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오피셜 뱅크시
알레산드라 마탄자 지음, 정다은 옮김 / Pensel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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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46 : 언오피셜 뱅크시, 알레산드라 마탄자 저, 2022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이 미국이란 나라의 위대함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들이 가장 가난한 소비자들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을 구매하는 전통을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이 말은 미국 팝아트의 대명사인 앤디 워홀(1928~1987)이 인터뷰 중 자신의 예술관에 대한 질문에 답변으로 말한 내용이다. 워홀은 한창 주가를 올리던 무렵 위와 같이 공공연히 대중들의 위선적 예술관을 조롱하며 더욱 파격적인 행보를 감행했고, 더욱더 그 명성(내지는 악명)을 높이며 팝아트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주된 생각은 대중들이 돈이 되는 예술을 원한다면 그를 기껏이 행하는게 예술가의 책무이며, 그것이 결코 예술가로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런 관객의 수준을 조롱하며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거꾸로 대중들에게 전복적으로 다가가 마치 "록스타"의 이미지를 원했다. 그리고 그의 예측대로 그는 전설로 남게되었고, 그의 작품들은 현대 미술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2000년대로 돌아와 우리의 상황을 엿보도록 하자. 위의 두 그림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지 않은가? 왼쪽의 그림은 워홀의 그 유명한 "마릴린 몬로(1964)"이고, 오른쪽은 뱅크시의 "케이트 모스(2005)"이다. 두 그림의 차이점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법과 구도가 매우 유사하며, 그것을 뱅크시도 숨기지 않는다. 다만 차이점이 존재한다면, 뱅크시는 워홀과 달리 철저히 익명으로 현재까지 남아있고, 자아도취적인 워홀과 달리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그리고 자신이 번 엄청난 돈도 자선단체에 기부해버린다.) 이 그림은 나오자마자 열광적인 관심을 받으며,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며 완판됬다.

 이처럼 뱅크시는 어느덧 대중들에게 가장 인지도를 가진 아티스트로서 자리잡았으며, 그의 각종 기행과 (다분이 의도된) 에피소드들은 더욱더 그의 명성을 높이며, 현재 최고의 판매가를 자랑하는 작가로 각광을 받고 있다. 

2. 저자의 의도...

이 책은 앞서 소개한 뱅크시의 작품들과 내력을 소개한 저서이다. 그 유명세에 걸맞게 그동안 다수의 관련 서적이 나왔지만, 이 책은 기존 책과 좀 다른 측면이 있다. 먼저 이 책은 거리 미술의 전문가로 알려진 존 브랜들러와 사진작가 알렉산드라 마탄자의 공저로 쓰여진 책이다. 브랜들러는 그동안 주로 뱅크시의 작품들을 거래하고, 대중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으며 본 작 이외에도 다수의 매체에서 뱅크시의 작품 세계에 대해 평을 올려서 이름이 알려진 아트 딜러이다. 마탄자는 사진작가이자, 작가로 여러 베스트셀러를 써낸 전문 작가이다. 이 책은 두 사람의 협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 작품들의 소개와 뱅크시에 대한 주 코멘트는 브랜들러가, 전체 책의 집필은 마탄자가 구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브랜들러는 초기부터 뱅크시에 주목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알려져, 이 책에서도 주로 작품해설에 치중하여 그를 소개하고 있다. 뱅크시는 철저히 "거리미술"에 전념해 왔으며, 그것을 빼고는 그를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많다. 따라서 그의 주요작품들을 갤러리가 아닌 "거리"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대부분 소개하며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업들을 세심하게 배치한 책이다. 또한 뱅크시의 정치적 견해를 배제하면 그의 작품세계의 절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아나키스트적 면모를 여과없이 설명하며, 마치 혁명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의 전설에 견주어 그를 소개하고 있다.

3. 인상적인 부분...


뱅크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앤디워홀 + 체 게바라"라고 나는 단언한다. 위트있는 농담과 냉소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비꼬며, 온갖 권위에 도전적으로 메시지를 던진다. 영국 여왕이 아이콘인 정치 세력들,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대변되는 국제 분쟁의 현장까지...어디든 정치적 모순과 권력의 남용으로 신음하는 곳에 반드시 그의 작품을 남기며, 대중들에게 소위 "가치전복"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마치 아나키스트적으로 모든 체제를 부정하는듯이 보이지만, 의외로 그 근본에는 휴머니스트적인 측면이 관찰된다. 전위적으로 체제를 전복하는 과격한 측면이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여 그 수위를 조절한다. 

