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네 대화 편 -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3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엮어 옮김 / 서광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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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저술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칠십 되는 나이 아테네 내에서 고발당하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그가 고발당한 이유는 젊은이들을 현혹하고 신을 모욕한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억지로 밀어붙인 고소는 소크라테스를 법정 앞에 세우게 만들고, 그를 유죄로 심판한다. 그의 유죄선고는 아테네 시민들이 법에 의해 살아가고, 모든 것은 법으로 복종해야 하나 법을 복종하지 않고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소크라테스를 함정에 빠뜨린다.


그 함정에 의해 관아를 향하여 소크라테스는 발을 옮긴다. 가는 도중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한 에우티프론을 만나고, 그와 대화 후 법정에서 변론하는 소크라테스가 보인다. 플라톤의 대화록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은 말 그대로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것에서 시작하여 재판과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을 보여준 작품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무고한 죽음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정치인이란 꿈을 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리스철학의 중심이 되어 21세기까지 내려온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주의를 신봉하지 않고, 플라톤의 사상에 다소 위화감을 느낀다. 플라톤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그의 철학에 중심 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라고 해도,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분명 알 수 있다. 귀족적인 시민, 또는 더 나아가 철인(哲人)군주에 의한 통치다. 국내 플라톤과 그리스철학 대가인 박종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중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환상은 우리의 현실을 옭아대는 병이다. 그런다고 철인이 나와 정치를 해도 다 되는 게 아니다. 이미 21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종현 교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한 점을 보고, 그가 1970년대 한참 교수에 있던 점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군사독재 시절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논하나, 사실 소크라테스가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그가 참주제 이후 민주제가 도래했을 때 어느 권력자에게 미움을 받아서이다. 2번째 변론의 해제부분에서 번역자가 당대 권력자인 아니토스에게 바른 말을 하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아니토스의 사주를 받은 밀레토스가 소크라테스를 공격한 것이다. 당대의 권력자와 그 법정에 나온 시민들은 권력의 흐름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가 일치된 전체의지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희생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철학사상에서 장 자크 루소는 기존 플라톤주의를 이어 받은 것 같으면서도 전도시켰는데, 루소는 플라톤이 주장한 국가관에서 시민에 의한 옳은 정치를 지지했다. <사회계약론>에서 제시한 이상적 국가정치관이 그리스로마의 공화제였다. 하지만 그 공화제에서 모든 것이 옳은 게 아니지만, 그 이후 인간의 역사에서 그 만큼 옳은 정치관이 없었다. 공공에 대한 이익을 지지하고, 개인의 이익을 뒤로 하는 일반의지는 시민정치에서 매우 소중한 정신이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법이 아니 법을 이용하는 자를 따르게 되면 그 사회는 결국 독재자의 것이 되거나 바르지 않은 정치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치철학은 보자면 바르지 못한 권력자에 향하여 옳은 이야기를 하다 화를 당한 것이다. 박종현 교수가 1972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했다면, 그가 한참 교수로 있던 시절은 군부독재권력이 판을 치는 시기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보면서 철학적 사유를 좋아하나, 번역자의 조언이나 사유를 볼 때마다 조금 불편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철학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고대그리스인에게 신에게 가장 접근하기 좋은 학문이고, 신에게 가장 근접하는 것은 육체를 벗어나 영혼의 영원성이다. 영혼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육체를 벗어나 초현실적 존재로 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에서 인간이 살아생전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오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며, 그 자신도 올바른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잘못된 게 있다면 말해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용기란 바로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지혜다. 박종현 교수의 고대그리스철학 연구 분야는 한국에서 분명 최고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말하던 그 분은 전혀 본인 스스로 소크라테스처럼 살지 않았던 것이다. 실천적인 학문이 아니라 이론적인 영역에서 활동한 것이다. 한국 철학이 이렇게 풍부하지 못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행한 지(智)와 행(行)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단지 지(知)와 행(幸)만 추구했을 뿐이다. 자신의 지적인 능력과 그 능력을 토대로 권력과 이익만 탐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전혀 수업료도 받지 않고, 남에게 바른 말만 하던 남자였다. 그런 점에서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을 읽는 것은 모순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던 인생, 우리 같은 소시민 혹은 지혜와 용기가 부족한 이들에겐 엄두도 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란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신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신은 결국 자신에게 끊임없는 시험에 들게 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왜 신을 믿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제우스께 맹세코! 라는 그 강렬함을 말이다. 신은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관념적인 영역이 있기에 죽음이란 세계를 두려워한다. 물론 죽음과 전혀 관계없는 나이나,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관계가 없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정 두려움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죽음 앞에서도 자신 안에 있는 신을 배신하는 게 더 두려운 것이다. 자신 안의 신이란 양심과 의지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이란 신에게 가장 근접한 이유는 인간으로서 일말 양심의 가책을 만든 짓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내린 배심원을 보면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죄인으로 심판했지만, 신의 심판은 그들에게 어리석고 한심한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신은 없다고 해도 후세의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바라보는 인류에겐 소크라테스는 불멸의 철학자고, 그를 죽도록 만든 시민들은 기회주의자로 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아도 죽음을 선택했다.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파이돈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고, 크리톤을 보면 탈옥하지 않고 사형일을 기다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가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구분되어 있고, 육체는 한시적이나 영혼은 영원한 점이고, 인간이 죽으면 명부에 있는 하데스의 궁에 초대된다. 그곳에 가면 신적인 존재, 위대한 서사 시인들을 만날 수 있어 소크라테스는 도리어 죽음을 기대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점은 우리 인간이 선택하는 시점에서 이미 잘못된 것이라도 그 잘못된 몇 가지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국가를 배반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길러주고 먹여주며, 살아온 날을 보여준 아테네가 사형선고를 한다고 해도 아테네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당시 지식인이나 후대의 인간도 안다. 잘못된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로 모든 것을 배신할 수 없고, 오직 자신 안의 신에게 결백해도 분명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대그리스철학에서 중세를 지나 근대 계몽주의 사상이 도래하면서 시민의 의무란 바로 저런 부당한 사례를 없애는 것이 시민의 의무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에게 충실한 게 시민의 의무라면 그 국가는 관념적인 존재일 뿐이지, 국가란 결국 정부라는 기능이 필요하다. 정부에서 인간이 운영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역시 정부의 기능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탈옥과 망명을 선택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바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너무 자신을 신용한 것인지? 그래도 지혜로 보자면 소크라테스가 가장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볼 수 있다. 지혜라는 것은 사소한 이익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대인들의 지혜를 보면 사소한 이익에 눈이 빠지도록 신경 쓰며, 결국 남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라도 당장 이익이 있고, 법적인 문제가 없어 보인다면(아니 있더라도) 기를 쓰고 덤벼든다.


