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박열이 누군지 잘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열이란 사람이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그가 일본사회에 큰 풍파를 일으킨 조선인이란 사실도 알았다. 단지 재판과정이라 상세한 내용까지 몰랐다. 근대사와 관련하여 독립운동 내지 항일운동, 혹은 이와 유사한 민족 내지 민중운동들을 살펴보면 박열의 이름이 나온다. 영화 <박열>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박열의 아내이며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이다. 그녀는 자서전을 낸 것까지 나도 알았지만 직접 읽지는 않았다.

 

단지 아는 사실은 후미코는 어린 시절 매우 불우한 삶을 보내고, 자신이 일본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박열과 혼인신고를 올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서 그녀의 유해는 박열의 고향에 묻혀있다는 점이다. 박열의 시신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있다. 박열과 후미코는 죽어도 같이 묻히자는 약속은 했다. 안타깝게 육체는 분리되고, 박열과 후미코의 신위정도만 같이 남을 뿐이다. 영화 <박열>1923년 관동대지진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지진은 국가재난 중에서 가장 무서운 사건 중에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화재나 수해는 그 자체로 끝이 나지만, 지진은 수해와 화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지진이 일어나면 우선 지반이 갈라지고 땅 밑의 빈 공간에 추락할 수 있다. 게다가 지하에는 단순히 자연토양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근대화가 진행되었다고 하나, 지하에는 각종 선로나 관이 매설된 경우도 많다. 지금 지진이 일어나면 2차적 피해로 화재가 되는 이유는 지하에 매설된 관로 중에는 대부분 전기선로와 가스관이 있다는 점이다. 가스관에서 가스가 새어 전기선로에서 일어나는 스파크현상에 따라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

 

현대사회처럼 당시 일본이 그 정도로 도시시스템이 구비된 것은 아니나, 화재가 많이 일어났다. 일본 내각대신들이 회의할 때 모두 덥다고 짜증을 부린다. 그러는 와중 누군가가 대답한다. 밖의 온도는 46도라고 말이다. 화재로 인해 기온이 국부적으로 상승하여 주변까지 열기를 타고 간 것이다. 당시 일본 건축물이 고층건물이 없다는 점에서 열섬현상 같은 공기순환 장해가 없었을 것이다. 국부적인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나니 지진의 무서움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지하에 가스관은 없어도 집안에 전기는 들어온다. 전기로 인한 화재, 혹은 아궁이에서 불씨가 나와 화재로 이어진다.

 

이 심각한 사태를 두고 일본내각은 제대로 정리하기보단 이 상황은 타개하기 위해 대안을 내놓는다. 현재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한 불만으로 이 혼란을 이용하여 반란을 도모한다고 말이다.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지르며, 각종 폭력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정국을 마비한다는 식으로 정보를 날조한다. 영화에서 관동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했지만, 대지진 이후 불안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들은 수천명이나 살해되어야 했다. 자경단이 몰려와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강에 수장시키는 등 아주 잔혹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일본입장에서는 이런 혼란을 조선인에게 넘기고, 그 마무리 정점을 수괴를 지목해야 했다. 불령사에서 활약했던 박열은 일본정부에서 불온한 인물로 지목받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범하고 나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 내에서도 일본정부를 규탄하던 자도 많았다. 1923년은 19193·1운동 후이기도 하나, 3·1운동은 러시아 소비에트에 의한 볼셰비키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세계에서는 제국주의 씨앗이 퍼져간 것처럼 이에 대비되는 좌파 세력도 많았다.

 

한국에서 현재의 좌파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되나, 당시 사회주의 내지 자유주의조차도 좌파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천황을 중심으로 내각이 이루어진 일본에서 개인의 자유를 중심하는 자유주의조차 용납할 수 없고, 사회주의 노선 같은 경우 반봉건을 넘어 반국가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 내지 아나키스트를 비교하면 유사한 접점도 있는 반면 그 기본은 다르다. 박열은 기본적으로 아나키스트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광복군 내지 임시정부만 생각하겠지만, 주로 공작과 암살을 주도하던 이들은 아나키스트들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암살을 하던 자 중에 조선총독부 주요인물, 을사오적 같은 친일파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암살만 아니라 관공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의열단이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이 있은 후인지 영화 <박열>에서 폭탄을 구하기 어렵다는 장면이 나온다.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써 극단적 자유주의를 추구한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로 이상하게 가고 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하는 자유주의란 국가나 사회가 무엇이든 그 개인이 하고자 하는 행동에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 없다. 단지 그 자유적 책임이 죄가 없는 사람에게 피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권총과 폭탄을 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갔다. 성공할 수 없을 줄 알면서도 혹은 가서 아무런 성과 없이 죽임을 당할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의 공간에 찾아간다. 친일파와 일본 관료를 무참하게 살해해도 일본의 민중은 건들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들의 마음은 그게 중요했다. 일본의 민중 역시 억압받는 또 하나의 인간이라 본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의 국제사회에서 보여준 행동들은 민족과 국가가 있더라도 아나키스트들에겐 그것은 이미 초월한 개념이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인이지만,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부정했다. 아나키스트 역사에서 대표인물로 이회영이 있겠지만, 이회영과 같이 활동하던 단재 신채호도 있다. 신채호에 대한 자료를 본다면, 그가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에 참석할 때 일본, 중국, 조선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영화 <밀정>을 보면 조선독립운동에 헝가리 아나키스트가 도움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역시 제국주의를 부정했기에 그들과 접점이 있은 것은 사실이다.

