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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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학계를 그렇게 잘 아는 편은 않으나, 확실히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학소설을 읽으면 기존 한국소설계는 뭔가 모르는 엄숙주의 내지 장편으로 전개되는 유형이 많았다. 물론 소설 중에 단편적인 부분도 많으나, 대부분 단편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꾸려진 경우는 드물지 않은 것 같다. 소재나 이야기의 주제성도 거대한 서사에서 점차 작은 이야기로 넘어가고, 예전에 읽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처럼 한국의 소설도 왠지 모르게 일본의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서브컬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가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이번에 읽은 최제훈 소실모음집 <퀴르발 남자의 성>을 읽을 때 생각이 드는 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몽타주의 편집적 요소가 보인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같은 요소가 조금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시간과 공간의 일치성보단 시간전개가 뒤죽박죽인 “퀴르발 남자의 성”, 추리 소설 <셜록 홈즈> 작가인 코난 도일을 최제훈 소설문집에서 셜록 홈즈가 발견한 피해자로 등장시키거나, 또는 정신적 해리증세를 가진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함 등을 작품에 반영시킨다.

 

최제훈 소설모음집은 이른바 추의 미학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고,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반영한다.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란 바로 오늘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추악함은 원래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만들어져 가는 것인가? 여러 가지 모습이 드러나겠지만, 점차 인간이 부패하가는 모습을 작가는 잘 맞춘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과 평이 있으며, 심지어 뒤에 보면 문학평론가의 심사평이 따른다.

 

나는 문학도가 아니고, 문학평론가는 전혀 관계없으니 굳이 그렇게 정리할 필요 없다. 단지 나대로 생각하여 그것이 타인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객관성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찍어볼 것이란 문제다. 이 소설에 재미있기도 하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 서브컬처의 느낌이 나는 이유는 이미 이 이야기들이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등장할지 모르나, 서브컬처 내에서 그렇게 드물지 않은 이야기다. 영웅의 시대가 서사를 풍미하는 게 아니라 반영웅, 혹은 얼간이라도 주인공이 나오고, 별에 별 기막힌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서브컬처이다.

 

마녀에 대한 이야기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메데이아라는 마녀의 이름이 이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라는 게임 및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단지 사람들은 마녀가 처음 가진 의미, 마녀의 시작과 그 변이과정을 잘 모를 뿐이다. 작가 최제훈은 마녀의 이야기에서 고증적인 연구를 많이 했다. 마녀사녕은 문명이 존재하는 인간세계에 얼마나 추악한 일들이 벌여졌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존재이다. 문제는 그것은 되풀이되는 하나의 세계이고, 이제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사회만이 아니라 사이버세계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을까? “그녀의 매듭”에서 고교동창생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조건만남을 한 것을 알았던 주인공은 친구의 성공과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분노로 뒤에서 공작을 펼친다. 그런 공작은 대학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에 나와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친구 주변 여자까지 견제에 들어간다. 마녀는 사실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마녀 같은 인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형이상학적인 사이버세계에서 난무하고 있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개인의 영역이 아닌 집단적 광기로 변화하여 한 개인을 괴물로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보다는 왜 악하게 되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아이를 죽여 괴물의 성에서 같이 향연을 열던 부모와 삼촌내외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욕망에 이성과 도덕관을 잃어간다. 아니 처음부터 도덕이란 무엇인가? 개인에게 가해진 물리적, 사회적 폭력은 어느 한 개인을 자신도 모르게 괴물로 키워낸다. 그리고 자신을 한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거나,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기도 한다.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2사람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단 다른 사람의 이름을 꺼내어 그 주제에 맞추어 간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물론 나와 상대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상대만 조금 알고 나는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을 하나의 가십거리를 삼아버리는 것은 현대사회 인간이 본인 자신을 타자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타자에 대한 욕망, 그것이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한 것이다. 사실 다른 책에서 흡혈귀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글을 보면서 기억나는 게 미국대공황 이후 경제적 문제에서 흡혈귀는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고, 프랑켄슈타인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것을 하나로 모우는 것, 즉 현실에 대한 도전에 대한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보인 흡혈귀 아니 퀴르발 남작에서 그는 보통 사람마저 식인귀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국에서 살던 가족들이 시집보낸 딸집에 간 이유는 경제적인 조건이 어려워서이다. 경제적 상황에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만 따지기에 효율성에서 개인과 개인의 집합에선 윤리적 가치를 따질 이유는 없다. 그런 모순은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처럼 코난 도일이 추리소설 <셜록 홈즈>의 작가이고, 홈즈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그가 죽었는데, 홈즈는 추리과정에서 혼선을 빚는다.