우리의 지혜란 바로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지혜다. 물론 사소한 것이라 하여 액수나 권리가 사소한 것은 아니나, 지혜의 가치는 사소하다 못해 치졸한 것이다. 아마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던진 많은 사람 역시 그럴 것이다. 중우주의에 빠진 시민들, 그러나 그런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자 역시 그런 중우주의라는 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다 이제 와서 중우주의를 논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플라톤의 대화록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지 잘 보여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 하지만 나에게 철학은 나의 지혜를 사랑하기보단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공공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곳이 좋다. 물론 플라톤의 <국가>나 <향연>을 보면 아름다운 사람이 결국 아름다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 나온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아주 극소수인 점에서 현대에서 실현 불가하고, 다수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필요하다. 중의주의 요소가 그때보다 더 심한 현실에선 더 어렵고 난감한 일이다. 이미 중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 모순이 드러난 시점이다. 단지 그 현실적 문제는 민주주의 제도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민주주의적인 정신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 점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서적 광고를 보니, 마녀사냥에 대한 인류역사를 다루었다. 그런데 책 처음에 등장한 사건이 소크라테스의 죽임이다. 소크라테스가 마녀사냥의 희생자인 점이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흐름이 태동하면 인간 역시 그런 시대를 따라 가야 하나, 자신의 이권은 과거를 지향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지점에 충돌이 발생하고, 희생자는 권력과 재력이 없는 사람이다. 15~17세기 마녀사냥이 광적으로 이루어진 유럽에선 그 희생자가 힘없는 여성이라면, 고대 사회는 지식인이다. 고대사회는 노예가 존재하고, 심각한 계급사회다. 물론 중세 이후의 유럽 역시 계급사회지만, 개인의 노예보단, 국가의 농노가 더 많은 시기다.

 

그리스의 노예들은 오히려 그리스 남자성인들 즉 시민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구가 전체 10%인 점에서 말이다. 발언권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점은 그 만큼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시민에게 보장되어 있고, 그 책임 역시 막중했다. 시민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통제하는 자다. 그리고 그것이 전도되는 이상 시민의 국가가 아니라 권력자의 국가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시절과 지금의 시절은 다르나, 소크라테스가 적어도 무엇을 위해 희생했는지 본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하늘을 보며 당당히 길을 걷을 수 있을까? 반성과 사유가 없는 인생은 그저 공허한 삶이다. 죽음은 물론 두렵지만, 공허한 인생을 산 자들은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고, 맹목적인 믿음과 광적인 언행을 보인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만큼 어려운 말은 없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생각해볼 점이 있다. 죽음을 한자어로 사망(死亡)이라 하고, 한국인은 귀천(歸天)이라 한다. 영어권에서 죽음이란 death이나, 소크라테스가 말한 죽음은 Thanatos이다. 타나토스는 죽음이기도 하나, Eros와 다르게 죽음에 대한 욕망이다. Eros는 삶에 대한 열망이란 정신분석적 용어처럼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왜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으로 가는지 생각하면 타나토스란 단어를 생각해 볼 점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고대그리스의 죽음에 대한 관념에서 윤회설은 없을 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으면 호메로스를 만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어도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 영혼의 삶, 내가 세상에 없어도 역사는 나를 기록한다. 소크라테스가 육체적으로 죽어도 정신적으로 살아있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거론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 역시 역사에 남겨질 것이고, 역사적 가치가 없다면 역사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족보에 내 이름이 올라가겠지만). 만약 내 이름이 후대에 간다면 어떻게 보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은근히 욕먹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 거기서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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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1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르스 발언 때문에 박원순 시장이 검찰 고소되었단 얘길 들었습니다. 법의 칼날이 - 그 속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 해괴망측하게 움직이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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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5-06-15 08:27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면 먼저 법적으로 고소당할 자는 따로 있는데 말이죠. 자본이 지배한 세계에서 한계인 것 같습니다.