 

영화 <박열>에서 갑자기 후미코가 노래를 부르니, 옆에 있던 불령사 회원들도 모두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 노래의 기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만든 국제노동자조직 인터내셔널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인터내셔널가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시기에 프랑스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와 같이 불러진 노래이고, 결국 인터내셔널가는 초기 소비에트연방의 국가가 된다. 하지만 그 노래는 가끔 노동자의 날에 길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이 가진 분노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무엇 때문에 후미코가 박열에게 빠지고, 죽음을 닥칠 것을 알면서도 불령사에서 활동했는가? 박열은 시 개새끼를 짓는다. 부당한 권력 앞에 힘없는 자가 조롱당해 억울함에 복받쳐 나오는 눈물을 해학적으로 써내려갔다. 후미코는 이 시를 보고 박열에게 반했고, 그 마음은 평생 이어갔다. 후미코는 가난한 이유로 어린 시절에 수많은 고생과 핍박을 받았다. 단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조선인만 고통 받는 게 아니라 일본인 내에서 가난하고 힘 없는 자도 억압에 시달린 점이다.

 

영화에서 일본 변호사 중에서 후세 다쓰지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후세 변호사는 영화에서 소개한 것처럼 한국건국 훈장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나, 2·8 독립선언문 제작에 도움을 주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만 아니라 일본의 가난한 노동자를 대변한 변호사이다. 평생의 약자를 위해 헌신했으며, 대한민국 헌법조차 그가 초안을 제공했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영화 <박열> 구성은 박열과 후미코의 만남, 일본내각의 음모, 그리고 관동대지진에 따른 조선인 학살, 박열의 구속과 재판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후미코가 죽고, 박열은 후미코의 의문사와 관동대지진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원한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마지막까지 삶을 택한다. 시나리오라면 이미 역사도서 내지 평전 혹은 인터넷 자료에 잘 나왔을 것이다. 단지 영화에서 이런 시나리오의 토대가 되던 당시 상황을 어떻게 각색 하는 가이다. 박열은 영웅의 이미지보단 광인 내지 광대로 자체했다. 일본 검사와 법원에 당당했고, 보통사람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에 후미코 역시 박열 이상으로 광기를 보여준다.

 

검사가 박열에게 협박을 받았냐는 말에 오히려 자신이 박열을 협박하고, 사상적으로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이야기 흐름은 박열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그 중심인물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후미코였다. 이야기의 최고조는 법정이다. 법관에게 자신의 사상을 당당하게 말하는 박열과 후미코의 연기가 돋보인 상황이다. 박열과 후미코 역을 맡은 배우는 한국인이나, 대사를 말하는 과정은 롱 테이크로 할 수밖에 없다. 일어로 말을 해야 하나, 일어에 대한 발음과 대사, 그리고 감정표현 모두 신경을 써야 하는 고난이도 연기이다. 법정에서 긴 대사만으로 작품의 의미를 내세울 때 배우의 연기력과 감독의 연출력이 없으면 어렵다.

 

한국에서 법정에서 롱 테이크로 명장면을 연출한 영화는 송강호 씨가 등장한 <변호인>이다. 부림사건 때,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를 위해 야학을 해준 대학생들은 불온사상가로 매도해 정식 심문을 거치지 않고 고문을 가한 한국에서 잊을 수 없는 용공조작사건이다. 피고가 된 자들은 모두 죄가 없지만, 죄인이 되어야 했다. 관동대지진 때 죄 없는 조선인들이 권력자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법치국가에서 죄의 유무는 법정 안에서 밝혀지는 게 당연하나, 오히려 법정은 권력을 대변하는 하나의 도구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관동대지진이란 대재앙을, 그때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후세에 남겨준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기린 것이다. 영화에서 시대는 일제강점기이지만, 그 맥락은 현대적으로 유사한 점들이 많아. 권력계층들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혹은 군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희생양을 찾아 제거하고, 거기에 반발하는 자들은 철저히 왜곡한다. 정보를 차단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나가는 모습은 비단 일본 관동대지진 사건만은 아니다.

 

영화 <박열>말고도 역사적 사실을 근원으로 만든 작품들이 많다. 이런 작품에서 주장하는 바는 역사라는 기록에서 당시 누군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각본을 만들지만, 왜 각본을 짰는지를 우리 관객은 생각해야 한다. 영화 <박열>은 상영시간이 2시간 10분 정도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관람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주말의 킬링 타임 영화으로 마무리 된다면 너무 아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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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 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
정윤섭 지음, 서헌강 사진 / 열화당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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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소 시대유행에 따라가는 것보다 그냥 내가 좋아서 선택하여 취향 및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진보적이고, 때로는 보수적이고, 혹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전통과 관련하여 21세기 중국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이 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아래 기존 중국의 전통문물 및 사상을 파괴했다. 공자의 출신이 중국이나, 중국은 공자를 묻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공자의 사상은 다시금 세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공자의 위패를 모조리 없앤 바람에 그나마 공자의 위패가 있고 향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에 와서 다시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 공자의 사상이 왜 다시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하면 답은 나온다.

 

근대화란 이름 아래 서구화를 이룬 것은 좋으나, 결국 자기정체성이란 이름 아래 문화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중국이 그동안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으나, 정작 마르크스가 가르친 교훈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주도로 이루어진 관료주의 사회주의 체계만 존재한다. 거기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중국은 자본주의형 사회주의 국가로 된 것인가? 그런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 이름 아래 과거에 버렸던 공자를 찾고, 유학을 찾는다. 우리는 유학 하면 고리타분한 것으로 알겠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 유교의 문화, 아니라면 조선의 문화가 강하게 숨 쉬고 있다.