또한 뱅크시는 그 소재에 있어서 몇몇 특징들이 있다. 첫째로, 그의 작품은 "거리"와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대중을 무법적으로 감시할법한 감시카메라 바로 앞에 "무엇을 쳐다보는가?"라는 작품을 남기듯이 그 적재적소의 장소에 알맞은 작품을 남긴으로써 환경과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일체화시켜버린다. 그것을 서로 분리하는 순간, 그 원래의 가치는 사라져 버리고 퇴색해버리는 것이다. 둘째로, 블랙코메디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하여 이미지 전복을 시도한다. "침팬지"가 지배하는 이 지구의 모습이라든지, '생쥐"가 주인공인 다양한 군상을 인간에 빗대어 그리는 모습말이다. 이는 기존의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역으로 이용하여, 주목도를 높이고 그 모순에서 유머를 발생하여 작품의 의도를 휴머러스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외면한 탐욕적인 자본주의 (특히 미국의 다국적기업으로 대표되는)를 실랄하게 비판한다. 우리의 시각을 방해하는 광고판에 조롱하듯 작품을 남기거나, 수많은 난민들이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수익의 극대화를 꾀하면서도 그 현실을 외면하는 기업들의 로고를 명시하여 작품에서 조롱하는 작품들이 그것이다. 대중들에게 잘못된 소비관과 주체하지 못하는 이윤추구의 욕심을 이제는 그만하기를 바라며, 대중들에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작품들을 배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은 항상 작품에 연관된 일화 하나씩을 담고 있다. 이는 워홀이 당시에 구사하던 전략과 매우 흡사하다. 모호한 작품을 던지고, 가치전복적인 메세지나 일화를 배경으로 전달하여 대중들이 열광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물론 조롱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는 보들리야르가 일찍이 예건한 시뮬라크르의 실현이며, 뱅크시도 그 방법론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다만 차이점은 워홀의 방법론은 따르되, 절대로 자신의 어떤 부분을 익명성으로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도 뱅크시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지만, 아무도 그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심지어 한 명의 작가인가에 대한 논란마져 존재한다. 때문에 개인의 영달이나 명예욕과는 거리가 멀며, 끝까지 저항하는 정신으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대중들은 열광을 하며, 그의 작품들은 가장 인기를 끄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이 책에서도 그런 면모들을 설명해주며 그의 작품세계 자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4. 아쉬운 부분...


이 책은 뱅크시의 작품 세계에 대부분 촛점을 맞춘 책이다. 그의 신화적인 이야기나 기행들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배제한 것이 보인다. 이는 유사한 작가들의 "의도된 이미지 메이킹"에 대해 거리를 두고자 함이 아닐까 사료된다. 다분히 이러한 행위들은 유행 당시에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주목도를 높이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기억은 휘발되고 결국 남는 것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이 수순이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걷어내고 작품 자체만으로 생명력이 약한 작품들은 한때의 해프닝으로 취급받으며 그 생명이 다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뱅크시의 작품을 소개할 때도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구성한 부분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뱅크시는 "메시지"를 던지는 작가이다. 그 메시지가 없으면 작품은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는 반쪽 자리 작품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이런 딜레마를 이기고 온전히 아티스트로서 인정받을려면 그의 행보를 부각시키는 것을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작품에 보다 치중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였을 것이다. 이 책 또한 그런 면모가 보인다. 다만 전시회에서의 작품들은 많이 소개되지 않아 다소 아쉽지만, 그의 거리미술 측면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수긍이 간다. 

5. 나오며...

위 작품은 그의 대표작 "분노, 꽃을 던지는 자 (2005)"이다. 현재 국제 분쟁의 상징인 이스라엘의 베들레햄에 존재하는 작품이다. 원래 이 이미지는 폭동에 가담한 시위자가 마스크로 자신을 숨기고, 분노의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인데, 그 화염병을 평화의 상징인 "꽃"으로 대치한 것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그의 정체성, 즉 "체 게바라 + 앤디 워홀"의 측면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 생각한다. 부조리한 현실에 가차없이 저항하며 분노를 하지만, 그 투쟁의 방식은 폭력이 아닌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진다. 또한 이 작품의 위치를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스라엘에 남김으로써 블랙 유머적인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혁명적 투쟁 방식으로 이미 그는 전설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언젠가 자신을 드러낼 지, 아니면 이대로 영원히 대중들의 가슴속에 "혁명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을지는 뱅크시 본인만이 아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주도한 예술적 행위에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했다. 앞으로도 그의 어떤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달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그의 진솔한 "작품"으로서의 면모를 잘 살려준 이 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좋은 시도를 한 저자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언오피셜뱅크시 #뱅크시 #존브랜들러 #알레산드라마탄자 #Pensel #그래피티 #거리예술

@seonae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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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 일본 원자력 발전의 수상한 역사와 후쿠시마 대재앙
앤드류 레더바로우 지음, 안혜림 옮김 / 브레인스토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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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45 : 후쿠시마, 앤드류 레더바로우 저, 2022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청와대 대변인 : “원전 찬성-반대 진영 모두가 승복할 수밖에 없는 절묘한 결론이다.”

2017년 있었던 "신 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 위원회"의 강평이었다. 그동안 업계 관계자들만, 또는 정부의 관계자들과 소수의 시민단체만이 참여하여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문제를 국민 참여단을 도입하여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세간의 관심을 불러모았던 현장이었다. 물론 모두의 관심이 쏠린만큼 격렬한 논쟁이 붙으며, 국민들의 의견이 양분화되어 지면을 뜨겁게 달군 부작용도 있었지만, 전례없이 실시간으로 국민 다수의 의견을 직접 경청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허나 이 자리에서 나온 결론은 "신원전의 건설을 재개한다"는 것이고, 지금까지 탈원전을 원하는 사람들의 비난에도 기존의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위 사례에서도 보듯이 아직까진 다수의 사람들이 현재 전력공급을 위한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현재까지 이어온 경제성장을 위해 원전을 허용하자는 것이 다수의 의견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논쟁은 가라앉지 않으며, 전보다 훨씬 반원전의 여론이 들려옴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왜일까...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와 비슷한 국내 사정의 이웃 "일본"의 전례없는 재앙 사태인 "후쿠시마 원전 사건" 때문이다. 시작은 자연재해로 촉발되었으나, 그 전개과정에서 전대미문의 인재로 바뀌면서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인 이 사건이 너무나도 그 악명을 떨치며 교훈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한번 인간의 손을 벗어난 이 위험한 자연의 힘은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으로 우리의 삶을 흔들고 있고, 일본이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전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자칫 국내 경제 성장률에 미치는 영향을 넘어, 국제 분쟁마져 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 파멸의 교향시가 멈추지 않고 있다.) 

