬을 찾아 집어내면 된다.

공부를 잘해보겠다는 치구심이 지나치면 오히려 공부가 안된다. 공부는 억지로 용을 써서 되는 게 아니다. 간절하되 자연스러워야 한다. 마음에 힘을 빼고 쉽고 편안하게 하라. 공부가 좀 되었다고 좋아하지도 말고 공부를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에 억지를 쓰지도 말고 그저 알 수 없는 그 자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그게 공부다.

이번에는 수련과 공부에 대한 말씀들.

어쩌면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게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집착에 모두 벗어나지 못했다.그게 더 잘 살고, 잘 하고, 잘 만들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는 열정이라는 이름의 가면으로 나를 속이기 때문에 이러면 나만 힘들다는 것을 알아도 쉽게 놓지를 못했다.

힘을 빼고 집착을 버리고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했을 때 실제로 결과는 좋게 나온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겸손에 대한 말씀도 참 좋았다.

이건 진짜 공부를 치열하게 해본 사람만이 느껴보는 감정이다. 또는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라는 결과의 운이 좋았거나.

어느 순간 내가 상위권인 것 같고 잘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이쯤해도 될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오히려 무리를 하고 지치고 재미가 없어졌던 것 같다.

사람은 끝없이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내가 나를 물을 때 부처가 온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마음에서 힘을 빼야 한다. 힘이 들어가면 틀 속에 갇히게 되고 틀 속에 갇히면 선입견에 눈이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사는 건 무엇이고 죽는 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이런 물음을 치열하게 물으면 몸과 마음의 힘이 자연스레 빠진다. 그러면 세상이 거울에 비추듯 나에게 비춰진다.

-힘을 빼면 생각이 바뀐다

'마음에서 힘을 빼라!'

마음에서 히을 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모른다. 그 알 수 없는 물음 속으로 끝없이 몰입하다 보면 자연히 힘이 빠진다. '안다'라는 생각이 모두 비워지면 내가 정말 '모른다'라는 생각만 오롯이 남게 된다.

모든 앎이 끊어지고 완전히 힘이 빠진 그 자리, 그 완벽한 비어짐의 자리가 진정한 자유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뭘까? 같은 질문 없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대로 대학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삶이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 그 자체가 중요하다. 질문의 크기가 사람의 크기를 만든다. 질문이 깊을수록 생각도 깊어진다. 답이 없는 아득한 질문, 그것이 우리를 무한의 사유로 이끈다. 그 알 수 없는 세계, 무한의 세계가 궁극의 깨달음이다.

그렇기에 "내가 나를 물을 때 부처가 온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물을 때, 그 막막하고 알 수 없는 물음의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부처가 된다. 그 어떤 것도 끄달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부처다. 부처가 오더라도 따를 일이 없다.

마음 수행은 그런 것이다. 내가 나를 바로 알면 내 길을 가면 된다. 남 따라 살 필요도 세상의 요구를 쫓을 필요도 없다,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물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안다'라는 그릇된 생각을 내려놓고 몸에서 힘을 빼듯 마음에서 힘을 빼고 살면 더없는 자유가, 무한한 행복이 거기 있다.

<힘 좀 뺴고 삽시다> 책을 읽다가 후반부쯤 가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내 속에 질문이 된다.

'스님,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겁니까?', '나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나를 아직 모르고, 어떻게 해야 잘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행이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화두를 놓지 말고, 깨어있으라 말씀해주시면서 정작 '모른다'라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위로해주신다.

한 세 번 넘게 반복되는 것 같다. 위의 저 말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정진하면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고 무한한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다.

정말 그런지 나는 정말 알고 싶고, 그래서 계속 한다.

*이 글은 다산책방으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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