 

창조자가 코난 도일이고, 코난 도일을 찾아가는 홈즈는 그 과정에서 오류를 범한다. 오리지널보다 카피 내지 만들어진 존재가 오히려 죽어버린 자신을 찾아가지만, 헛수고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매듭”처럼 자신의 소꿉친구의 얼굴사진을 도려, 이현정의 사진과 합성시킨 연화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다. 본질은 수동적이고, 본질이 아닌 가상, 허구, 복사, 잉여적 존재가 우리 일상을 움직이고 있다. 아마 소설의 제목을 여러 작품에서 “퀴르발 남자의 성”이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분명 저 남자의 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 삼켜지거나 그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 활보하는 세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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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9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1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전에 본 영화중에 <한공주>라는 작품이 있었다. 평소 여자연예인들에게 관심이 없는 나에게 마음에 드는 연예인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한공주>에서 주연을 맡은 천우희 씨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를 정말 잘 했기 때문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리뷰를 작성하지 못했는데,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잔혹한 장면들이 사실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것이라 한다. 과거 밀양에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당한 여중생은 자살했는데, 그 이후 거기에 가담한 남학생들이나 그 남학생 주변의 인간들은 사회에 나가도 잘 먹고 잘 사는 어이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서 일본 2CH에서 어떤 히키코모리가 고등학교 당시 자신을 엄청 괴롭힌 4명으로 24살 되도록 세상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은둔하고 있다는 사연을 보았다. 동창회에 가기 싫어 억지로 가보니 자신을 괴롭힌 4명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참고로 밀양 집단성폭행 사건 가담자 1명은 공무원이 되었다는 인터넷(Face Book 화면갈무리) 게시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나두고 떳떳하게 얼굴을 내미는 세상이 되었을까? 아무튼 세상이 이상하게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 어째서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하게 당한 부조리를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말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보는 세상, 과연 이게 정당한 도덕적 가치관인가?

 

이번에 본 영화 <귀향>, 귀향이란 하면 귀향(歸鄕)이란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귀향(鬼鄕), 즉 귀신같은 넋이나 혼과 같은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에서 억지로 끌려나와 먼 곳에서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했던 소녀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유골조차 고향 뒷동산에 안치되지 못하고, 설사 살아와도 그때 이후로 시간은 멈추었다. 예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낮은 목소리>를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만화애니메이션축제에서 프랑스 앙골렘 만화축제에 상당한 평가를 받았던 “지지 않는 꽃”이란 전시회를 보았다. 만화작가가 그린 하나의 만화서사도 있었지만, 위안부에 끌려갔던 살아남은 소녀들의 그림도 있었다.

 

점점 갈수록 그들의 수는 줄어들고, 그들의 한 맺힌 분노는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상처에 시들어간다. 이미 “지지 않는 꽃” 전시회에서 <나비의 노래>를 통해 보았다. <귀향>에서도 내림굿을 받은 소녀가 상처투성이 소녀와 나비를 보았다고 한다. 나비, 자유로이 날개를 펼치면 날아가는 생물, 그 나비를 마치 무참하게 밟은 일본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한 일본군 장교가 나비의 표본작업 중 날개 하나를 잔인하게 부순다. 자유를 향해 날고 싶은 소녀들을 마치 포악하게 파괴하듯이 말이다.

 

시놉시스적인 부분에서 정말 표준적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분에게 충격의 연속일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보다 더 화가 나는 장면은 과거 위안부에 끌려간 살아나온 영희(손숙 선생님 배역)가 TV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관공서에 가서 신고해달란 기사를 보고 관공서로 향한다. 그때 앉아있던 남자직원에게 차마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뒤돌아서는 순간, 직원들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업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걸 신고하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 라는 말에 화가 난 영희의 억울함이 더 먹먹해졌다.