2. 저자의 의도...


저자인 앤드류 레더바로우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전, 인류의 최대 재앙이라 일컫어지는 "체르노빌 사태"에 대해 충격적인 저서를 발표하며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원전 르포 작가이다. 후에 등장한 걸작 드라마 "체르노빌(2019)"의 고증을 자문해주며, 그 유명세를 과시한 작가이다. (이 드라마는 현재까지 최고의 재난 드라마로 칭송받으며 각종 상들을 휩쓸었다.) 저자는 기존 르포와 차원을 달리하는 몇몇 지점들로 굉장히 알려져있다. 그것은 단순히 참상의 단면과 피해자들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집중하는 여타의 저자들과 유사한 지점이 아니라, 해당 사건이 벌어진 국가의 배경부터 시작하여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분위기를 매우 자세히 조사하고 분석하여 소개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실수들, 그로 인한 결과의 참상들이 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독자들에게 폭넓게 설명하고, 이와 같은 참상이 언제든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현실적으로 그린다는데에 있다. 이 저서도 현대 일본의 근간인 메이지 유신부터 시작하여 경제대국으로 발전해온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 와중에 벌어진 성장 만능 주도의 일본 정부와 그에 결탁한 "경제 카르텔"의 민낯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시작은 불가피한 "자연 재해"로 시작하되, 그 전개는 "인재"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구조를 말이다. 이처럼 풍부한 사전 배경 지식을 통해, 일본이라는 땅에서 국지적으로 일어난 비극적인 사태가 아니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다른 구조에서도 모순점이 존재하면 언제든 유사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3. 인상적인 부분...


먼저 이 책은 개인적으로 붙인 제목대로 일종의 "교향곡"과 같은 구조를 띄고 있다. 1장, 2장은 마치 빠른 악장이 나오는 교향곡의 1악장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숨가쁘게 발전해온 일본의 고도 성장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그 이후 느린 2악장처럼 성장 후 일탈과 잃어버린 10년으로 대변되는 3, 4장을 소개하며, 스케르조의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3악장의 그것처럼 사고의 전조를 언급한다. (6장) 그리고 마지막 장렬한 피날레의 4악장에서 후쿠시마 복합재난을 서술하고, 그 여파를 마무리 한다. 앞서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사태가 발생한 배경을 근본부터 언급하므로 방대한 정보와 인명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그 분량 또한 상당하고, 자칫 늘어지기 쉬운 내용이지만, 마치 교향곡의 구성처럼 그 흐름을 유지하여 독자들에게 한 달음에 자신이 목도한 것들을 전달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듯 느껴진다. (다만 이런 유려한 구성의 교향곡 결말이 "파멸"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슬픈 일이다.)

또한 그 배경으로부터 지적하듯이, 후쿠시마 사태는 단순히 일본만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다. 최초로 원자력 상용화를 주도한 것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선진국들이며 이들의 적극적인 프로파간다가 분명 존재하였다. (심지어 CIA도 관여한 흔적도 언급한다.) 이와 더불어 국가 주도의 원전 정책의 최대 수혜자인 원전 업계의 양태를 낯낯이 고발한다. 이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최근 지면에서 "원전 마피아"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들은 강한 결속력을 자랑하는 경제 공동체로 막대한 영향력을 사회 각계에 행사하여 (정치적 로비를 포함) 그 폐해가 날로 늘어가며, 이는 분명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학계 - 업계 - 정계 - 국제관계로 이뤄지는 이 먹이사슬의 생태계가 분명 위험요소가 다분한 이 산업에 있어서 대중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고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 내 피해자들의 현황과 실상을 자세히 소개하여 그 분노의 지점을 높여간다. 하루 아침에 생활의 터전에서 쫓겨나, 이재민 신세가 된 무수히 많은 시민들과 이를 외면하는 도쿄 전력의 실태, 그리고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을 대비하며, 같은 인간으로써 느끼는 참담함의 동조를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또한 매우 일본과 닮아있는 우리 현실 (비록 한반도는 지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할지라도)에 투영하여 가늠케 해볼 여지를 제공한다. 다만, 그 비참함을 단지 감정적으로만 이용하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객관적으로 전달하며, 또 하나의 "빈곤 포르노"화가 되지 않는데 촛점을 두는듯 하다. 그럼으로써 이 사건이 단순히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강조한다.

4. 아쉬운 부분...