 

하다못해 우리 언어라고 하는 한글조차 사실 그 기원은 조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성과품이다. 유교문화 국가에서 나온 성과품이 계속 이용하고 있다. 과거의 훈민정음이 한자를 읽지 못하는 백성을 위한 언어라고 해도, 결국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정치사회를 이끌어간 왕조와 사대부들이 창조한 하나의 체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20세 말에 시작되어 한국에서 21세기 초반에 담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사상을 해체 및 보완을 하는 것도 있지만, 3세계의 문화가 소외되지 않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나 남미, 중동아시아 등 비서구화된 세계가 있는 공간에도 그들만의 문화와 사회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처럼 서구화된 국가조차 서구화 이전의 문화가 없던 것은 아니다. 한국 전통문화가 예전에는 별 소득이 없는 것으로 봤지만, 이제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매년 관광객이 찾아온다. 20세기까지 중공업이 주요한 산업경쟁력이면, 이제는 탈산업화에 따른 문화적 관점, 즉 취미와 취향, 그리고 문화유산인 것이다. 한국이 김치가 유명하다면, 그 김치의 기원은 조선에서 시작된다.

 

조선이 전근대사회이고, 조선은 일제침략과 산업화에 따른 문화적 해체를 겪는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주요경제활동은 농업이고,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기존 향약체계에 따른 문화적 전통이 남아있었다. 조선의 시작은 훈구대신이란 공신들이 있었지만, 차후에 사림 선비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림의 선비는 권력을 잡기도 했지만, 권력에 소외되면 향리에 남아 농사를 짓거나 글공부를 하였다. 그런 선비들 중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과거에 나가지 않고, 현세의 문제를 찾아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책으로 남겨 실학적 면모를 남겼다. 한국의 실학사에서 지봉 이수광, 반계 유형원 등이 시작하고,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이란 거대한 학맥을 이룬다. 지금 한국의 유교를 보면 길재와 정몽주, 김종직과 정여창, 김광필과 조광조를 내세우고, 이언적과 이황, 율곡과 송시열, 조식과 서경덕 등을 내세운다. 그러나 유교연구에서 가장 많이 검토되는 대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다. 그들이 그나마 앞자리에 있던 선배들보다 뒤에 있는 점도 있지만, 그들은 단순히 조선을 사대부들만의 국가가 아니라 그 이상의 국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유교의 학문은 성리학에서 많은 장점과 단점을 만들었다. 공자의 유학은 정치적 도를 추구하나, 죽음과 세상만물 이치에 대한 부분에서 부족했다. 이것을 보완한 게 주자의 성리학이다. 문제는 성리학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견고하게 만들어진 학문체계이고, 그것이 그대로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보았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예송논쟁 같은 거대한 혈쟁을 펼쳤지만, 그 이면에 생각하면 통치술이란 어떻게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사유지만, 성리학은 그 원래 취지를 벗어난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에서 광해군 시대를 막을 내리게 만든 인조반종에 따라 서인들이 집권하고, 서인들이 정치적 암투로 인해 소론과 노론으로 분리되고, 조선이 망하는 그 마지막까지 노론이 지배했다. 을사조약에 서명하고, 동참한 대신 중에 거의 대부분 노론이라 한다. 조선을 말아먹은 노론의 형태에 대해 생각하면 조선의 유학은 정말 버려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조선의 유학은 노론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그 중에서 오히려 21세기에도 위대한 세계적 위인으로 칭송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2012년 유네스코 기념 세계인물로 장 자크 루소, 로드 드뷔시, 헤르만 헤세와 같이 올라갔다. 세계적인 음악가 드뷔시, 문학가 헤세,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에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확립한 루소, 이 거대한 인물 속에 정약용이란 이름이 당당히 올라갔다. <왜 조선유학인가>란 책을 보면 정약용에 대한 부분이 책자의 1/3에 이른다. 정약용이란 이가 있기에 조선의 유학은 세계적으로 큰 학문으로 인정받았고, 세계 유학 학술에서도 당당히 그의 사상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검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다산이 역사적 조명을 되찾기 위해서 아주 기나긴 시간을 참아야 했다. 그의 명성을 다시 찾은 것은 100년 뒤다. 18362월 고향 마재에서 회혼식을 맞이하던 중 눈을 감은 그는 평생 정치적 박해로 시달렸다. 형제와 가족, 일가친척, 친구들의 목이 형리의 칼에 무참히 베어졌다. 그가 유배를 마치고 와도 아무도 그를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열수가 무너지면 수만권의 서고가 무너질 것은 알아도, 그 서고를 아무도 이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 이유는 정약용 선생은 벽파노론이 아니라 시파남인이었다.

 

벽파와 시파의 차이는 사도세자, 정조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두고 애절함을 느끼는 자가 시파이고, 오히려 제거가 잘 되었다고 보는 자가 벽파이다. 정약용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다. 이때 정약용이 태어나고, 귀향하여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에 지은 아명이 귀농(歸農)이었다.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윤씨이다.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현감에 있을 때 외갓집인 해남에 내려가 책을 읽기도 했다. 정약용의 사상은 단순히 그의 천재성이 아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조성된 집안 환경이 매우 컸다.

 

어머니의 할아버지는 공재 윤두서이고,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종손이다. 또한 공재 윤두서의 아내는 지봉유설 저자 이수광의 후예이다. 지봉유설이 실학의 시작점이고, 그 뿌리는 다른 줄기로 타고 가서 정약용이란 거대한 대양(大洋)에 흘러간 것이다. 독립운동가 위광 정인보는 다산을 두고 조선의 마지막 등불이라고 했다. 다산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다산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 및 기념관, 다산에 대한 책들은 계속 우리 주변을 돌고 있다. 정약용은 역사기록에서 권력자에 의해 패배자로 기억되었지만, 후대에 이르러 한국의 위대한 위인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기록이 지금까지 무사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약용 선생의 가족과 제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조선왕조 시절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의 사촌이었다. 2014811, 한국 천주교회사에 가장 성스러운 행사가 있었다. 교황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한국에 방문하여 천주교 유적지를 방문하고, 명동성당에 미사를 봤다.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한국에 방문하여 하신 업무 중에 한국 천주교 성인을 시복하는 일이었다. 그 시복대상자 중에 1791년 신해사옥 때 참수당한 윤지충이란 진사였다.