 

자신의 나라가 없을 때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나라가 있는데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억울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한공주>와 <귀향>을 놓고 내가 이렇게 대조하는 것은 바로 이게 우리 사회의 암적인 모습인 것이다. 왜 피해자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어 지내고 계속 도망쳐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화냥년이란 말이 있다. 화냥년이란 원래 환향녀(還鄕女)에서 나 말이다. 병자호란 때 청국에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다시 고향에 올 때 돌아온 것은 자신을 반겨주는 가족의 미소가 아니라 마치 오랑캐에게 몸을 팔았다고 여기는 더러운 눈빛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면서도 내가 느끼는 딜레마 중에 하나가 바로 저런 모순이다. 물론 전쟁이란 엄청난 재난은 인간을 하여금 가학적인 요소로 변질시킨다. 죽음에 맞대 있기에 그 증오와 불안을 여성에게 화풀이하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과 망각으로 이어지므로 연속적인 가학성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성폭행에서 단순히 폭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모습으로 변질된다. 사디스트적인 성적쾌락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폭력성이 하나의 미적인 가치로 변해 오히려 당하는 대상을 억압하는 모티브가 된다.

 

<귀향>은 전쟁에서 위기에 봉착한 일본군, <한공주>에선 인격과 무관하게 돈과 성공만 강조하는 한국사회, 모두 강박관념이 약자에 대한 배려보단 약자를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 <귀향>을 보면서 연출적인 부분에서 딱 2가지가 충격적이었다. 그로테스크, 즉 보기가 흉하고 끔찍하여 상당한 불쾌감을 주는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하이앵글 각도에서 수많은 위안부소녀들이 그 작은 방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성폭행당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것도 방 하나가 아니라 방이 수십 개나 되는 벌집처럼 말이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위안부소녀들의 착취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말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자, 살해 후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서 모금해준 분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이 그렸던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위안부소녀 시체를 불태우는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을 모티브가 된 장면은 시체가 기름에 의해 타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 일본군복을 입혀 총알받이가 되게 하거나, 식량이 없다면 인육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총을 쏴 죽이고, 칼로 찔려 죽이고, 동굴에 화염방사기로 태우거나 폭탄을 날리기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한지 신이 해본 실험으로 세계 2차 대전이 아닐까 싶다. 인간을 생체실험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폭격과 독가스, 세균전, 핵폭탄이 이때 최고조로 달했다. 이런 일이 있고도 반성하는 국가는 영원히 그때의 비극을 잊지 않은 반면, 어느 국가는 그때를 오히려 영광의 순간으로 여긴다. 다른 국가는 어느 국가의 만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그때의 영광이라 말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발끈하지 못한다. 오히려 할머니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인간도 있다. 어떤 블로그에 글을 봤는데, 분명히 여성분 같은데, 위안부 할머니에게 위로되지 못할망정 망언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남자라면 그 남자의 아내, 딸, 손녀까지 모두 위안부 같은 곳에 끌려가라고 말이다. 오히려 그 말이 정답이지 않을까도 싶다. 물론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한 사람에게 폭언을 하는 사람에게 반인륜적인 부조리를 당해보라고 하는 것이 다소 윤리적인 영역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남에게 인륜적 가치를 대하지 않은 이상 자신에게 그런 가치를 받을 자격은 없다고 나 역시 그렇게 본다. 영화 <귀향>에서 무속인이 굿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마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는 천도제인 오구풀이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면 과연 그 소녀들의 영혼은 하늘로 혹은 고향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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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탄생의 역사 - 마르크스 40년 경제 이론 작업의 전모를 밝히다 동아대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총서 3
비탈리 비고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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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교수님의 이번 도서는 번역도서이군요.