이 책은 전체적으로 르포 형식을 띄고 있다. 그것도 방대한 양의 자료와 사료를 집약한 책이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막대한 양의 정보에 독자가 질식할 수도 있다. 때문에 저자는 자신의 취재 내용 중 어느 선까지 대중들에게 전달할지 고민한 흔적들이 보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일반인들임을 감안하면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개인적으로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경제적인 타당성 분석"이다. 앞서 한국의 공청회도 포함하여, 탈원전을 반대하는 측의 가장 주된 요인은 "경제적 효용성"이다. 안전만 보장된다면, 상대적으로 운용비용이 적고, 심지어 탄소저감의 흐름에 영향을 줄것처럼 호도하는 기사마져 존재할 정도이다. 그러나 조금만 내막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원전의 가장 큰 문제점인 "핵폐기물 처리와 관리비용"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한번 지정된 곳은 향후 수백년간 사용하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누수현상이나 기타 환경오염에 대한 비용 또한 측정이 불가능하다. 아직 우리의 기술은 이것들을 되돌릴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그저 매몰하는 것만이 최선일 뿐이다. 또한 확률적으로 천재지변에 가까운 낮은 가능성으로 그 안전에 대한 비용을 낮게 평가할 수 잇으나, 역사는 그렇지 못하였다. "체르노빌 사태" 이후 그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몰락해버린 구소련의 사례와 현재진행형으로 앞으로 얼마의 비용이 들어갈지 계산조차 못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에서처럼 그 비가역성이 너무나도 크다. 이 모든 것을 경제적 수치로 환산한다면, 과연 저들이 주장하는만큼 원전이 효율적인지는 의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저자 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관심을 둔 이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다른 시각을 제공할 수 있는 시도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5. 나오며...


사실 개인적으로 원전은 "원폭"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이 발견을 태생부터 무기로 다뤄왔다. (그 압도적 파괴력에 경외와 공포를 보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UN 상임이사국으로 대변되는 국제적 수퍼 파워의 척도가 된 것을 엄연히 인정해야 한다. 이를 아무리 평화적으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이 힘은 분명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궁극의 힘에 가깝다. 때문에 "평화적 목적"의 원전은 기만적인 표현이 다소 포함된 프로파간다라고 극단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핵분열"의 힘은 그 자체로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면서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손을 잠시 벗어나는 순간 재앙은 늘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로부터 아직도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더 완벽한 기술을 선보이거나, 아니면 이 통제불가능한 힘을 봉인하는게 현재로서는 최선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를 위해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저자는 우리에게 생생히 소개하며 과연 우리가 이를 감당할 수 있냐고 되묻고 있다. 먼 이웃의 일이나, 나에게는 편리하기만 한 단순한 기술이 아닌, 파괴력을 지닌 이 원전이라는 힘을 다시 한번 모두가 생각해봐야 마땅하다. 

#후쿠시마 #앤드류레더바로우 #브레인스토어 #후쿠시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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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지음, 문미선 옮김 / 북산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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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44 :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저, 2022(1903)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고전 미술에서 "라파엘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그 위상에 조금도 누가 되지 않는다. 인상주의를 위시한 근현대 미술사가 아무리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도, 그 절대적 권위는 사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영원불멸의 역사가 되었고, 급기야 신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수많은 화가들이나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예술의 신으로 추앙하고, 권위로써 그를 세워놓았다. (실제로 그를 천사의 재림으로 그리는 화가까지 존재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인격적인 인간의 모습 내지는 모든 에피소드가 하나의 전설로 자리잡게 되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전해진다. 마치 태평양 전쟁 시대에 희대의 명장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즉각 군신의 반열에 올라 추앙을 받게된 케이스와 유사하다. 그리고 그를 위해 이소로쿠의 인간적 면모를 지우고자, 그동안 알려진 연인들에게서 교환된 서신을 압수하고, 자결을 강요하기에 이르는 과정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전통"이나 "전설"을 의외로 만들어내기 좋아한다. 특히나 예술의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현대미술이나 음악의 세계에서도 종종 유사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 이는 반대로 대중들에게 예술은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듯한 착각을 불러오며, 그 권위에 거구로 복종하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것이 보들리야르가 지적한 "이미지의 전복"에 해당하는 사회현상이 아닐까 싶다. 이는 대중들 사이에 끝없이 재생산되어 끝내 예술에 대한 선입견을 "고착화"시키는 결말로 이르게 된다.

2. 저자의 의도...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유명한 토마스 만의 자서전 격인 소설로 1898년에 작가로서 등단한 이후 초창기에 쓴 그의 소설이다. 만은 몰락한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태어나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유명세를 타, 이후 망명생활을 한 이력이 있다. 따라서 초창기의 그의 생에에서 일반 시민으로써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삶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다행히도 작가로서의 역량을 일찍 인정받아 명성을 누렸다. 이런 그의 이력으로 짐작해보건데, 당대의 예술인에 대한 귄위와 편견에 상당히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인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배경을 설명하자면, 19세기에서 20세기의 전환기에 대세를 이루던 예술관은 "데카당스"의 예술이었다. 한낱 미천한 인간의 삶과 정반대 지점에 예술은 거창하게 존재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면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였다. 그런데 토마스 만의 일련의 작품들을 관찰해보면. ‘좋은 작품은 다만 어려운 생활의 압박 하에서 생긴다는 것, 산 사람은 창작을 하지 못하며, 창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죽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즉, 성실하고 건강하며 얌전한 인간은 결코 글을 쓰거나 연출하거나 작곡 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만은 착실한 은행가였고, 이와 같은 사람이 소설을 쓰는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글재주는 상당히 인정받는 갓 서른을 넘긴 시점에서 외톨이로 살아가는 자신에게 문학은 천직이 아닌 저주였던 것이다. 이 불안한 초창기의 모습을 이 책은 고스란히 담고 있다.