 

윤지충은 다산 정약용 선생과 사촌이었다.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사촌동생 권상연도 천주교 문제로 참수를 당했다. 국가반역죄인과 동급으로 취급당한 윤지충의 죄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사른 후 천주교방식으로 장례식을 치룬 것이다. 관아에 고발되어 배교를 하지 않은 채 참수당한 그는 정약용 선생만 아니라 해남윤씨 일족까지 여파를 주게 되었다. 윤지충이 죽은 후 1801년 신유사옥에서 정약용의 친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이 참수를 당한다.

 

정약용의 유배 18년의 시작이 가족들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정약용의 유배지 중에 가장 유명한 장소는 강진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외가의 먼 친척들의 소유물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귤정공댁이고, 다산초당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행당공댁이었다. 다산의 주변을 보면 해남윤씨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다산은 학문을 쌓을 때 평생 성호 이익 선생을 흠모했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다산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와 아주 친했다. 게다가 이익의 형인 이잠과 이서 역시 윤두서와 매우 친한 친구였다.

 

이익의 아버지 이하친은 숙종 때 경신대척출로 귀양지에서 사망하고, 큰형 이잠은 상소문을 올리다 노론의 공격에 의해 장살되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이익과 윤두서는 벼슬을 포기한 채 학문에 매진했고, 단순히 성리학만 아니라 지리학, 천문학, 의학, 음악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는 잡학가가 되었다. 잡학은 벼슬에 도움 되지 않으나, 조선의 백성에게 필요한 기술이었다. 기상을 알면 농사가 보이고, 지리를 알면 무역이 보이고, 의학을 알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기술을 쌓으면서 성호 이익은 박학다식한 학자가 되었고, 남인들 대부분은 성호 이익에게 가르침을 받아 성호학파란 거대한 실학학파가 탄생했다.

 

윤두서 역시 그런 실학적 가치관을 지녔고, 그의 관점은 백성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을 관찰했다. 이런 사상적 흐름이 다산에게 이어진 것이다. 다산의 외가 해남윤씨 녹우당, 한국 최초 천주교 순교자의 집, 한국 국문학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고산 윤선도, 녹우당 터는 해남윤씨가 기거한지 500년이 되었고, 고산이 효종에게 하사받은 가옥은 400년이 되었다. 한국 전통고택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는 녹우당, 한국 전통가옥 연구에서 녹우당은 매우 중요한 건축연구 대상이다.

 

몇 백 년 동안 전쟁과 풍파를 견디고 살아남은 그곳은 조선의 문화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세계이다. 예전에 전주 한복마을을 놀러간 적이 있었다. 한복마을 인근에 전동성당이 위치해 있다. 그곳은 정약용의 사촌 윤지충이 참수당한 곳이고, 그의 피가 서린 곳에 성당이 올라가있다. 해남윤씨 문중 홈페이지에 그동안 그늘에 숨어 있었던 윤지충의 초상화가 등장하고, 518 광주 민간인학살사건에서 마지막 수배자인 윤한봉도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낼 수 있었다.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남윤씨는 그렇게 바람 잘 곳이 없는 집안이다. 나의 아버지는 배를 타시고 몇 개월 동안 외국에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부자의 정을 깊게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어디를 놀러가는 일은 전혀 없었으며, 집에 오시면 집안 내부 수리일을 돕기만 했다. 그래서 대화의 주제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제대로 이야기한 부분이 정약용 선생과 고산 윤선도 고택에 대해서였다. 아버지는 정약용 선생의 따님이 강진 항촌마을에 시집을 왔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터져도 녹우당이 무사한 것은 국군과 북한군이 교대로 지켜주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해남윤씨 기원은 윤선도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해남에 장가와서 생활하던 도중 나라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해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가뭄에 시달려 배고픔도 한탄스럽지만, 가난이란 이유만으로 옥살이를 해야 했던 많은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이때 어초은공이 자신의 재산을 나라에 기부하여 옥문에 갇힌 백성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한다. 그것도 1번도 아닌 3번이었다고 한다. 해남윤씨 종가와 관련하여 본관이 해남이라 해도 본래 해남윤씨 집성촌은 강진군이고 문중의 장손 역시 강진에서 터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무관직을 주로 역임하다 조선 후기로 가서는 문관을 주로 많이 배출했는데, 양반 사대부 집안이라 해도 일반적인 양반의 모습으로 살지 못했다. 어초은의 스승인 금남 최부는 윤효정의 아내 언니의 남편이었다. 최부는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화를 당해 죽임을 당하고, 윤효정의 아들 윤구는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해 유배가게 되었다. 개혁적인 정치세력에 따라 권력으로부터 견제를 당했고, 신해사옥과 신유사옥 시에는 더 큰 위기에 봉착했다. 해남윤씨는 8대 종파가 있는데, 그중 어초은공파가 가장 많이 활약했지만, 그만큼 시련도 많았다.

 

선조시대 정여립 반역사건 시 동인의 영수 이발이 죽임을 당할 때, 그의 노모는 윤구의 딸이었고, 윤선도에게 고모할머니가 되었다. 고산 윤선도 역시 유배로 이루어진 삶이었고, 그런 비운의 삶은 한국의 국문학을 성장시켰고, 그의 흔적은 한국 대표 문화관광지가 되었다. 21세기 한국이 세계적으로 계속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한국이란 그 나라는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되묻게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를 방문하면 국가적으로 전통적 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얼마 전 한국에 방문한 벨기에 여군대령은 그 나라의 공주였다. 벨기에의 공주라고 해도 그녀는 특권을 가진 권력자보단 시민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동안 멀리했지만, 다시금 찾아가게 되는 회귀현상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 유교는 모조리 뿌리 뽑았지만, 지금의 유교는 전 세계에 공자학교가 세워질 정도로 다시 활약하고 있다. 조선유학에 대한 책을 보고 난 뒤 서양철학을 보면 그 말을 취지는 조금 상이할지어도 거기서 의미하는 맥락은 유사하다. 서구의 학문이 들어와 서구화된 것처럼, 그 서구화의 사상적 토대 역시 서양 철학가 내지 사상가에 의해 존립된 것이다. 그런 학문적 전통을 살리기 위해 각국에서는 그들 나라의 위인들의 역사적 기록과 업적을 기리며, 그들이 살았던 공간을 문화적 배경으로 삼는다.

