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좀 빼고 삽시다 -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명진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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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좀 빼고 삽시다>의 저자는 무려 50년 간 수행하고 남들보다 많은 경험을 하신 명진 스님이다.

영성 지능에 관심이 많아서 특정 종교나 분야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수련하신 분들의 책은 꼭 읽는 편인데,

이 <힘 좀 빼고 삽시다> 책은 그동안 명진 스님이 겪어오신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인생, 그리고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기분이다.

근데 어투는 어찌나 거침없고 빵빵터지시는지 울다가 웃다가 한 편의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같고 예능 같기도 하고...

아무튼 겉 잡을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음공부를 하는 초심자나 젊은 친구들이 읽으면 참 좋겠다싶은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있다.

부제인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일침이 정말 힘들거나 아플 때 읽으면 더더욱 위로받는 기분이다.

명진 스님이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고, 스물다섯 살 때 하나뿐인 남동생을 군 사고로 잃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학을 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다가 우연히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무주 관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불교에 귀의하셨는데 그 마저도 평탄치 않았다.

누군가의 삶이 평범하다면 명진 스님의 삶은 정말 기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항상 질문하고 깨어있는 삶을 사셨나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누구보다 치열한 시간이 있었다.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도대체 죽는 게 뭔지, 사는 게 뭔지, 나는 누구인지를 간절하게 물었을 뿐이다."

 

 

-"왜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까? 남들은 부모와 같이 행복하게 사는데 나는 왜 친척집으로 떠돌아다녀야 합니까? 어째서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한 겁니까?"

-그때 누가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라,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해주었다면 내가 조금 덜 괴로웠을까? 우리들 각자의 삶이 모두 인연에 따라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더라면 조금 덜 불행했을까? 인생이란 것이 고통의 바다이며 본디 무상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의 내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힘든 시절, 때로는 책과 노래에 위로받았다. 어쩌면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더 많이 '나는 왜 살까?' 하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알게 모르게 부처님이 손바닥 위를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학생?"

"예."

"무엇이 '예'라고 대답했소? '예'라고 대답한 놈이 뭐요?"

-남악 회양이 선종의 육대 조사인 혜능을 찾아갔다. 그가 엎드려 절을 하고 법을 물으려고 하는 순간 혜능 선사가 먼저 물었다.

"어떠한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너는 누구인가?'하고 물은 것이다. 회양 스님은 그 물음에 앞뒤가 꽉 막혔다. 물어보려던 질문도 잊은 채 돌아갔다. 그리고 팔 년 동안 '그때 뭐라고 대답을 했어야 할까'를 화두로 삼아 공부했다.

-나는 스님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이야기,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뭇엇인지 고민하던 것,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는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겁니까?"

"내가 나를 알아야 돼. 다른 일은 전부 다 그다음 일이지. 나는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가는 공부를 하는 게 바로 불교야."

내 인생을 바꿔 놓은 말씀이었다.

젊은 날의 명진 스님을 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보통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아마 청년기 때는 주먹 깨나 쓰셨을 것 같다.

그만큼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세상과 인생을 비관하며 삐딱하게 바라보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아마 운명인지 필연인지 책과 음악, 그리고 교리로 그 에너지를 바꿨다.

'내가 누구인가.'

아마 살면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자 가장 쉬이 잊어버리는 질문인 듯하다.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그 말에서 중심이 느껴지는데 결국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리송해지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 평생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그 클리셰를 잊고 살았다.

나도 그 화두로 시작해서 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알고 싶다.

 

 

 

 

-복을 구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복은 누군가에게 빌어서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과란 것이 얼마나 무서울 정도로 분명한지,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마음 쓰는 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똑똑히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복을 짓고 좋은 일 하는 것은 남이 하는 게 아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극락도 내 발로 찾아가고 지옥도 내 발로 기어든다. 그것을 자작자수라고 한다. 나의 무엇이 그렇게 하게 하는가? 내 행동, 내 말 한마디, 내 마음 씀씀이가 복도 짓고 화도 부른다.

-불행한 일이 잇따라 일어나는 내 삶이 괴로웠다. 그 괴로움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어릴 때는 참 내가 박복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누구인지 묻기 위해 그 시절을 지나온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 고통의 세월이 나라는 사람의 운명 속에 감춰진 또 다른 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계속 쌈박질을 해댔다면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나이만 먹었을 것이다. 나는 고통스럽더라도 다음 생에도 어려운 환경에 태어나 갖은 고생을 하다가 부처님 법을 만나는 게 소원이다.

