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색 머리카락 사이로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침착하고 분별있어 보이는 표정에, 보고 있으면 즐거워지는 행복하고 선량한 모습이었다. 아들 삐에르의 표현에 따르면, 롤랑 씨 부인은 돈의 가치를 알지만 그렇다고 몽상의 매력을맛보는 데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소설과 시들을 즐겨 읽었는데, 그 예술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작품들이 일깨워주는 우수 어린 부드러운 몽상 때문이었다. 시 한편, 종종 진부하고, 종종 형편없는 시 한편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듯 그녀의 여린 심금을 울리며, 은밀한 욕망이 거의 실현된 듯한 느낌을 안겨줬다. 그리고 회계장부처럼 정리가 말끔하게 되어 있는 그녀의 영혼을 살그머니 흔들어놓는 이 가벼운 감정들을 즐겼다. - P43

르까뉘 씨는 공증인이고, 사업상 인연으로 롤랑 영감과 약간 친분이 있었다. 저녁때 방문하겠다고 알려온 걸 보면 뭔가 위급하고중요한 용건임이 틀림없었다. 롤랑네 네 식구는, 계약, 유산, 소송, 바람직하거나 혹은 무시무시한 일들과 연관된 오만가지 생각을 일깨우는 공증인의 개입이 있을 때마다 보잘것없는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러듯이, 이 소식에 불안을느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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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히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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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독점해 왔다고 자부하는 그 역할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는데,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만큼 파괴된다는 속담도 있듯이 그것은 담배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재앙이다. 터키의 지배 하에 있던 근동 지방에서 염주가 담배나 수연통을 대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상인들은 장사가 한가해지거나 카페에 앉아 있을 때 진주모, 백단, 회양목, 상아, 호박 등으로 만들어진 염주를 굴리는데, 신에게 경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렇게 한다.


큰 염주들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신의 아흔아홉 가지 속성에 맞추어 아흔아홉 개의 알로 되어 있는데 그 백번째 속성은 인간이 모르는 것이다. 이 뚜렷한 경계선에서 계시가 끝나고 비의(秘儀)가 시작되는 것이다. 작은 염주들은 서른세 개의 낱알로 되어 있어 손에 쥐거나 가지고 다니기에 훨씬 편하다. 그리고 그 알들을 세 번 돌리면서 〈낭송)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 본다면 굳이 그렇게 낭송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염주는 그저 손을 심심하지 않게 해주고 또 정신을 쉽게 세계에 동화시킴으로써 그 둘 사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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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중은 ‘축제‘화한 단기적 동원에만 효과가 있었다. 2011년 이후 일본에서도 갑자기 데모 = 동원의 계절이도래해 많은 좌익이 열광했다. 그러나 2017년 현재 그런 축제가 남긴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축제가 아니라 일상이다. 달리 말해 동원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연대의 이상은 정체성의 결여에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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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친구들은 가깝지만 멀었다. 한국인들은 멀었지만 가까웠다. 해리는 나에게 자신이 겪은 숱한 모욕들을 적어 보냈다. 나처럼 멀리 있는 사람이 혜리에게는 필요했다. 가까워질 수 없고 개입도 불가능하고 그저 듣기만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임솔아, <그만두는 사람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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