 

과거의 가치가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나, 적어도 지켜갈 가치가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통문화 기념한 유적지 및 관광지를 찾아가면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 지금은 어느 정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꾸준히 잊지 않고 지켜온 것이다. 녹우당 외에도 많은 전통한옥에 오랫동안 지켜오고 살아온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자유로운 인생을 포기하게 만들지언정 자신의 인생철학에서 오히려 더 소중한 것을 지켰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봐서는 답답할지 모르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은 휴가와 휴일을 이용하여 그런 장소를 찾아 떠난다는 점이다. 누군가 즐기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 토대를 구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누군가 그것을 맡기기만 하면서 그것조차 비웃으면 참으로 바보가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해남과 강진의 관광문화지도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정약용의 외가만 아니라 정약용의 친구 겸 사돈, 그리고 사위의 집과 무덤도 올라간 것을 보았다.

 

정약용 선생의 어머니가 해남윤씨지만, 자신의 딸도 해남윤씨 집안에 보냈다. 다산의 외가가 어초은공파라면, 다산의 따님이 시집간 곳은 해남윤씨 참봉공파 만호공댁 집안이다. 다산의 친구 윤서유,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의 친구 윤광택, 다산의 따님과 외손자가 같은 장소에 잠 들어 있다. 그들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받들어준 것은 역시 그들의 후손들이다. 집안의 틀에 얽매여 거기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굴레지만, 그 굴레가 없다면 한국의 전통문화는 모조리 사라졌을 것이다.

 

<녹우당>이란 책을 보면서 다시 또 느낀 점은 조선시대 사대부는 남성중심이라 해도 여성들의 업적이 너무 감동스러웠다. 여성 국문학에서 규한록을 저술한 광산이씨의 기록에서 애한과 갈등 그리고 운명적 기로가 돋보인다. 나의 가까운 친족이 많지 않은데, 내 할아버지들이 독자로 내려왔기 때문이라 들었다. 나의 고조부는 30살 되기도 전에 운명했다. 아직 10살 채도 안 된 증조할아버지는 고조할머니 손에 이끌려 강진군 항촌마을에 왔다고 한다. 몰락한 가난한 양반에 시집와서 남편을 여의고 하나뿐인 아들을 키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파온다.

 

집안 족보시작은 임오보라 하고, 그것은 고산 윤선도가 시작하여 그의 외손자가 마무리했다고 한다. 남자만이 아니라 딸의 생년월일도 기록하고, 어디에 시집간 것까지 기록했다. 제사문제는 유교문화 이전에 한국전통문화이기도 하지만, 제사를 지내야 하는 점은 단순히 친척을 모이기 위한 문화적 장치만 아니라, 힘들게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으나, 아버지의 빈자리란 공백이 이렇게 만든 모양이다.

 

<녹우당>은 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이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내 아버지와 나와 이야기한 것에 대한 각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많은 내용들이 이 책에 소개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 가난과 배고픔, 서러움이란 한에 눈을 감은 내 아버지를 돌이켜본다면 내게 남은 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들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정리하고, 그런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책을 읽고 거기서 또 다른 이야기를 찾는다. 해남윤씨 집안에 태어나면 그 집안의 특성에 따른 문화적 영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그것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배제할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을 아직도 버리지 않았기에 해남 녹우당 뒷산에는 비파나무 숲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다산초당에 있는 정자에서는 강진만의 푸른 바다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시대는 계속 변화하고, 사회는 계속 이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나온다. 한국인이 한국 사람으로 남는 것은 문화적으로 계속 교류하는 것도 있지만,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게 아니라 계속 새롭게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실학자들은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늘 받아들여 색다른 결과로 이어갔다. <녹우당>의 책에서 소개한 녹우당은 기존의 것을 버리지 않고, 그 기존의 그릇이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 우리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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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농부 바보 노무현
김정호 지음 / 생각의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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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반가운 얼굴들이 생각났다. 집안일로 몇 년 간 봉하마을에 봉사활동을 가지 못했지만, 당시 같이 논밭에서 제초를 뽑고, 공터의 잡초를 베며, 장군차도 같이 심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을 떠오르게 해준 서명은 <바보농부 바보노무현>이다. 책의 저자 김정호는 노무현대통령의 비서관이었고, 퇴임 후에는 같이 봉하마을에 넘어온 사람이다.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은 상당히 작은 마을이고, 주변을 보면 낮은 산과 들판의 벼만 보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봉하마을로 돌아왔다. 김정호 비서관만 아니라 김경수 비서관 역시 그렇다. 김경수 비서관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지금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아내와 자녀를 이끌고 봉하마을로 내려와 노무현대통령 옆에 있었고, 노무현대통령이 그 육중한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된 이후에도 봉하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 하러 봉하마을을 찾아오면, 김경수 비서관은 찾아와 인사도 나누고 같이 식사도 하고 했다.

 

김경수 비서관을 보면 공부를 잘 했고, 안경을 낀 얼굴이 마치 샌님처럼 생긴 반면 김정호 비서관을 처음 봤을 때, 도회지에 나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 후 마지막 여생을 귀향한 농부처럼 생겼다. 옷도 편하고, 머리도 그냥 적당히 하고 다니고, 말투 역시 부드럽기보다 다소 쉰 목소리로 사투리도 적당히 섞었다. 그는 책에서 소개한 것처럼 제주도 옆에 있는 추자도가 고향이고, 대학은 부산대학교를 나왔다. 그러나 중간에 생략된 게 있지만, 고등학교는 영도에 있는 부산남고등학교를 나왔다.