마르크스 원전이 모두 번역하는 그날이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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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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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 글을 쓰는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내 글에 대해 생각하면 문법이나 문장의 매끄러움이 부족한 것을 안다. 과거에 적은 내 글에 비교하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특히 논문을 심사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부분이 역시 문법과 어감의 난해성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 마음 한편에 숨은 불편한 초조함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억눌리기에 충분하다. 이런 식의 화두를 던지 이유는 이번에 읽은 서적이 <밤이 선생이다>라는 황현산 교수의 산문집을 읽었기 때문이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여 문학서적과 번역도서를 출간한 이 분, 황현산이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그의 프로필을 보니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인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번역했던 분이다. 디드로의 책을 읽지 않으나, 그 책의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번역자의 이름으로 황현산이란 이름을 본 것 같았다. 문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동기는 황현산 교수의 <밤이 선생이다>가 매우 논리적인 성찰은 논리로서 풀어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문체로 살려낸 것이다.

 

내 글을 본다면 그렇게 쓸 자신이 없다. 내 글을 보면 상당히 파고 들어가는 감이 없지 않게 강하다. 이른바 오타쿠라는 무단히 파고들어가는 인생살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아니라면 다른 삶에 의한 요소인가?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타인과의 소통이 잘 되는 편은 아니다. 남의 말을 들을 때 정보의 인식은 정확히 알아들어도 거기에 대한 기호적인 대답은 다른 식으로 전달된다. 쉽게 말하면 엉뚱한 녀석이다. 인간에 대해 내가 생각하자면 누구나 변태적인 요소가 있고, 도착적인 요소가 있다고 여긴다. 변태라고 하여 성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성격과 말투, 몸짓, 관심, 취향, 정체성까지 파고들어간다고 여긴다.

 

인간은 원래 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라면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쇠사슬에 묶인 존재라고 해야 하나? 어째든 인간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 존재가 되고, 자연적 본연의 모습과 현실의 인위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진 간극 아래 자신의 입장과 의지가 모호하게 비치된다. 즉 인간은 본연적인 삶을 살 수 없고, 삶의 틀에서 타자와의 관계성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자신의 본연적인 세계가 아니라 본연적이지 세계가 형성되어 자신의 말과 언어로 표출된다.

 

황현산 교수 역시 삶을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단지 그 분은 아주 부드러운 섬세한 글로 보여준다면 나는 오히려 투박하고 퍽퍽한 느낌이 강할 것이다. 문체의 부드러움과 표현에 대한 환상적 요소, 삶에 대한 시선이 언제나 비딱하게 보는 나에게 무리인 것 같다. 언제 개인적으로 작문하여 내가 다시 확인해보면 뭔가 작품 내 등장인물이 다소 강박적인 반응하고, 다른 사람을 내 눈의 대신 관찰할 때도 역시 뭔가 경계하는 날카로움이 담겨있다. 즉 내 글은 절대 부드럽고 친절한 글은 아니다.

 

그런다고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과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하나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적인 보고 느끼는 것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을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그런 예술적 삶을 제대로 맛 볼 수 없다. 솔직히 그렇지 아니한가? 1970년대 6시 되면 오디오의 파놉티콘이 울려 퍼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인간은 생물이고, 자기만의 바이오리듬을 가지고 있다. 낮에 물론 자신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에 접해 있겠지만, 밤의 공간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다.

 

낮에는 착취당하고, 밤에는 위로받는다. 사실 낮에는 타인의 눈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나 밤에는 자신의 눈에 맞추어야 한다. 고요한 밤이 왜 중요한가? 조용한 방에 시야를 빼앗기는 것도 없이 오로지 어둠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낮과 밤은 모두 같을지 모르나, 인간 개인에게 낮과 밤은 서로 다르다. 낮과 밤 속에서 단지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의 대조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 언제나 낮의 밝은 것만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강박관념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움직인다. 자신의 결정한다는 그 자체도 사회적인 조건과 현실의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점은 부정하고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참으로 기만적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기만적인 것을 추구해온 것이다. 작가는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나, 과거에 의해 조성되어 미래로 움직이는 시간적 존재다. 시간적 단절에서 우리는 시간의 축척을 무심코 버린다.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 몰라, 자신의 장소는 만드는 것보다 어디든지 화려한 곳이 보이면 너도 나도 상관없이 달려든다. 유행의 시대에 걸맞은 화제의 장소는 언제나 인파로 가득하다.

