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참으로 많이 바뀐 것 같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를 나는 잊지를 못한다. 내가 살던 부산 영도에서 어느 한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이름은 최강서 열사, 어느 누구에겐 열사이고 다른 누군가에게 아주 불편한 이름일 것이다. 그가 자살을 한 이유는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문재인 후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문재인 후보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이겼다면 그는 자살을 하지 않았고, 영도에서 중앙동으로 넘어가는 부산대교에서 그 긴 행렬의 장례행사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노동자의 현실을 사람은 잘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체는 잘 모르겠다. 실로 노동자 본인조차 자신에게 가해진 현실에 대한 부조리에 무지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매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친다. 만일 그 피해를 당한 사람이 본인의 가족과 친구가 된다면 세상에 대한 부조리에 깊이 좌절한다. 그 좌절의 맛을 본 사람은 세상에 대한 불만과 모순에 원망으로 매우 부정적인 삶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대통령이 바뀌어 당장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극단의 선택을 고르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만 구축할 뿐이다. 그 말은 무엇인가? 억울한 일이 있으면 말할 수 있는 기회도 주고, 전부 해결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그림자들의 섬>에서 오늘 내가 본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노무현대통령은 부산에서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국회로 입성 후 청와대로 들어간 인물이다.

 

노무현은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이고, 가진 게 없는 서민이라도 서민의 편이 제대로 될 수는 없어도, 되고 싶어도 그에게 힘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들은 더 없었다. 지난 참여정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실패한 정부라고 한다. 그런데 정권에서 다른 대통령 2번을 거치고 오면서 이제는 그 말을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영국정치가 및 역사학자인 E.H 카를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모르고, 혹은 긴 어둠의 터널을 헤쳐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역사에서 10년이란 시간은 정말 짧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매우 길고도 힘든 시간일 수 있다. 10년이란 시간을 두고 우리는 무엇이라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판단에 따라 서로 다른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만의 주장을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잘 했다고 말이다. 참여정부는 실패했는데 왜 노무현대통령이 1등이란 말인가? 그것은 지난 다른 대통령을 겪으면서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림자들의 섬>에서 노동자들의 시선에서 노무현 대통령도 탐욕스러운 자본가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런 자라면 퇴임 후에 화려한 생활도 하지 못한 채 1년 조금 뒤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내 가슴을 적시고 말았다. <노무현입니다>라는 영화는 노무현이란 인물을 과거의 인간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등장시켰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참으로 신화(神話)적인 존재이다. 신화란 인간이 아닌 신의 이야기라고 하나, 신은 인간의 심리와 욕망을 대체해 놓은 존재에 불과하다. 인간을 신격화시킨 점에서 노무현은 생물학적으로 사망했지만, 사회적으로 다시 부활한 존재이다.

 

인간의 죽음을 두고 어느 누군가는 생물학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에서 완전히 소거될 경우 사망이라고 지칭한다. 그가 남겨놓은 많은 자료에서 노무현은 죽은 인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다가온다. 그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E.H 카가 말한 역사라는 존재는 과거와 현재가 영원히 멈추지 않고 대화하고 있다면 노무현이란 존재는 과거가 있는 자가 아니라 미래진행 상황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은 그렇다 하더라도 제작사가 CGV(물론 아트하우스에서 지원했지만)라는 점이다. 대기업이 노무현대통령을 위한 영화를 제작하는 것, 그 시기가 전직 대통령이 탄핵 및 파면 전이란 점이다. 영화 개봉 시기는 525일이나 이미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되었다. 전에 내가 본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독립영화 또는 예술영화를 상영하던 규모가 상영관에서 볼 수 있었다. <무현, 두 도시 이야기>로 전인권의 노래인 걱정말아요가 상당히 흥행했다.