-힘을 빼면 우리가 집착하고 욕망하는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생애 사람 몸 받고 더없이 수승한 부처님을 만났으니 부지런히 수행해 묶여 있는 모든 업력의 굴레에서 벗어나 생사가 끊어진 대자유, 해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뿐이다.

삶은 참 불공평하다.

그리고 평범하다는 건 어찌보면 가장 예외적이고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것을 꽤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던 것 같다.

명진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건 정말 몸소 경험하고 체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셀럽 같은 유명인이 단지 공부를 많이 해서, 운이 좋아서, 본인이 노력이라고 생각해서 배운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서 배운 이 날 것의 생생함이 더 좋다.

그리고 인과응보라는 말을 당연하게 믿고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인과응보라는 말도 한 줌의 재처럼, 신기루처럼 먼 나라 이야기로 느껴지게 되었다.

악한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착한 사람들이 더 힘든 그런 반해피엔딩 이야기가 어른이 되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려고 해봐도 도저히 천성인지 운명인지 되지도 않을 뿐더러 찝찝하고 불행해졌다.

명진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또 한번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든다.

비록 내가 마음처럼 큰 일을 당장 해낼 수는 없더라도, 지금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의 최선의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남에게 해나 폐를 끼치지 말고 되도록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오늘도 소망한다.

우연히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 나는 사춘기 때 다가왔던 그 순수한 물음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사춘기로 살고 싶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사춘기를 겪게 된다. 반항하고 대들고, 못된 짓, 엉뚱한 짓을 도맡아 하는 시기가 그때일 것이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가장 순수한 물음은 바로 그 사춘기 때 본능적으로 다가온다. 유년기에서 어른으로 가는 그 시기에 '왜 살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름이 남으면 뭐하고 남들이 알아주면 뭐하나? 나는 무엇일까?' 하는 아득한 물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실 사춘기 때 불현듯 나오는 그 물음만큼 순수한 게 없다. 자기를 향한 순수한 물음, 그것은 어린 새가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날갯짓과도 같다.

-사춘기 때 처음 다가왔던 물음으로 돌아가는 것, 나를 향한 물음으로 끝없이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도를 향해 가는 것이다. 순수한 물음에 욕심이 붙어버리면 이미 그것은 아닌 게 되어버린다. 욕망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도를 구하려는 욕심 또한 그렇다. 도를 구하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욕심은 좋은 욕심이기 때문에 버리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욕심 또한 모두 버린 상태여야 사춘기 시절의 순수한 물음에 다다를 수 있다. 구하거나 바라거나 얻고자 하는 것이 없는 상태, 버리고 버린 상태가 수행의 자리다.

나는 사춘기 때 다가왔던 그 순수한 물음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사춘기로 살고 싶다.

피카소는 평생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기를 바랐고, 살바도르 달리는 자신이 천재임을 자부하는 진짜 어린아이와 유아틱함을 왔다갔다하면서 살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인간의 삶과 정신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나누며 궁극적으로는 어린아이처럼 살 것을 말한다.

명진 스님의 말씀에도 우리가 왜 다시 순수함을 가진 때로 돌아가야하는지 철학적인 질문을 훅훅 던지신다.

나에 대한 질문과 자기를 향한 순수한 물음. 그때로 회기해서 살아야 하고, 스님도 그렇게 살고싶어 하신다.

과거의 나를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들이 많다. 그래서 과거의 그 감정을 붙들고 아직도 놓아주지 못하는 후회와 집착들도 생기나보다.

그때 느꼈던 순수한 물음만을 남긴 채 다시 살아봐야겠다.

 

 

 

 

 

"절하되 자연스러워야 한다. 마음에 힘을 빼고 쉽고 편안하게 하라."

 

-정성을 다해 수행하면 꼭 그 결과가 나타난다. 한 생각 한 생각 속에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을 때 그 정성스러움으로 기도가 이루어지고 수행에도 진전이 있다.