 

자신을 생산하기보단 스스로를 소비하고 소모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그런 세상에 태어나다보니 나 역시 황현산의 글에 많은 놀라움을 느낀다. 작은 섬에 태어나 소금의 맛까지 말하며 바다의 정취와 산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 살아가는 인간은 도시의 소모품이 아니라 농가의 인간이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가득 찬 회색 빛 천국에서 하늘의 달조차 매연에 가려져 흐릿하다. 현대인들은 감수성은 메마르고 감정은 폭발한다. 드라마를 비롯하여 TV를 거의 안 보는 나에게 TV 드라마만큼 가장 재미있는 콘텐츠이면서도 가장 저질스러운 콘텐츠는 없다고 본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하고, 오로지 욕망과 기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세상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파생실재의 공간이나, 우리의 공간은 드라마부터 소외된 실존하는 가상에 위치해야 하는 세상이다. 모두가 꺼리는 세계, 밤이라는 것은 어둠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빛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우리는 밤이라는 어둠을 너무 외면한 것이다. 산문집처럼 밤이 선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언제나 주변에 화려한 것만 보고 듣기를 강요했기에 우리 안의 세계를 찾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인간들을 잊어가고,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하려고 했다. 밤이면 낮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한산하다. 낮에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나와 주변의 소리를 기울이고, 다음으로 그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에 기울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은 맞으나, 지나친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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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루이 알튀세르 자서전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이매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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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후에 읽을 예정인 <알튀세르 효과>는 최근 출판된 도서이다. 아주 묵직한(870페이지 분량) 서적으로, 루이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제시한 연구내용에 대해 후세 학자들(프랑스 철학자들이 작성 한국 철학자가 번역 및 추가 작업)이 새롭게 해석하여 제시한 도서이다. 루이 알튀세르라는 학자를 내가 알게 된 동기는 이른바 사상관련 도서를 찾아보면서이다. 구조주의 4인방인 푸코, 레비스트로스, 라캉, 바르트 외에 추가적으로 구조주의에 들어 갈만한 인물이 바로 루이 알튀세르인 것이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루이 알튀세르와 저 위의 인물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거의 비슷하다. 푸코는 알튀세르의 지도받는 학생이었고, 라캉은 알튀세르 초빙으로 프랑스 최고의 교육기관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 외에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자크 데리다 등 프랑스 20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최고의 사상가들과 교류한 알튀세르는 프랑스 지성계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사실 20세기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에 세계적으로 철학과 사상의 조류는 프랑스 구조주의, 그리고 후기구조주의로 넘어간 것 같다.

 

20세기 나치만 아니라면 독일의 관념철학과 분석철학 그리고 독일에서 영국으로 추방된 마르크스주의까지가 독일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쟁이란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전쟁이 바로 알튀세르의 인생을 모든 것을 빼앗고, 그를 알튀세르로 만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읽은 알튀세르의 저서는 <재생산에 대하여>와 <철학에 관하여>이다. 재생산이란 자본주의사회구조에서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 사회적 토대를 유지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한 군중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연구하고,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1990년 알튀세르가 죽을 해가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시기다. 그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가톨릭신자였으며,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를 중심으로 홉스, 로크, 몽키스키외, 루소, 헤겔 등의 철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을 가게 된 동기 역시 전쟁이다. 전쟁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내가 <철학에 관하여>란 책을 읽을 때 그는 우연성에 초점을 맞추어 관념적인 사고와 유물론적인 현상이 부딪혀 새로운 현상을 보여준다는 충돌이론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런 이론을 제시했는가? 철학은 사실 철학이란 도서로 존재하여 교과서처럼 사람에게 오는 게 아니라 철학이란 하나의 실천적인 행위가 있어야 비로소 철학이 된다. 실천하지 않은 철학은 철학적 가치를 가진 게 아니라 그저 관념 안에서 흩어지는 안개일 뿐이다. 행동을 위한 사유, 사유로서 보여주는 철학적 가치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려운 말일 수 있고, 간단한 논리일 수 있다. 그가 왜 마키아벨리를 생각하는가? <군주론>이란 서적에서 군주는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공포의 대상이 되더라도 증오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고 했다.