3. 인상적인 부분...


이 소설은 어찌보면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크뢰거의 입을 빌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예술관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아니면 성공하지 못한 작가로서 불투명한 미래를 일기장의 형식처럼 독백의 기록으로 남길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조류에 반하는 사실성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 이후의 많은 소설들이 좀더 인간 내면의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으며, 혹자는 현대 소설의 시작이라고 보는 이도 존재한다. 결국 예술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것은 인간이며, 항상 신의 영역 어딘가에서 아련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격렬하고, 불안하며, 우울한 감정들이 얼마든지 미학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낸 작품이다.

또한 이 책의 역자도 밝히듯이, 독일 문한 특유의 서술 방식이 눈에 띈다. 얼핏 보면 딱딱하고 두서없이 쓴 것이라 생각이 들 여지도 존재하지만, 실제로 매우 정서된 작품이다. 감정의 흐름, 독자들의 이입 여지에 대해 고민하고, 쓴 구성이다. 사실 오늘날 정말 다양한 시도와 문체를 보아온 독자들에게는 단촐하고, 초라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시대를 감안한다면 그 당시에 상당히 획기적인 구성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책의 해설편에 보면 역자가 최대한 공을 들여 이 부분을 살릴려고 노력을 하였으며, 흔히들 고전에 따라붙는 각종 "주석"들 마져 없애서 최대한 그 당시의 느낌을 살릴려는데 주력한 흔적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내용 자체에 있어서, 고뇌하는 주인공이 결국은 "인간"으로 돌아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스토리는 인상적이다. 지금이야 흔한 모습으로 간주할수도 있지만, 마치 하늘의 고고한 새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앉아 우리를 그윽히 바라보는 그 느낌이라고 할까...예술은 저 멀리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삶의 진지한 모습과 희로애락을 담고 우리 곁에 같이할 때 가장 빛난다는 주제 의식하고도 연결되는 지점이어서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수없이 많은 철학과 사상들이 난무하던 시대였고, 지금도 시대를 관통하려는 많은 담론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인간계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영원한 숙제를 안고 사는 숙명을 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아쉬운 부분...

이 작품은 이미 고전으로서 그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새롭게 접하는 현대 독자들이 보기에는 다소 심심한 작품이 될 수 있다. 누군가 그러듯이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품인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을 외피로 가지고 있으므로, 자극적인 요소도 전무하고, 그 이야기 구조마져 심심하므로 누군가의 해설이나 사전 배경 지식없이는 당대의 사람들이 느꼈을 감흥을 재현하기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주변의 독서모임이나 고전을 다루시는 분들의 조언을 받으면 좀더 풍성하게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허나 한가지 기억할 사실은 위에 언급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꾸준히 사랑받은 작품이며 그 고유의 가치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의 초창기 모습을 보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두 세번 읽어보면 젋은 시절의 고뇌를 엿볼 수 잇는 좋은 초기작이라 말하고 싶다.

5. 나오며...

문득 이 책을 읽다가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 영화가 연상된다. 이 영화에서 천상의 두 천사가 지상(베를린)으로 내려와 이리저리 방황한다. 때로는 인간을 관찰하기도 하고, 도움을 원하는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천상의 속성이므로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더욱이은 어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아이들의 눈에만 그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던 중 한 천사가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모든 걸 포기하며 완전히 인간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결말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만이 그 유일한 케이스가 아니라 상당수의 천사들이 자기와 같은 선택을 함을 알게 되며, 여인의 남자로 남겨지게 된다. 예술은 이 영화에서의 천사와도 같다. 외피는 어떠하다 하더라도 그 속성은 이 세상 본질의 것이 아닌것처럼 찬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그 예술은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애초에 예술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에서 천사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중요한 감정인 "사랑"을 위해 그 존재의미를 부여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예술은 당연히 지상의 인간 곁에서 머물 수 밖에 없고,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본주의적 예술관의 서막을 알린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는 이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부덴부르크 가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평생을 예술에 헌신하게된 계기를 마련해준 이 작품은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될 산 증인이다. 이처럼 좋은 책을 다시 한 번 소개하는 출판사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아울러 최대한 작품의 느낌을 살릴려는 역자분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만 #북산 #고전 #예술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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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아르떼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100배 즐기기 -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한경arte 특별취재팀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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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43 :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한경 arte 저, 2022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위 평화로운 사진은 우리가 소위 "합스부르크 왕가(신성 로마 제국)"으로 알고 있는 가문의 시초가 되는 합스부르크 성의 모습이다. 한낱 시골영주에 지나지 않던 저 가문이 몇 백년 후 천하를 호령하는 제후국으로 성장하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고, 전 세계의 기록은 그들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그 지위로 만들었을까...