 

<노무현입니다><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비교하면 전편은 대통령 경선에 대한 이야기이고, 후자는 2000년 부산 북·강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이야기이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르지만 연결이 된다. 부산 북·강서에서 패배한 노무현은 원래 종로 지역구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었다. 유리한 배경과 조건이 있는데도 반대당의 영역인 부산에 내려와 외로운 전쟁을 시작했다. 그 외로운 전쟁은 겨우 지지율 2%인 약소후보를 2002년 대통령선거후보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저 노무현대통령이 고졸 출신 변호사로 잘 안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노무현대통령을 희화한 캐릭터이다. 고등학교도 경기고, 부산고 같은 명문 인문계열이 아니라 상고출신이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한 사람도 적은 시기지만, 상고출신 가방끈 짧은 변호사에게 세상은 참으로 야박했다. 노무현대통령도 만약 집에 여유가 있다면 부산에 유명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서울에 있는 법과대학을 나와 사법고시에 붙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농부의 자식은 학교에 다닐 입학금보다 오늘 당장 해결해야할 저녁밥이 걱정이다.

 

가난이란 것은 참으로 슬프고 원통한 것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멸시를 받고 조롱을 받는 것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그리고 더 서러운 것은 그 가난이 나의 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식과 후손에게 영원히 이어져 가는 것이다. 노무현은 가진 게 없는 비주류 중에 비주류이다. 가난한 이유로 굶주리며 살아가야 했던 그에게 그 가난이 자신의 적이었다. 비주류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난이었다. 가난이 학교도 가지 못하고, 백도 만들지도 못한다. 가진 게 없기에 상대방과 싸울 때도 늘 밀린다.

 

노무현에게 가난과 그 가난으로 이어진 가방끈의 콤플렉스는 깊은 분노로 만들어진 슬픔이었다. 생각하면 그가 속한 당에 있던 사람은 과거에 야당만 해왔다고 해도, 김근태 의원은 학생운동의 대부였다. 하지만 학생운동을 하던 자들은 대부분 명문대학교 출신이 많았다. 엘리트 세계에 속한 자들이 가진 뛰어난 머리와 양심은 좋지만, 그 한계성이 있었다. 엘리트들은 가난한 사람이 힘들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그 힘든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힘들게 살아가는지는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통과 드러나지 않은 심연의 고통은 다르다. 지금은 대학을 대부분 가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대학교보다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한 사람도 많다. 길가에 가는 어르신들은 초등학교만 나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가난 속에 숨겨진 세상에 대한 원망과 우울은 아마 노무현대통령의 힘이었던 것 같았다. 노무현대통령 임기 5년은 나에게 군복무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200312월에 입대하여 20083월에 전역했다. 입대하기 전부터 노무현대통령을 지지했던 나로선 전역 후 주변사람들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노무현대통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괜한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군복무 중에도 그랬지만, 2008년 봄은 유독 심했다. 그런 분위기는 1년 뒤 2009년 늦은 봄 5월에 잊을 수 없는 비극으로 결말이 되었다. 그가 세상에 마지막 모습을 드러나기 전에도 나도 외로웠다. TV와 신문에는 늘 노무현대통령만 때리는 기사만 나오고, 이른바 소위 진보언론과 진보지식인도 숟가락을 올리며 더욱 심하게 때렸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세상이 허무한 공간이 되었다. 생각하면 진보정당이나 진보언론·지식인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심하다.

 

노무현이란 이름을 두고 계속 돌팔매를 날리다가 총선시기가 나오면 노무현의 이름을 우려먹는다. <노무현입니다>란 영화를 보면 한 측근이 나와 봉하마을의 장례행렬을 이야기해준다. 자신과 아무런 면식도 없고 아무런 득도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와 그 빗속에서 장시간 비를 맞으며 참배를 한 모습에서 진정 이것이 노무현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노무현대통령을 소재로 한 도서와 영화 그 밖의 매체들은 노무현대통령을 누군지 알려주는 계기도 되지만 한편으로 그를 우려먹는 도구도 된다.

 

노무현대통령은 완전히 신화적인 존재라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었고, 반영웅이 되었다가 다시 영웅으로 소환되었다. 그가 영웅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상고 출신 변호사가 노동인권운동을 위해 길 위에서 싸우고, 많은 권력자들에게 맞서서 싸웠다. 우리가 입에서 말하지 못한 것을 그가 대신 속 시원하게 말해준다. 그가 반영웅이 된 동기는 무엇인가? 혼자 들쑥날쑥 설치다 현실의 벽에 걸리거나 또는 그를 믿었는데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이유이다. 이에 대해 그가 처한 입장이나 현실적 시스템에 대해 우리는 그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했다.

