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세 여성의 삶을 토대로 그려낸 조선 공산당의 역사.
1910년대의 청춘들이 처형, 암살, 병사, 고문, 유배 등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이야기다.

시대가 그러했으니 희망적인 장면은 전무하다 보아도 무방하고, 이 세 여성이 겪는 고초가 생생해서, 부제인 ‘20세기의 봄’은 악의적 농담처럼 보인다.
봄이 어딨어? 죄다 겨울, 겨울, 겨울인데... 손발이 시리고 허기지고 온 몸이 바스라질 것 같은 통증을 읽는 내내 느꼈다.

공산주의자들의 이야기는 정규 교육과정에서 몹시 생략되어 있는지라, 그간 조각조각 모아지던 얄팍한 정보들이 취합되는 독서였다. 역사지만 세 여성의 매혹적인 인생이야기는 흥미와 재미를 모두 책임져 준다.

그나저나 어찌나 파벌 별로 치고 받는지, 대의를 위한 양보는 한치도 없는지, 좀스럽고, 비굴하고... 그런 종류의 혐오가 불쑥 들기도하니 그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그런 역사의 민낯을 보는 것도 의미있다.

파란만장이란 것은 이 정도 쯤은 되야할 것 같은, 빨려들어가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다음 책은 좀 잔잔한 걸로, 따뜻한 걸로 읽어볼까 한다.

- 1920년, 그 해는 누굴 만나도 상해나 모스크바 얘기였다. 볼셰비키 혁명을 둘러싼 매혹적인 소문들이 흘러 다녔고 상해는 어느 결에 사람들 마음에 망명수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열여덟 나이에 강연을 다니며 여성계몽운동도 해봤지만 정숙의 야심은 그 이상이었다. 정숙은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이 세상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맹수이빨 사이에 끼어 있는 조선민족을 구할 사상과 이론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 21

- 차별없이 평등하자면서 이게 뭐야? 조선 공산당이나 공산 청년회나 간부 중에 여자가 한 명도 없잖아. 멀쩡히 같이 토론하다가도 밥 먹을 때 되면 여자들하네 밥해오라 그러고 말이야. 상투 틀고 곰방대 빠는 양반들이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지. 공산주의 하자는 젊은 남자들이 그러는 데는 정말 배신감이 느껴진다니까. - 134

- 왕년에 조선공산당을 만든다고 뛰어다니던 마르크시스트들은 지금 감옥에 있거나 고문과 독방생활로 정신줄을 놓았거나 아니면 천황의 신민으로 소속을 바꾸거나 했다. 조선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운명은 여기까지 인가. 가령 파리 코뮌처럼 유토피아의 이상이 피바다 속에 침몰하는 그런 장렬한 패배도 없이 비밀회합하고 암호 편지 주고받다가 끝나버리는 것인가. - 314

- 내 나이 스무살엔 조국해방을 완수할 때까지 행복이니 하는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했었소. 그러다 문득 거울을 보니 귀 밑에 희끗희끗 새치가 올라오고 있지 않겠소. 이제 중년이 된 것이오. 지금 웃지 않으면 웃을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오. 요새는 유쾌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소. 지금 내 가장 큰 소망은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오. - 336

- “부녀복무단을 만들자는 얘기도 있소. 여러가지 뒷바라지 할 부인네들이 필요하니까 말이오.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정숙은 식탁 귀퉁이에 턱을 괸채로 중얼거렸다.
“나는 가끔 이 남자들하고 혁명을 하는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 다들 <자본론>대신 <사서삼경>을 읽는 모양이야.” - 378

- 내 나이 벌써 육십여섯이구나. 오래도 살았네. 애비가 세상에 난 것이 갑신년 정변 이듬해 였으니 조선 땅에서 개화의 역사하고 같이 나이를 먹은 거야. 내 생전에 나라가 풍전등화 아닌 적 없었고 더구나 식민통치까지 갔으니 명색이 동경서 근대 법체계를 공부했다는 자한테 이 현실이란 건 잠시 넋 놓고 쉴 틈도 허락지 않더란 말이지. 눈에 보이느니 모순투성이고 당장 팔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일들 뿐이었으니. 권태롭고 나태한 인생보다는 살 만하지 않았나 싶다마는 돌이켜보면 내가 한 일들 중에 태반은 안해도 좋은 일 아니었나 싶구나. 지금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모르는게 사람의 일이라. - 277

2018. 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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