비결은 "혼인"으로 맺어진 동맹과 합종연횡을 넘어 능수능란함을 자랑하는 그 "기만함"에 있다고 흔히들 평한다. 현재까지도 그 내력이 이어질 정도로 유럽내에서 유력가문과의 전격적인 정략결혼으로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적극 도모하고, 그외의 세력과는 대립 또는 동맹을 냉혹하게 반복하며 자신의 세력을 불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이후 1차 세계대전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흥망성쇠를 겪으며 역사의 한 축을 움직이던 유럽 최대의 가문이다. 이처럼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지만, "청이 높아지면 그림자는 길어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 이면에는 치열한 암투와 모략이 필수적이고, 일반 대중들에 대한 통치 역시 폭정과 탄압의 상징이 될 수 밖에 없다. ("빌헬름 텔"의 배경만 봐도 그러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가문들은 자신들의 치세를 포장하고, 위엄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예술"을 활용해 왔다. 비단 "메디치 가문"의 사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세종"으로 대표되는 문화 중흥기에는 선대 "태종 이방원"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있지 않았던가...이것이 내가 느끼는 예술의 아이러니이다. 예술은 늘 피를 먹고 자란다.        

2. 저자의 의도...


이 책은 오스트리아-한국 수교 130 주년을 기념하여 양국 정부의 협조하에 빈미술사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협동 전시회를 기념한 책이다. 아울러 빈에서 공수한 대표작들에 대한 사전정보와 배경을 설명하고, 관객들이 전시회에서 좀더 이해할 수 있또록 사전 정보 설명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서적이다. (또한 화보집의 성격도 겸하고 있다.) 아직 한국은 미술 전시 시장으로는 주변 국가에 머물러 있고, 이웃인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시장 규모가 작은 관계로 그동안 상대적으로 이러한 전시 기획에서 늘 소외받았었다. (아니면 위 두 국가의 하위 시장으로 인식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전례없는 기획을 시도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유럽 중세미술이나 고미술에 목이 마른 대중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 서적 같은 매체에서 유럽의 중세사는 상당히 대중에게 노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적인 문화 유산은 거의 접해볼 수 없는 현실에서, 비교적 합스부르크 왕가와 같이 대중적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있는 기획 전시에서 그 시장 가능성을 보여준 좋은 선례로 남을 것이다. 이 책은 철저히 이번 전시의 소개와 정보 전달에 충실한 내용으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전시에 흥미있는 독자들에게 충실하게 그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 

3. 인상적인 부분...


사실 대한민국에 있어 현재의 대중들에게 인식이 남아 있는 마지노 선은 "조선시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조선이 과연 "전제국가"이냐 라는 논쟁을 제기하겠지만, 적어도 대중들의 인식속에는 강력한 왕권이 작용하는 중앙 집권 국가이다. 따라서 영주를 중심으로 한 중세 봉건주의는 피상적으로만 알 뿐, 그 현실적인 체험이나 인식은 거의 전무한 게 사실이다. (이는 오래도록 다이묘가 유지되던 일본이나, 각 지방  성을 중심으로 지역 호족들이 늘 존재했던 중국과는 다르다.) 따라서 이따금 매체에서 등장하는 중세 유럽의 문화는 낯설고 신기하기만 하며, 우리의 역사와는 동떨어진 그것으로 치부하기 쉽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없는 판타지 성격의 어떤 문화적 코드로 읽혀지기 쉬운 측면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와 이 서적으로 그동안 말로만 듣던 모습들을 실제로 체험하고,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전시회에 소개되고, 본 서적에서도 나온 작품들의 개별 가치도 주목할만하다. 한때 전 유럽을 호령하던 세도 가문이었던 만큼, 당대의 예술가들이 총망라된 유서깊은 작품들이 즐비하다. 벨라스케스, 루벤스, 브뤼헬 등 쟁쟁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고, 그 외에도 화려한 궁중 양식의 유물들이 그 자채를 뽐내고 있다. 게다가 갑옷이나 무기류를 비롯한 장식품들도 함께 소개되어 풍성한 면모를 자랑한다. 멀리 지구 반대편까지 공수되어 자국의 화려한 면모를 간직한 유물들이 생소한 대중들에게 소개되는 장을 마련한 점에서 이 전시와 서적은 의미가 크다.

마지막으로 구한말에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와 외교적인 교류가 존재했고, 그 흔적 또한 소개된 점도 참고할만하다. 기록에 의하면 대한제국의 고종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세프 1세와의 친선교류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양국이 선물로 교환한 유물들도 존재한다. 한반도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인 비운의 제국이지만, 몰락해가던 정세를 뒤집기 위해 당시의 서구권의 중심이던 유럽에 외교적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흔적들은 마땅히 후세에도 알려지고 기억이 되서 잊어버리면 안되는 소중한 자산이다. 현대 대한민국은 분명 선진국이다. 그것도 엄청난 대외무역을 바탕으로 일어난 제조국이다. 다시말해 전 진구를 상대로 경제활동을 이어가야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대외적으로 이미지나 신용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나라 중 하나이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세계에 각인되고, 인지도에 있어 필요한 요소라면 무엇이든지 활용해야 하며, 이런 역사적 흔적들은 좋은 소재들이 될 수 있다.

4. 아쉬운 부분...