 

영도가 섬이고, 제주도 옆 추자도 역시 섬이다. 섬마을 소년이 지금은 농부가 되어 벼를 베고 정미소에서 쌀을 도청한다. 내가 처음 봤을 때가 아마 20115월이었을 것이다. 2011523일은 노무현대통령이 서거한지 3년이 되는 날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면 준비할 게 많다. 내가 가서 한 것은 그 전에 수고한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더위와 햇빛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찾아오면서 낫을 들고 구릉지에 있는 잡초를 베고, 제초기로 공터를 정비하고, 장군차를 심기 위해 구릉지를 오고가고 했다.

 

경남 김해가 부산하고 가까이 있지만, 사실 내가 영도에 살고, 그것도 영도도 태종대 입구 쪽에 살다보니 상당히 멀었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김해경전철을 환승 후 다시 김해시내버스를 타고 진영역에 가서 마을버스를 타면 총 4번의 버스 지하철을 탔다. 아침 7시 반에 나와 아무리 빨리 들어가도 10시 반 전에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나마 나갈 때 차를 가진 분에게 신세지고 지하철역에 가면 다행이다. 정말 쉽지 않은 먼 발길이었다. 하지만 무척 보람은 있었다. 책을 보니 나보다 더 많이 오래 활동하신 분들의 아이디가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들의 별명을 보면서 옛날 그때가 생각난다. 최근 몇 개월 전 봉하마을에 들른 적이 있었다. 봉하마을은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건물도 제법 몇 동 생겼다. 처음 20096월에 방문할 때 아무것도 없었다. 가게도 몇 군데 없었지만, 상점도 생기고, 식당도 잘 운영하고 있었다. 주차장도 당시 제대로 구비되지 않았는데, 조금씩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이 참 많이 지나간 것을 느낀다. 김정호 비서관은 그런 봉하마을에서 마치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있었다.

 

김정호 비서관라는 호칭보단 봉하마을에서 대표님으로 통한다. 영농법인 봉하를 만들고 운영하기 때문이다. 봉하마을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가장 유명한 역시 봉하막걸리이다. 봉하막걸리에 맛을 들이면 다른 막걸리를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게다가 5월부터 9월 사이 뜨거운 태양아래 노동을 하게 되면 상당히 지친다. 그때 막걸리 한 잔에 두부김치, 부침개 등을 먹으면 다시 힘이 난다. 자원봉사하면 막걸리를 2통 넘게 마신 것 같다. 농사일이 쉽지 않은 것을 알지만 실제 경험하니 더욱 그렇다.

 

농사일과 관련하여 봉하마을 논에 매년 연중행사로 하는 것이 들판에 글과 그림 등을 새기는 것이다. 들판에 녹색으로 너울 걸리는 벼에 다른 색을 지닌 벼를 심는다. 시간이 지나 가을 추수할 무렵이 되면 제법 멋진 글과 신기한 그림들이 나온다. 하지만 성과물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피사리, 흔히 우리는 피라고 불리는 잡초를 제거하여야 한다. 제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벼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므로 잡초를 제거하러 논바닥에 들어가는 일은 참 어렵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거나 혹은 긴 장화를 신고 들어가 몇 시간 정도 제초 제거를 했다. 날이 좋은 날도 하고, 비가 오는 날도 했다.

 

제초를 제거하고 저녁 5시 반이나 6시 되면 조금 쉬다가 저녁을 먹는다.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이나 혹은 그런 분들을 위해 주변에서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준다. 때로는 남는 음식을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을 가지기까지 시간을 제법 걸렸고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봉하마을은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 지금이야 정자가 놓여있고, 각종 들꽃과 야생화가 형형색색을 띄며 방문객을 맞이해주나, 논에 쓰레기나 슬러지가 가득했고, 공장에서 폐수가 몰래 방류되었다.

 

나의 전공이 환경공학이라 그런지 이 책을 보면서 노무현대통령의 환경적 마인드가 대단해 보였다. 사실 환경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문명의 혜택을 대신 넣으면 처음에 편리하고, 많은 이익을 주지만, 나중에 그 이익과 편리함 이상으로 재앙과 피해가 따르는 것이다. 물길을 막으면 물이 썩어 들어가고, 물이 썩으면 병충해가 일어나고, 병충해가 일어나면 작물조차 자라기 어렵다. 이런 순환적 모순을 이기기 위해선 자연 그대로의 조건을 받아 들이야 한다. 자연생태계는 자기 스스로 복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을 존중하여 맞추면 병충해도 이기고, 품질도 좋은 작물을 거둘 수 있다. 봉하마을에서 나오는 막걸리가 괜히 맛있는 것은 아니다. 쌀의 품질이 좋아야 막걸리의 맛을 보장하고, 봉하마을에서 나오는 쌀을 밥으로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우렁이와 오리를 이용하여 친환경적 농업을 일구는 것은 곧 자연을 살리고, 대외무역에서 농촌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이제는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삶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우리는 입맛을 조금 더 즐거운 곳을 찾는다. 봉하마을에 오면 쌀로 만든 막걸리와 각종 재래식으로 만든 반찬들이 입맛을 돋게 한다.