 

국민과 혹은 국민이 존재하는 국가라는 하나의 사회에서 국가를 보는 관점이 현실적 조건 경제적 상황 등을 제대로 간파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토대와 상황적 조건에 의해 구성되어진다. 관념론적인 요소는 어떤 운동을 위한 하나의 지표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자체는 운동이 될 수 없다. 운동을 하기 위해 관념론적인 요소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만은 없다. 현실적 조건과 상황, 그리고 그 현실을 타파해 가야하는 주체들의 요건들이 바로 새로운 현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래 말하지 않았나? “철학자 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만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해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석을 한 후에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스피노자적인 가치관이란 자신의 틀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봐야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사상을 파고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나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은 연구라고 본다.

 

루이 알튀세르의 서적인 <철학에 관하여>는 1980년 알튀세르의 아내 엘렌느를 정산착란 상태에서 살해 후 후견인 보호 아래서 저술했던 도서이다. 세계 최고의 교육기관인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이면서 교수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을까? 그런 자신이 자서전을 저술하면서 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하는 것일까? 상당히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일들이다. 보통 자서전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성장기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적고, 거기에 있었던 특별한 일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나 인물을 정리해간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적이나 이상을 제시하나, 알튀세르는 그런 식의 책은 아니다. 보통 나도 그렇지만, 대다수 지성인들은 자서전을 좋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자서전에 들어가는 내용을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도 살며시 보여주나, 마지막은 자화자찬으로 종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알튀세르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과 다른 책이라고 밝힌다. 루소의 <고백>은 인류 학문에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다 보여주고, 거기에 대한 자신과 반성과 성찰을 보여준 책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연구에서 <고백>의 영향은 엄청나다고 하다. 인간의 심리는 모순적이면서도 역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루소의 <고백>과 같은 자서전이 아닌 다른 식의 자서전으로 발간한다.

 

루소는 자신의 죄와 과오를 보여주고 성찰한다고 하겠지만, 알튀세르는 그것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하는 학문적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단순히 자서전으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로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자신이 어릴 시절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르기까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제3자의 관찰을 집어넣고, 자신을 어떻게 주변에서 대응이 이루어졌는지까지 나온다. 하지만 모든 시작점은 역시 전쟁이 문제인 것 같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운 점이나, 한국에서 정신병이나 우울증, 과대망상증 같은 심리적 혹은 정신적 증세를 가진 사람에 대해 매우 불편하게 바라본다. 한 마디로 무슨 정신과에 다니는 순간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 많이 줄어든 편이나, 솔직히 대규모 전쟁을 거친 국가로 본다면 한국인에 가해진 트라우마는 매우 심각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환자가 만일 다시 사회에 나가더라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더 이상 일상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도 1960년대 알튀세르가 정신병원에 입원할 때를 말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전쟁이 중요하다고 한 점은 세계 1차 및 2차 대전은 수많은 유럽인들을 충격과 공포로 밀어 넣었다. 기존의 전쟁의 백병전 중심으로 총과 칼, 그리고 대포로 이루어진 공격이나, 20세기부터는 폭격과 화학전이 도입되던 시기다. 총과 칼은 눈에 보이는 적만을 놀리지만, 폭격과 화학전은 눈에 보이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준다. 전쟁의 판도에 따라 달라진 전쟁에서 알튀세르의 아버지 샤를르는 자신의 동생 루이와 같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샤를르는 전쟁 중 잠시 휴가를 받아 돌아오나, 자신의 하나밖에 없던 동생 루이는 비행작전 중 공중에서 산화하고 만다. 문제는 루이 알튀세르의 어머니는 알튀세르의 삼촌 루이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삼촌 루이는 죽고, 샤를르만 돌아와 어머니와 혼약하고,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어머니는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던 루이의 죽음에 충격 받고, 그 와중에 샤를르와 결혼, 결혼식 후 첫날밤이 사랑이 아닌 강간처럼 이루어진 점, 자신이 이때까지 모은 재산을 그가 탕진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뒤틀어져 버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저자는 루이 알튀세르이고, 아버지 이름은 샤를르 알튀세르, 그리고 삼촌의 이름은 루이 알튀세르이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죽은 삼촌의 이름 루이를 받아들인 어머니의 환상이 되어야 했던 아이다. 어머니가 바라본 알튀세르는 아들이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예전 연인이던 루이의 대체용으로 취급당해야 했다. 살아있는 2명과 죽은 1명의 계약 아래 알튀세르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의 과도한 집착은 결국 그의 우울증을 야기했다. 삼촌의 영향은 컸다.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삼촌 루이는 학자 같은 인물이었고, 매우 감수성이 넘치던 청년이었다.