이번 전시나 서적에 대해 아쉬운 부분보다는 원론적인 점에서 분명 지적할 지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예술의 모순"이라고 명명하는 점이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에서의 지배력을 넓히고, 여러 나라들을 통합 흡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많은 폭정과 실정들은 분명 역사에 존재한다. 일례로 우리가 "빌 헬름텔 설화"로 잘 알고 있는 이야기도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위스에서 벌인 폭정이 그 배경이다. 이외에도 전 유럽을 수십년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30년 전쟁" 등 역사의 주역이었던 면에서 그 반대 급부인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가리고, 대내외적으로 정통성과 이미지 쇄신을 위한 치적이 반드시 필요하며, 대부분 이 목적으로 "에술"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게 된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 최대의 후견인으로 자처하며, 수집가로서의 역활도 수행하게 된다. 현재 오스트리아나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던 지역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유사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일화와 같이 아무리 손을 씻어도 손에 묻은 피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권력을 위해 행한 많은 오류들은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이 또한 이들의 역사이다. 모든 역사에는 공과 과가 존재하니, 이번 전시와 관련없이 "과"도 조명하는 기회도 존재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물론 이것은 전시의 측면에서는 어렵고, 영상이나 글로써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5. 나오며..."

최근에 미술 전시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라면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전시나 각종 매체에서의 조명이 눈에 띌 것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사후에 소유한 미술품들 중 상당수를 국가에 기증하고 이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밝히는 것은 이 미술품들이 국가에 귀속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이건희 전회장의 그림 로비 의혹과 현 이재용 회장의 뇌물수여 혐의와 주가조작 혐의로 인한 수감생활 후, 대국민사과와 함께 사회 환원을 약속한 댓가로 이뤄진 이력이 남아있다. 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지금은 세계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컬렉션으로 새롭게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니 격세지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번 합스부르크 전시회도 민중의 피와 땀을 매개로 이뤄진 찬란한 그 작품들만이 우리에게 기억될 뿐, 그 이면의 민중사에 대한 조명은 미진하거나 거의 전무하다. 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미래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러한 것들도 같이 다뤄져 역사의 기억을 특정인의 의지대로 기억하고 싶은데로만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끝으로 이 전시회는 전례없는 중세 유럽을 소개하는 좋은 시도라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후에도 좀더 다양한 유사 시도가 이루어져 이제 문화적으로도 더 성숙한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마친다.

#합스부르크600년매혹의걸작들 #한국경제신문 #한경arte #한국오스트리아수교130주년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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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행복 - 택시 운전하며 인생을 배우다
황성규 지음 / 메이킹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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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MAN의 북 리뷰 시리즈 01-42 : 길 위의 행복, 황성규 저, 2022


* 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서평단으로서 개인의 의견임을 밝힙니다... 

#도서협찬

1. 들어가며...

몇 년전인 일로 기억한다. 하루는 라디오를 듣고 있던 중, 김미화 씨의 낭랑한 목소리로 어느 광고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된 일이 있다. 상품을 광고하는 피곤함이 깃든 보통의 광고가 아니라, 담담한 목소리로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하는데 지금도 굉장히 나의 마음 속에 울림을 가져오며 남아있다.

어머니께 "엔딩노트"를 선물해보세요. 당신께서 인생의 끝이 다가옴이 아니라, 당신이 이제껏 살아온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고 이해하며  서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순간 나도 "아, 맞다...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삶도 한 편의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치열한 그 삶을 반드시 기록해야겠다..." 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꼭 한번 실천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우리가 보통 "역사"라고 하면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움직이는 쳇바퀴 속에서 이러저리 흔들리는 우리들 개개인의 모습이 쉽게 떠오른다. 그리고 거창한 어떤 "큰 시대의 요구"를 담는 고귀한 기록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내가 정의하는 역사는 다르다. 앞서 밝힌 역사는 각 개인의 총합에서 공통분모를 취한 부분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역사의 주체이다. 모두가 각자의 사연이 있고, 끊임없이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어떤 공통점이 "시대정신"으로서 나타나지, 결코 각 개인의 삶의 역사가 무시될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많은 매체는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그런 행위일 뿐이지, 위대한 기록의 여부를 가르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삶과, 당신께서 간직한 말 못할 사연들은 모두의 눈물과 웃음을 담고 있는 소중한 기억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기획이 매우 직관적으로 와닿으며 각 개인의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각인시켜 준 경험이었다.

2. 저자의 의도...


저자분은 "필부"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평범한 이력의 일반인에 가깝다. 다만 어린 시절 가난한 배경을 갖고 태어나,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해온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후에 만학도로서 평생의 한을 풀고, 전공을 살려 해당 분야의 직장을 다니다, 인생 후반부에 택시기사를 생업으로 하시면서 제3의 인생을 사시는 내력을 가지고 있다. 정말 눈코 뜰새없이 달려만 오는 숨가쁜 생업의 무게로 기쁨도, 슬픔도 함께하시며 처자식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지난 세대의 표준적인 아버지 상인 것이다. 어느 가정의 아버지를 살펴보아도 말로 다하지 못할 그 수많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생애 전반을 기억에 의존하여 신변잡기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굳이 이분의 이야기에 우리가 주목을 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할수도 있으나, 어렴풋이나마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세대의 삶과 겹쳐져 그 정겨움에 몰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저자분께서도 당신의 삶의 기억을, 더 나이를 먹어 체력과 정신력이 희미해지기 전에 정리하시고 싶은 목적으로 본 저서를 기록하신 것으로 느껴진다. 