 

직접 내가 고생하여 수확한 작물을 다시 재가공하여 식품으로 마주하면 어떤 기분인가?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고, 농부가 일한 땅은 정직하게 답해준다. 한국에서 농사를 지는 분들을 그렇게 대우를 받지 못하나, 사실 농부가 있지 않으면 사회시스템이 붕괴한다. 왜냐하면 식량은 모두가 먹는 필수도수기이기 때문이다. 식량의 자급적 생산력에서 이미 한국은 외국에서 수입을 의존하고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일본, 유럽, 미국 등에서 곡물과 고기, 생선을 받지 않으면 식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사를 지으면 대부분 농민에게 남는 것은 손바닥에 굳은살이, 얼굴에 까맣게 탄 흔적뿐이다. 자신이 직접 농지를 갖고 농사를 지는 것이 아니라 먼 곳에서 땅만 가지고 있다가 소작농 부리거나, 농지를 가진 이유로 각종 혜택을 보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사회가 도시화되면서 발전한 원인은 그만큼 농촌사회의 손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트에 가서 쌀 204만원 조금 넘는다. 쌀이 가장 싸다는 말은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루소가 인간의 권리가 가장 저조한 이유는 인간의 용도가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라 말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저렴해야 이용하기가 좋았던 것이다.

 

쌀농사를 지어도 남는 것도 없이 빚만 늘어가는 농부의 고민에 쌀 수입이 전면 개방되니 얼마나 힘든가? 그나마 쌀은 국내산이 좋다는 인식이 있기에 식단에는 한국 쌀이 올라와도 농민의 마음을 위로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농사를 지는 것은 자연적 조건을 최대한 고려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파괴하는 농업보단 자연과 친환경적으로 만들어가는 농사는 잃어버린 새도 날아오고 물고기도 헤엄친다. 자연이 푸르고 물이 흐르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은 황폐화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동물 생태계도 공존해야 한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새가 살 수 없는 곳은 인간도 살아갈 수 없다고 말이다. 노무현대통령이 고향에 내려오면서 가장 하고픈 일은 농촌을 다시 살리는 것과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여 농민은 경제적 이윤증대, 자연은 환경복원,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휴식공간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1년하고 3개월 만에 깨지고 말았다. 그가 세상에 없다고, 그가 꿈꾸던 세상은 포기할 수 없었다. 김정호 비서관은 그렇게 농부가 되어 갔다. 책에서 집에서 가출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나도 예전에 김정호 비서관의 따님을 본적이 있었다.

 

자주 오지 않은 모양인데, 오랜만에 찾아온 딸을 두고 계속 봉하마을에 10년 가까이 남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이 미련하면 바보 같다고 하나, 때로는 우리는 그런 미련한 인간을 원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머리만 굴리는 사람보다, 가슴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때로는 너무 그립다. 바보는 분명 욕일 수 있으나, 그 바보라는 의미가 어떤 식으로 가는지에 따라 다르게 판단된다.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상황이 너무 잘 나와 있다. 옆에서 지켜본 사람과 언론의 관점은 다르다.

 

권력은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정보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보단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설정한다. 미디어가 정치적, 경제적 이익에 따라 움직이므로 힘을 없는 자들은 대부분 진실과 먼 형태로 각인되어 그렇게 억압을 받는다. 그저 함께 하던 사람이 옆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이어가는 일이란 참으로 괴롭다. 김정호 비서관은 노무현대통령이 서거할 때 뒤처리로 너무 바빠서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처음 벼를 베고 쌀을 수확할 때 묘비 앞에서 서럽게 우는 장면에서 내 코끝이 진한 느낌이 다가왔다. 봉하마을에서 마지막으로 김정호 비서관을 본 건 작년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니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았다. 조만간 나이가 60세를 향해 가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활기차게 쉰 목소리로 반기는 김정호 비서관, 바보농부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도 중요한 것 같다. 조만간 봉하마을에 가서 얼굴을 비추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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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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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집안 제사일로 시골에 내려갔다. 시골에 가면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척들을 만날 수 있다. 나의 친가 쪽 친척들은 그래 많지 않다.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아버지가 그 위의 할아버지들이 독자이거나, 다른 형제들이 있어도 모두 일찍 삶을 마감했다. 친가 식구가 6촌 이내나 10촌 이내의 숫자가 동일하다. 그 정도로 가족이 많지 않다. 그러나 촌수를 늘려 20촌까지 가면 말이 달라진다. 그때는 제법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친가의 식구들과 제사를 지내면서 이제 식구수도 계속 줄고 앞으로 묘관리가 어려우니 가족묘를 만드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가 되면 우리 직계식구들만 아니라 선대의 할아버지 기준으로 그 후예들은 모두 같은 무덤 내지 혹은 제삿날도 맞추자는 말이 나온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국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518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먼 친척들은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 살고 있고, 제사를 지냐면 동백리 벽송마을로 나는 찾아간다. 그곳에 아주 유명한 인물이 있다. 19805월 광주의 비극에서 마지막 수배자인 합수(合水) 윤한봉의 고향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내 선대 할아버지 묘소를 가는 입구가 마을입구와 겹친다.

 

거기에 합수 윤한봉 생가라는 표지판이 쓸쓸하게 서있다. 윤한봉 선생이 살고 있는 집은 현재 그의 고모가 살고 있다고 한다. 윤한봉의 친척들이 제사를 지내는 시기와 우리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는 시기가 비슷하면, 마을제각에 가서 그들의 친척들을 나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찾아가 인사한다. 게다가 거기 계시는 어느 노인 분은 나의 아버지를 알고 계셨다. 나의 형이나 사촌들은 잘은 몰라도, 내가 합수 윤한봉을 알게 된 동기는 집안문중 홈페이지에 그의 존재를 알았고, 그가 동백리 출신이란 것은 최근 몇 년 전에 알았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윤한봉 선생을 아냐고 물어보니, 아버지가 하는 말에 아주 더럽게 독한 놈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국에 망명 갔다가 병으로 죽은 것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전혀 발을 들인 사람도 아니나, 알고 있었다. 시골에 계신 작은아버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518에 대해 물어보니 작은아버지는 마음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자신은 아직 광주에 있는 518묘지에 가보지 않았으나, 언제 자신을 대신하여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전에 윤한봉 선생의 자서전인 <망명>을 읽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을 처절했고, 상당히 지독한 신념을 지녔으며, 마지막은 가난한 인생을 살더라도 부와 명예 모두 버리고 세상을 떠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한국 미술사학자로 유흥준 교수가 유명하다. 그가 언제 사람들을 데리고 윤한봉 선생 본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가 왜 찾아갔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 읽은 안재성 작가의 <윤한봉>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윤한봉 선생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될 때 옆방에 유흥준 교수가 수감되어 있었던 것이다.