 

그가 선택한 최후는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지금 젊은이 사이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있기에 노무현대통령이란 인물이 누군지 궁금할 것이고, 극우사이트에 접한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그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데 정작 그가 누군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자신의 크고 작은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은 주변인들을 외면한다. 그러나 노무현은 끝가지 외면하지 않는다. 돈을 포기하지 못해도 사람은 쉽게 포기하는 세상, 노무현대통령을 사람들이 다시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영화 제목 <노무현입니다>는 과거 정철 카피라이터 책제목인 <노무현입니다>와 일치한다. 영화제목이 저렇게 만든 이유는 노무현후보는 길거리에 나가 길가의 사람들에게 인사하면서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라고 말한다. <노무현입니다>를 보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대통령정부기관이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은 국민이란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2% 만년 꼴찌가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하여 마지막에 취임식에 간다는 것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노무현대통령은 신화가 된 것이다.

 

그의 시작은 서사의 발단이고, 그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발단이며, 그가 임기 중과 퇴임 후는 위기였고, 그의 죽음 절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는 다시 서사의 발단으로 돌아갔다. 서사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은 모든 것의 종료가 아니라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다. 생물학적 노무현은 이미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노무현이란 이름 세 글자는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서 노무현은 이렇게 다시 말한다.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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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5-2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j가 박근혜 정부에게 압박당하고 명량,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등 아부성 영화 제작도 했지만 민심을 읽는 마케팅은 정말 잘 아는 듯.
http://www.huffingtonpost.kr/2017/01/16/story_n_14192040.html

만화애니비평 2017-05-28 22:13   좋아요 0 | URL
변호인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아무리 탄핵정국이라도 이런 행동은 거의 모험이네요. 마케팅도 대단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임원들의 판단도 대단.
 
윤한봉 -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안재성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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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나올 줄이야. 윤항봉의 자서전인 망명이란 책을 본 적이 있었다. 윤한봉의 생가는 강진군 동백리 벽송마을에 있다. 내가 매년 시제로 벽송에 가는데, 언제나 갈때마다 마을입구에서 윤한봉 생가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비록 그의 묘는 광주에 있으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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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변호인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양우석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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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이 TV에서 방영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알고보니 이 영화를 상영 후 CJ 부사장에게 엄청난 압력이 왔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짐작했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아픈 장면은 경찰에 끌려간 끌려간 아들을 보고 온 순애가 송변을 만나 변호를 애원하는 장면이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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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안국진, 이정현 외 / 아트서비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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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소설은 아마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가 살아가는 세상은 환상과 재미가 있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현실이 단지 꿈이라면 혹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이라면 말이다. 혹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 즉 이데아란 존재하지 세계가 존재하면 어떤 것일까 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품어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저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가 적은 것은 정치철학 도서로 군림하고 있지만, 책을 보면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 같은 형식이다.

 