오쌩 2015-06-16 01:09   좋아요 0 | URL
도대체 어떤 근거로 고소를 한거죠.법에 처벌할 명문화된 조항이 없을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개판이네요.법에도 없는 유언비어 확산을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멍멍이들을 보면...

오쌩 2015-06-16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잘봤어요. 플라톤의 철학,저도 별로 좋아하지않아요.
70년대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철인을 박정희에 비유하는 헌사를 바치는것을 보고, 머리를 저었어요.
군국주의 ,반자유주의,전체주의 를 정당화하는 철학의 시초가 플라톤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6-16 08:52   좋아요 0 | URL
아 과연 70년대이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현대철학자가 존 롤즈인데, 이 양반 밑에서 사사한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있습니다.
이 양반 1980년대 전후로 육군사관학교 철학과 교수에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더불어 존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번역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어쩌고 어쩌고 하나, 하는 짓거리가 가관이죠.

민주주의를 말하는 인간들이 과거 권력에 노예에서 이제 자유로우니 자신의 지위에 노예가 되는군요. 어째 루소의 가르침이 그대로 드러나는지.

소크라테스는 시민으로서 아테네를 위해 살아온 점에서 아이러니하죠. 그가 전쟁 3번과 각종 지위를 맡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나, 그런 그가 민주정에 의해 희생당했죠.

아마 멍청한 중의주의에 의해 뽑힌 정치가보단 처음부터 정치가를 지도하여 양성하는 게 옳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죠.
공부 잘하고 머리 좋아도 결국 양심이 문제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죠.
머리 좋은데 양심이 없는 자와 머리가 나쁜데 양심이 없는 자 중에서 누가 더 시민에게 악영향을 주는가에서 전자라고 하더군요. 후자는 고의보단 무의식적이 요소고 전자는 고의적으로 악질이니깐요. 박통 시절이 바로 그런 시대죠.

오쌩 2015-06-16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민주주의를 반대해 반민주주의를 추구했는데,그가 역설한 철인정치 아래였다면, 소크라테스는 더 빨리 처형당하지 않았을까요.

알옥 2016-05-15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법정에 고발당했다, 당시 정치인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 박종현 교수에 대한 비판글 여기서 그냥 글 안읽고 내렸습니다. 플라톤 전집을 읽어보았다면 솔직히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할만 일들을 여럿 했습니다. 특히 초기와 중기 사이의 대화편을 보면 항상 젊은이들과 함께 있었고, 당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나 소피스트들이나 거기서 거기로 보였을텐데.. 초기나 중기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지인들 대표적으로 크리톤등이 소크라테스에게 경고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없는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없는 궤변론이네요.. 참으로 답답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5 22:39   좋아요 0 | URL
걱정마세요. 존 롤즈 번역자인 황경식 교수님은 더 깝니다.
정암학당 향연을 읽었지마는 개인적으로 천병희선생님이 마음이 가네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5-18 20:56   좋아요 0 | URL
그러면 그런 내용을 저에게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참고로 저는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을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독학했습니다. 패션 철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궤변론 맞을지도 모릅니다. 공대 졸업하여 독학하면서 님의 그런 지칭 처음 들어봅니다. 답답하면 그렇게 알려주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비꼬는 말투에 대해 님 태도가 바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어린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여러모로 성격이 강직한 점은 알고 있습니다. 단지 님만큼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아는데 남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에 대한 이해도에 부분에 대하여 님이 저보다 많이 알겠죠. 제가 박종현 교수를 겨냥한 것은 플라톤의 철학을 그래 말하면서 그의 지행일치를 논하면서 막상 본인은? 이런 겁니다. 오늘 518인데 황경식 교수는 그 사건을 두고 ˝사태˝라고 하더군요.

아직도 제글에서 플라톤만 잘 알고 모르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시고, 님의 기분이 좋지 못하면 제게 부족한 점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런 양질의 도서를 소개해주면 되는 겁니다. 이 글이 플라톤만 적어내리고 있다는 가정 아래서요.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님은 오리지널 철학과 전공자가 왠지 허접하게 보이는 사람 잡고 궤변론자이니 답답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정도의 사람일 뿐입니다. 님의 덧글은 ˝내가 아는데 넌 왜 몰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나요?

비로그인 2018-05-1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이글을 읽에 되었습니만 꼭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는 징검다리를 건넘니다.
518이 사태 맞지 않습니까?
어찌 말은 잘 하는데 직시하지 못하는 행동은 어디에서 나오는건지
모택동도 스탈린도 정권을 잡은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말이 앞서기전에 사태의 공정함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차안대를 쓰고 어찌 주의를 바라볼수 있습니까

만화애니비평 2018-05-18 08:57   좋아요 0 | URL
일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