 

윤한봉 선생의 인생을 보면 지금도 한국에서 유명한 재야인사, 학자, 정치인 등이 많다. 김남주 시인과 박석무 다산연구소장, 그의 절친한 후배 윤상원,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린 박기순, 영혼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을 위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어준 황석영 작가 등,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제법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러나 윤한봉이란 이름은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진짜 민주주의 내지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나, 혹은 거기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 또는 그 사람들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왜곡하는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왜 사람이 저렇게까지 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가 가진 평소 성품이나 인격이 어느 특정한 사건을 겪거나, 어느 특정한 인물을 만날 때 변화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훌륭한 인간은 그 자신이 뭔가 성과를 내어 보여주기보다 그 성과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과 가치를 주는 것이다. 윤한봉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멋을 부리거나 사치를 즐기지 않았다. 그가 가진 멋은 인간적인 정이었고, 그가 제일 사치를 누린 것은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가진 것은 쇠불알 같은 가방이다. 세면도구와 속옷 그리고 필기도구가 전부이다. 가방 하나에 모든 것을 들고 다녔다.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남이 오면 좋은 것을 대접하고, 자신은 골방에 잠을 자도 그렇게 모은 돈으로 민족학교 내지 한청련 활동에 모두 투자했다. 세월호 비극이 터지자 뉴욕에서 세월호 관련 운동이 있을 때, 그 모임 주도세력의 창시자가 윤한봉 선생이었다. 미국에 망명갈 때 그는 나라를 잊지 않았다. 전봉준 장군과 김구 선생을 존경하여 민주, 민족, 민중을 사랑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직 배고프고 고통 받은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여겼다.

 

<윤한봉>을 읽어도 그가 한 업적을 생각하면 보통 인간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여겼다. 아마 시골에 가서 윤한봉 선생의 친척들을 만나면 더욱 그럴 것이다. 윤한봉 선생의 아버지 윤옥현은 아들이 민주화운동으로 경찰에 끌려간 뒤 화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시골의 작은아버지가 윤한봉과 518의 이야기를 듣자 착잡한 기분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에 획을 남긴 인물, 그리고 그가 살아온 인생이 마치 선구자 내지 순교자 같다면 그가 후세에게 큰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하나, 그가 살아온 인생도 그러하나 주변 가족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희생으로 이루어져 오늘 자유민주주의를 맞이하게 되었다. 최근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등장했다. 새로운 대통령은 거의 10년 만에 518행사의 본질을 되살렸다. 유족을 찾아 위로하고, 그들과 같이 묘역에도 참배를 해주었다. 518 비극이 슬픈 이유는 그 당시 희생자는 계엄군에 저항하던 많은 시민들도 있지만, 어린 여중생과 여고생도 있었고, 심지어 세상의 빛을 얼마 보지도 못한 어린 아이들까지 있었다. 광주의 비극은 윤한봉 선생에게 평생 부채로 남았고,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 혼자 미국에 있었다는 사실은 스스로 철저한 인생으로 빠지게 되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 최근 한국의 지성인이나 엘리트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현상이나 사건들을 보면서 어려운 말로 직시하여 고찰할 수 있지만, 때로는 너무 감정적으로 수사적으로 빠져든다. 논리라는 것은 정확한 통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의 기본적 윤리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 지식인층은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의 도덕적 매너리즘에 빠져 대중과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윤한봉 선생이 518 이전부터 활동할 때 농민을 위해 활약했다. 농민들은 제대로 아는 것이 없고 오로지 땅의 진실만 추구할 뿐이다.

 

그런 농민에게 어려운 말을 늘여놓고, 실질적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민주주의 내지 진보적 가치관을 지닌 지식인 내지 엘리트 한계는 바로 여기서 부터이다. 그들이 말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들이 만든 지성과 감성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 지성을 위한 지식이 필요하기도 하나, 그 이상으로 그들이 가진 지성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이 진실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가장 높은 자들은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갈 용기가 필요하다. 서민이나 농민이나 모두 말을 예쁘게 하지 못한다. 욕을 반 섞어 가고, 때로는 농담 그 자체로 이끌어가야 할 때도 있다.

 

고상한 정신은 필요하나, 모든 사람들에게 고상한 정신을 강요할 수 없다. 윤한봉 선생의 호가 합수(合水), 똥과 오줌이 모두 모인 오물이란 의미이다. 오물은 더럽기도 하나, 우리 모두가 오물을 내보내는 생물이다. 깨끗한 것은 바라도, 그것을 위해서 누군가는 더러운 것을 받아들여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게다가 똥오줌은 과거 농초에게 소중한 비료가 아닌가? <윤한봉>을 읽으면서 우리 모두가 윤한봉 선생처럼 살아갈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집안 일로 알아 갈수밖에 없는 인물이나, 그래도 내가 관심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면 그저 족보에 이름 세 글자 정도 올라갔다는 정도만 알 것이다. 합수 윤한봉이 이 세상과 작별한지 10년이 되었다. 독재군부가 물러가고 난 후 그가 귀국해도 여전히 한국은 어두운 안개에 가려워져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 극진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사상과 가치관은 우리가 절실히 필요해보였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가 합수라는 호처럼, 광주의 비극은 단순히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라는 것을 그는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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