플라톤의 대표도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이데아(Idea)에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 공간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관념적인 가치관이 존재하던 세계와 달리 현실은 물질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이니 다소 인식의 간극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물질적 세계, 유물론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도 관념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현실은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우리가 이상적 가치를 삼아야 하는 그 이념조차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해진 가치관을 우리 인간들은 말을 하고 있어도 전혀 반대로 움직이지는 이상한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고 있자면,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1세기 한국에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력이 돋기 시작한다. 물론 앨리스 그 자체가 그런 성향일 수 없으나, 소설 속의 앨리스는 상상 속의 인물, 즉 현실에 없는 가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가상적 존재이기에 마치 어느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기에 우리 인간들은 그들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하나의 필연성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우리 현실을 다룬 이야기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앨리스라면, 당연히 환상적 가치관이 녹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다. 오히려 너무 적나라하기에 게다가 그 현실이 우리에게 낯설고도 외면하고 싶기에 더 환상일지 모른다. 우리는 21세기 현대사회를 거치어 오면서 지난 20세기의 흔적을 외면하려 한다. 공장이나 산업노동자는 1960~80년대의 대표적 서민의 삶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는 공업 중심의 노동생산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계속 서비스 중심의 사회로 산업체계가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도 산업노동자는 존재하고, 산업재해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이야기, 우리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 숨겨진 지저분하고 추악한 모습을 이 영화에서 여지없이 보여준다. 바로 앨리스란 여성이 그동안 세상이 자신에게 대해준 부조리에 대한 반동으로서 말이다. 영화초반 주인공의 모습이 나오기보단 주인공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와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이다. 보통 한국의 여성이 신고 있는 신발을 생각해보자. 주말의 시내가 아니더라도 보통 평일의 주거지 주변을 돌아다니면 어린 학생들은 운동화, 20대 내지 30대 직장인들은 구두, 중년 여성들은 운동화, 구두, 슬리퍼 등을 신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앨리스는 다르다. 앨리스 동화책에서 귀여운 에이프릴이 달린 원피스와 아기자기한 구두가 아니다.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신고 다니는 안전화였다. 안전화를 신어본 경험이 있다. 물론 공장보단 공사장 쪽 안전화를 신어봤지만, 기본적으로 신발이 아주 무겁고 매우 튼튼하다. 안전화를 신고 다니는 앨리스 수남은 신문배달, 식당, 청소 등 하루에 몇 가지의 일을 하는 슈퍼 우먼(Super woman)이다. 보통 남자도 체력이 감당되지 않은 노동시간을 그녀는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단 1가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남편, 인간 규정과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수남을 보면 2가지의 삶에서 갈등한다. 하나는 여중을 나와 여공으로 취업하느냐 아니면 고등학교로 나와 엘리트(나는 앨리스라고 생각한다)로 되는 것에서 엘리트(앨리스)를 선택한다. 문제는 학교에 가서부터다. 자격증을 많이 따고, 주판과 타자기를 잘 사용해도 그녀에게 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정현 씨가 연기한 앨리스의 고등학교시절은 아마 1980년대 정도일 것이다.

 

1980년대 컴퓨터 XT가 나오고, 1990년대 386486, 21세기 오면 펜티엄과 그 이상의 컴퓨터가 등장했다. 인간이 손으로 직접 계산하고 타이핑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컴퓨터 엑셀이 계산하고,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문서를 만들어낸다(지금 내가 하고 있는 리뷰 작업도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 작업 중이니 말이다).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이 사회적으로 문명발전이 더해지면 기존의 기술력은 아무 것도 쓸모 없는 잡동사니가 된다.

 

앨리스가 가진 기술은 모두 별 볼일 없는 게 되어 버렸고, 졸업 후 그녀가 처음 들어간 회사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이었고, 결국 그녀는 작은 공장의 사무직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배경에서 앨리스의 고등학교 시절이 1980년대라는 점에서 당시 대학을 안가고 취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취업을 해도 전문적으로 기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공장에 가게 되고, 사무실에 가서는 보조요원만 되었다. 학교선생은 앨리스에게 가슴을 풀어헤치면 그래도 인정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공장에 가니 자신보다 더 볼륨을 가진 여직원이 있었다.

 

