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길 시가 있는 고요아침 34
김광희 / 고요아침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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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붓을 잡고 자신의 삶을 그리기 시작하다.

오늘처럼 벼루가 무겁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한동안 빛이 차단된 공간에 틀어박힌 채, 작은 인기척에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곤 했던 나의 오랜 벗이자 길동무, 벼루는 이제 서서히 밝은 세상으로 나올 태세를 갖춘 듯하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붓 한 자루만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는데, 살아가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붓을 놓아버린 것이 못내 아쉬운 오늘이다. 《나길》을 읽으니, 이 시원섭섭함은 좀체 가시지 않는다. 시인은 칠십여 년을 붓으로 살아온 '뿌리 깊은 서예가'였기 때문이다.

 

인고의 세월로 무장된 삶 그리고 글

시집을 읽으면 나는 시인의 고향으로 떠난 여행가가 되었다. 시인은 연만한 나무 한 그루처럼,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시어로 풀어놓았다. 시집의 각 장 마다 직접 쓴 붓글씨 작품이 삽입되어, 시적 감수성과 서예에 대한 정신력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필히, 삶이란 것에 오감을 열어놓고 광활한 대지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먹물의 인생

 

 

 

까맣게 드리운 모습이

붓끝에서 당신으로 떠 오른다

영겁의 세월 속에

침묵으로 다가 선

한 많은 세월

 

일곱 소녀 시절에 잡았던 먹물은

할매된 늙은 화선지에서도

힘있게 번져나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

 

고고한 학의 날개처럼

등에도 가슴에도

'국민대통합'을 새겨 놓고

여명을 기다리는

붓과 벼루의 인생

 

 

김광희 시인의 <먹물의 인생>은 개인적으로 동질감이 느껴져 발췌해보았다. "영겁의 세월 속에 침묵으로 다가 선 한 많은 세월"에서 붓을 잡기까지의 삶을 회상하는 시인의 모습이 애련하게 떠오른다. 모진 풍파 넘기고 연만한 몸뚱어리에 검고 진하게 물든 먹물, 그것은 애써 버리지 않아도 시인과 하나 되어 늙어가는 먹물의 인생 그 자체를 보여준다. 시인은 "할매된 늙은 화선지에서도 힘있게 번져나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라고 하였다. 필력이 증명하는 자신의 곧은 정신력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먹물은 고고한 학이 되어 여명을 향해 날아가고자 한다. 이것은 곧 "붓과 벼루의 인생", 즉 시인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세계가 아니었나 싶다. 《나길》은 시인의 삶이 진솔하게 드러나는 시집. 이 깊은 밤, 생각하는 서예가의 詩香이 은은하게 번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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