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서 내가 그동안 해 왔던 독서의 부박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최인훈의 <회색인>이나 <서유기>를 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처음엔 반갑지만은 않았다. 전적을 알지 못하는 이의 일기를 읽는 기분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러나 읽으면 읽을 수록 나는 독고준이라는 인물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일기와 그의 딸, 성적 소수자이며 지식인인 서술자의 일기가 교차되는 이 글은 다른 책들처럼 쉬이 읽히지는 않았으나 그게 오히려 더 즐거웠다. 한 사람의 일생의 기록을 휙 읽어버리는 일은 얼마나 무례한가 말이다. 독고준의 일기를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어떨까? 그가 읽은 책을 같이 읽고, 그 말미에 달아 놓은 그의 딸의 생각을 공유하며 한동안 지내도 행복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북에서 부르조아적 사고로 자아비판을 강요받았던 섬세한 소년은 그 상처를 평생 잊지 못한다. 남에서 의지할 곳 없어서 자기 누이를 북에 두고 내려와 새 장가를 든 매형의 집에 얹혀 지내야 했을 때, 너절한 삶을 이끌어야 했을 그 자존심 강한 소년의 상처받은 마음이 생생했다. 비록 그의 일기 어디에서도 그런 구절을 찾을 수 없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크기의 상처가 아닐까? 다양한 범위를 아우르는 독서의 세계, 그리고 아름다운 시들에 대한 촌철의 평들은 내가 앞으로 읽어야할 책들이 너무도 많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느껴야할 세상의 아름다운 시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한다. 정치 시평(時評), 세계에 대한 관심, 문단과 후배 문인들에 대한 사랑과 작품에 대한 꼼꼼한 독서의 흔적이 드러나는 이 일기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실제 한 인물의 긴 인생의 기록으로만 느껴진다. 과연 이 글들이 고종석이라는 작가의 창작이란 말인가? <회색인>과 <서유기>를 읽으면 독고준에 대해서 얼마나 알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