앨리스가 가진 자격증도 필요 없으나, 앨리스가 가진 여성적 매력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매일 공장에서 구박받고, 고독한 삶을 살아온 앨리스, 그녀에게 규정이 다가온다. 규정은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노동자고, 처음 앨리스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어준 사람이다. 영화에서 2사람의 출생이나 배경을 말하지 않지만, 나는 이 2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버려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앨리스가 고교진학과 여공 사이에 고민한 점에서 그녀는 원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고아인 확률이 높았고, 규정 역시 청각장애인인 점에서 부모에게 버려진 사람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면 부모와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거나, 의역하여 생각하면 부모의 도움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즉 아무런 경제적 지원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N포 시대의 청춘이었던 것이다. 단지 더 나아가 남편 규정은 청각장애인이었고, 우리의 앨리스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영화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앨리스란 제목이 들어간 순간부터 영화 속 세계에서 앨리스는 성실하나, 앨리스란 인간의 성향은 이미 앨리스틱(풀어 말하면 현실적인 감각이 약간 동떨어진 인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사랑을 받지 않고 그저 먹고살아갈 길만 생각하던 그녀가 세상의 쓴맛(소주를 마시며)을 느낄 때 옆에 규정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오직 규정만이 자신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었다. 여기서 앨리스는 스위치가 off 모드 on 모드로 교체되었다. 앨리스는 사랑하는 규정과 소박하지만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을 원했고, 규정은 자신의 아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집을 사야 한다고 했다. 규정은 청각장애에 가난한 청년이었다. 보잘 것 없는 2사람, 그들은 동상이몽을 꾸었지만, 그래도 같이 의지해야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각장애가 심해진 규정은 난청상태가 심각해지고, 결국 귀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들은 전자기기 주변에 있으면 부작용이 생기고, 작업도중 규정은 절단기에 손가락을 잃고 만다. 부서진 보청기, 그리고 억지로 앨리스의 손에 수리된 보청기, 이때부터 앨리스는 힘겨운 사투를 벌인다. 앨리스는 남편이 원하는 집을 구하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다. 보통 사람이면 포기하지만, 수남은 앨리스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구조의 모순을 본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집을 살 수 없다.

 

자신이 버는 돈보다 집값의 시세가 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도 100% 적금이 불가능하다. 급료 내에서 전기세, 물세, 세금, 전화세, 식비 등등이 나가기 때문이다. 생계 때문에 집을 구하지 못하다가 결국 140,000,000원을 대출받는다. 금융자본주의에 노출된 우리 서민이 10년 넘게 일해도 집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집을 사서 남편이 기뻐할 것이라 여긴 앨리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집을 사자 남편이 앨리스의 손을 잡아주며 슬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다. 카메라(남편의 시선)로 보이는 앨리스 손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과 손바닥에 베인 굳은 살, 그 옛날 부드러운 손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그런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슬프게 우는 남편을 보자, 앨리스는 남편의 손가락이 잘린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죄책감과 그동안 자신에게 무심하게 보인 남편이 아직까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자 기뻐한다. 하지만 남편은 벽에 드릴을 뚫고, 뭔가를 설치한다. 드릴사용법에서 마지막 그림에 어떤 남자처럼 그림이 당신도 멋진 남자라며 말을 건네는데, 남편이 집 안에 봉을 설치한 이유는 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아내인 앨리스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집을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그것을 포기한 남편이 집을 아내에 의해 구하게 되자, 자신이 아내의 삶에 장애물 1호라는 것을 스스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규정, 오히려 그것이 앨리스의 스위치를 Normal에서 High로 전환되게 만들었다. 앨리스는 집을 전세로 내놓고 자신은 원룸 고시촌에서 살아간다. 좁은 방에 침대 하나에 방의 3분의 2는 차지하고, 나머지는 작은 수납공간만 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 후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 힘든 일과 외롭게 고시촌에서 살아가는 앨리스, 그녀가 이런 선택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동네가 도시계획구역에서 금회 시범적으로 도시개발계획에 속하게 된 것이다. 도시재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당초 그 지역이 철거되고 새로운 아파트나 상가 그리고 도로가 신설된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부동산투기나 시세차입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된다. 영화에서 앨리스가 살아가는 지방자치단체는 해정구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서울시 영등포구 목동 일원이다. 목동문화체육센터 옆에 있는 임야공원, 한강 옆으로 안양천이 흐르는 동네였다.

 

도시개발사업이 이루어지면 부동산시세 차이 내지 혹은 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문제는 그 도시계획 구역계에서 앨리스가 사는 동네만이 우선적으로 시범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때부터 앨리스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인내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구청 소속 상담실을 운영하는 경숙이 자신의 동네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기 위해 전문시위가 최도철 예비역원사를 이용한다. 전문시위 횟수가 300번이 넘은 그는 이른바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도시개발사업을 자신들의 동네로 옮기기 위해 조작한다.