 

그런 요소를 조카에게 물려준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알튀세르에게 우울증이 되었고, 청년과 장년 그리고 노년까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평생의 굴레였다. 아내 엘렌느의 교살은 참으로 끔찍하기 보단 아련했다. 아내 역시 우울증에 시달렸다. 죽기 전 보름 넘게 집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누가 와도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있었다. 아내는 나치가 프랑스 점령할 때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그녀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병으로 둘 다 돌아갔다. 우울증에 걸린 부부, 게다가 자살할 충동을 느껴도 자살할 용기가 없던 엘렌느는 알튀세르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내의 목과 어깨를 마사지를 하는 도중, 알튀세르는 아내의 목을 졸라 죽인다. 그런데 문제는 고의가 아니라, 안마 도중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의 동공은 풀어지고, 맥박이 없었다. 미친 듯이 당직의사실에 가서 이 사실을 고한 그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병원에 수용될 때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때 알튀세르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도 몰랐다. 노년의 찾아온 불행, 그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우울증과 정신착란 증세였다. 어머니에게서 시작한 과오, 어머니를 벗어난 수용소 생활과 혹은 외할아버지와 함께한 농촌생활이 행복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알튀세르, 물론 그 후로 활동하지만, 알튀세르라는 이름은 어떤 사회적으로나 신분에 대한 꼬리표가 달려 다녀야했다. 그의 자서전은 그런 기존의 자신이 마치 도처에 존재하는 쇠사슬에 묶여있는 인간이 아니라 본인 그 자신이고자 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거기서 자신을 분석하여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22장을 보면 마지막 문단 쪽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한다. 그는 1918년생, 1980년대에 저술했다면 60이 넘은 노년이란 점에서 그의 새로운 시작은 나이보다는 그가 자신이란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시점에 스스로 선언을 한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가 상당히 겁이 많았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매력에 집착하면서도 한편으로 거기서 얽매이는 것을 싫다는 것도 나온다. 한 인간이 가족에서 시작된 편력이 이렇게도 지독한 것인가? 아내의 죽음에서 결국 아내를 죽이게 된 원인은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자살적 충동을 아내에게 이어진 것이다. 아내 역시 죽음을 생각했고, 그녀 역시 죽음으로 얼룩진 인생이다. 알튀세르의 삼촌 루이의 죽음, 그리고 엘렌느 역시 레지스탕스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조직의 오해로 추방된 사건 등등, 인간의 상처란 쉽게 아물지 못하는 것 같다.

 

알튀세르는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에 의해 만들어진 가족의 탄생, 가족이 움직이는 형태, 그리고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아픔들, 자신은 살아있는 인간이나 죽은 인간을 대신해야 했던 존재, 처음부터 살아있던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자신,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분석했기에 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은 계속되어 그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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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2-14 2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하겠어요 ^^

만화애니비평 2016-02-15 08:44   좋아요 1 | URL
아~! 그렇습니까~~

보빠 2016-02-24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이신데 후기는 인물비평이시네요 저도 알튀세르 좋아하지만 저렇게 못느꼈는데 대단하십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2-24 09:25   좋아요 2 | URL
알튀세르를 읽기 전에 장 자크 루소의 <고백>을 읽었던 게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알튀세르와 루소의 글에서 역시 알튀세르의 의도처럼 그렇더군요.
알튀세르의 정신착란과 우울증에서 생각해보면 저도 엉뚱한 점이 많은(아마 이게 정신분석에서 과대망상이라 하겠죠) 사람인지라, 그런 점에서 염두하여 글을 적었죠.
일단 오타쿠인 이상 망상은 기본을 가지고 있다보니..
이번에 이책을 보면서 번역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철학을 자주 읽는 편인데, 번역이 친절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