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무 살 생일이었던 그날, 연신 소주를 들이켜서 발그레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엄마는 말했다. 점심시간이면 동료들과 함께 공장 마당에서 배트민턴을 쳤는데 그 사람과 자주 짝이 되었다고, 어느 날 셔틀콕이 이마에 세게 부딪혔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달려와 괜찮냐고 물은 뒤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주었다고, 그러니까 그게 다였다, 엄마가 그와 한 데이트는……. 나의 작고 어렸던 엄마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고, 쑥스러워하면서도 그가 내민 손을 잡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라켓을 쥐었다. 셔틀콕을 허공에 던진 뒤 라켓으로 탕 칠 때 엄마의 몸짓은 암사슴처럼 날렵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본 적 없지만 본 것 같은 그 장면을 이제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터였다. 커플은 곧 라켓을 챙겨 공터를 떠났지만 둥근 선을 그리며 반복해서 오가는 셔틀콕이, 신의 뜻도 아니고 죄의 결정체도 아닌, 그저 그 중간쯤의 어딘가에서 흔들리며 머무는 삶의 한 덩어리 은유가 내게는 계속 보였다.
-356~3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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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 대중이 구체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추상적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것은 추상적인 방식으로 읽힌다. 따라서 대중이구체적이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경험과 추상을 구분하긴 어렵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정의라는 것 자체다.

이택광 - 이제 자신의 저작이나 작업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 독자를 위한 질문을 해보겠다. 당신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또는젠더 이론가라고 불리는데, 왜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가?

스피박 - 나는 의식적으로 탈식민주의라는 주제를 정한 것이아니다. 나에게 정치는 윤리적이라기보다 젠더적이다. 왜냐하면 젠더는 거기에 중요한 문제로 있기 때문이다. 젠더가 거기있었기 때문에 내가 연구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추상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사회정의에 대한 추상화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젠더의 문제다. 다음 문제는 남아와 여아가 태어나서 상징적인 아버지를 가지고 어떤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쁘다는 윤리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젠더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젠더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경험을 읽는다는 차원에서 나에게 먼저 존재했던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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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그런 배경을 가져야 정치적 행위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장기적 계획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교육과 세상을 바꾸는 장기적 계획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스피박 :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다. 욕망을 재배치하는 것이교육의 목적이다. 모든 교육은 억압을 없애는 문제다. 욕망을자유롭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이런 교육의 목적과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 괴리가 있다. 이런 까닭에 교육은강제적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계획과 다른 것이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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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어떤 첨단의 발명품도 그 순간에 사람과 대상물 사이에 오가는 신성한 대화를 기록하거나 간직하게 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있으니, 그건 바로미국의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이 말한 ‘눈의 기쁨‘이다.
인간은 가슴을 울리는 진정한 경외감을 느꼈을 때나 아주 아름다운 것에 굴복했을 때 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억하려고 애쓰지만 잘되지 않는다. 너무나 찰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우리는 그 기억이 몸 어딘가에 깊이깊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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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내가 무사히 도쿄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무사히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지금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죽은 사람들의 모습도 머릿속에 떠올려가면서 양자를 비교해 보지 않으면 내가 살아 있다는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죽은 사람의가엾음 역시 알 수가 없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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