 

국가와 주민이란 이름 아래 경숙과 최원사는 대대적인 공작활동을 펼치고, 구청직원은 경숙이 구청에도 알력을 행사하고, 최원사라는 전문시위가의 권위의식으로 마을주민들을 포섭해갔다. 앨리스는 자신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결국 이 2사람과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최원사의 집에 가서 구타를 당한다. 최원사 역시 이 시대의 희생양 내지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 군에 몸을 받쳐 살아왔으나, 가족도 없이 혼자 독방에서 살아가는 노인이었다. 게다가 생계를 위해 길가에 버려진 종이박스를 모아 폐품가게에 팔며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살아왔지만, 국가는 그에게 고독과 가난만 주었고, 남은 것은 오로지 생고집인 그에게 전문시위 활동과 폐품수집으로 생계를 이어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더우나 추우나 2만원을 받고 현장에 출동하는 어르신들이 생각난다. 다 같이 못살고 배고프고 힘든 서민이나, 진짜 적은 싸우지 않고, 자신들의 세계에서 힘겹게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의 그림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경숙은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최원사가 죽은 후, 경숙은 최원사가 분신자살했다고 주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평소 잘 아는 세탁소 사장을 이용한다.

 

최원사가 죽기 전에 청년부장에서 이제는 최원사의 행동대장으로 임명한다. 영화에서 경숙은 세탁소 사장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 전화는 자기만 하고 약은 3개에서 1개만 먹으라고 한다. 상담소 운영을 하면서 세탁소 사장을 알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준다(왜 자신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손을 세탁소 사장의 얼굴을 쓰담아 주는 것일까?). 세탁소 사장이 경숙의 말을 잘 듣는 이유는 단순히 약을 전달해주는 상담원이 아니라는 점이 내 생각이다.

 

이렇게 앨리스는 다수의 적들과 상대해야 한다. 두뇌파 경숙, 행동파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 그리고 더 나아가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린 형사들까지 말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살인용의자로 수사대상에 올라간 앨리스에게 형사가 찾아온다. 형사가 찾아오는 장면에서 좁은 고시촌 침대는 3사람이 앉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형사 2명 사이 중간에 끼인 그녀의 작은 몸은 더 작은 몸으로 보인다. 형사가 그녀의 고시촌을 방문 후 서로 대화를 한다. 고참형사는 신참현사와 대화 중 이런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범죄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가난한 사람은 고의로 범죄를 일으키는 것보단 우발성에 의한 사고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 말은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점,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개인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에 대해 아무런 구원이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거기에 대한 분노와 저항에는 매우 가혹하다. 안 그러면 앨리스가 최원사와 세탁소 사장에게 심한 몰골을 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의료현실의 모순도 나온다. 사람이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을 때 의사들은 환자의 호흡기를 떼라고 한다. 뇌사 판정을 받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자살시도로 뇌사가 된 남편이 계속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가 눈처럼 불어난다. 그러나 병원입장에서 죽기 일보 직전의 환자를 강제로 내보낼 수 없다. 환자가족이 파산해도 빚만 계속 늘어나도 병원은 끝까지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지 그런 부담을 안기 싫어 앨리스에게 안락사와 존엄사를 선택하도록 한다.

 

뇌사판정을 받으면 생존에 대한 권리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모르나, 한국에서는 아직 안락사라는 제도가 없다. 일부 선진국에서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된다. 더 이상 살아갈 가망 없이 병마의 고통에 의해 끔찍한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오히려 죽음이 축복일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의사에게 언제나 존엄사란 극단의 선택만 요구받는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사실 보호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경제적인 조건에서 생활은 파탄 나고, 오랫동안 지켜본다고 마음까지 지친다. 하지만 앨리스의 선택은 너무나도 달랐다.

 

영화를 보면서 엽기적이고 끔찍하고 때로는 측은하고 고소하기만 했던 영화 같았다. 앨리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점에서 우리라고 앨리스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중하다고 해서 그 소중한 것을 알게 해주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 앨리스가 그토록 잔혹한 동화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나를 찾아주는 사람을 찾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선악의 도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과 악이라 도덕적 가치는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권력에 의해 조성된다.

