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은 사뭇 다르다. 당시에는 그토록 무익하고 지루할 정도로 평온하게 느껴지던 시기가 지금은 매우 소중하다. 그 시기는 내 인생의 다른 시기들과는 워낙 달라서, 벌써부터 마술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속성은 보통 오래된 기억에만 생기는 것인데 말이다.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 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의 앞 장들에서 조금이라도 전달됐기를 바랄 뿐이다. 내 마음의 모든 기억들은 겨울 추위, 의용군 병사들의 넝마가 된 제복, 스페인 사람들의 달걀 같은 얼굴, 모르스 신호 같은 기관총 소리, 지린내와 빵 썩는 냄새, 더러운 접시에 담아 후루룩 들이키던 함석내 나는 콩스튜 등에 연결되어 있다.
그 시기 전체가 이상하리만큼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되돌아볼 가치도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다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