(통상 내 글에서는 내용의 진의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가의 사진을 배제하는데, 이 책만큼은 반드시 저자의 사진이 있어야만 이 글이 의미가 있을듯 하여 실례를 무릎쓰고 남긴다.)

3. 인상적인 부분...


일단 이 책은 크게 우리 부모님들이 고이 간직하시는 사진앨범을 보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누구나 인생은 자신이 생각하는 에피소드의 단편들로 구성하려 하지만, 그 기억을 불러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진"이나 기억을 담고 있는 어떤 "물건"일 것이다. 실제로도 저자의 인생 여정에서 큰 사건이 있을 때의 추억을 사진과 병행하여 배치하고 있다. 따라서 책의 끝까지 단번에 읽어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론 나와 같이 저자의 의도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라면 온갖 신변잡기적 구성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저자분의 의도에 동의를 하기만 하면 기꺼이 그의 삶에 들어가 그 흘러가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어서 흐뭇했다.

또한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이 든다. 생업에 종사하며,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급급했던 초반부, 학업의 꿈을 절대 접지 못하고 끝끝내 쟁취하여 신협의 임원으로 당선되기까지 한 중반부, 그리고 그동안 누리지 못한 삶의 여유를 위한 자기 찾기 과정이 들어가며 택시 기사로 살아가시는 후반부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 역사하고도 겹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동아시아의 조그마한 나라로 시작하여 원조 경제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초반부, 베트남전을 비롯한 몇번의 기회를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으로 급성장하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기록한 중반부, IMF 사태를 딛고 다시한번 도약하여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서 이제는 복지국가로서의 자기 성찰로 고민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이 저자의 삶과 정확히 겹쳐서 보인다. (그러므로 비록 일개 개인의 삶이라도 맥락에 따라서 얼마든지 거대 담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다시 한번 주장하는 바이다.) 따라서 과거의 한국의 모습으로 부터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져왔는지 궁금한 젋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고 부모님 세대를 이해해보는 것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자의 끊임없는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될 연세라 봐도 무방하고, 출가한 자식들의 삶을 뒤에서 지켜보며 인생의 후반부를 정리해도 이상하지 않을 때인데, 다시 한번 택시 기사(그것도 무려 타다)로 근무하고, 또 그 와중에 지역 기자로 활동하시는 정력적인 모습을 보며 삶의 끈질김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주변의 환경적 요인이든, 자신의 자의적인 선택이든 간에 연배와 관계없이 늘 도전하는 모습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시는 우리들 부모님의 모습 또한 겹쳐서 보이므로 감정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아쉬운 부분...

만일 이 책을 냉정하고 차갑게 평가하자면 그저 일개 개인의 자서전에 가깝고,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할 만큼의 극적 전개도 없는 신변잡기적인 에세이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그렇게 결코 폄하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은 한 가정의 삶을 지켜온 가장의 일생의 이야기이며, 그 애환과 경험을 고스란히 투영한 소중한 삶의 기억이다. 별다른 수사의 배치가 없어도 바로 우리 곁에서 살아숨쉬는 우리들 부모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나로써는 어지간한 고전 소설보다도 흡입력이 있게 다가왔다. 이 분의 삶의 한 부분이 고스란히 내 마음 속으로 다가오는 그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의 완성도에 대해 논의를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그 분의 삶의 한 부분을 이해하고 있는데 감히 평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것도 있다.) 

다만, 인간의 기억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미화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아픈 기억은 사진한장도 남기기 싫어하고, 설령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어떤 치부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쉬운 선택이 아니다. 더욱이 저자의 큰 따님은 이른 나이에 안타까운 선택을 한 사연도 존재하니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삶을 들여다보는 나로써는 몇몇 실패나 아픈 기억에도 사진이나 기타 기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은 다소 존재한다. 저자의 아픔을 반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대로 이 분의 삶의 역사를 보고싶은 독자로서의 욕망이라 할까.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어떤 부분은 지극히 개인사적인 부분이 있으므로 이 아쉬움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였다.

5. 나오며...


다시 돌아와 나는 나의 어머니의 삶을 돌이켜본다. 내가 기억이 남아있는 연령때부터 시작하여, 내가 느끼는 어머니의 이미지에 남이 들려준 어머니의 모습을 덧칠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하나 그려본다. 그 그림은 그다지 그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때로는 수수하게, 어느 부분에서는 눈물자욱이 남아있는 그런 투박한 그림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보통인의 삶이다. 우리 대부분의 삶은 화려하게 채색된 웅장한 그림아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그림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온 타인들도 비슷한 감정과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그 그림이 남의 그림이 아닐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위의 "화려한 그림"의 생명력을 뛰어넘는 것이 된다. 현재 선진국인 대한민국이 상상하기 힘든 질곡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움직일 수 없는 생명력이 있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파친코"의 이민진 작가의 힘도 여기로부터 비롯된다고 나는 믿는다.) 소중한 기억을 일깨워준 작가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도 인생 여정에서 뜻하는 바를 이루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길위의행복 #황성규 #메이킹북스 #에세이 #택시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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