 

물론 극단적 행위에 대해선 윤리적인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리를 말하려면 그 윤리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제3자 역시 심판대에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앨리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점이다. 앨리스는 세상의 룰과 자신의 룰에서 자신을 선택했다.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술적으로 상당히 높다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적 가치는 기존에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촬영기법이나 연출에 대해서는 저예산이므로 그다지 높은 평가는 어렵다. 단지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엄청난 반전과 흥미가 있다. 생계밀착형 잔혹동화이고 현대사회 한국이니 N포 세대에겐 낯설지는 않으나 낯설게 되어가는 이야기가 흐른다. 행복해지고 싶은 게 죄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죄를 박살낼 수 있을까? 앨리스의 적으로 나온 이들을 보면 대부분 가난하고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딱하다. 딱한 사람끼리 싸우는 현실에서 우리 사회 자체가 이상한 나라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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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꽃과 부수는 세계>는 SF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지금은 2016년이라면 그 시대는 2100년 기준으로 시작한다. 물론 작중에 등장하는 도로시와 듀얼의 시기는 2100년보다 더욱 더 후에 존재하는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조금 겉모습의 이미지처럼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 3명이 등장하여 뭔가 귀여운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닐까 하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런 소녀로 통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영상서사로써 흘러간다. 전형적인 스토리나 혹은 스포일러 등보다는 이 영화에서 말해주는 의미하는 바가 뭔지 생각해본다면, 인류에 대한 감독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환경, 솔직히 인간은 신석기 시대부터 도구를 만들어오면서 인류문명이란 것을 만들어왔다. 특히 철기시대에 오면서 중앙집권제로 이어지고, 각국에서 전쟁과 더불어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기원전 5~6세기 동양에서 공자와 석가모니가 있고, 서양에서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있다. 이들의 존재처럼 종교와 정치가 어느 정도 학문적 영역에서 큰 발전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쟁의 손길은 모든 인간에게 흘러가고, 20세기 큰 전쟁을 맞이하면서 인간들은 전쟁이란 것들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분쟁국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고, 최근에 이슬람 과격테러로 분쟁이 일어나지만, 과거의 전쟁에 비하면 횟수의 차이는 분명하다.

 

전쟁의 순기능을 인정하기 싫으나, 전쟁은 인간사회를 변화시킨다. 인간의 수를 줄이고,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등장하고, 과학적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문명의 수레에서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의 목을 겨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인류가 윤택해지면서 한편으로 비참해졌다. 환경이란 단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길을 나오면서 대기 중의 미세먼지가 코를 자극하고, 눈을 피로하게 만든다. 미세먼지의 농도가 강하면 호흡기 질환이 심해지고, 미세먼지의 입자가 작으면 폐 속으로 들어가 폐기종 같은 질환을 일으킨다. 과거에 결핵과 폐렴에 의한 폐질환이 이제는 대기오염으로 대체되고, 과거 이질이나 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병이 이제는 수질오염으로 인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런 모순에서 인간의 세계를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줄 도구나 시스템을 원한다. 아니라면 어떤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신화처럼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하고도 때로는 위대하기도 하다. 양날의 검이란 말처럼 검은 자신의 목을 노리지만, 자신이 노려야 할 대상의 목도 노리기 때문이다. 지구환경을 살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오염원의 통제고 오염원의 억제다.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없으면 지구는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에 몸살을 앓을 일도 염려도 없고 숲속의 작은 새들의 서식처를 잃을 일도 없다.

 

지구의 환경이 쇠약함에 따라 새롭게 만든 Mother System, 지구는 대지의 어머니라 하고, 지구를 Earth라고 하나, Gaia라고 하는 이유는 대지에서 만물의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지구를 파괴하고, 지구를 망치는 존재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있다. 지구의 대자연은 아름답고 위대하나,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지구에서는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기계의 사고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인간처럼 감성적이고 느낄 수는 없다. 이게 바로 기계와 인간의 차이다. 기계에겐 윤리라는 것이 없다. 단지 도덕적인 요소를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대체할 뿐이다.

