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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란 어쩌면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드문 것은 ‘올바른 때—를 마음대로 하기 위해, 우연의 앞 머리털을 잡기 위해, 필요한 500개의 손이다!"
-27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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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도덕은 타자의 덕에 대한 증오에서 시작한다. 노예, 약자들은 무엇보다 귀족의 도덕, 주인의 도덕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반대로서 자신의 도덕을 정립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악’을 먼저 규정한다. 누가 악한가? 고귀한 자가 자신에서 시작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처럼 느끼지 않은 이들, 자기처럼 행동하지 않는 이들, 즉 고귀한 자, 강한 자, 위험한 자(혹은 위험을 사랑하는 자) 등이 악하다고 규정하는 데서 시자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부정한 이들과 대립하는 자신을 ‘선하다‘라고 말한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선’을 정립하는 것이다.
노예의 도덕은 적대와 원한, 즉 부정적 감정을 가치날조의 동력으로 삼는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이 노예가 "이상을 제조하는 방식 wie man Ideale fabrizirt" 이다. 여기서 가치는 완전히 전도된다. 귀족의 도덕에서 ‘좋은 사람‘이 노예의 도덕에서 ‘악인‘이 되고, 주인의 도덕에서 ‘경멸할 만한 사람이 노예의 도덕에서 ‘선한’ 사람이 된다. 즉 노예의 도덕에서는 ‘위험하지 않은 인간‘, "착하고 속기 쉽고 아마도 약간은 어리석은" 사람,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좋은 사람un bonhomme’이 선한 사람이다.
-336-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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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타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비나 쪽을 바라보며,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 하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도 고귀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고귀하지를, 전혀 고귀하지를 않다고 베르타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제 베르타를 괴롭히는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이렇게 해서뭐가 만족스러운 건가, 베르타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게 그래도 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그게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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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검은 기름때가 덕지덕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체구가 작은 엄마한테는 좀 크고 갑옷처럼 무거워 보이는 옷이었다. 여자는 그날 처음 엄마가 어떤 모습으로 공장에서 일하는지 알았다. 노동환경이 그리 좋은 공장이 아니란 사실도, 일이 많이 어렵고 힘들었겠다는 것도, 엄마의 손톱 밑에도 더러운 기름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 또한 여자는 처음 봤다. 그 검은 손으로 엄마는 쌀을 씻고 열무를 다듬고 나물을 무쳤다. 여자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냉장고 속을 감돌던 냉기처럼 차갑고 싸늘한 손이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잘 살라는 말이었겠지. 이것저것을 다 합해도 삶은 사는 것밖에는 아니고, 거기서 ‘잘‘ 살면 성공한 거니까.
-56p

선물 교환을 끝낸 여자는 창문을 닫고 부엌으로 들어온다. 마침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냉장고는 울어야 제 일을 해낼 수 있다. 한참 서서 가만히 소리를 듣고 있던 여자가 냉장고 문을 연다. 가로등을 닮은 노란 불이 켜지고 안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온다. 여자는 냉장고 속 깊숙이 상체를 숙여 자신을 집어넣는다. 그러고 소리 내 울어본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제 일을 해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번에는 냉장고가 아니라 여자가 자신의 눈물을 허용한다. 울자 차가운 눈물이 흐르고 여자의 몸은 따뜻해진다. 따뜻해지기 위해서는 차가운 게 필요하고 차가워지기 위해서는 따뜻한 게 필요하다. 오늘 밤 여자는 잠이 안 오고, 허기는 가시지 않으며, 외로움이 괴로움으로 바뀌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눈 오는 새해니까. 살아가는 날들 중에는 부끄러운 것들이 훨씬 많으니까. 여자는 울음을 그치고 냉장고 문을 닫기 위해 허리를 편다. 그때 냉장고가 좀 더 크게 소리 내 물어본다. 잘 살고 있느냐고.
-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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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악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욕망 위에 수립된다. 이것들은 소설의 상대적이고 애매한 언어를 자기네들의 명확한 교조적 담화로 바꾸지 않고서는 소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누군가는 옳다고 주장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옹졸한 폭군의 피해자이거나 부도덕한 여인의 피해자다. 또는 아무 죄도 없는 K가 공정하지 못한 재판에 억눌리거나, 그 법정 뒤에 신의 정의가 숨겨져 있기 때문에 K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또는 - 또는’에는 인간 현상의 본질적인 상대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무력감, 지고의 심판관이 부재함을 직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담겨 있다. 소설의 지혜(불확실함의 지혜)를 수용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무력감 때문이다.
-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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