-노파는 물과 물방울이 둘이 아닌 것처럼 생과 사가 둘이 아님을 알았다. 나고 죽는 문제, 존재의 문제에 대해 한 생각이 바뀜으로써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고 생사가 끄달리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삶과 죽음이 무엇인가를 물었으니 그 물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겠는가. 그런 절절함을 바탕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게 수행의 핵심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아, 내가 공부가 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잘된다는 생각이 오히려 공부에 장애가 될 수 있다. 나도 공부가 조금 되었던 것에 집착하여 오히려 공부가 안되었던 것이다.

...

일체 구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흙탕물에 빠뜨린 구슬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구슬을 찾겠다는 급한 마음에 연못에 들어가 이리저리 뒤적거리면 흙탕물이 더 뿌옇게 일어나 도저히 구슬을 찾을 수가 없다. 가만히 기다렸다가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아졌을 때 구슬을 찾아 집어내면 된다.

공부를 잘해보겠다는 치구심이 지나치면 오히려 공부가 안된다. 공부는 억지로 용을 써서 되는 게 아니다. 간절하되 자연스러워야 한다. 마음에 힘을 빼고 쉽고 편안하게 하라. 공부가 좀 되었다고 좋아하지도 말고 공부를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에 억지를 쓰지도 말고 그저 알 수 없는 그 자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그게 공부다.

이번에는 수련과 공부에 대한 말씀들.

어쩌면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게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집착에 모두 벗어나지 못했다.그게 더 잘 살고, 잘 하고, 잘 만들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는 열정이라는 이름의 가면으로 나를 속이기 때문에 이러면 나만 힘들다는 것을 알아도 쉽게 놓지를 못했다.

힘을 빼고 집착을 버리고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했을 때 실제로 결과는 좋게 나온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겸손에 대한 말씀도 참 좋았다.

이건 진짜 공부를 치열하게 해본 사람만이 느껴보는 감정이다. 또는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라는 결과의 운이 좋았거나.

어느 순간 내가 상위권인 것 같고 잘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이쯤해도 될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오히려 무리를 하고 지치고 재미가 없어졌던 것 같다.

사람은 끝없이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내가 나를 물을 때 부처가 온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마음에서 힘을 빼야 한다. 힘이 들어가면 틀 속에 갇히게 되고 틀 속에 갇히면 선입견에 눈이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사는 건 무엇이고 죽는 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이런 물음을 치열하게 물으면 몸과 마음의 힘이 자연스레 빠진다. 그러면 세상이 거울에 비추듯 나에게 비춰진다.

-힘을 빼면 생각이 바뀐다

'마음에서 힘을 빼라!'

마음에서 히을 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모른다. 그 알 수 없는 물음 속으로 끝없이 몰입하다 보면 자연히 힘이 빠진다. '안다'라는 생각이 모두 비워지면 내가 정말 '모른다'라는 생각만 오롯이 남게 된다.

모든 앎이 끊어지고 완전히 힘이 빠진 그 자리, 그 완벽한 비어짐의 자리가 진정한 자유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뭘까? 같은 질문 없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대로 대학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삶이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 그 자체가 중요하다. 질문의 크기가 사람의 크기를 만든다. 질문이 깊을수록 생각도 깊어진다. 답이 없는 아득한 질문, 그것이 우리를 무한의 사유로 이끈다. 그 알 수 없는 세계, 무한의 세계가 궁극의 깨달음이다.

그렇기에 "내가 나를 물을 때 부처가 온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물을 때, 그 막막하고 알 수 없는 물음의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부처가 된다. 그 어떤 것도 끄달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부처다. 부처가 오더라도 따를 일이 없다.

마음 수행은 그런 것이다. 내가 나를 바로 알면 내 길을 가면 된다. 남 따라 살 필요도 세상의 요구를 쫓을 필요도 없다,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물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안다'라는 그릇된 생각을 내려놓고 몸에서 힘을 빼듯 마음에서 힘을 빼고 살면 더없는 자유가, 무한한 행복이 거기 있다.

<힘 좀 뺴고 삽시다> 책을 읽다가 후반부쯤 가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내 속에 질문이 된다.

'스님,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겁니까?', '나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나를 아직 모르고, 어떻게 해야 잘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행이 스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화두를 놓지 말고, 깨어있으라 말씀해주시면서 정작 '모른다'라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위로해주신다.

한 세 번 넘게 반복되는 것 같다. 위의 저 말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정진하면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고 무한한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다.

정말 그런지 나는 정말 알고 싶고, 그래서 계속 한다.

*이 글은 다산책방으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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