 

그래서 도로시와 듀얼이 사는 세계에는 2차 공간에서 바이러스가 나오고, 그 바이러스의 토대는 2차 가상공간의 데이터베이스가 실현화 된 3차 공간에서다. 3차 공간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불안하고 때로는 오류의 집단으로 나올 수 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슬프고, 아프고, 잔혹하고, 거절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하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소녀가 리모다. 리모는 듀얼과 도로시의 세계에 새롭게 찾아온 인격화된 프로그램이다. 그녀의 등장으로 듀얼과 도로시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프로그램으로 활동하는 그녀에게 인격이란 그저 만들어진 그 자체, 인격이 있다고 해도 감정은 그저 주입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 느끼고 행동하고에 대해 뭔가 새로운 생각을 품지 않는다. 단지 듀얼은 뭔가 자신의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이 석연하지 않다는 것만 느낀다. 그 환상의 의문을 깬 것이 바로 리모의 역할이다. 리모는 듀얼과 도로시하고 친구가 되어 다양한 경험을 나눈다. 여행을 가고, 요리는 하고,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때로는 마음이 아픈 모습도 목격한다. 이때까지 프로그램이기에 맛이 있는 음식도, 재미있다고 여기는 일들도 모르고 살아온 도로시와 듀얼에게 리모는 신기한 존재다.

 

그러나 사실 바이러스란 존재는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 혹은 인간 그 자체에서 나온 불순물이다. 인간은 모든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싫은 것들도 있다. 현실세계 인간은 모두 Mother System에게 의존하다 그것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다시 Mother System를 저지하려 했지만, 모든 지구의 시스템을 장악한 Mother System을 정지하는 것은 내 폐 속에 암이 있어서 그 폐조차 모두 잘라버리는 같은 행동이었다. 더 이상 인류에게 숨을 쉴 공간이란 있을까?

 

지구를 관리하는 Mother System에서 그런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려면 그 감정을 부정하는 자신의 구조체계를 변모해야 했다. 그래서 Mother System의 프로세스 백업 프로그램은 스스로를 바이러스로 인정하게 하여 Mother System의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인 듀얼과 도로시로 하여금 삭제되어야 했다. 그것은 지구를 멈추게 한 것은 인간이겠지만, 인간이 없다면 지구가 멈추는지 아닌지도 모르며, 인간만이 현실을 자각하기에 비로소 지구라는 존재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기쁜 것만이 아니라 슬픈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듀얼과 도로시의 경험에서 듀얼은 자신이 관리한 가상세계에서 바이러스가 된 자, 스미레를 직접 지운다. 아름다운 피아노를 연주하는 꿈이 많은 소녀 스미레, 물론 프로그램의 업무로 본다면 듀얼의 일은 합당하나, 과연 친구였던 자의 꿈을 파괴하는 것은 옳은 것일까? 그저 주입된 것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슬픈 일일 것이다. 정말 자신이 슬픈 일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겪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도로시도 처음에 듀얼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대략 19세기 유럽 귀족가문의 딸로 활동하고 있을 때, 도로시는 이때까지 가지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매를 가졌다. 그곳에서 나눈 정이란 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가상공간에서 경험한 자신의 마음과 기분은 가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Mother System의 의도 아래 태어난 리모는 바로 이것을 노린 것이다. 인간은 시스템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으나, 그곳에 머물려 정체되면 아무 것도 만들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물론 인간이 이때까지 같은 인간에게도, 자연의 동물에게도, 대지의 자연에게 해왔던 잔인한 짓들은 관객의 눈으로 보는 나 역시 많은 것을 생각나게 만든다. 그런다고 인간 그 자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 세계를 모두 부수는 것과 같다. 작품의 제목처럼 유리의 꽃은 인간에게서 완벽한 모습, 즉 좋은 점만을 말하는 것이고, 부수는 세계는 그런 아름다운 겉모습을 추구하는 세계는 결국 아무 것도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새롭게 탈피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주제성은 물론 이해할만하나, 그것을 어렵지 않게 잔잔히 보여준 점은 감독의 역량으로서 역량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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